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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페라 카르멘의 원작은 프랑스의 작가 메리메의 소설
이 오페라의 원작자인 메리메(1803 - 1870)는 문학 뿐 아니라 신학, 점술, 사학, 고고학에도 조예가 깊은 사람으로서 카르멘과 <콜롱바>가 대표작이다. 메리메의 <카르멘>은 드라마틱하지 않은 담담한 문체로 쓰여진 중편 소설이라고 한다. 소설가이자 고고학자이기도 했던 메리메가 답사여행기처럼 쓴 것이고 또 소설 중에 상당히 흥미로운 고고학적 고증도 나온다.메리메의 원작이 출판된 것은 비제가 오페라에 착수하기 보다 26년 전이었고 메리메 자신은 <카르멘>이 초연되기 5년전인 1870년에 세상을 떠났으니까 자기 작품이 미래에 이렇에 유명하게 될 줄은 몰랐을 것이다.
<카르멘>의 리브레토를 쓴 앙리 메이약과 뤼도 빅 알레비는 마치 오랫동안 푸치니의 오페라 리브레토를 공동집필한 일리카와 자코사처럼 20년 이상이나 함께 일해온 팀이었다. 이들은 당대 최고의 대본 집필가였으며 주로 오펜바흐를 위해 대본을 썼었다. 이중 알레비는 비제의 처삼촌이 되고 비제의 스승이었던 프로망탈 알레비의 조카가 되었던 관계로 비제를 도와 오페라가 이루어지도록 중요한 역할을 했던 것이다. 메이약이 주로 담당했던 부분은 대화와 희극적 터치였고 알레비는 노래 부분의 가사를 맡았다.
당시의 프랑스 오페라는 일정한 형식을 따르지 않으면 안 되게 되어 있었고 <카르멘> 역시 그 한계를 벗어나지 않는다. '오페라'로 불리던 파리의 대 오페라하우스와 '오페라 코미크'라고 불리던 오페라하우스는 서로 공연하는 작품의 형식을 지배하고 있었다. 알레비는 비제의 작품을 오페라 코믹에서 공연하기로 예정하고 우선 작곡가가 제시한 소재에서 대중의 반감을 불러 일으킬만한 요소들을 부드럽게 만들려고 노력했다. 두 리브레티스트들은 '오페라 코미크'에 이상적일 법한 후렴과 운을 맞춘 2행연구들을 제안했고, 비제는 무섭게 화를 내며 거절했기에 끊임없는 수정이 가해졌다.
음악 역시 통상 리허설 동안 상당히 수정하는 습관이 있었던 비제는 <카르멘> 작곡에 있어서 특별히 까다롭게 되어 대폭 손질을 해서 1막과 3막 및 4막의 각 피날레는 여러 번 다시 썼으며, 여러 독창곡들도 수정하거나 다시 쓰는 등 수없는 개정 작업을 했다.<카르멘>이 초연될 오페라 코미크의 극장장은 관객에게 충격을 주는 일을 피하려고 할 것이기에 아래와 같이 타협했다.
첫째, 카르멘의 성격을 부드럽게 만들고 둘째, 순전히 오페라 코미크 형식에 맞는 순결하고 순진한 소녀를 대비시키겠다는 것, 셋째, 집시들과 밀수꾼들을 다소 희극적으로 만들겠다는 것, 마지막으로 죽는 장면은 맨 마지막에야 나올 것이며 '휴일의 태양 아래 환한 곳'에서 전개되리라는 것, 이상이었다.
따라서 원작에는 없는 미카엘라란 호세의 약혼녀와 투우사 에스카미요를 창조했고, 원작에 등장하는 카르멘의 애꾸눈 남편 가르시아가 완전히 삭제되었다. 그 때까지 오페라 코미크의 무대에서 그와같이 난폭한 죽음으로 오페라를 끝맺는 경우가 없었기에 극장장은 주인공이 죽는 것에는 완강히 반대했지만 6개월간의 설득 끝에 허락을 했다고 한다.
만족스럽지 못했던 초연
잦은 연기 끝에 1875년 3월 3일, 처음으로 무대에 오른 <카르멘>의 지휘는 들로프르가 맡았는데, 초연 날의 관객 가운데는 들리브, 구노를 비롯해서 오펜바흐, 마스네, 알퐁스 도데 알렉상드르 뒤마(피스) 같은 대가들 뿐 아니라 그 외 수많은 음악계와 문단의 저명인사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리차드 터커가 주연한 <카르멘>) 당시 기록에 의하면 초연 때 제1막은 확실히 굉장한 열광으로 받아들여졌다. 제2막은 미지근한 갈채였고 3막에선 한층 더 적은 박수를 받았으며, 마지막 4막이 끝났을 땐 침묵이었다. 사실상 이 때쯤엔 대다수 관객들이 이미 극장을 떠나고 없었다.
<카르멘>은 주인공의 타입이 준 충격이 실패의 큰 원인을 수 있다. 오늘날 이탈리아 베리즈모 오페라에 직접 영향을 준 작품이 <카르멘>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는 만큼 당시로서는 너무 적나라한 주인공의 모습이 충격을 주었으리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처음엔 관객의 수가 적었으나 4,5월에 이르는 동안 조금씩 진전되었으며, 초연 후 석달 만인 6월 쯤이 되었을 때는 37회의 공연 기록했다. 그리고 새 시즌에 다시 무대에 올려졌고, 이후 7년간 오페라 코미크의 무대에서는 사라졌지만 대신에 전 유럽을 석권하기 시작했다. 세계적인 성공을 거두자 1883년 무렵에는 프랑스에서도 다시 무대에 올려지게 되었다.
작곡가 비제는 초연날 밤 의기소침해서 극장을 떠났는데, 초연일로부터 정확히 3개월 후인 6월 3일 36세의 나이로 숨을 거두고 말았다. 하지만 오페라의 실패가 그의 죽음의 직접적인 원인이 된 것은 아니었으며 그는 수년 간 너무 과도하게 일해서 건강이 쇠약해져 있었고 직접적인 사인은 심장마비와 인후의 농양으로 인한 전색증이 겹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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