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약 삼위일체가 성서의 가르침이 아니라면, 어떻게 그것이 교회중심 교리가 되었는가?
많은 사람은 삼위일체 교리가 기원 325년의 니케아 공의회에서 공식화되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러한 생각은 완전히 정확한 것은 아닙니다.
니케아 공의회에서는 그리스도가 하나님과 같은 실체라고 주장하였으며,
그렇게 함으로써 후기의 삼위일체 신학을 위한 기초를 놓은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니케아 공의회에서 삼위일체가 확립된 것은 아닙니다.
니케아 공의회에서는 성령을 지고의 삼위일체 신의
셋째 위로 언급한 적이 전혀 없기 때문입니다.
여러 해 동안, 예수가 하나님이라는,
당시 발전중이던 사상의 성서적 근거에 대해 많은 반론이 있었습니다.
논쟁을 해결하기 위해, 로마 황제 콘스탄티누스는 모든 주교를 니케아로 소집하였습니다.
전체 주교 중 일부에 불과한 300명 정도가 실제로 모임에 참석하였습니다.
콘스탄티누스는 그리스도인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생애의 후기에 개종한 것으로 생각되지만,
죽음이 임박할 때까지 침례를 받지 않았습니다.
콘스탄티누스는 자기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태양신 숭배자입니다.
그의 개종을 내적인 은혜의 체험으로 해석해서는 안됩니다.
그것은 군사적인 문제였습니다.
교리에 대한 이해는 분명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전투에서 승리하는 것이
그리스도인들의 하나님의 권한에 속하는 것이라고 확신하였습니다.
침례받지 않은 이 황제는 니케아 공의회에서 무슨 역할을 하였습니까?
「브리태니카 백과사전」은 이렇게 설명합니다.
“콘스탄티누스는 직접 회의를 주재하면서, 토론을 적극적으로 지도하였으며, •••
공의회가 발의한 신조에서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관계를
‘아버지와 하나의 실체’라고 표현한 결정적인 공식문을 직접 제안하였다. •••
주교들은 황제에게 위압되어, 단지 두명만 제외하고 신조에 서명하였는데,
그들 중 다수는 자신들의 견해와 매우 달리 행동한 것이다.”
그러므로 콘스탄티누스의 역할은 결정적인 것이었습니다.
두달 동안의 격렬한 종교 논쟁 후에, 그 이교 정치가는 중재에 나서서,
예수가 하나님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에게 호의적인 결정을 내렸습니다.
그러면 왜 그렇게 결정하였습니까? 성서적인 어떤 신념 때문이 아니었음이 분명합니다.
“콘스탄티누스는 기본적으로 그리스 신학에서 제기하는
그 어떠한 의문도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라고
「간추린 그리스도교 교리사」는 알려 줍니다.
콘스탄티누스가 실제로 이해한 것은 종교적 분열이
자신의 제국에 위협이 된다는 것이었으며,
그는 자신의 통치 영역을 결속시키기를 원하였던 것입니다.
하지만, 니케아 공의회에 참석한 주교 중 삼위일체를 주창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들은 성령의 역할이 아니라 다만 예수의 본성에 대해 결론을 내렸을 뿐입니다.
만약 삼위일체가 성서의 분명한 진리였다면,
주교들이 그때에 삼위일체를 제의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첫댓글 니케아는 -콘스탄딘이 전체를 주도하고 회의자리를 만들은것뿐이지,, 그가 지식이 있어서 진리를 주도하려한것이 아닙니다 삼위일체의 진리는 콘스탄딘하고 아무 관련이 없습니다 그전부터 예수님의 신성을 부정하는 아리우스 파(오늘날 여증회)들이 설치므로 논란이 불거져서 ,,325년에 와서 황제가 소집하여 해결책을 모색한것입니다 동서 화합의 목적이 있었지요 예수의 신성논쟁은 이미 니케아 5년전부터 알렉산드리아에서 아리우스파들과 논쟁되어 온 것이였고요 고로 동방교회가 소란하므로 결국 황제가 325년에 소집한것입니다
아무도 없다니?..정신이 있나요 없나요? .그때 알렉산드리아 교회의 서기로 참석한 아타나시우스를 모르시나요? 그는 아리우스의 그리스도론을 배격하고 삼위일체의 그리스도론을 수립하는데 결정적인 공헌을 한 사람이지요
반론을 하실려면 제대로 해보세요......아래글에 대해................ "니케아 공의회에 참석한 주교 중 삼위일체를 주창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들은 성령의 역할이 아니라 다만 예수의 본성에 대해 결론을 내렸을 뿐입니다. 만약 삼위일체가 성서의 분명한 진리였다면, 주교들이 그때에 삼위일체를 제의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재반론을 하려면 님이 역사적 상황을 제대로 알고 하세요 자기 생각대로 하려는군요 님이 그자리에 있어 봤나요?함부로 아무도 없었으니,,하면서 ,,,,단정하려 합니까 대세가 결국 최종적으로 아타나시우스쪽으로 기울어지고 많은주교들이 동의를 한것입니다 그런데 무엇이 불만입니까 주교들이 밀고 동의하면 마찬가지아닙니까 일일히 주교들이 떠들고 나셔야 하나요? 님들은 그렇게 회의하나요? 아리우스파문제는 알렉 산드리아지방에서 일어난 문제이고 충돌한것이므로 알랙산드리아의 서기인 아타나시우스가 나선것으로 봅니다
역사적으로 당시를 설펴보면, A.D 318년 알렉산드리아의 교부인 알렉산더가 삼위일체론을 주장 하면서 갈등은 심화되었는데. 같은교회의 장로였던 아리우스는 알렉산더의 삼위일체론에 반기를 들고 나섰는데 아리우스는 성부는 성자보다 먼저 존재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 예수는 하나님뒤에 오는것이요 창조되지 않은 존재는 오직 하나님 뿐이다라고 주장을 하며 예수는 피조물의 첫째것이요 하나님이 아니라고 주장하였습니다 이때문에 논쟁이 되었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