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 시제 걸음을 나서
5년 전 코로나가 덮쳤던 첫해 봄이었다. 고향을 지키는 큰형님은 벽화산 정상부 고조 증조부와 벽화산성 성내 위치한 증조모 산소를 조부모와 부모님 산소 인근으로 이장하고 기제를 시제와 통합시켰다. 벽화산은 자굴산에 못 미쳐도 산성이 있어 외지로도 알려졌다. 조상들께선 그 먼 곳에다 산소를 써서 후손들이 벌초와 성묘 걸음을 하기가 힘들어 마을 가까운 곳으로 옮겨왔다.
팔십 평생 농사를 지으며 한학을 궁구해온 큰형님은 유교적 보수성이 강함에도 장묘와 제례에서 한발 앞서는 과감한 결단을 내렸다. 복잡한 절차의 장제 문화는 우리 세대까지로 끝내고, 아들과 손자들에게 기존 번거로움에서 가볍게 해줄 책무로 받아들였다. 아래 작은형님들도 전적으로 동의했다. 코로나와 무관하게 몇 해 전부터 마음에 둔 일이 공교롭게도 코로나 사태와 겹쳤다.
음력 시월 상달 지내는 대종중 시제는 시제대로 그대로 두고, 아랫대 고조 이하 증조와 조부모는 봄 시제로 모시게 되었다. 돌아가신 아버님 기일이 음력 삼월 보름이라 이날을 전후한 일요일이 조상 숭모의 날로 정해졌는데 올해는 사월 셋째 일요일이었다. 어제부터 몸이 불편해하던 아내는 자고 난 아침에도 여전히 힘들어해 부득이 혼자 길을 나서 작은형님 내외와 같이 갔다.
동마산 나들목에서 차를 올려 남해고속도로 순천 방향을 잠시 달렸다. 차창 밖 신록이 싱그러운 산에 걸쳐진 흰 구름은 연초록 숲과 대비되었다. 함안 가야를 지난 군북 나들목에서 고속도로를 내려간 국도에서 남강 정암교에는 옛 철교와 솥바위가 건너다 보였다. 의령 관문에는 백마를 탄 홍의장군이 한 손에 칼을 든 동상으로 우뚝했다. 마침 의령읍에서는 홍의장군 축제가 열렸다.
조선 중기 임진년 왜구가 침략했을 당시 동래성을 비롯해 곳곳에서 관군이 연전연패를 거듭할 때 남강 하류 기강나루에서 의병장 곽재우가 승전보를 전했다. 수군으로 첫 승리를 거둔 이순신의 옥포대첩보다 일주일 앞선 임진년 음력 4월 22일이다. 음력을 양력으로 환산한 6월 1일이 정부에서 지정한 기념일 ‘의병의 날’인데 홍의장군 축제는 농사철과 겹쳐 곡우 무렵으로 당겼다.
일전 충익사 사당에서 지역 인사들이 헌관으로 제례를 올리면서 축제 막을 열었다는 소식은 초등학교 친구들 단체 카톡을 통해 알고 있다. 친구들 관심사는 두 가지로 고향 출신 작곡가 이름을 딴 ‘이호섭 가요제’와 소 힘겨루기 대회였다. 이호섭과는 동갑이라 친밀감이 더했고, 소 힘겨루기 대회는 한 친구가 훈련 시킨 싸움소가 출전해서인데 이번엔 아쉽게 초반에 탈락했단다.
모처럼 고향 걸음을 나서도 홍의장군 축제는 둘러볼 겨를을 내지 못했다. 남천교를 지난 고향 마을올 찾아가니 동구 밖 논에 마늘이 풋풋하게 자라고 마을 회관 인근 밭에는 고추 모종이 심겨 있었다. 이 밖에도 형님 내외가 애써 짓는 농사인 대봉 감나무는 새순이 나와 자랐다. 고향 집에 닿으니 원근에 사는 형제 조카들이 먼저 와 댓돌은 신발이 그득하고 제상엔 제수가 차려졌다.
저녁에 지내는 기제와 낮에 지내는 시제에서 메밥과 탕을 제외한 제수는 같은 상차림이다. 진주에 사는 큰조카가 중심이 되어 병풍이 둘러쳐 촛대와 향로가 준비되고 제상에 과일과 육포가 올려졌다. 제주가 든 주전자와 퇴주 대접도 놓고 낮이라도 촛불을 켜고 향불을 피웠다. 고조부터 지방을 붙여 술잔을 바쳐 증조와 조부와 부모님까지 술잔과 축을 바꾸어 읽어내려 절을 올렸다.
거실을 겸한 아래채 이름은 큰형님 아호를 딴 ‘운강정사(雲岡精舍)다. 운강정사에서 시제를 지낸 뒤 위채로 올라 두 방과 마루 세 군데로 나뉘어 20여 명 대가족이 둘러앉았다. 주방에서는 모처럼 친정을 찾아온 두 여동생 손길이 분주했고 특별 손님으로 와주신 올해 여든두 살 마산 막내 고모님도 자리를 함께 했다. 큰형수님이 손수 빚은 두부와 발품 판 산채가 돋보인 상차림이었다. 24.04.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