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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2월 2일 주님 봉헌 축일
제1독서 : 말라 3,1-4
복 음 : 루카 2,22-32
22 모세의 율법에 따라 정결례를 거행할 날이 되자,
예수님의 부모는 아기를 예루살렘으로 데리고 올라가 주님께 바쳤다.
23 주님의 율법에
“태를 열고 나온 사내아이는 모두 주님께 봉헌해야 한다.”고
기록된 대로 한 것이다.
24 그들은 또한 주님의 율법에서
“산비둘기 한 쌍이나 어린 집비둘기 두 마리를”
바치라고 명령한 대로 제물을 바쳤다.
25 그런데 예루살렘에 시메온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이 사람은 의롭고 독실하며 이스라엘이 위로받을 때를 기다리는 이였는데,
성령께서 그 위에 머물러 계셨다.
26 성령께서는 그에게 주님의 그리스도를 뵙기 전에는 죽지 않으리라고 알려 주셨다.
27 그가 성령에 이끌려 성전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아기에 관한 율법의 관례를 준수하려고
부모가 아기 예수님을 데리고 들어오자,
28 그는 아기를 두 팔에 받아 안고 이렇게 하느님을 찬미하였다.
29 “주님, 이제야 말씀하신 대로 당신 종을 평화로이 떠나게 해 주셨습니다.
30 제 눈이 당신의 구원을 본 것입니다.
31 이는 당신께서 모든 민족들 앞에서 마련하신 것으로
32 다른 민족들에게는 계시의 빛이며 당신 백성 이스라엘에게는 영광입니다.”
봉헌의 축복
-봉헌 삶을 통해 정화되고 성화되는 우리들-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
은혜롭게 시작된 2월입니다.
어제 2월 첫날 복음의 주제는 ‘하느님의 나라’였고 오늘 2월 둘째 날은 ‘봉헌’입니다.
어제 미사 후 수도원 경내 산책 시 만났던 형제와 자매 두 분이 생각납니다.
“강복 드리죠. 형제님(자매님) 자체가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예수님을 모시고 예수님과 하나 된 자는 모두가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오늘도 하느님의 나라를 사세요!”
강복과 더불어 가볍게 안아 주면서 격려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참으로 믿는 이들 하나하나가 하느님의 나라이며 세상의 빛입니다.
세상을 밝히는 빛입니다. 어제의 탄식도 잊지 못합니다.
“남북의 분열보다 남남분열이 남남갈등이 남남불화가 너무 심각합니다. 양극단입니다.
상생공존, 상호보완 해야 사는데 너무 극단을 달립니다.
지역 간, 세대가, 계층 간, 정파 간, 이념 간 등 산산이 분열되고 쪼개져 있는 느낌입니다.
악순환을 벗어나지 못하는 듯하여 마음이 아픕니다. 인터넷 댓글들도 너무 험악합니다.”
제 탄식에 공감하는 듯 몇몇 형제도 묵묵부답이었습니다.
이런 현실일수록 그리스도인의 화해와 평화를 위한 사명이 지대합니다.
바로 하느님의 나라를 사는 것입니다. 봉헌의 삶을 통해 실현되는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오늘은 참 기분 좋은 주님 봉헌 축일입니다.
특별히 자신을 봉헌한 수도자들을 위한 봉헌생활의 날입니다.
어찌 수도자들뿐이겠습니까? 봉헌의 삶에로 불린 모든 신자들의 날이기도 합니다.
세상에 봉헌보다 아름다운 말마디도 없을 것입니다.
세례 받아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기에 봉헌의 아름다운 삶입니다.
봉헌의 기쁨, 봉헌의 행복, 봉헌의 축복, 봉헌의 사랑, 봉헌의 아름다움 끝이 없습니다.
봉헌은 모두입니다. 봉헌이 답입니다. 삶의 허무와 무의미에 대한 유일한 답도 봉헌입니다.
그러니 믿는 이들의 삶은 봉헌입니다. 봉헌의 삶입니다. 봉헌이 바로 삶의 의미입니다.
하느님을 믿었기에 봉헌의 축복이지 하느님을 몰라 봉헌이란 말은 물론
그 풍부한 뜻도 모른 채 무의미하게 생각 없이 살아가는 이들은 얼마나 많겠는지요.
봉헌의 삶이 하느님 중심의 삶을 확고히 해주며 오늘 지금 여기서 하느님의 나라를 살게 합니다.
오늘 복음은 온통 봉헌의 사람들로 가득한 분위기입니다.
모세의 율법에 따라 예수 아기를 예루살렘에 데리고 올라가
주님께 바친 아름다운 요셉-마리아 부부도 봉헌 삶의 모범입니다.
시메온과 한나 여예언자 역시 봉헌 삶의 모범입니다.
평생 의롭고 독실하며 이스라엘의 위로받을 때를 기다리며 살았던 봉헌의 사람, 시메온입니다.
성령께서 늘 그 위에 머물러 계셨다니 봉헌의 축복임을 깨닫습니다.
성령에 이끌려 성전에 들어간 시메온는 오매불망 그리던 주님을 만납니다.
바로 봉헌 축복의 절정이 주님과의 만남입니다. 그대로 말라기 예언의 실현입니다.
“보라, 내가 나의 사자를 보내니 그가 내 내 앞에서 길을 닦으리라.
너희가 찾던 주님, 그가 홀연히 자기 성전으로 오리라. 너희가 좋아하는 계약의 사자, 보라, 그가 온다.”
바로 우리를 봉헌하는 이 거룩한 성전 미사시간 우리를 만나러 오시는 주님이십니다.
말라기 예언서 말씀처럼 주님은 은제련사와 정련사처럼 우리를 깨끗하게 하고
우리를 정련하여 주님에게 의로운 제물을 바치게 하십니다.
아기 예수님을 두 팔에 받아 안고 노래하는 시메온의 찬가는 언제 바쳐도 영혼에 깊은 평화와 위로를 줍니다.
봉헌 축복의 절정인 주님을 만나 감사의 기도를 바치는 시메온입니다.
“주여 말씀하신 대로/이제는 주의 종을/평안히 떠나 가게 하소서.
만민 앞에 마련하신 주의 구원을/이미 내 눈으로 보았나이다.
이교백성들에게는 계시의 빛이시오/주의 백성 이스라엘에게는
영광이 되시는 구원을 보았나이다.”
우리가 방금 축복받은 봉헌초를 들고 시메온이 되어 위의 찬가를 노래했습니다.
위의 시메온의 찬가는 우리가 봉헌의 하루를 마치고 끝기도 후 잠자리에 들기 전 노래하는 아름다운 찬가입니다.
세상의 빛으로서 아름다운 봉헌의 삶을 상징하는 봉헌초의 불빛이 성전 안을 환히 밝히듯
우리 봉헌의 삶으로 어둔 세상을 환히 밝혔으면 좋겠습니다.
평생 봉헌의 삶에 항구하고 충실했기에 시메온도 안나도 주님을 만났습니다.
봉헌의 축복은 아기 예수님에 대한 묘사를 통해 분명히 드러납니다.
‘아기는 자라면서 튼튼해지고 지혜가 충만해졌으며, 하느님의 총애를 받았다.’
참으로 요셉 마리아 부모처럼, 부모들이 자녀를 주님께 봉헌할 때
자녀들이 주님의 풍성한 축복을 받음을 깨닫습니다.
봉헌의 여정입니다.
한 번의 봉헌이 아니라 날마다 끊임없는 봉헌의 여정 중에 정화되고 성화되어
아름답고 거룩한 주님을 닮아가는 우리들입니다.
충만한 기쁨과 평화의 축복으로 삶의 허무와 무의미는 완전히 사라지고
생명과 사랑의 빛으로 충만한 삶입니다.
고해인생을 축제인생으로 바꿔주는 봉헌의 삶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당신께 봉헌하는 우리 모두를 축복하시어
더욱 아름답고 거룩한 봉헌생활을 할 수 있게 하시며,
마지막 아름다운 봉헌의 선종의 죽음도 맞이하게 하실 것입니다. 아멘.
조명연 마태오 신부
옛날에 어떤 사람이 불로장생의 비법을 찾아 헤매다가
세상의 끝에 존재하는 한 동굴에서 신선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이 신선은 그에게 영원히 사는 법을 알려주겠다고 했지요.
그곳에는 신비로운 운동기구가 있었습니다.
신선은 그에게 이 운동기구를 계속해서 운동을 하면 영원히 살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여러분이 이 신선을 만났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영원히 살 수 있다는 이 운동기구를 이용해서 운동하시겠습니까?
이 사람은 신선의 말을 듣자마자 너무 기뻐서 운동기구에 올라가 운동을 시작했습니다.
한참동안 운동을 하다 보니 슬슬 지루해졌고, 여기에 몸도 마음도 점점 괴로워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선에게 언제까지 운동기구를 움직여야 영원한 삶을 살 수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신선은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영원히 살고 싶다면, 영원히 운동을 해야 한다.”
다른 것은 하나도 하지 않고 영원히 운동만 하면 영원히 살 수 있다고 합니다.
어떻습니까? 영원히 운동만 하시겠습니까? 아마 그럴 분은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사는 목적은 단지 오래 사는 것, 단지 건강한 것 자체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래 사는 것, 건강한 것은 지금 이 순간의 삶에서 행복하기 위해 필요한 것입니다.
만약 행복하지 않으면서 건강하게 오래 살 뿐이라면 의미가 없게 됩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단순히 그냥 사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떻게 사는 것이 중요합니다.
어떻게 행복의 삶을 살 수 있을까를 깊이 생각해야 할 때입니다.
하지만 많은 이들이 그냥 마지못해 산다고 말합니다.
어떤 목적의식 없이 불평불만으로 가득 차있을 뿐입니다.
오늘 우리는 주님 봉헌 축일을 맞습니다.
주님께서 당신 자신을 우리 인간을 위해서 희생 제물로 봉헌하신 날입니다.
이 봉헌을 통해서 바로 우리 모두에게 구원의 길이 열리게 되었습니다.
바로 죄로 물들어 있는 우리들을 제자리로 되돌리기 위해 당신 자신을 희생 제물로 봉헌하신 것입니다.
왜 주님께서 이런 선택을 하신 것일까요?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가 이 세상 삶 안에서 행복하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주님의 사랑을 기억하면서 내 자신의 삶에 대한 목적의식을 가져야 합니다.
그래야 쓸데없는 것에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행복을 위해 나아가야 할 길에 집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만을 바라보고, 주님만을 생각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세상의 유혹에서 벗어나서 주님의 뜻에 맞게 살아가는 제대로 된 봉헌의 삶을 살 수가 있습니다.
기다림의 기쁨
반영억 라파엘 신부
오늘은 성모님께서 모세의 율법대로 정결 의식을 치르시고
아기예수님을 성전에서 하느님께 봉헌하신 것을 기념합니다.
주님께서 하느님께 봉헌되었듯이 우리도 매순간 자신을 주님께 봉헌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십자가를 바라보며 우리를 위한 주님의 사랑에 감사하고,
제단의 초를 바라보며 자신을 불태워 빛을 밝혀야 하는 사랑의 응답을 일깨워야 하겠습니다.
예루살렘에 사는 시메온 이라는 사람은 의롭고 독실한 사람으로서
주님의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는 죽지 않으리라는 성령의 알림을 받았고,
이스라엘에 내려질 위로, 곧 메시아가 가져다 줄 구원을 기다렸습니다.
많은 예언자들이 메시아가 장차 오리라고 선언하였지만 시메온은 메시아를 직접 보았습니다. 이는
“주님께서 모든 민족들이 보는 앞에서 당신의 거룩한 팔을 걷어붙이시니
땅 끝들이 모두 우리 하느님의 구원을 보리라”(이사52,10)한 예언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시메온은 의롭고 독실하기에 끝까지 기다릴 줄 알았고 마침내 주님을 직접 뵈었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죽어도 여한이 없습니다.
시메온은 기다림의 열매 앞에서
“주님, 이제야 말씀하신 대로 당신 종을 평안히 떠나게 해 주셨습니다.
제 눈이 당신의 구원을 본 것입니다.
이는 당신께서 모든 민족들 앞에서 마련하신 것으로
다른 민족들에게는 계시의 빛이며 당신 백성 이스라엘에게는 영광입니다”(루카2,29-32).하고 고백하였습니다.
옛말에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고 하였습니다.
우리도 주님께서 약속하신 영원한 생명에 대한 희망을 간직하고,
희망하는 대로 살아감으로써 행복하였으면 좋겠습니다.
하느님의 나라에 대한 열망이 있다면 열망이 있는 만큼
하느님의 뜻에 맞는 삶으로 기다림을 간직해야 합니다.
“사람이 하느님에게 바칠 제물은 감사하는 마음이요,
사람이 지킬 것은 지존하신 분에게 서원한 것을 갚는 일”(시편50,14)이기 때문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여러분의 몸을 하느님 마음에 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바치십시오.
이것이 여러분이 드려야 하는 합당한 예배입니다”(로마12,1)라고 말합니다.
사실 “태를 열고 나온 사내아이는 모두 주님께 봉헌되어야 한다.”는 주님의 율법에 따라
아기 예수님께서 성전에 봉헌 되었고 만국의 빛이 되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우리 자신의 거룩한 삶을 봉헌함으로써 세상을 비추는 빛이 되어야 합니다.
이제는 만민에게 베푸시는 주님의 구원을 우리가 전해야 할 때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것이 여러분에게 달려 있는 듯이 하십시오!
또한 모든 것이 하느님께 달려있는 듯이 기다리십시오”(성 이냐시오).
“우리가 그분께 드릴 것이 정령 아무 것도 없다면 아무 것도 아닌 것 자체를 드리기로 합시다”(마더 데레사).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마태5,16)
신앙과 삶은 하나임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어떤 기다림이든지 그 간절한 기다림이 하느님 마음에 들어 기쁨이 되고 복이 되길 바랍니다.
기다림의 열매를 가지고 주님을 증거 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주님께서는 너희에게 자비를 베푸시려고 기다리시며 너희를 가엾이 여기시려고 일어서신다.
주님은 공정의 하느님이시다. 행복하여라, 그분을 기다리는 이들 모두!(이사30,18)
미루지 않는 사랑, 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 되게 하는 자격을 얻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성탄을 지낸 지 벌써 40일이 지났습니다.
이날, 성모님께서는 모세의 율법에 따라 정결례를 치르시며, 예수님을 성전에 봉헌하셨습니다.
사실,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예수님께서는 죄 아래에 있는 사람들에게 적용되었던
모세의 이 율법규정을 지키지 않으셔도 되셨지만,
율법 아래에 있는 이들을 속량하시려고 굳이 율법의 관례를 준수하셨습니다.
이에 대해서, 사도 바오로는 <갈라디아서>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때가 차자 하느님께서 당신의 아드님을 보내시어 율법 아래 놓이게 하셨습니다.
율법 아래에 있는 이들을 속량하시어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 되게 하는 자격을 얻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갈라4,4-5)
바로 이날, 죽기를 결의하고 메시아를 기다렸던 한 노인과
밤낮으로 단식하며 메시아를 기다렸던 한 과부가 구세주를 뵈었습니다.
바로 이날을 기념하여, 우리는 “주님봉헌축일”과 “봉헌생활의 날”로 지내고 있습니다.
“봉헌생활”이란 <교회법> 573조 제1항에서는 이렇게 정의하고 있습니다.
“성령의 감도 아래 그리스도를 더욱 가까이 따르는 신자들이 복음적 권고의 선서를 통하여,
하느님의 영광과 교회의 건설과 세상의 구원을 위하여 새로운 특별한 명의로 헌신하고
하느님 나라에 봉사함으로써, 애덕의 완성을 추구하고 교회 안에서 빛나는 표징이 되어,
천상적 영광을 예고하려고 하느님께 전적으로 봉헌되는 고정된 생활양식이다.”
이는 여섯 가지 의미로 정리해 볼 수 있습니다.
<첫째>, “성령의 감도 아래 그리스도를 더욱 가까이 따르는 신자들”이라는 표현을 통하여,
봉헌생활은 성령의 감도로 이루어진 것으로 그리스도를 모범으로 삼고 살아가는 삶을 말합니다.
이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권고인 <봉헌생활>에서는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주님이신 그리스도의 모범과 가르침에 깊이 뿌리박고 있는 봉헌생활은
하느님께서 성령을 통하여 당신 교회에 주신 은혜이다.”(제1항)
결국, 봉헌생활은 그리스도와의 일치를 성취하기 위해,
그리스도를 더욱 가까이 따르도록 주어진 성령의 선물에 따른 삶이라 할 수 있습니다.
<둘째>, “복음적 권고의 선서를 통하여”라는 표현을 통하여,
봉헌생활은 복음적 권고인 가난, 정결, 순명의 삶을 통하여,
하느님의 영광과 교회의 건설과 세상의 구원을 위하는 삶임을 말해줍니다.
이를 위의 문헌 <봉헌생활>에서는
“그리스도처럼 하느님 나라를 위해 봉헌된 삶”(제22항)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자신의 영광이 아니라 하느님의 영광을 자기의 집을 건설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의 건설을, 자신의 구원이 아니라 세상 구원의 삶임을 명심해야 할 일입니다.
<셋째>, “하느님 나라에 봉사함으로써, 애덕의 완성을 추구하고”라는 표현을 통하여,
봉헌생활은 사랑의 완성을 향하여 지속적으로 전력을 쏟는 삶임을 말해줍니다.
이를 교황 요한 바오로 6세 반포한
“수도생활의 쇄신 적응에 관한 교령”인 <완전한 사랑>에서는 이렇게 밝히고 있습니다.
“완전한 사랑을 복음적 권고의 실천으로 추구하는 것은
하느님이신 스승의 가르침과 모범에서 그 기원을 이끌어 온다.”(제1항)
결국, 봉헌생활은 예수님의 분부에 따라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데에
온 힘을 쏟아내는 삶이라 할 수 있습니다.
특히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그 사랑의 완성을 이루었듯이,
봉헌의 삶 역시 십자가의 죽음을 통한 삶임을 말해줍니다.
<넷째>, “하느님의 영광과 교회의 건설과 세상의 구원을 위하여
새로운 특별한 명의로 헌신하고”라는 표현을 통하여,
봉헌생활의 축성은 세례에 의한 축성에 깊이 근거하며,
이 축성을 더 완전히 표현하는 특별한 축성임을 말해줍니다.
이를 “수도생활의 쇄신에 관한 교황 바오로 6세의 사도적 권고”인 <복음의 증거>에서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수도자들은 특수한 축성으로 일생을 하느님께 봉헌하였고,
세례의 축성으로 이루어진 근본적 봉헌을 더욱 완전히 실현시키고 있다.”(제4항)
결국, 봉헌생활은 그리스도교 안에서 이루어지는 삶이라 할 수 있습니다.
<다섯째>, “교회 안에서 빛나는 표징이 되어, 천상적 영광을 예고하려고”라는 표현을 통하여,
봉헌생활은 인간의 궁극적인 생활을 예표 하는 생활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를 공의회 문헌 <교회헌장>(제44항)과 <봉헌생활>(제26항)에서는
봉헌은 “미래의 부활과 천국의 영광을 더 잘 예고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봉헌생활은 교회 안에서 빛나는 표징이 되고, 천상적 영광을 예고해줍니다.
<여섯째>, “하느님께 전적으로 봉헌되는 고정된 생활양식이다”라는 표현을 통하여,
봉헌생활은 모든 것보다 우선하여 하느님을 사랑하며,
자신을 온전히 하느님께 바치는 삶임을 말해줍니다.
곧 일시적 충동에 따라 사는 임시적인 삶이 아니라,
공적인 선서로 평생토록 지속되는 고정된 생활 형식임을 말해줍니다.
이를 <봉헌생활>에서는 “가없는 헌신”(104항)이라 표현하고 있습니다.
흔히들 하늘의 제왕이라고 부르는 독수리는 시력이 5.0이라고 합니다.
“수도자의 복음”이라고 불리는 <요한복음>을 쓴 요한은
신비를 바라보는 그러한 눈을 가졌기에 독수리 복음사가라 불리어집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어린 아기에게서 구원을 보는’ 시메온의 눈이 바로 그러한 눈일 것입니다.
그런 눈을 지녔기에, 독수리는 날개 짓을 하지 않고도 높은 하늘을 유유자적합니다.
바람을 타고 있기 때문입니다.
봉헌생활이야말로 하늘과 땅을 꿰찔러 바라보며, 바람을 타고 높은 하늘을 나는 삶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성령의 바람을 타고 유유자적하는 삶 말입니다.
오늘도 성령의 바람을 타고 흐르는 축복의 삶 되길 바랍니다. 아멘.
모두 주님께 봉헌해야 한다.
한상우 바오로 신부
봉헌이
일상이며
봉헌이
우리 생활이 되어야합니다.
봉헌으로
우리가 누군지를
분명히 알게 됩니다.
함께 하는 믿음이
진정한 봉헌입니다.
흐트러진 우리 삶을
바로잡아 주는 것이
봉헌입니다.
삶의
모든 배경이 되어줍니다.
예수님과
우리의 관계는
봉헌으로
더욱 깊어집니다.
봉헌 안에
존엄함이 깃들어져
있습니다.
봉헌이 우리를
정화시켜줍니다.
예수님께서는
봉헌으로
당신의 길을
보여주셨습니다.
봉헌으로
모인 공동체가
바로
수도 공동체입니다.
구원을
가능케 하는 것은
봉헌입니다.
나약함과
두려움 속에 있는
우리를 봉헌이
주님께로 데려갑니다.
가야할 길을
아름답게 하는
봉헌이 있기에
우리는 혼자가 아니라
주님과 함께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을
키워주는 봉헌입니다.
봉헌은
모든
일상임을 믿습니다.
협상의 기술: 요구가 아닌 욕구에 집중하라
전삼용 요셉 신부
허브 코웬이란 작가는 “인생의 8할은 협상이다.”라는 말을 했습니다.
협상은 회사에서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삶 전반에서 매 순간 일어나는 일입니다.
부부싸움을 하더라도 나의 주장을 관철시키기 위해 상대와 어느 정도 협상을 하게 됩니다.
이 협상의 기술이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매일 싸우느냐, 사이좋게 지내느냐가 결정됩니다.
아인슈타인 이후 가장 천재적인 물리학자라 불리는 파인만이 있습니다.
그는 천재였지만 성격이 고약하여 그의 기행만 따로 모아놓은 책이 있을 정도랍니다.
특별히 사람들 앞에 나서는 것을 극도로 싫어하는 성격이었습니다.
1965년 전화 한 통화가 걸려옵니다.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로 선정되었으니 상을 받으러 오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비행기 타면서 만나야 할 사람들,
일주일 동안 여행해야 하는 것들이 너무도 끔찍하여 이렇게 응답합니다.
“됐어요. 상 받으려면 북유럽까지 오가느라 비행기를 10시간이나 타야하고
일주일이란 시간을 써야 하는데 ... 귀찮아요. 받지 않겠습니다.”
이에 놀란 노벨상 재단 측에서는 갖은 회유와 협박을 가했습니다.
“이 상은 초등학교 우등상이 아닙니다. 받으시면 국가의 영광이 되는 상입니다.
그리고 교수님, 일주일 씩 있을 필요는 없고요, 상만 받고 바로 가셔도 됩니다.
교수님이 이러시면 앞으로 다른 미국 노벨상 후보자들에게도 지장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파인만은 “됐습니다. 귀찮습니다.”라고 거절했습니다.
이들은 협상이 아니라 협박을 하고 있었습니다.
사람은 협상과 협박을 구별하지 못한다고 합니다. 협박은 쌍방이 둘 다 기분 좋게 끝날 수는 없습니다.
이때 파인만의 아내가 나섭니다.
“여보, 가기 싫으면 가지 마세요. 그런데 이걸 한 번 생각해 보세요.
이번에 당신이 상을 거부하면 인류 역사를 통틀어 자발적으로 노벨상을 거부한 첫 인물이 되는 거예요.
그렇다면 누가 관심을 가질까요? 바로 기자들이겠죠. 그냥 며칠 고생하는 게 낫지 않을까요?”
파인만은 아내의 말에 설득당해 노벨상을 수상하러 떠났습니다.
[참조: ‘거절할 수 없는 협상의 신이 되는 법’, 웅이사의 하루 공부, 유튜브]
이 이야기는 최철규 작가의 ‘협상의 신’이란 책에 나오는 사례입니다.
최철규 작가는 협상의 가장 중요한 것으로 ‘요구에 집중하지 말고 욕구에 집중하라.’는 원칙을 제시합니다.
파인만이 제시했던 요구는 오랜 시간 여행하는 것이 귀찮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이 말만 듣고 날짜를 줄이려는 노력과 더 나아가 협박까지 했습니다.
하지만 파인만의 아내는 남편의 욕구에 집중하였습니다.
남편이 사람들을 만나는 것을 원치 않는다는 것을 알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가지 않으면 기자들 때문에 더 많은 사람들에게 시달려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였습니다.
말하는 것에 집중하지 말고 상대의 욕구에 집중해야 상대로부터 많은 것을 얻어낼 수 있습니다.
물론 상대도 즐겁게 말입니다.
이것은 하느님과 인간과의 사이에서도 통용됩니다.
오늘은 ‘주님 봉헌 축일’입니다.
요셉과 마리아께서 아드님 예수를 성전에서 하느님께 봉헌한 것입니다.
이제 자신들의 것이 아니기 때문에 주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아들을 쓰시라는 뜻입니다.
당신을 참 주님으로 인정하고 자신들이 가진 가장 소중한 아들을
주님 뜻에 맡기는데 주님께서 즐겁지 않으실까요?
아무래도 주님은 당신이 주님으로 인정받는 것을 가장 기뻐하시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미사 때 무언가를 청할 때 돈과 함께 청하는 것 같습니다.
성경을 통틀어 하느님께서 인간을 통해 가장 즐거워하시는 일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인간에게 감사의 봉헌을 받는 것이라 당당히 말할 수 있겠습니다.
에덴동산에서 주님께 봉헌되어져야 했던 선악과를 봉헌하지 않았기에 모든 죄가 들어왔고
예수님께서 당신 자신을 봉헌하셨기에 그 죄가 사해졌습니다.
무엇을 얻어내려면 그 무언가를 주시려는 분의 욕구를 올바로 알고
그 욕구에 합당한 것을 채워주어야 합니다.
주님께는 그것이 ‘봉헌’입니다.
어떤 아이가 땀을 흘리며 슈퍼에 들어왔습니다.
그리고 아저씨에게 “콜라 하나 주세요!”라고 말합니다.
아저씨는 콜라가 떨어진 것을 발견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말해야할까요? 콜라 없다고 가라고 해야 할까요?
그 아이는 콜라가 먹고 싶은 것이 아니라 갈증을 해소하고 싶은 것입니다.
요구가 아니라 욕구를 볼 줄 아는 주인이라면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콜라 몸에 안 좋아. 완전 설탕 덩어리야. 물이나 이온음료가 어떻겠니?”
상대의 욕구가 채워지지 않으면 상대는 내가 원하는 것을 주지 않을 것입니다.
성당에서도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하지도 않은 채
내가 원하는 것만 줄기차게 청해봐야 그 원하는 것을 얻을 수는 없습니다.
먼저 주님을 기쁘게 해 드립시다.
그러면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다 받게 될 것입니다.
주님께서 가장 기뻐하시는 것은 우리가 드리는 ‘감사의 봉헌’입니다.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