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Daum
  • |
  • 카페
  • |
  • 테이블
  • |
  • 메일
  • |
  • 카페앱 설치
 
카페정보
카페 프로필 이미지
나무아미타불
 
 
 
카페 게시글
여행과 사찰 스크랩 신라 9산 선문 사자산문파의 개조사 화순 쌍봉사
현림 추천 1 조회 365 17.07.26 06:38 댓글 7
게시글 본문내용

신라 9산 선문 사자산문파의 개조사 화순 쌍봉사


화순 쌍봉사(雙峰寺)는 전라남도 화순군 이양면 증리에 있는 조계종 제21구 본사인 송광사의 말사이다.

쌍봉사라는 사명(寺名)은 창건주인 철감선사의 도호(道號)가 쌍봉(雙峰)임으로 이에 비롯된 것이라고 한다.

철감선사(798~868)는 통일신라시대의 승려로, 28세 때 중국 당나라로 들어가 불교를 공부하고

문성왕 9(847) 범일국사(梵日國師)와 함께 돌아와 풍악산에 머무르면서 도를 닦았는데

경문왕대에 이 곳 화순지역의 아름다운 산수에 이끌려 절을 짓고

그의 도호 쌍봉(雙峰)’ 를 따서 쌍봉사라 이름한 것이라고 한다.

철감선사의 도호가 쌍봉(雙峰)인 것은 이 절의 앞산과 뒤산의 산봉우리가

쌍봉(두개)이어서 철감선사의 도호를 쌍봉이라 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쌍봉사는 동리산문(桐裏山門)의 개산조(開山祖)인 적인 선사(寂忍禪師) 혜철(惠哲)

8392월에 중국에서 귀국하여 최초로 하안거(夏安居)를 지낸 곳이 무주(武州) 관내 쌍봉사라는 견해가 있어

이에 따르면 839년 이전에 창건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 후 철감 선사 도윤(道允:798~868)이 주석하면서 사세가 크게 번창한 것으로 보인다.

철감 선사는 중국 소주(蘇州)[창건 비문에는 소주(韶州)라 기록됨] 쌍봉사에서 도를 깨치고 돌아와

이 절에 주석하면서 절의 이름을 쌍봉사라 하였다고 한다.

이처럼 쌍봉사의 창건자나 연대에 대해서는 명확하지가 않다.




847(문성왕 9)에 귀국한 철감선사는 이 절에서 신라 선문9산의 하나인 사자산문(獅子山門)의 기초를 마련하였고,

이곳에서 그의 종풍(宗風)을 이어받은 징효(澄曉)4대 적멸보궁의 하나인

영월의 흥녕사(興寧寺)에서 사자산문을 개산(開山)하게 되었다.


 

창건 이후 무상한 세월과 전란 등으로 사세가 기울어 고려에 들어와서 퇴락한 절을

1081(문종 35)에 혜소국사(慧昭國師)가 창건 당시의 모습대로 중건하였고,

공민왕 때 전라도관찰사 김방(金倣)의 시주로 중창하였다.

조선시대에는 왕실이 보호를 받기도 하였으며, 임진왜란으로 소실된 뒤 1628(인조 6)에 중건하였고,

1667(현종 8)1724(경종 4)에 중창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중요문화재로는 국보 제57호인 철감선사탑(澈鑒禪師塔)

보물 제170호인 철감선사탑비(和澈鑒禪師塔碑)가 있고,

보물 제163호였던 대웅전이 있었다.

철감선사탑은 우리나라 석조 부도 중 가장 기묘하고 아름다운 우수한 작품이라고 하며,

868(경문왕 8)경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철감선사탑비는 신라 말 작품으로 비신은 없어지고 귀부(龜趺)와 이수(?首)만 남아 있으나,

그 조각의 우아함은 당대의 명작이다.

그 외에 보물 제1009호 능성 쌍봉사 감역 교지(綾城雙峯寺減役敎旨),

보물 제1726호 화순 쌍봉사 목조 지장보살 삼존상 및 시왕상 일괄, 지방 유형 문화재 제251

대웅전 목조 삼존 불상, 지방 유형 문화재 제252호 극락전 목조 아미타여래 좌상,

문화재 자료 제66호 극락전과 쌍봉사 사적비, 부도 등이 남아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천왕문 앞에 옛적에 있었다는 연못1994년 복원한 것이라고 한다.


천왕문


@쌍봉사 내 전각으로는 삼층 목탑의 형식을 가진 대웅전과 극락전·나한전·지장전·호성전·일주문·사천왕문·요사가 있다.

대웅전에는 목조 석가 삼존상이 모셔져 있고, 극락전에는 아미타여래 좌상이 있으며,

나한전에는 석가 삼존상과 십육 나한 인왕상, 지장전에는 지장 삼존도와 시왕상이 모셔져 있다.

호성전(護聖殿)에는 철감 선사 도윤과 중국 조주선사의 영정이 봉안되어 있다.

사찰 입구 왼편에는 쌍봉사 사적비가 세워져 있고, 사찰 뒤편 언덕에는 철감 선사의 부도와 탑비가 있다.




천왕문의 사천왕상이다. 좌로부터 남방 수호신 증장천왕, 서방수호신 광목천왕.


좌로부터 북방수호신 다문천왕, 동방수호신 지국천왕

대웅전

@임진왜란 후 폐허가 된 쌍봉사는 여러 차례 불사가 이루어졌다.

그 중 대웅전의 중수 기록을 보면 1628(인조 6) 탑지(塔址) 위에

현재의 3층 대웅전을 요의선사(了誼禪師)가 중수하였고,

1690년 수열 선사(守悅禪師)가 대웅전 중건 불사를 하였으며

1694년 극락전에 아미타 삼존불을 봉안하면서 대웅전에는 석가불을 봉안하였다.

1724(경종4)에 치현(致玄)이 대웅전을 3차 중수하였다.

대웅전은 평면이 방형인 3층 전각으로 사모지붕의 목조탑파형식을 지닌 희귀한 양식이다.

 193653일 보물 제163호로 지정되어 보존해 오던 중 198442일 신도의 부주의로 소실되어

문화재 지정이 해제되었으며, 복원공사는 문화재관리국이 그간 자료를 수집하여

198585일 착공하여 19861230일 준공, 원형대로 복원되었다.

 


@대웅전은 3층의 정방형 단칸집으로 통일신라시대 양식을 그대로 지닌 목조탑파형 건물이었다.

쌍봉사 대웅전의 이러한 목조탑파형 건물은 법주사 팔상전과 함께

우리나라 목탑의 원형을 간직하고 있다고 평가되어 보물 163호로 지정되어 있었으나

19844월 기도하던 신도의 과실로 촛불로 전소 되고

지금의 대웅전은 1986년 말 예전의 실측 자료를 토대로 정면1,

측면1칸 총 높이 12m의 정방형3층 목탑형식의 독특한 전각으로 복원한 것이다.

그러나 보물제 163호로 지정되었다가 해제한 것은 아직까지 재 지정하지 않은 상태다.


 

@대웅전은 1962년 해체공사 때 3층 중도리에서 1690(숙종 16)의 두 번 째 중건에 이어

1724(경종4)에 세번째 중건된 사실이 기록되어 있는 상량문이 나왔다.

그리고 최근까지 대웅전으로 사용되었던 3층각은 원래 대웅전 건물이 아닌 탑이었다고 전한다.

쌍봉사의 기록에 의하면 소실되기 이전의 모습은 지붕이 팔작형식이었으나,

복원하면서 원래 모습인 사모지붕의 목탑 지붕형식으로 바꾸었다고 한다.



@위 사진은 1937년 동양건축이란 잡지에 실린 화재로 소실되기 전 원형 대웅전의 모습이다.

수리 당시 작성한 실측도면을 바탕으로 1986년 복원한 새로운 지금의 대웅전은

옛 대웅전과 지붕의 모습이 다름을 알 수 있다.

옛 대웅전은 지붕 양옆에 삼각형 박공이 만들어진 팔작지붕인데 반하여

새 대웅전은 마치 석탑 최상층의 지붕처럼 네 곳의 기왓골이 가지런히 꼭대기에 모이는 사모지붕의 형태다.

새 대웅전의 지붕에는 또 석탑의 꼭대기를 장식하듯 상륜부가 만들어져 있다.


 

이렇게 바뀐 것은 해체수리 과정에서 대웅전이 과거 사모지붕이었다는 사실과

과거 삼층전(三層殿)이라고 불리며 목탑으로 구실하던 이 건물의 기능이

어느 시기에 대웅전으로 바뀌었기 때문에 지붕 모양 역시 전각이란 구조에 걸맞게

팔작지붕으로 개조했을 가능성이 있는 것으로 학자들은 여기고 있다.






<대웅전 목조삼존불>

@쌍봉사 대웅전에 봉안되어 있는 목조 석가여래좌상 및 가섭존자상과 아난존자상은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251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 불상과 동시에 제작된 쌍봉사 극락전 아미타여래좌상의 대좌 밑바닥에 쓰인 발원문

……강희(康熙) 33년 미타전에 미타(彌陀)와 좌우 관음(觀音대세지보살(大勢至菩薩),

삼층보전에 석가(釋迦)와 아난(阿難가섭존자(迦葉尊者)를 봉안하였다.

금어질 색난(色蘭), 모현(慕賢), 득우(得牛)라 적혀 있어

1694(숙종 20)에 색난, 모현, 득우 등이 불상을 조성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 삼존불상이 봉안되어 있는 삼층목탑형인 대웅전은

1690년에 중수되었음이 해체 보수 때 상량문을 통하여 밝혀졌으나,

이 전각은 1984년에 화재로 소실되었다.

다행히 법당 내부의 불상은 화재를 피해 1986년 새로 복원된 대웅전 내에 다시 봉안되었다.


 

@쌍봉사의 화재사건과 관련하여 이런 미담이 전해지고 있다.

1984년에 대웅전에 불이 났을 때, 마침 근처에서 밭일을 하시던 할아버지 한 분이

  불길을 뚫고 들어가 혼자서는 도저히 들 수도 없는 석가모니 부처님와 가섭존자,

아난존자의 상을 차례로 업고 나왔다고 한다.

그리고 불길이 덮치는 가운데서 대웅전 편액까지도 무사히 떼냈다고 한다.




@지장전

지장전은 보물 제1726호로 지정되어 있다. 쌍봉사 지장전 안에는 목조지장보살좌상을 중심으로

도명존자상(道明尊者像)과 무독귀왕상(無毒鬼王像), 시왕상(十王像) 및 권속 등 21구의 존상들이 봉안되어 있다.

이 존상들은 내부 복장물이 거의 없어진 상태이지만, 다행히 몇 구에서 후령통과 발원문이 수습되었다.

특히, 3 송제대왕상(宋帝大王像) 내부에서 발견된 발원문은

가로 123.5, 세로 45.5인 직사각형의 한지에 조성 장소와 목적, 관련 인물을 기록하였는데,

이 발원문과 사찰 관련 문헌을 통하여 이 존상들이 1667(현종 8)에 조성된 것임이 밝혀졌으며,

쌍봉사의 불상 24구를 제작한 조각승 운혜(雲慧) 등이 조성하였다고 한다.

운혜는 1650(효종 1) 해남 서동사 목조석가삼존불좌상과

1680(숙종 6) 곡성군 도림사 목조아미타여래좌상을 제작한 17세기 중반의 대표적인 조각승이다.

 


지장보살좌상은 높이가 104, 민머리의 성문비구형이다.

얼굴을 앞으로 내밀어 구부정한 자세를 취하고 있으며, 얼굴과 앉은키는 대략 1:3.2의 신체비례를 보인다.

전체적으로 조선 후기에 유행한 불상의 이목구비를 지니고 있지만, 각이 진 얼굴에 턱이 약간 뾰족하고,

인중이 넓으며, 목에 난 삼도(三道)가 거의 수평으로 처리된 점이 특이하다.



따로 제작된 오른손은 어깨 높이까지 올려 엄지와 중지를 맞대고,

왼손은 가지런히 무릎 위에 올려놓은 채 엄지와 중지를 맞댄 아미타수인을 취하고 있다.

바깥에 걸친 두꺼운 대의는 오른쪽 어깨에서 대의자락이 가슴까지 내려와 두 겹 접힌 후

팔꿈치와 배를 지나 왼쪽 어깨로 넘어가고, 반대쪽 대의는 세 겹으로 접혀

수직으로 내려와 결가부좌한 다리 위에 펼쳐져 있다.

하반신을 덮은 대의자락은 중앙에 동일한 두께로 접힌 자락을 중심으로 향좌측으로 파도가 출렁이듯 접혀 있고,

향우측에 한 가닥 넓게 펼쳐져 있다.



특히 배 부분에서 가운데로 흘러내린 주름의 끝단이 부메랑같이 표현된 점이 특징이다.

대의 안쪽에 입은 승각기는 둥근 상단에 양쪽 끝이 날카롭게 접힌 도끼날 같은 부형(斧形)으로 표현되었다.

또한 지장보살좌상의 왼쪽 측면에 보이는 대의자락이 두 가닥 수직으로 내려오다가

Y자로 접힌 표현은 17세기 중반에 활동한 조각승 운혜 비구가 제작한 불상에 나타난다.


 

지장보살좌상 좌우에는 높이 146, 합장을 한 도명존자와 지물을 든 자세의 무독귀왕이 서 있고,

좌우 벽면을 따라 향좌측에 높이 156의 세 명의 대왕, 향우측에 일곱 명의 대왕과 시자 등을 봉안하였다.

시왕상은 모두 의자에 앉은 자세로 높은 관을 쓰고, 융복과 곤룡포를 입고 다양한 지물을 들고 있다.

그리고 시왕상 사이사이에 판관(判官)과 귀왕(鬼王) 등이 배치되었다.




<극락전>

화순 쌍봉사 극락전 목조 아미타여래 좌상은 원래 양옆에 협시불인 관세음보살, 대세지보살과 함께

 삼존의 형식을 갖추고 있었으나, 19898월경 양 협시불이 도난당하여 이후 새로 조성하였다.

아미타여래 불상은 1694(숙종 20)에 만들어진 것으로 대웅전에 모셔져 있는

전라남도 유형 문화재 제251호 목조 삼존 불상과 크기와 수인만 다를 뿐 조각 형식이 매우 흡사하다.

200165일 전라남도 유형 문화재 제252호로 지정되었다.



화순 쌍봉사 극락전 목조 아미타여래 좌상은 전체 높이가 165로 대형에 속한다.

상호는 넓적하고 사각형에 가까우며 등이 굽어 있다.

머리는 나발이 촘촘하고 육계는 정상에 원통형으로 처리하였으며,

머리 중간에 반월형의 계주가 있다. 백호는 이마에서 양미간 사이로 내려와 있다.

귀는 두툼하며 귓불이 뭉툭하다. 목은 짧으며 삼도가 얕게 파여 있다.

 

법의는 통견이며 두툼하고 의문(衣紋)은 뚜렷하다.

왼쪽 어깨에서 내려온 법의자락은 수직으로 흘러 손목까지 감싸고 있으며,

오른쪽 어깨에서 내려온 법의 자락은 팔목까지 내려와 있다.

군의의 상단 옷 주름은 규칙적으로 주름잡아 앙련형으로 장식화한 형식으로 처리하였고,

그 밑에 1조선의 의대가 돌려져 있을 뿐 띠 매듭은 없다. 복부에는 넓은 U자형이 2조선으로 양각되었다.


 

수인은 미타정인으로 오른손을 올리고 왼손을 내려서 엄지와 중지를 맞대고 있는 중품하생인을 결하고 있다.

어깨의 너비는 85로 무릎 너비 115에 비할 때 너무 넓어 둔중한 감을 풍기고 있다.

 

불상 하면의 중앙에 가로 21, 세로 17.5크기의 복장공이 뚫려 있다.

복장물은 대부분 분실되고 다라니(陀羅尼) 3종류, 실 꾸러미 3, 후령통(喉鈴筒) 1개만 남아 있었다.

현재 불상의 대좌는 근래에 제작한 것으로 본래의 것은 경기도 목아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가

현재는 송광사 성보 박물관에서 보관중이다.


(극락전에 있는 범종)

 

화순 쌍봉사 극락전 목조 아미타여래 좌상은

대웅전에 있는 석가여래 좌상과 조각 형식이 거의 흡사하여

동일인에 의하여 같은 시기에 조성된 것으로 파악되며,

기록에도 1694(숙종 20)에 조성된 것으로 되어 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극락전이 있는 위 신중탱화는 1919년에 효해(曉海) 스님이 봉안한 것이라고 한다.


극락전에 산신과 칠성탱을 모시고 있다.


나한전이다.


대웅전의 목조 석가삼존불상과 같이 중안 석가모니불 옆에

가섭존자와 아난이 협시하고 있고 좌우에 나한들을 봉안했다. 





@호성전

쌍봉사 호성전은 일반 사찰 건축물과는 달리 T자형 맞배지붕 건물로

원래는 세조의 위패를 모시는 사당으로 죽수서원(竹樹書院)의 속사(屬寺)였다.

죽수서원은 기묘사화(己卯士禍) 때 능주로 유배되어 사사(賜死)된 조광조(趙光祖)를 배향(配享)한 서원이다.

쌍봉사는 2008년에 이르러 세조의 위패 대신

이 절의 창건주인 철감선사 도윤과 조주선사의 진영으로 대체하고 모시고 있다.




<조주선사>

조주선사(778~897)는 당() 조주(趙州)사람으로 성()은 학씨(?().

당나라 문종 대화원년(827)에 지주에 있는 마조도일의 제자인 남전보원 문하에 입방하신 후,

당나라 대중11(857) 선사 나이 80세에 조주(백림선사/관음원)에 와서 120세로 입멸하실 때 까지

관음원에서 40여년간 주석하면서 선풍을 진작하였다.

우리에게 익숙한 화두 정전백수자(庭前柏樹子/뜰 앞에 측백나무), 구자무불성(狗子無佛性), 끽다거(喫茶去)

많은 공안으로 고불(古佛)조주(趙州)로 회자하며, 시호는 진제(眞際)대사다.


 

<철감선사 도윤>

@철감선사는 798(원성왕 14)에 태어나 868(경문왕 8)에 입적한

신라 말기의 사자산문(獅子山門)파를 일으킨 개조사이다.

속성은 박씨(朴氏). 호는 쌍봉(雙峰). 도윤은 휘다. 시호는 철감(澈鑑)이다.

황해도 봉산에서 태어나 18세에 출가하여 귀신사(鬼神寺)에서

 화엄경을 공부하였으나, 원돈(圓頓)을 가르치는 화엄이

 심인(心印)을 전하는 선보다 못하다고 생각하여  825년 당나라로 갔다.

 

도일(道一)의 제자 보원(普願)은 첫눈에 법기(法器)임을 알고 그에게 심인을 전한 뒤

그의 법인(法印)이 신라로 간다고 탄식하였다고 한다.

847(문성왕 9) 범일(梵日)과 함께 귀국하여 금강산에 머무르며 후학들을 지도하였는데,

경문왕도 그때 그에게 귀의하였다.

귀국 후 철감선사는 신라 말 구산선문(九山禪門) 중 사자산문(獅子山門)의 개산조로 화순 쌍봉사로 이거하여

선풍(禪風)을 떨치다가 868418일 문인들을 모아 법을 널리 펼 것을 당부하고

나이 71, 법랍 44세로 입적하였다. 시호는 철감선사(澈鑒禪師)이며, 탑호(塔號)는 징소(澄昭)이다.

죽을 때 오색과명이 입에서 나와 공중에 상서로운 상이 퍼져 나갔다하여

서기만천철감국사(瑞氣滿天澈鑒國師)라고도 한다.

경문왕은 입적한 선사에게 철감이라는 시호를 내리어 탑과 비를 세우도록 하였다.




범종각









<철감선사 탑과 탑비>

국보 제57호로 지정된 철감선사탑(澈鑒禪師塔)과 보물 제170호로 지정된 철감선사탑비(和澈鑒禪師塔碑)

 화순 쌍봉사 철감 선사(澈鑒禪師) 도윤(道允)[798~868]의 탑()과 비()

통일 신라 시대 조성된 것이다.

@철감 선사는 통일 신라 시대의 승려로, 스물여덟 살 때인 825(신라 헌덕왕 17) 중국 당나라에 들어가 유학하고,

847(신라 문성왕 9)에 범일 국사(梵日國師)와 함께 돌아와 풍악산[금강산]에 주석하였다.

경문왕을 불법에 귀의하게 하기도 하였고 그의 문하에서 선문구산의 하나인 사자산파(獅子山派)[영월]를 이룩한

절중 선사(折中禪師)[826~900]가 배출되었다.

경문왕 대에 당시 능성군(현 화순) 지역에 절을 지어 쌍봉사라 하였다 한다.

868년 일흔한 살의 나이로 쌍봉사에서 입적하니,

경문왕은 철감이라는 시호를 내리고 부도와 탑비를 세우도록 하였다.

입적한 해인 868년 무렵 탑비를 세운 것으로 보인다.

 

탑비는 비몸돌이 없어진 채 거북받침돌[龜趺]과 머릿돌[이수]만 남아 있다.

네모난 바닥 돌 위의 거북은 용의 머리를 하고 여의주를 문 채 엎드려 있는 모습으로,

특히 오른쪽 앞발을 살짝 올리고 있다. 머릿돌은 용 조각을 생략한 채 구름무늬만으로 채우고 있다.

앞면 가운데에 제액을 만들고 비제를 음각 예서체로 새겼다.




해탈문이다. 해탈문은 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천왕문 뒤편 편액으로 처리한 것이다.


해탈문을 나오는 것은 곧 천왕문을 나오는 것이다. 같은 전각의 앞 뒤 편액이 다르기 때문이다.




일주문을 나와 다음 코스 송광사로 향한다.

쌍봉사 일주문은 2010년에 새로 세운 것으로 쌍봉사자문(雙峰獅子門)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쌍봉(雙峰)은 이 절의 앞산과 뒤산의 봉우리가 2개인 쌍봉을 의미함과 동시에

창건주 철감선사의 도호를 의미하기도 하고, 사자문은 철감(澈鑒)선사가 이 절에서 선문9산의 하나인

사자산문(獅子山門)의 개산조의 사찰임을 강조하기 위해 것으로 사료된다.



 




 
다음검색
댓글
  • 17.07.26 07:14

    첫댓글 _()_
    나무 아미타불
    감사 합니다,

  • 17.07.26 08:23

    귀한 사진 잘 보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 17.07.26 14:16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나무지장보살
    감사합니다.

  • 17.07.26 18:55

    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

  • 17.07.26 20:10

    _()_
    나무아미타불
    감사합니다.

  • 17.07.27 05:28

    해설 참 좋았습니다.
    항상 건강하시고,행복하소서.
    감사합니다.

  • 17.08.02 15:25

    감사합니다.나무대자대비 관세음보살 _()_

최신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