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해서 좋지 나는 너의 낡고 헐렁한 드로즈 팬티를 입는다 이젠 꽉 끼는 깔끔한 게 부담스럽다 나는 너의 희끄무레한 셔츠를 입고 조끼를 걸친다 부주의하고 어설픈 수비대원 같다
철거반입니다 당신 소지품을 챙겨 나오시오
우크라이나에서 온 우크렐레 연주자입니다 당신 노래를 들려주시오
놀라게 하거나 말장난하면 너는 흥분한다 내가 침대에서 부드럽게 욕설 같은 걸 하면 너는 한 번 더 말해줘 나를 빨아들인다 나는 너덜너덜하다 나는 줄이 잘 풀린다 수명이 다한 악기 같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사랑의 격렬함을 가지는 건 아니다 사실 사랑에 진절머리가 난 인간으로서 하는 말인데 넌더리는 초월처럼 한 번 만에 완성되지 않는다 나는 숨을 멈추게 하는 재미를 좋아하지만 온전히 끝까지 사랑을 잊지 않기 위해 애초에 기억하지 않는다
모든 것이 녹는다 반지를 녹여 해바라기를 심었다 가끔 네가 날 뭐라 생각하는지 모르겠다고 말할 때면 난 잠시 침묵한다 버릴 게 없는 사람이죠 나는 창가에서 여름을 본다 난 네가 시간에 녹지 않는 물건을 훔쳐 오면 좋겠다
나는 너의 팬티를 입고 창가에 서 있다 구아바 상자 안의 상한 구아바색 여름이다 뿌리와 꽃 열매까지 모두 모두 먹을 수 있는 식물은 훌륭하다 버릴 게 없는 생선처럼 버릴 게 없는 문장을 썼다는 소설가처럼 참 훌륭하다 못해 비참하다
심혈을 기울인다는 말에서도 슬픔을 느낀다 우리는 도망자처럼 행동하지만 일상은 의외로 평범하다 구아바 상자 위의 이구아나처럼 나는 너에게 붙어 있다 비슷한 빛으로 비슷한 소리를 내며 끔찍한 웃음과 흐느낌의 혼동 속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느끼는 기분으로 대다수의 사람들이 상상하는 지독히 음란한 상상을 하면서 너를 만난 이후 모든 걸 망쳤어 망해간다는 말을 뱉지 않은 채
비슷한 것끼리 붙어 있으면 더 빨리 상하는 법이죠 더할 나위 없이 상해서 건질 게 없어지면 우리를 이용 가치 없다고 버리지 않을까요
진짜로 하고 싶은데 너무 하기 싫은 일을 피해서 나는 너의 검은 외투를 입고 얇고 긴 넥타이를 맨다 우리는 항상 검은 외투를 쓰고 비탈에 있는 계단으로 갔다 버릴 게 하나 없는 강가에서 버릴 게 하나 없는 사람들이 버릴 게 하나 없는 물고기를 낚고 있었다 벌거벗은 아이들이 버릴 게 하나 없는 노래를 불렀다 나는 취할 게 하나 없는 사람을 잃은 후
안에 누가 있습니까? 당신 소지품을 챙겨 나오시오
내 짐은 항상 걸리적거리는데 왜 버릴 게 하나 없을까
어린 시절 집 앞에서 사람들이 소를 보며 말했다 소는 쟁기질을 끝내고 돌아오고 있었다 머리부터 꼬리까지 버릴 게 없는 가축이라고 했다 시체들이 흘러가는 강가가 보였다
버릴 것만 가득한 인생을 꿈꾸었다
마음으로만 살해했다는 뜻이 아니다
그러나 우리의 일상은 의외로 평범하다
햇볕에 데워진 돌계단에 뺨을 대고
공포와 넘치는 관능 너는 내 몸 아래 깔려 있다 사람들은 매일 결합하면서 왜 비밀로 하는 걸까 만난 이후 망해가고 함께 있으면 축이 나고 헐었다 줄 중 하나는 상태가 좋지 않다는 증거 같았다 비슷한 것끼리 붙어 있으면 진짜로 하고 싶은 노래가 있었고 너무 짓기 싫었다
⸺월간 《현대문학》 2019년 3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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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이듬 / 1969년 경남 진주 출생, 부산에서 성장. 2001년 《포에지》에 시를 발표하면서 등단. 시집 『별 모양의 얼룩』『명랑하라 팜 파탈』『말할 수 없는 애인』『베를린 딜렘의 노래』『히스테리아 』『표류하는 흑발 』, 장편소설 『블러드 시스터즈』, 산문집『모든 국적의 친구』『디어 슬로베니아』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