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손에 실존적 자유의 깃발을 / 다른 손에 인간적 해방의 깃발을 / 높이 쳐들고 / 일생을 통한 뜨거운 열정으로 / 이론과 실천을 하나로 어울러 / 이 나라 현대철학의 제1세대 학자로서 / 최고봉을 이루셨던 분… ” 경남 함양군 안의면 안의공원에 세워진 하기락(河岐洛) 박사의 학덕비(學德碑)의 비문 내용이다. 일제시대와 해방공간을 거쳐 현대에 이르기까지 격동의 시대를 온 몸으로 넘은 고(故) 하기락 선생을 ‘만나기 위해’ 만년(晩年)에 모셨던 김주완 교수(경산대 대학원장·대한철학회장)를 지난 16일 만났다.
하기락 선생은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아나키스트(anarchist)이다. 사전에는 아나키스트를 ‘무정부주의자’‘반역자, 폭력적 파괴자, 폭력 혁명가’로 묘사하고 있다. 하지만 이같은 해석은 바르지 않다. 김주완 교수는 하기락 선생을 알기 위해서는 그의 아나키즘(anarchism)을 이해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교수가 들려 준 하기락 선생의 생전 목소리다. “일본사람들에 의해 아나키즘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이 생기게 됐다. 아나키스트들이 독립운동에 많이 참여했기 때문에 일제에 의해 나쁜 이미지가 굳어진 것이다.” 그러면 하기락 선생이 생각한 아나키즘은 무엇일까? “아나키즘의 핵심은 자주(自主)와 평등(平等)이다. 제도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제도의 자주적 관리, 즉 구성원들이 주인이 되는 사회이다.
김주완 교수는 하기락 선생의 ‘아나키스트’는 ‘자유인(自由人)’또는 ‘자주인(自主人)’로 풀이하는 것이 옳다면서 “하기락 선생은 생전에 ‘아나키즘은 명실상부한 민주화를 추구한다’고 역설한바 있다”고 회고했다. 하기락 선생의 생각이다. “아나키즘은 우리식으로 말하면 자주인 사상이다. 자주인은 바로 자기가 주인이 되자는 것이다. 개인이 스스로 자신의 주인이 된다는 것은 인간생활을 자유롭게 하고 정치권력이나 재벌의 압박을 배제할 수 있는 길이 된다.” 그렇다고 개인의 자유만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역시 하기락 교수의 육성이다.“…‘나’라는 인간이 인간으로서 소중한 것처럼 ‘너’라는 인간도 역시 인간으로서 소중한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최고 가치라면 ‘너’또한 최고가치이다. … 만인이 각인의 자유를 보장하는 ‘아나키’사회가 성립될 수 있는 것이다.” 개개인의 존엄성을 인정받는 사회를 열망했던 하기락 선생의 마음을 느낄 수 있는 대목이다.
우리시대에 ‘하기락’은 어떤 의미로 다가올까. 김주완 교수는 “하기락 선생은 대학강단에서 활동하면서 사회운동에 실질적으로 참여한 분”이라면서 “하나는 학문적 업적으로, 다른 하나는 아나키스트로서의 삶으로 조명할 수 있다”고 말한다. 학문적 업적은 서양철학을 전공했으면서도 민족의 주체성을 강하게 갖고 있었다는 점이다. 하기락 선생은 “서양철학도 한국사람이 하면 결국 한국철학이어야 한다”는 입장에서 서양철학을 연마했다. 하이데거와 니콜라이를 전공하고, 대학강단에 선 후학들을 상당수 길러냈지만 한국철학에 지대한 관심을 보였다. 만년에는 대작 〈조선철학사(朝鮮哲學史)〉를 저술했을 정도이다. 김주완 교수는 “서양철학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한국적 사유로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신경을 써왔다”고 밝혔다.
하기락 선생을 평가할 때 ‘아나키스트로서의 일생’을 빼놓을 수 없다. 경성고보와 일본유학시절 학생운동에 적극 가담하면서 제적당하고, 투옥될 만큼 ‘잘못된 현실’을 바로 잡겠다는 의지가 강했다. 1939년 일본 와세다대 재학당시 동참모임에서 ‘지식인의 임무’를 밝힌 발언이다. “조선 민족의 문화를 옹호해야 한다. 지식인은 문화를 지도해야 할 임무를 지고 있다. 혼돈한 시대에 새로운 원리를 가지고 벽에 부딪혀진 문화를 창조함에는 분명 난관이 있다. 문화 지도에는 지도 방법으로서의 세계관 혹은 역사관이 있어야 한다.”
해방이후 하기락 선생의 삶은 더욱 치열해졌다. 대학에서 교편을 잡고 후학을 길러내면서 그의 관심은 늘 ‘현실을 바로 잡는’데 있었다. 양지보다는 음지를 지향했다. 없는 사람들, 고통받는 사람들과 함께 하려는 지성인의 길을 걸었던 것이다. 이 시대에 더욱 하기락이 빛나는 삶은 언제나 약자편에 있었으며 실천까지 겸비하고 있었다.
그는 환경, 군비축소, 통일문제에 대한 관심을 보였다. 특히 민족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통일은 필수적이란 입장을 지녔다. 하기락 선생의 목소리이다. “어차피 핏줄이고 형제다. 남한이 형 입장에 있고, 형편이 나으면 동생을 도와야 한다. 오랜 시간이 걸리겠지만 통일을 이루기 위한 유일한 길이다.” 김주완 교수는 하기락 선생의 이같은 입장에 대해 “선생님은 사회주와 자본주의의 통합사회를 지향했다”고 기억했다. 이처럼 하기락 선생은 기존의 사회체제에 대해서도 따끔한 질책을 던졌다. “인간의 얼굴을 가진 사회주의와 사회의 얼굴을 가진 자본주의가 조화하여 21세기로 향하는 인류전체의 연대와 화평을 도모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하기락 선생의 학문에 대한 열정은 뜨거웠다. 1963년 11월9일 우리나라 최초의 철학자 모임인 한국칸트학회를 설립해 초대회장을 지냈는데, 한국철학회와 함께 철학계의 양대산맥으로 자리잡은 대한철학회의 전신이다. 정열적인 강의와 토론은 철학계에서는 유명하다. 80이 넘은 고령에도 불구하고 후학들과 세미나를 할때면 누구보다 성실했다. 김주완 교수는 “이 어른은 한번도 늦게 온 적이 없었다”면서 “제자들이 발표할 부분까지 당신이 직접 꼼꼼하게 읽고 나올 정도로 철저했다”고 말했다.
만년에도 저술활동을 위한 펜을 놓지 않았다. 또 손수 만든 타블로이드판 〈노동신문〉을 넣은 배낭을 짊어지고, 울산·창원·구로공단을 찾아 노동자들에게 직접 나누어 주었다. 지인(知人)들은 그를 “아주 정열적인 영원한 청년”이라고 말한다. 조그만한 집에서 ‘당신의 생각’을 구체화 하고자 했던 하기락 선생은 자제들이나 제자들이 주는 용돈을 모아 〈노동신문〉을 만드는데 보탰다. 1997년 세연(世緣)을 다하는 날도 노동자들에게 나눠줄 신문을 배낭에 넣어 외출을 준비하고 있었던 그였다.
* 제자가 말하는 허유
허유는 하기락 선생이 스스로 지은 호(號)이다. “비어 있음”의 뜻이다. 허유는 하기락 선생이 평생 일관되게 이루려고 했던 그의 사상을 함축적으로 담고 있다. 제자 김주완 교수는 “허유는 곧 없음으로 있음이다”며 “있기는 있되 아무 것도 미리 가진 것 없이 살고자 한 것이 하기락 선생의 삶”이라고 풀이한다. ‘인간의 해방’이라는 이상적인 목표를 그의 일생의 과제로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강조한다. 하기락 선생을 추모하는 시에서 김주완 교수는 “…없음으로서의 있음, / 항시 비워둠으로서 가득함, / 허(虛) 현실 저편에 빛나는 유(有)의 이상을 / 바라보며 . 노력하는 것이 곧 인간의 천분임을 / 두 자 아호 허유로 쓰시면서 가르치신…”이라고 ‘허유’를 말한다.
* 하기락 선생은 어떤 분
1912년 경남 함양 출생. 1937년 동경 상지대 예과 수료. 1939년 항일운동으로 6개월 옥고. 1940년 와세다대 철학과 졸업. 1945년 한국농민조합 창설 및 조합장 피선. 1946년 독립노동신문 편집. 1946년 부산 자유민보 창간 주필 취임. 1947년 대구대 철학과 주임교수. 1952년 안의고교 설립, 이사장 취임. 1953년 경북대 철학과 주임교수. 1960년 경북대 문리대 학장. 1963년 한국칸트학회 회장. 1965년 한국철학연구회 회장. 1966년 동아대 초빙교수. 1979년 계명대 대우교수. 1987년 경북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 고문. 1987년 전국아나키스트 대회장. 1988년 세계 아나키스트 대회 서울 유치. 1989년 국제아나키스트 연맹 한국대표. 1990년 소비에트 과학아카데미 공식초청 강연. 1990년 국제평화협회 이사장. 1990년 ‘사회주의 정당’창당준비위원장. 1997년 경북대 병원에서 별세. 1998년 후학들은 은사의 학덕비를 세웠다. 하기락 선생은〈철학개론〉 〈서양철학사〉 〈한국아나키즘운동사〉 〈조선철학사〉 등 저서 25권. 〈하르트만, 철학개론〉 〈크로포트긴, 근세과학과 아나키즘〉 등 번역서 19권. 〈하이데거에 있어서의 공간성과 시간성의 문제〉 〈우리나라 아나키즘 운동〉 등 논문 29편을 남겼다.
대구=이성수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