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경 김영사와 김영사의 3개 암자 순례를 떠났지만,인연이 없는지 양진암을 제외하고
2개의 암자는 불사(佛事) 중이라 돌아서서 서울로 올라오는 길에 충주 석종사를 들렸다.
석종사의 홈피에 의하면 이 절은「봉황이 살았다는 금봉산(錦峰山) 기슭에
조선 말까지 죽장사라는 대가람이 있었는데 조선의 숭유억불(崇儒抑佛) 정책이 기세를 떨치는 시대
조선말 조병로 충주목사가 사찰을 허물어 중추 관헌(現 淸寜軒 製錦堂)과 충주 읍성을 지었다고 한다.
그 후 일제 식민지 시대를 거치면서 대가람의 옛터는 민간 소유로 넘어가고
사찰의 유물은 도굴당하고 5층 석탑만이 남은폐사지가 되어 있었던 것을
1985년부터 金牙(금아) 慧國(혜국)스님이 과수원 800편을 사들이기 시작하여
10만여 평의 터를 마련하여 21동의 대가람을 복원하여 지금에 이른 것이라고 한다.」
일주문<금봉산 석종사>라는 편액이 걸린 석종사의 일주문이다.
일주문(一柱門)은 사찰로 들어가는 첫 번째 문으로,
한 줄로 세운 기둥 위에 맞배지붕 양식을 취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 기둥 양식은 일심(一心)을 상징한 것이다.
청정한 도량에 들어가기 전에
세속의 번뇌를 말끔히 씻고 일심이 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그런데 석종사의 일주문은 평택의 심복사처럼 지붕의 형식이
팔작지붕 형식을 취하고 있는 것이 이색적이다.
일주문 입구에는 넓은 주차 공간이 마련되어 있고
일주문 지나면 경내에도 주차할 공간이 마련되어 있다.
일주문 앞에 <都放下> 라는 문구가 새겨진 표지석이 세워져 있다.
일반 사찰의 해탈문이나 불이문,구례 화엄사 연기암 등을 가보면
<入此門內 莫存知解>라는 문구가 바위에 새겨진 것을 볼 수 있는데
석종사를 이를 <도방하>라 줄여 표현한 것이다.
세속의 경지가 아닌 부처님의 경지이니 일체의 아름알이를 내려놓으라는 의미다.
화엄공원 일주문을 지나면 오른쪽에 화엄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공원 한쪽에는 바위에 <대방광불화엄경>이 부조되어 있고,
왼쪽 중앙에는 비로자나불과 협시불이 부조된 마애불이 있고
마애불 좌우로 <법성게(法性偈)> 자귀(字句)가 부조된 바위들이 나열되어 있다.
<법성게>는 신라의 고승인 의상대사가 깨달음의 경계와 법(法)에 대하여 표현한
7언 30구의 게송으로, 화엄일승의 교리를 함축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일반적으로 화엄의 주불인 비로자나불은 협시를 두지 않는데
협시불을 모실 때 전각 명이 <대적광전> 이라면 비로자나불, 노사나불, 석가를 모시고,
<대광명전>일 때는 비로자나불, 문수보살, 보현보살을 모신다.
석종사 화엄공원의 마애불은 비로자나불 좌우에 문수와 보현보살을 부조해 놓았다.
<대방광불화엄경>이라 부조된이 바위 좌측의 건물은 선림원이 모양이다.
천척루 좌측에는 오층석탑이 오른쪽에는 범종각이 있다.
오층석탑5층 석탑은 옛 가람터에서 남은 유일한 유품이다.
사찰의 설명서에 의하면 하대 갑석과 1층 탑신석, 2, 3층의 옥개석만 본래의 것이고
상륜부와 탑신부 등은 모두 복원된 것이라고 한다.
복원된 옥개석은 4단의 받침으로,탑신에는 우주(隅柱)가 모각되어 있다.
기단부는 흐리지만, 안상(眼象)의 흔적이 남아 있고,상대 갑석에는 연화문이 부조되어 있다.
기단부의 면석에 탱주(撑柱)가 하나인 것으로 보아 고려 초기 이후의 작품으로 사료된다.
범종각
불전 사물인 범종(梵鍾), 법고(法鼓), 목어(木魚),운판(雲板)이 조성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