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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2월 3일 연중 제4주일
제1독서 : 예레 1,4-5.17-19
제2독서 : 1코린 12,31─13,13
복 음 : 루카 4,21-30
그때에 예수님께서 회당에서
21 말씀하기 시작하셨다.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
22 그러자 모두 그분을 좋게 말하며,
그분의 입에서 나오는 은총의 말씀에 놀라워하였다.
그러면서 “저 사람은 요셉의 아들이 아닌가?” 하고 말하였다.
23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이르셨다.
“너희는 틀림없이 ‘의사야, 네 병이나 고쳐라.’ 하는 속담을 들며,
‘네가 카파르나움에서 하였다고 우리가 들은 그 일들을
여기 네 고향에서도 해 보아라.’할 것이다.”
24 그리고 계속 이르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어떠한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
25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삼 년 육 개월 동안 하늘이 닫혀 온 땅에 큰 기근이 들었던 엘리야 때에,
이스라엘에 과부가 많이 있었다.
26 그러나 엘리야는 그들 가운데 아무에게도 파견되지 않고,
시돈 지방 사렙타의 과부에게만 파견되었다.
27 또 엘리사 예언자 시대에 이스라엘에는 나병 환자가 많이 있었다.
그러나 그들 가운데 아무도 깨끗해지지 않고, 시리아 사람 나아만만 깨끗해졌다.”
28 회당에 있던 모든 사람들은 이 말씀을 듣고 화가 잔뜩 났다.
29 그래서 그들은 들고일어나 예수님을 고을 밖으로 내몰았다.
그 고을은 산 위에 지어져 있었는데,
그들은 예수님을 그 벼랑까지 끌고 가 거기에서 떨어뜨리려고 하였다.
30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떠나가셨다.
큰 산, 큰 사랑, 큰 사람
-하느님 중심의 삶-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
어제 수도원에는 경사가 있었습니다. 봉헌축일에 하느님이 보내 주신 선물입니다.
바로 김상엽 레오 형제가 수도원에 입회한 것입니다.
손이 없던 집안에 오랜만에 득남한 듯 레오 형제의 가족도 함께한
기쁨과 희망이 가득한 축제 분위기 같은 점심 식탁 자리였습니다.
작은 공동체인 수도원도 내적으로는 불암산 같은 큰 산 공동체가 된 느낌입니다.
260만의 작은 나라 카타르가 아세안 축구 경기에서 강호 일본을 3:1로 격파하고 우승했습니다.
외형적으로는 작은 나라가 내적으로는 큰 나라임을 증명했습니다.
레오 형제의 어머님이 “큰 신부님에게 드린다”며 선물한 과타루페 묵주도 고마웠습니다.
무엇보다 “큰 신부”란 오랜만에 들은 말마디가 반가웠습니다.
하여 즉시 소감을 게시판에 써 붙였습니다.
-“‘노老 신부’가 아니라 ‘큰大 신부’란다!
큰 신부답게 살자. 몸이 커서 큰 신부가 아니라,
마음이 커서, 사랑이 커서 큰 신부겠지.”
쓴 다음 예전 써놓았던 ‘큰 산’이란 짧은 자작시를 써넣었습니다.
“아/크다/깊다/고요하다/저녁 불암산!”-
더불어 '깊고, 쉽고, 아름답고, 울림이 있다.'는
어느 신학자의 제 강론평에 고무됐던 적도 생각이 납니다.
늘 거기 그 자리에 언제 봐도 새롭고 정다운 불암산 '큰 산'입니다.
예전에 자작 애송시 ‘가을 산’이란 시도 생각납니다.
“산에/갈수도 없다
산을/가져올 수도 없다
이 좋은/가을날!
아예/산 되어 살기로 했다
단풍 물든/장엄한/가을 산으로
사랑하는 이여/놀러오지 않으련
넉넉하고 편안한/가을 산/큰 산/내 품으로!”-1999.10.26
아, 20년 전 시입니다. 여기에 첨가한 시작노트도 재미있어 나눕니다.
“단풍 물든 장엄한 가을 산을 좋아하지 않을 자 누구이겠는가?
그 좋은 가을날 휴가도 못가고 참 답답했다.
불암산을 바라보며 아쉬움을 달래던 중 문득 떠오른 시이다.
시란 짜내는 것이 아니라 떠오른 생각을 줍는 은총의 선물이다.
산에 갈 수도, 산을 가져올 수도 없으니, 아예 정주의 산되어 살기로 작정하니 마음이 편했다.
사랑하는 이가 찾아오길 기다리는 산같은 마음으로 쓴 시이다.
지금도 산이 그리울 때는 즉시 산이 되어 산다. 산이 산을 찾아갈 수는 없지 않나?”
‘큰 신부님’이란 말마디에서 연상되어 떠오른 큰 산, 큰 사람, 큰 사랑이란 말마디입니다.
내일이면 입춘, 봄의 시작을 앞두고 밖에는 보슬비가 내립니다.
더불어 떠오른 ‘내 딸 아이 하나 있다면’ 이란 자작 애송시입니다.
“마음을 촉촉이 적시는/봄비!/하늘 은총
내 딸 아이 하나 있다면/이름은 무조건/봄비로 하겠다.”-2005.3-
14년 전 써놓은 시이네요.
메마른 대지를 촉촉이 봄비 같은 사랑이 큰 사랑입니다.
몸이 커서 큰 사람이 아니라 마음이 사랑으로 커서 큰 사랑, 큰 사람입니다.
바로 성경의 사람들, 오늘 복음의 예수님이, 독서의 예레미야, 바오로가 큰 사람, 큰 사랑의 모범입니다.
말 그대로 하느님 중심의 삶에 전념하여 하느님을 닮아갈 때 이런 큰 산 같은 큰 사람, 큰 사랑, 큰 신부이겠습니다.
휴대폰을 켜니 ‘(미세미세)남양주시 별내동-매우 나쁨, 위험합니다! 외출을 삼가세요.’
알림 문자가 떠오릅니다.
공기는 미세먼지로 많이 오염되었어도 큰 산 같은 큰 사랑의 큰 사람 마음은
언제나 청정淸淨한 무공해 마음일 것입니다.
지난 밤 도착한 카톡 메시지, “신부님, 감사해요, 거기 그대로 계셔 주세요!”
산처럼 그 자리 있어 달라는 메시지에 새삼 제자리를 확인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예수님처럼, 큰 사람, 큰 사랑으로 살 수 있을까요?
첫째,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삶은 영적전쟁입니다. 두려워하면 집니다.
주님께서 자주 하시는 말씀이 “두려워하지 마라.”입니다.
수도원 십자로 바위 판에 새겨진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는 주님의 말씀도 기억하실 것입니다.
“두려워하지 마라”는 말씀 뒤에는 어김없이 따라오는 말마디가 “내가 너와 함께 있다.”는 주님의 말씀입니다.
하느님 중심의 삶이 심화될수록 사라지는 두려움입니다.
사면초가, 두려움에 떠는 예레미야를 격려하는 주님은 그대로 오늘의 우리를 격려하십니다.
“모태에서 나를 빚기 전에 나는 너를 알았다.
태중에서 나오기 전에 내가 너를 성별하였다.---
이제 너는 허리를 동이고 일어나라.---
너는 그들 앞에서 떨지 마라.---
오늘 내가 너를 요새 성벽으로, 쇠기둥과 청동 벽으로 만들어 온 땅에 맞서게 하고,
유다의 임금들과 대신들과 사제들과 나라 백성에게 맞서게 하겠다.
그들이 너와 맞서 싸우겠지만 너를 당해 내지 못할 것이다.
내가 너를 구하려고 너와 함께 있기 때문이다.”
‘내가 너와 함께 있다’는 주님의 말씀처럼 주님은 우리의 영원한 배경이 되십니다.
주님은 우리와 함께 하시어 우리 모두 두려움 없이
주님의 전사가, 주님의 용사가 되어 영적전쟁을 수행하게 하십니다.
그러니 사랑하는 형제자매님들 두려워하지 마시고, ‘화이팅!’ 힘내시기 바랍니다.
둘째, 사랑하십시오.
두려움을 몰아내는 사랑입니다. 사랑이 답입니다. 사랑밖엔 길이 없습니다.
평생 배워 공부해야 할 사랑입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사랑할 때 하느님을 닮아갑니다.
하느님은 샘솟는 사랑의 원천입니다. 사랑보다 영적전쟁에 좋은 무기도 없습니다.
인자무적仁者無敵, 어진 사람에게는 적이 없습니다. 사랑의 승리입니다.
오늘 바오로의 말씀은 사랑의 찬가가 아니라 분열의 어려움을 겪고 있는
코린토 교회 신도들을 위한 사랑의 가르침입니다.
정말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 좋은 것도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사랑은 명사가 아니라 동사입니다. 사랑은 개념이 아니라 실천입니다.
무재칠시無財七施란 불가의 말도 있듯이 가진 것 없어도 사랑은 끝없이 할 수 있습니다.
정작 품위 있고 아름다운 사람은 내적 부요의 사람은 사랑의 사람입니다.
끝없는 사랑 공부가 평생 공부입니다.
사랑하면서 몸은 작아도 마음은 커져 큰 산 같은 큰 사람이 됩니다.
사랑은 애매하거나 추상적이지 않습니다.
1. 사랑은 참고 기다립니다.
2. 사랑은 친절합니다.
3. 사랑은 시기하지 않고,
4. 뽐내지 않으며,
5. 교만하지 않습니다.
6. 사랑은 무례하지 않고,
7. 자기 이익을 추구하지 않으며,
8. 성을 내지 않고 앙심을 품지 않습니다.
9. 사랑은 불의에 기뻐하지 않고, 진실을 두고 함께 기뻐합니다.
10. 사랑은 모든 것을 덮어주고,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고, 모든 것을 견디어 냅니다.
위 열 가지 사항에 걸쳐 자신의 사랑을 점검해 보시기 바랍니다.
모든 것이 다 스러져도 사랑은 언제까지나 스러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믿음, 희망, 사랑은 계속됩니다. 그 가운데에서 으뜸이 사랑입니다.
큰 산 같은 큰 사람은 바로 큰 사랑임을 깨닫습니다.
셋째, 회개하십시오.
회개는 하느님 안 제자리로 돌아가는 겁니다. 하느님 중심의 삶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회개할 때 마음의 순수에 순수한 사랑이요 겸손과 지혜입니다.
오늘 복음의 예수님의 나자렛 고향 사람들이 바로 회개의 대상들입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어떠한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
바로 회개를 촉구하는 말씀입니다.
기근이 들렸을 때 이스라엘에 과부가 많았지만
시돈 지방 사렙타의 과부에게만 파견 되 엘리야의 예를 들면서,
또 엘리사 예언자 시대에 이스라엘에는 나병 환자가 많이 있었지만
시리아 사람 나아만만 깨끗해진 예를 들면서, 회개를 촉구하지만 마이동풍, 우이독경입니다.
오히려 화가 잔뜩 나서 예수님을 죽이려 합니다. 마지막 구절이 의미심장합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그 벼랑까지 끌고 가 거기에서 떨어뜨리려고 하였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들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떠나가셨다.’
‘백척간두 진일보百尺竿頭 進一步’, 바로 예수님 삶의 요약입니다.
예수님처럼 위기상황에서도 하느님 목표를 향해 최선을 다해 나아갈 때 통과입니다.
아무도 이처럼 큰 사랑, 큰 사람의 하느님 향한 진로를 막을 수 없습니다.
회개의 여정입니다. 끊임없는 회개입니다.
회개의 일상화를 통해 큰 사랑, 큰 사람으로의 끊임없는 내적성장입니다.
백척간두 진일보의 용기를 가능하게 하는 회개의 은총입니다.
연중 제4주일, 주님은 우리 모두 큰 산같은 큰 사랑, 큰 사람이 되는 길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1.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2. 사랑하십시오.
3. 회개하십시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내적으로
큰 산 같은 큰 사랑, 큰 사람으로 성장, 성숙시켜 줍니다. 아멘.
예수님과 마조 도일
류해욱 요셉 신부
오늘은 연중 제 4 주일입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고향 마을 회당에서 가르치시는 대목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많은 고향 사람들이 처음에는 무척 놀랍니다.
가만히 묵상 안에서 그분의 지혜에 탄복하고, 그분이 행하신 기적에 대해
경탄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그냥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우리 삶에서 놀라고 경탄할 수 있음은 매우 중요합니다. 바로 깨어 있다는 의미이기 때문이지요.
황동규 시인은 <수련>이라는 시에서 "이적 앞의 놀람 또한 살아 있는 것의 속뜻이 아니겠는가." 라고 썼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의 그 놀람이 진정 살아 있음, 깨어있음의 증표가 아니었다는 것이 안타깝습니다.
그들은 처음에는 놀랐지만, 곧이어 자기들의 놀람을 부정합니다.
진정 깨어 있었던 것이 아니라, 고정관념에 매여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말씀, 행적보다 원래의 직업, 누구의 아들, 누구누구의 형제 등의 틀 안에 집어넣고
그가 누구인지를 다 안다고 단정합니다.
그러니 새로운 진리를 알아보고 받아들일 수 있는 힘은 전혀 없습니다.
참으로 깨어 있음, 살아 있음은 바로 우리가 아직 모른다는 것,
사람과 세상에 대해, 예수님에 대해 모른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열려 있는 마음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에 대해 알고 있다는 생각, 바로 고정관념이 진리를 볼 수 있는 눈을 가리게 함을 묵상합니다.
열려 있는 마음이 없는 고향 사람들을 보시며 예수님께서는 그들한테 믿음이 없음에 놀라셨습니다.
이 대목을 묵상하며 우리에게 그런 열려 있는 마음, 진정한 믿음이 있는지 새삼 돌아봅니다.
중국의 선사 중에 아주 유명한 마조 도일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어린 나이에 출가하여 머리를 깎았고 구족계(具足戒)를 받아 스님이 되었지요.
어느 날 당대 유명한 스님인 회양(懷讓)스님을 만났는데,
회양스님은 도일 스님이 인물이라는 것을 한눈에 알아보고는 물으셨지요.
회양을 스승으로 하여 10년 간 수행을 한 후 스승을 떠나 강서로 가서 방장이 됩니다.
그 후 중국에서 가장 유명한 선사로 수많은 제자들을 두게 됩니다.
그는 이미 유명인사가 된 후 고향을 방문하게 됩니다.
고향 사람들은 자기 고향에서 오늘날 성철스님과 같은 유명한 스님이 나온 것이 자랑스러웠고 대대적인 환영을 합니다.
그런데 그의 이웃이었던 할머니 한분이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나는 대단한 인물이 온다고 이렇게 난리법석이 난 줄 알았더니
다름 아닌 쓰레기 청소부 마씨 아들 녀석이 왔구먼.”
이 말을 들은 마조 도일은 장난 반, 감상 반으로 즉흥시를 지었다고 합니다.
권커니 그대여,
고향일랑 가지 마소.
고향에선 누구도 성자일 수 없나니
개울가 옛 할머니
아직도 옛 이름만 부르누나!
깨달음을 얻은 선사이지만 마조 도일의 인간미가 엿보이는 게송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도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과 친척과 집안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고 말씀하시지요.
예언자나 성자가 고향에서 존경받지 못하는 것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마찬가지인가 봅니다.
왜 그럴까요?
그만큼 인간이 자기가 지니고 있는 선입관을 버리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 아닐까요?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하는데, 참 그게 쉽지 않아요.
우리가 무엇인가에 대해 이미 알고 있다는 생각이 진리를 보는 눈을 가리게 합니다.
저 사람은 쓰레기 청소부의 아들이고, 저 사람은 목수의 아들이라는 선입관이
마조 도일이 지닌 보리심(불교에서 진리를 보는 사랑의 마음)이나
예수님이 지닌 사랑의 마음을 보지 못하게 합니다.
고향 사람들이 믿지 않는 것에 놀라셨던 예수님의 마음을 헤아려 보며
내 마음 안에는 과연 새 술을 담을 새 부대를 마련하고 있는지 돌아봅니다.
우리가 사람이나 사물을 바르게 보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선입관을 버려야 하겠습니다.
진실은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니까요.
마음의 눈으로 보아야 할 터이니, 우리가 마음의 눈을 감지 않도록 늘 깨어 있어야 하겠지요.
조명연 마태오 신부
어느 간병인이 한 할머니를 10년 넘게 자신의 어머니처럼 간병을 했습니다.
이 할머니는 오랫동안 자신을 정성껏 돌봐준 간병인이 너무나 고마웠지요.
그래서 자신의 이름으로 된 주택 한 채와 땅이 있었는데,
땅은 자녀들에게 상속하고 이 주택은 간병인에게 증여하라는 유언장을 남겼습니다.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간병인과 자녀들은 모두 유언 내용에 깜짝 놀랐습니다.
특히 자녀들은 간병인이 할머니를 꼬드겨서 그런 유언장을 남긴 것이라면서 소송을 제기하게 됩니다.
이 과정에서 간병인은 큰 상처를 받았다고 합니다.
어떤 사실 여부 확인도 하지 않은 채 자신을 재산이나 탐내는
욕심 많은 사기꾼으로 몰아세우는 모습에서 크게 화도 나고 상처도 받은 것이지요.
그래서 자녀들이 너무 괘씸해서 법적 대응을 할까도 생각했지만,
할머니께서 좋아하시지 않을 것 같아서 욕심 부리지 않고 모두 자녀들에게 돌려주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후에 듣게 된 자녀들의 말과 행동에 더 큰 상처를 받았습니다.
캥기는 것이 있어서 재산을 포기한 것이라면서
자기들이 재빨리 소송을 걸지 않았으면 어머니 재산을 모두 날릴 뻔 했다면서,
10년 넘게 자신의 어머니를 보살펴 준 간병인을 사기꾼 취급을 하는 것입니다.
자신들이 해야 할 몫을 대신 해 준 간병인에 대한 고마운 마음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이 자녀들의 모습이 지금 현대인들의 일반적인 모습은 아닐까 싶습니다.
먼저 의심하고 단죄하고 봅니다. 그래서 부모의 감사하는 마음조차 남에게 절대로 줄 수 없다고 말합니다.
주님 곁으로 먼저 간 할머니께서는 이 모습에 어떤 마음이 드실까요?
그리고 주님께서는 이 모습을 어떻게 보실까요?
예수님 시대의 사람들 역시 이런 모습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회당에서 은총의 말씀을 하십니다.
그런데 몇몇 사람들은 “저 사람은 요셉의 아들이 아닌가?”(루카 4,22)라면서
색안경을 끼고 예수님을 바라봅니다.
이렇게 의심하고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편견을 보시면서
“어떠한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루카 4,24)라고 말씀하시지요.
그리고 실제로 많은 은총을 베풀지 않으십니다.
편견 없는 믿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만이 예수님의 은총을 얻을 수가 있었습니다.
편견 없는 믿음은 세상의 기준을 내세우는 곳에 있지 않습니다.
그보다 오늘 제2독서의 사도 바오로가 말하고 있듯이,
사랑의 마음을 통해서 편견 없는 믿음을 갖출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사랑이 없으면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1코린 13,2)라고 힘차게 말했던 것입니다.
세상의 물질적이고 세속적인 기준을 내세우는데 모든 힘을 기울여서는 안 됩니다.
그보다는 주님의 은총이 이 세상 한 가운데에서 이루어질 수 있도록 우리의 노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께서 진실로 원하셨던 좋은 사랑 가득한 하느님 나라가 완성될 수 있습니다.
사랑을 지니면 보인다
반영억 라파엘 신부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많이 사랑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시고 당신의 모든 것을 주십니다.
그러나 그릇을 준비하지 않으면 담을 수 없습니다.
이 시간 은총의 그릇을 준비할 수 있는 마음을 일으켜 주시길 기도합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에 대해서 좋게 말하며, 그분의 입에서 나오는 은총의 말씀에 놀라워하였습니다.
그러면서 “저 사람은 요셉의 아들이 아닌가?” 하고 말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의 메시지는 환영했지만 이 은총의 메시지를 가져오신 예수님은 배척하였다는 것을 말합니다.
다시 말하면
‘네가 좋은 얘기는 하였지만 구세주라는 것은 믿지 못하겠다.
네가 목수 요셉의 아들이고 가족관계나 환경을 보면 우리와 별로 특별한 것이 없고
너를 빤히 아는데 어찌 믿을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사람들은 예수님에 관해서 잘 안게 아니라 잘 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 생각이 눈을 가려 구세주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머리로, 지식으로 아는 게 병이었습니다.
믿음으로 확실히 알면 힘이요, 능력인 것을! 안다는 것이 걸림돌이었습니다.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본다는 것은 결코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어떤 과거에 대한 기억이 있으면 지금 앞에 있는 것을 제대로 볼 수 없습니다.
미래에 대한 기대가 너무 커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은 자기들에게 예수님께 얽힌 기억이 남아있어서 다른 것을 볼 수 없었습니다.
구세주는 '이러저러한 분으로 오셔야 된다'라는 고정된 생각이 있었기 때문에
구세주를 앞에 놓고도 구세주로 알아보지 못하였습니다. 정말 등잔 밑이 어두웠습니다.
우리의 삶에 있어서도 다르지 않습니다. “저 사람은 원래 그런 사람이야!”라고 얘기할 때가 있습니다.
우리가 사람을 판단합니다. 그러나 실제로 그 사람에 대해서 알면 얼마나 압니까?
그 사람에 대해 알지도 못하면서 안다고 생각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결코 내가 아는 게 다가 아닙니다.
더군다나 우리는 어떤 사람의 '좋은 점'보다도 허물을 잘 봅니다.
좋은 점은 작게 보고 허물은 아주 크게 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형제의 눈 속에 든 티는 보면서도 어째서 제 눈 속에 들어있는 들보는 보지 못하느냐?”(루카6,41)고 하셨습니다.
혹 내가 이웃에 대해 잘 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오히려 그의 본 모습을 제대로 보지 못하는 일은 없어야 하겠습니다.
자! 여러분, 무엇이 보입니까?
볼펜, 손, 좀 더 자세히 보면 검은 볼펜을 들고 있는 손, 검은색 153볼펜을 들고 있는 신부의 손…
잉크가 반 남아있는 검은 색 볼펜….
이렇게 우리는 겉으로 드러나 있는 극히 일부를 보고서 전체를 다 아는 양 말합니다.
모두를 다 담아서 표현할 수는 없습니다.
그럼에도 자기가 보고 싶은 만큼만 보고 다 본 것처럼 말합니다.
그러므로 내가 아는 게 다가 아니라는 것을 인정해야 하겠습니다.
잘 안다는 예수님께 대한 선입견이 결국에는 예수님을 구세주로 알아보지 못하게 하였고
더욱이 예수님을 고을 밖으로 내 몰았습니다. 벼랑으로 끌고 가 거기에서 떨어뜨리려고 하였습니다.
고향 사람들은 은총을 내박쳤습니다. 긍정적인 놀라운 말씀의 능력을 보고도 그랬습니다.
오늘 복음은 신앙생활을 하는데 있어서 잘못된 선입관이 얼마나 나쁜 영향을 미치는가 보여주는 좋은 예입니다.
사실 우리의 이웃, 남편과 아내, 자녀안에 긍정적인 장점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데 왜 그것을 못보고 허물에 대한 기억 때문에 상대를 거부해야 합니까? 긍
정적인 생각을 품으면 은총의 길이 열리는데 왜 부정적인 생각에 더 매달려야 하는지 안타깝습니다.
은총의 말씀에 놀라워하였으면 거기에 더 큰 마음을 두지
“저 사람은 요셉의 아들이 아닌가?”하는 소리를 왜 합니까?
잘못된 선입관, 시기와 질투, ‘너는 별 볼일 없는 사람이야!
내가 너보다 더 낫지.’하는 마음이 밑바닥에 깔려 있기 때문입니다. 교만이 은총을 멀어지게 합니다.
우리가 어떤 사람의 허물을 보게 되는 것은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그 사람의 부족함을 채워주라고 하느님께서 나를 선택하셔서 당신의 도구로 쓰시는 겁니다.
그런데 많은 경우 하느님께서 나를 뽑으셨다는 것은 잊은 채 허물을 이용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어떤 선입견에 묶이지 말고 하느님의 뜻을 헤아려야 하겠습니다.
'기쁨을 나누면 배가 되고, 슬픔을 나누면 반이된다.'고 했는데
요즘은 '기쁨을 나누면 시기, 질투가 되고, 슬픔을 나누면 약점이 된다.'하니 서글퍼집니다.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에게는 은총이 컸지만 담을 그릇을 준비하지 못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넘치는 은총을 부어주려 했지만 주지 못하고 결국 그곳을 떠나야 했습니다.
주님께서 은총을 주지 않으신 것이 아니라 그들이 거부한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주님은 은총으로 다가 오십니다.
무엇이 그 은총에 걸림돌이 되고 있는지 살펴보고 걸림돌을 제거하는 한 주간 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무엇보다도 사랑을 담은 긍정적인 생각과 눈으로 상대를 바라보는 가운데 은총의 그릇을 채우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면 보입니다. 상대의 선하고 아름다운 모습이 보입니다.
그러나 시기와 질투, 욕심이 생기면 부정적인 모습이 더 많이 보입니다.
혹 다른 사람의 부정적이 모습이 보이거들랑 그 부족함을 채워야 할 소명과 함께
내가 많이 사랑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자각하시기 바랍니다.
“사랑”은 참고 기다리며 친절하다고 하였습니다.
시기하지 않고 뽐내지 않으며 교만하거나 무례하지 않고 자기 이익을 추구하지 않으며
성을 내거나 앙심을 품지 않고 진실을 두고 함께 기뻐하며
모든 것을 덮어주고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고 모든 것을 견디어 낸다(코린 13,4-7).고 하였습니다.
사랑을 살기를 희망하며 노래를 불러드리는 것으로 정리하겠습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어떠한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할 받지 못한다.
한상우 바오로 신부
삶을
망가뜨리는
우리의 편견입니다.
서둘러 판단하는
선입견의
어설픈 도장 찍기를
이제는 멈추어야합니다.
단정과 규정
판단으로는
아름다운 사람을
결코 만날 수 없습니다.
섬기러 오신
예수님조차
선입견의 굴레에서는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죄인인 우리가
죄인을 판단하는
모순된 모습입니다.
모든 이들은
결코 우습게 볼 수 없는
하느님께서 빚으신
하느님의 소중한
자녀들입니다.
서로를 자유롭게 하는
우리들이길 기도드립니다.
그 누구도
우리가
규정지을 수는 없습니다.
하느님께서 하실
하느님의 가능성을
믿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 마음속에
판단 방지 턱이
필요한 시간입니다.
사람이 되어 오신
예수님을
기쁘게 맞아들이고 모시는
기쁜 주일 되십시오.
선입견 아니라
존중이며
거부가 아니라
함께하는 기쁨입니다.
미움 받을 용기가 없으면 발전할 수도 없다
전삼용 요셉 신부
우리나라 언어는 참으로 소통이 어려운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특별히 우리 종교 안에서도 이런 면이 잘 나타납니다.
우리나라 문화에서 미사 끝나고 부제가 주교님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나올 수 있을까요?
물론 그 부제가 좀 지나치게 격이 없는 부제이기는 하였으나
저는 이탈리아에서 그 장면을 목격하고 충격을 받았습니다.
우리나라는 신학교 한 학년만 차이나면 사제가 되어서도
여전히 선배에게 존경하는 말투와 행동을 보여야합니다.
신학생이 사제를 대하는 것, 사제가 주교를 대하는 것은 이루 말할 것도 없습니다.
그런데 저의 논문 지도 신부님은 신학생 때부터 주교관에 들어가 둘이 TV를 봤다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 사제가 되어보니 외국 사람들이 보여주는 모습과는 매우 큰 차이가 있었습니다.
신자분들이 제 앞에서도 어려워 말을 못 하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그러면서도 저도 이런 권위적인 문화에 젖어있어서 신자들에게 기분 나쁜 말을 들으면 발끈 할 때도 있었습니다.
종교에서도 이렇다면 사회에서는 더 할 것이란 생각이 듭니다.
이런 위계문화가 명령을 지시하면 따라야 하기 때문에
그 집단의 급격한 발전을 이루게 하는 데 유용하지만 어느 정도 수준에 오르면
창의력을 발휘할 수 없게 만들기 때문에 더 큰 발전을 위해서는 계속 유리할 수만은 없습니다.
창의력은 두려움을 모르는 이들에게서 발휘됩니다.
또한 권위주의가 협동에 장애를 일으켜 집단을 마비시키기도 합니다.
‘아웃 라이어’의 말콤 글래드웰은 이 지나친 위계질서 때문에 비행기까지 추락한다고 주장합니다.
비행기의 기장과 부기장 사이의 의사소통에 어려움을 겪는 나라들은
1. 브라질, 2. 한국, 3. 모로코, 4. 멕시코, 5. 필리핀 순위인데
이 순서대로 비행기 추락 사고가 많다는 것입니다.
그 일 예로 1997년 8월 5일, 괌에서 추락한 대한항공 여객기의 사례를 들고 있습니다.
블랙박스에서 수거한 기장과 부기장의 대화는 실로 추락하기 직전이라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차분합니다.
그 이유는 기장은 지쳐있었고 부기장은 기장의 권위가 두려워 감히 자신의 주장을 말하지 못한 데 있습니다.
부기장이 위급상황에서 다시 상승하겠다는 말을 하고 자신이 바로 대처했으면 사고가 일어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 긴박한 상황에서도 기장의 대답을 기다리는 몇 초 동안 이런 일이 발생하고 만 것입니다.
우리나라 언어구조 자체가 매우 권위적이어서 소통을 방해하고 그 결과 협업에 방해가 됩니다.
우리나라에는 복잡한 경어체계가 있는데,
아주 낮춤(해라), 예사 낮춤(하게), 예사 높임(하오), 아주 높임(하십시오) 등입니다.
제가 아는 언어들 안에서는 이런 경어체계는 찾아볼 수 없습니다.
대부분 일상적으로 쓰는 말과 사이가 어색하여 조금 높여주는 말 두 경어체계로만 되어있습니다.
심지어 하느님을 ‘너’라고 하며 기도합니다.
우리나라 말은 상당히 미묘해서 저 사람과의 관계가 어느 정도인지 먼저 살펴보고
너무 높여도 너무 낮춰도 안 되는 딱 적당한 경어 체를 선택해야합니다.
물론 말이 편해지면 그들만의 더 끈적한 세계가 열리기도 합니다.
그러나 어쨌든 권위적인 문화는 바뀔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언어학자 손호민 씨는 자신의 책에서 평사원 김씨와 과장 사이의 대화를 한 예시로 들었습니다.
이런 우회적인 화법이 외국 사람들에게는 매우 이상하게 들릴 수밖에 없습니다.
과장: 날씨도 으스스하고 출출하네. => 한잔 하러 가는 게 어때?
평사원: 한 잔 하시겠어요? => 제가 술을 사겠습니다.
과장: 괜찮아. 좀 참지 뭐. => 그 말을 한 번 더 해 주면 제안을 받아들이지.
평사원: 배고프실 텐데, 가시죠? => 저는 접대할 의향이 있습니다.
과장: 그럼 나갈까? => 말귀를 잘 알아듣네!
저는 요즘 잘 안 되지만 주교님께도 ‘요’를 붙이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사제가 연세 드신 분께는 ‘다’나 ‘까’를 붙여야하는데도
모르는 사람이나 대등한 관계에서 붙이는 ‘요’를 쓴다는 것은
참으로 버릇없는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제가 볼 때는 “이랬습니다. 저랬습니까?”라는 말을 쓰면서
친근하게 소통하기는 참으로 어려운 것 같습니다.
집에서 부모님께도 “이랬어요. 저랬어요.”라고 한다면
더 큰 가족이라고 부르는 교회에서는 왜 그렇게 하면 안 될까요?
여기까지 읽으시고 어떤 분들은 ‘저 신부는 우리나라 말을 사랑하지 않는군!’,
혹은 ‘어른들에게 반말 쓰는 버릇없는 신부 아니야?’라고 생각하실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저는 우리나라 말을 사랑하고 어르신들에게 반말을 쓰지도 않습니다.
다만 권위를 중요시하는 군대문화 때문에 비행기가 떨어진다는 말콤 글래드웰의 말에 동의하는 것뿐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혼자 이상한 소리 하면 오늘 복음말씀처럼
고향에서 미움을 받아야만 한다는 것도 함께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당신 고향에서 미움을 당하십니다.
분명 그들이 알기로는 목수의 아들인데 예수님은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주장하십니다.
이것이 예수님을 잘 아는 고향 사람들에게는 황당하게 들릴 수밖에 없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이스라엘에 많은 과부가 있었지만
하느님께서는 이방 시돈 지방의 과부에게만 엘리야 예언자를 보내셨다는 것,
이스라엘에는 많은 나병환자가 있었지만 오직 시리아 장군 나아만만 고쳐주셨다는 것을 예로 들면서
나자렛 사람들이 당신을 미워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십니다.
어떤 사람이 새로 태어나 혼자 특별하다고 한다면 “너만 잘났냐?”라고 하는 사람들이 생기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것이 새로 태어나는 이들이 겪어야 할 운명입니다.
교회는 하느님의 자녀로 새로 태어난 이들의 공동체입니다.
새로 태어나면 그동안 속해 있던 곳으로부터 미움을 받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교회에 박해를 약속하신 것입니다.
만약 누군가로부터 미움을 사지 않으려면 그들 속에 섞여 있으면 됩니다.
하지만 주님께서 특별한 사람으로 불러주셨다는 것을 믿으면 미움 받을 용기가 필요합니다.
예수님도 이렇게 고향에서 당당히 미움을 받으십니다.
한국의 반도 안 되는 인구의 유대인들이 왜 노벨상을 휩쓸고 있고
우리나라는 하나도 못 타내고 있는 것일까요?
유대인들은 어려서부터 성경을 읽으며 자신들은 선택받은 민족임을 믿습니다.
그래서 미움 받더라도 선택받은 민족으로 살아가려고 합니다.
또 탈무드를 공부하며 하부루타 식의 토론을 배우는 것도 특이합니다.
하부루타는 직위고하를 막론하고 같은 주제로 끝장 토론을 하는 공부방식입니다.
우리나라 100분 토론처럼 남의 의견을 뛰어넘으려는 것이 아니라
각자의 주장을 체계 있게 설명해 내면 그만입니다.
그 토론식의 공부 방식 자체에 의미를 두지 누가 옳은지 그른 지엔 관심이 없습니다.
이렇게 터놓고 소통하다보니 공부에 흥미를 느끼게 되고
자신이 선택받은 민족이기에 그 수준까지 공부를 밀고 가는 것입니다.
그러니 미국 유명 대학의 30%, 하버드 대학의 30%가 유대인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세상을 휩쓰는 것은 머리가 좋아서가 아닙니다.
평균 IQ는 유대인들보다 한국인이 더 높습니다. 다만 유대인들은 미움 받을 용기가 있도록 교육받습니다.
자신들은 선택받은 민족임을 성경공부를 통해 믿고, 또 자신의 의견을 제시해서
누구에게도 버릇없다고 미움 받아도 괜찮은 사람으로 성장하는 것입니다.
우리 교육도 그렇게 가야합니다.
우리나라가 예의에 몰두할 때 일본과 청나라로부터 어떤 치욕을 당했는지를 상기해야합니다.
말로만 소통이 되는 성당이 아닌 참으로 무슨 말이라도 할 수 있는 여건이 되어야 성당도 발전할 수 있습니다.
100분 토론이 아닌 하부루타 식으로 서로의 의견을 존중하며
나의 의견을 스스럼없이 제시할 수 있는 문화가 되어야 교회도 나라도
비행기처럼 떨어지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