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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광호 목사의 신학에 대한 개혁노회의 평가
[예수님 생애 마지막 7일]과 [구약 신학의 구속사적 이해]라는 책과 [ 에세이 산상수훈 ]이라는 책에 대한 독후감
1. [ 예수님 생애 마지막 7일 ] (도서출판 칼뱅: 서울: 2006)
16pdp 보면, “하나님께서 ‘그 여인의 후손’과 ‘사탄’ 사이에 엄청난 전쟁이 발생될 것을 예고하셨다”라고 되어 있다.
그래서 저자는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왕으로 입성하시고 고난을 받는 사건이 있기 이전에 이미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사탄에서 속한 악한 세력들이 심판을 받게 될 것이라고 예언되어 있었다”고 단정한다.
그렇다면 왜 미리 예수님이 오셔서 역사 초반에 사탄을 심판을 행하지 않는가? 즉 왜 그리스도께서 미리 당겨서 나중에 등장하는 마리아의 몸이 아니라 아예 하와의 몸을 빌려서 오셔서 사탄을 박살되지 않는 이유가 무엇인가?
그리고 더 나아가서 과연 예수님이 천상의 왕이라면 심판 행위없이 궁극적인 승리를 표현할 수는 없더란 말인가? 꼭 사단이라는 피조물을 갈구야만 했던가? 그냥 악은 악대로 놔둔 상태에서 일단 승리를 선포하고 그 다음에 그들을 지옥에 보내어 영원형벌을 받게 하면 안될까?
즉 영적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영적으로 영적인 악을 처리하면 될 문제를 왜 인간의 몸을 입는 번거러운 절차를 꼭 밟고 육의 수난이라는 거쳐서 승리됨을 선언해야 하는가? 그렇게 되면 이것은 순수한 이는 영적인 차원에서 해결 지운 승리가 아니라 육이라는 조건에 근거하는 승리이기에 육적인 승리가 되는 것이고, 이는 곧 영적 세계만으로서 승리요건이 충족되지 못한다는 어떤 결함 요소를 말해주는 것이 예가 아닐까?
이 두 가지 점 을 고려해 볼 때, 저자는, 창세기 3:15이라는 약속과 그 성취성이 왜 하나님에게 있어 꼭 필요했어야 하는지를 그 원인 규명을 포기하고 있다. 쉽게 말해서, 라면을 끓이면서 조리 방식을 소개하는 것과 왜 라면을 만들었는가 하는 원인과는 명백히 다르다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그러나 라면의 경우에는 라면을 만든 목적을 몰라도 가르쳐준 조리법에 따라 맛있게 먹으면 그만이지만 창세기 3:15의 경우는 그런 것이 아니다.
만약에 창세기 3:15의 제시되어야 될 이유를 모르는채 창세기 3:15의 약속에 의해서 예수라는 분이 오셨다 하는 것을 수용하면 비록 창세기 3:15과 예수와 연관성을 인지하는 바로 그 당시자라고 하더라도 여전히 악마에게 속한 사람일 수 있다는 중요한 사실을 가볍게 다루게 된다. 실제로 악마도 창세기 3;15에 약속된 그 인물이 예수님 인줄 명백하게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광야에서 예수님을 시험한 것이다.
이러한 우려할 만한 경우가 249p에 다음과 같이 나온다.
저자는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를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나로 하여금 인간의 육을 입고 십자가 지게 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라는 의미라고 해석한다. 이런 의문점이라면 이미 십자가 지기 이전 겟세마네 기도에서 해결 본 바다.
즉 저자의 주장에 따르면 예수님께서 비록 자신을 그렇게 의문을 표시하는 반문으로 외치더라도 실은 몰라서 새삼스럽게 묻는 외침이 아니라 듣는 사람들에게 자신이 하신 일을 알리기 위한 취지라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 매달려서 연기를 멋지게 하고 계신 것이다. 관중들을 의식하시면서, 그것도 7이라는 숫자를 염두에 두고서 말이다.
그러나 성경에 보면 조금도 이런 뜻이 아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라고 되어 있다. 이것은 버려져야 만 이유를 예수님께서 다른 사람과의 연관성 찾는 것이 아니라 자기 쪽에서 이미 갖고 있음을 아신다는 고백이다. 즉 이 광경은 자신과 아버지만의 세계이고 다른 인간들은 개입할 여지가 없다. 한 분은 버려야 할 분이요 다른 한 분은 버림받아야 당해야 될 분이다. ‘버림’이 없는 하나님의 일을 없다. 이것은 하나님과 예수님만의 세계이며 다른 피조물들로부터 철저하게 차단된 세계이다.
여기서 예수님께서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다. 그냥 버림받아야만 한다. 구원이고 뭐고 다 아버지의 몫으로 남는다. 고린도후서 13:4에서는 “그리스도께서 약하심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셨으나 오직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으셨으니 우리도 저의 안에서 약하나 너희를 향하여 하나님의 능력으로 저와 함께 살리라”라고 되어 있다.
이로서 인간들이 염두에 두고 있는 모든 구원역사는 하나님의 뜻과는 무관하고 그들만의 소박한 성경 해석이요 희망사항일 뿐이다. 하나님께서 죄인된 예수님을 버림으로서 인간에서 올라오는 모든 해석도 다 거부하시고 차단하시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에게 모든 것을 일임하셨다. (요 5:21-23) 하나님은 그 예수님을 자신의 약속에 준해서 다시 살리심으로써, 이제 주도권은 예수님이 쥐게 되었고 인간들에게 돌아갈 몫은 없게 되었다. 즉 ‘모든 인간의 배제’를 의미하는 것이다. 모든 신학의 배제를 뜻하는 것은 물론 당연한 결과이다. 성도가 되게하든, 구원을 시켜주든 이제 모든 것은 주님 자신이 원하는 자에게만 제공될 뿐이다.
인간은 이제 성경을 놓고서 예수님과 머리를 맞대어 같이 토론할 처지에 있는 것이 아니다. 즉 올바른 성경해석을 운운할 입장이 되지 못한다. 왜냐하면 올바른 신학으로도 구원이 되지를 못한다는 말이다. 아니, 아예 모든 인간은 구원받을 그 어떤 권리나 자격을 주장할 수 없게 되었다. 구원이 십자가의 능력으로만 된다는 고린도전서 1장의 말씀은, 인간의 의사를 배제하는 방식으로 구원이 전개된다는 뜻이다.
“이렇게해서 구원해 주겠다”는 말씀이 아니라 “이렇게해서 구원은 오직 십자가의 능력 뿐이단다”라는 것을 증거하는 식으로 구원이 이루어진다는 말이다. 즉 예수님께서 인간이란 상대방을 향하여 ‘그들이 간절히 원하고 있는 그 구원’을 이루어주시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구원의 의지만’만을 펼치는 증거물이 되도록만 그들을 부르시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미 인간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고 모두 죽은 자들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면 사람은 존재할 수 없고(일시적인 목숨은 계속 죽음 속으로 사라져야하고) 십자가의 능력만 활개치는 새로운 세계가 펼쳐지는 것이다.
당연히 ‘교회만들기, ’교회 됨‘, ’바른 교회 유지‘라는 아이디어 같은 것은 주님 앞에서 용납이 될 수 없는 사항이다. 왜냐하면 인간들이 성경을 참조해서 구상해 내는 교회라는 것은 너무나도 불필요한 짓이기 때문이다.
교회란 ‘그리스도의 현존’이라는 표현으로 마감된다. 왜냐하면 인간들이 구상하는 교회상이란, 인간이란 존재성에 기초해 있기에 존재로만 확인이 될 뿐이지만 그리스도의 현존은 오로지 사건으로 만개된 활동을 펼치시기 때문에 ‘인간들의 교회존재’를 위한 그 어떤 시도를 통해서도 포착되지 않고 만약에 붙잡는 순간, 곧장 교회라는 이름의 ‘신종 우상’으로 등장될 뿐이다.
카톨릭이 그러했고 개신교도 그러했다. 그들은 자신의 존재성에 기초해서 교회를 꾸리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다.
즉 그리스도의 현존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현존→‘성도’라는 이름의 존재→그들의 성경 지식을 참고로 하는 ‘교회 지탱하기’로 교회가 존립하는 줄로 안다.
왜 이런 견해를 갖는가 하면, 그들은 눈에 보이는 데로 판단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즉 참된 교회가 그리스도의 현존만으로 끝난다면 눈에 보이는 사람은 불필요하고 없어져야 한다고 믿고 싶어한다. 그러나 그들은 그리스도의 현존이 자기 백성들을 통해서 날마다 자신을 부인하는 방식으로, 즉 십자가에서 나오는 ‘배제하는 능력의 적용과 발휘’라는 방식으로 자기 사람을 관리한다는 그 의의를 거부하고 싶어한다.
따라서 그들(카톨릭과 개혁주의자들) 성경을 해석하기를 십자가로부터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 피조물의 존재성에서 출발해서 창세기 1장을 펼쳐놓고 역사를 새로 보고 조립하겠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들은 창세기 1장에서 인간 소멸과 지옥을 찾을 방도가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창세기 1장에는 아직 예수님이 개입한 흔적이 없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러니 십자가 사건의 의미를 집어넣으려니 창세기 3장에 와서나 가능하다고 믿고 있다.
그 전까지는 인간의 고유의 가치를 보존하는데 주력하고자 한다. 정리하면 인간이 죄를 짓기 전의 정황에서는 십자가가 개입될 수 없고 오직 예수님의 창조하심만 개입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십자가’를 예수님의 일생 가운데 일부에만 해당되고 곧장 예수님의 존재적 본질로 얼굴을 돌려야 한다는 것이다. 바로 이런 관점에서 예수님과 십자가를 이해하고 있고. 그 이해된 예수님의 관점으로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를 다 해석하려고 덤벼드는 것이다,
하지만 십자가 사건을 통해서 드러난 진실은 오직 이것 뿐이다. “십자가 외에 다른 하나님의 뜻은 없었다”라는 것이다. 이것은 “십자가 지신 분 외에 하나님에게 있어 인간이란 없다”는 말이다.
그런데 그들은 십자가를 이렇게 해석하는 것이 아니다. 다음과 같이 이해하고 있다. “우리 인간들이 하나님의 뜻을 제대로 몰라서 우물쭈물하고 있으니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을 보내사 우리의 미진한 것을 보충해서 제대로 하나님의 뜻을 이해할 수 있도록 적극 협조하셨다. 그래서 우리의 가치는 전에도 있었지만 지금에 와서 십자가를 통해 더욱 더 빛이 나는 모습으로 고유의 귀한 가치를 부여받았다”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쉽게 말해서
“우리의 존재성 자체가 원래 가치가 있는데, 우리 인간이 부족해서 하나님 영광에 이르지 못한 것을 안타까워하셔서 우리를 도움주려고 예수님을 보내셨다”는 것이다. 이미 거듭난 버린 성도에게 있어 더 이상 예수님의 십자가가 우리를 구원하는 능력이 아니라 그저 수시로 우리로 하여금 정신 차리게 하는 모범적 행위 같은 것이다“고 보는 것이다.
그들의 노골성을 다음과 같이 까발리면 이렇다.
사람들에게
하나님과 인간에 대해서 이야기하면 반가워한다.
그런데 '십자가'를 이야기하면 의아해 한다.
그것은 십자가에서 인간의 버림을 외면해 버리기 때문이다. 인간의 가치가 버려지지 않는
그런 십자가이기를 원하면서 바울 서신의 모든 십자가와 복음에 관련된 구절을 해석한다.
그러니까 어떻게되었든 인간 존재의 가치에 ‘버림의 정신’이 포함되지 않고 빠지는 양상으로
해석하려는 것이다.
이러한 인간들의 의도를 달리 묘사하면 이렇다.
즉 "예수야, 이제 내 앞에서 비켜서 한켠에 비켜 서 있어라.
내가 하나님의 뜻을 잘 실천하지 못할 때 다시 부르마
네 사랑과 네 뜻을 내가 이제 알았으니 이제 직접 내가 하나님에게 나서겠다.
앞으로는 하나님 앞에서, 사람답게, 성도답게 반듯하게 살아볼련다.
그러니 예수야.
제발 이제 십자가 가지고 그만 얼쩡거려라. 그것은 내가 불신자에서 신자 될 때 한번 적용했으면
그만이 아니냐. 이제 나도 너처럼 새사람되었단다.
하나님이 이제는 예수라는 너를 고대하는 것이 아니라 나 (새사람된 나)를 기다리고 고대한다.
그러니 이제 그만 십자가 이야기는 내 앞에서 사라져주었으면 좋겠다"
어쨌거나 건전한 내가 계속 존속해야지만 성경준수하기, 하나님 섬기기, 하나님 찬양하기가 성사된다고 우기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들의 주장에 의하면 복음의 능력이나 내용이란 새 사람되었다는 자신들의 지혜로 채워진다. 그리고 그들끼리 뭉쳐서 소위 ‘교회’라는 결사체를 꾸려가려고 한다.
그런데 성경대로 하면 진리란 예수님이시기에, 그 분이 살아있는 한 십자가에서 죽으신 분의 능력도
계속 살아있다. 왜냐하면 ‘버림’의 능력이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터져나오기 때문이다. 십자가란 마치 기계가 고장할 때 수리용으로 집어넣다 빼는 작동기계가 아니다.
도리어 십자가에서 쉬지 않고 계속 나오는 능력이란, 인간이고 뭐고 그들이 신봉하는 소위 삼위일체
신까지 지속적으로 박살내어버리는 그런 능력이다. 그리고 계속해서 십자가만 남는다. 왜냐하면 결국 그 십자가 사건에 의해서 수립된 천국과 지옥만 최종 남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세상이란 천국과 지옥으로 분류된 한시적 상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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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구약 신학의 구속사적의 이해] 도서출판 칼뱅(서울:2006)
p59에 보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일부 사람들에 대해 의도적으로 유기하신 것이 아니라고 이해해야 한다. 만일 하나님께서 창세 전부터 유기한 자들이 따로 있다고 한다면 이는 하나님이 죄의 조성자가 되는 난제에 직면하게 된다”라고 되어 있다.
즉 저자의 하나님에 대한 이해에 따르면, 하나님에게는 ‘의도적’으로 못하는 것이 있다는 것이다. 사람들을 지옥을 보내는 일에 대해서는 하나님도 ‘의도적일 수’는 없고 적극적 관여가 안된다는 것이다. 왜 이런 논리를 전개해느냐 하면 그 이유는 ‘하나님을 죄의 조성자로 만들지’ 않기 위해서란다.
즉 소위 성도라는 자들이 이번에서 하나님 구출작전에 나서는 것이다. 하나님을 ‘죄의 주동자’로 몰리는 것에 대해서 우리 성도들이 변호에 나서야 한다는 것이다.
이들은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들과 똑같은 ‘죄’ 개념을 갖고 있는 것처럼 착각하고 있다. 자신들이 극복하지 못하니 하나님도 자기네들처럼 빠져나올 수 없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요한복음 16:8에 보면, 성령님은 도리어 인간들의 그 잘못된 죄관을 공박하는 식으로 활동한다고 되어 있다. 그 근거는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이다.
“그러하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죄에 대하여라 함은 저희가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라고 되어 있다.
즉 십자가 사건이 빠진 예수님은 곧 인간들이 예상한 메시야에 해당된다. “설마 하나님을 말씀을 존중하는 우리보고 뭐라하시겠느냐”하는 식에 기준에서 죄와 의와 심판에 대해서 기준점이 수립되는데, 이러한 아이디어는 비단 유대인인 뿐만 아니라 모든 인간들의 보편성을 말해준다.
그런데 십자가 사건은 오로지 예수님이 행할 수 있고, 뿐만아니라 더 중요한 사실은 모든 이름으로 그 주님의 이름 앞에 무릎을 꿇리기 위한 사건이라는 것이다. 즉 “나도 예수님처럼 압니다”라고 할 자가 하나님 보시기에 전혀 없게 만드는 사건이 십자가 사건이다. (빌 2:9-11)
하나님의 영광이란 오직 주님의 이름 앞에 무릎을 꿇는 양상에서만 생겨난다. 그런데 신체적인 무릎 꿇기가 아닌 이유는 그것은 ‘신체’라는 존재성의 행위에 해당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십자가 사건의 ‘무릎 꿇기’란 존재하고 있는 신체에게 요구하는 바가 아니라 영적으로 벌리는 ‘사건’으로만 가능하다.
그런데 죄라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일방적으로 열심히 ‘지옥만들기’에 나서시는 그 활동을 마치 “예수님 활동을 그렇게 하시면 예수님께서 지옥만들기 위해 강제로 죄를 만드는 꼴이 되니 주의를 요합니다.”라고 주님이 일방적으로 하시는 일에 관여할 수 있다고 여기는 바로 그 건방진 태도가 곧 ‘죄’이다.
유대인들이 평소에 자신의 죄인이 아니라고 우겼고 사도 바울은 자신의 천하의 의인인줄 알았고, 부자 청년은 어릴 때부터 십계명을 다 지켰다고 여겼지만 요한복음 15:22의 말씀처럼 (“내가 와서 저희에게 말하지 아니하였더면 죄가 없었으려니와 지금은 그 죄를 핑계할 수 없느니라”)
예수님의 등장으로 말미암아 졸지에 인간의 건전한 이성과 건전한 의지와 건전한 감정(저자의 주장대로라면 ‘잠재된 하나님의 형상에서 회복된 그리스도의 형상’ p53) 자체가 곧 예수님을 죽이고 미워하는 죄가 되는 것이다.
인간들은 자기 존재를 기초로해서 거기에다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성을 부가하여 웅장한 신학 체계를 구축하고 보다 완벽한 기하기 위한 신학적인 반성과 발전을 도모해 왔었다. 이러한 시도에 대해 누구보다도 도사 중에 도사, 천재 중의 천재가 사도 바울이었으며 그는 철통같이 믿은 바는, 하나님 있고, 성경이 있고 창세기 3;15의 약속대로 메시야가 오신다면 그것으로 부족한 점이 결코 없기에, 무엇 때문에 하나님께서 십자가에 버림받는 나사렛 청년이 필요했겠느냐 하고 생각한 것이다.
따라서 그는 하나님에 대한 충절을 극단으로 더욱 더 밀어붙이기 위해 하나님의 이름으로 예수의 복음을 받아들이는 사람을 살해하고 체포했다. 그 천재라도 십자가의 ‘메시야 버려짐’을 도저히 이해 할 수 없었던 것이다.
바로 인간의 신학으로 알 수 없는 이런 죄악된 점을 오로지 십자가 사건으로만 근거해서 알려주기 위해 성령님을 활동하시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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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에세이 산상수훈 ] 칼빈아카데미(서울:2005) \
p221에 보면, 저자는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속에서 티를 빼리라(5절)
주님께서는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를 탓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이 본문에서는 형제의 눈 속에 있는 조그만 티도 제거되어야 함을 말씀하고 계신다. 그러나 그것을 제대로 빼내기 위해서는 자신의 시각이 말씀 안에서 올바르게 되어 있어야 함을 말씀하신다. 이것은 앞서 말한 권징 사역의 중요한 기초가 된다.“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런데 과연 형제의 눈속에서 티를 뺄 수 있는 목사가 누군가? 목사 개인인가 아니면 소위 당회라고 하는 장로 집단체인가? 그리고 그들의 눈의 티는 누가 빼는가?
그리고 일반 교인들에게는 말씀의 능력에 의해서 티가 빠지지 않고 소위 교회 중직들의 잔소리와 권징을 들어야지만 눈에 티가 빠지는가?
즉 일반 교인들은 바로 성령에 의해서 티가 빠지지 않고 소위 교회 고위층이란 단계를 거쳐야만 눈에서 티가 빠지도록 우리 주님께서 조직틀을 확정지어놓으셨는가?
목사 장로의 눈의 티는 하나님이 관리하고 일반 교인들은 그 목사의 관리의 관리를 받도록 그렇게 법적으로 명시해 있는가? 과연 하나님께서 바로 교인들의 눈의 티를 빼는 것이 아니라 그 작업을 하시 전에 먼저 당회라는 것을 소집해서 그들이 훈계에 의해 눈의 티가 빠지도록 하시는가?
저자가 이런 어처구니 없는 주장을 하게 되는 이유가, 바로 교회라는 것이 눈에 보이지 않는 주님의 십자가 피의 활동의 결과와 열매로 보지 않고, 성령의 열매를 맺히기 위한 중간 단계로 인간을 동업자 자격으로 직분을 주었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즉 소위 거듭난 자들의 은사 받은 솜씨를 어딘가를 써먹기 위해서 주님께서 은사를 주었다고 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교회에서의 은사란, 은사를 통해서 자기를 부인하라고 주신 은사이다. 즉 “제 능력으로 절대로 하지 않았습니다”라는 것을 고백하기 위한 은사이다.
“나은 사람이 베드로와 요한을 붙잡으니 모든 백성이 크게 놀라며 달려 나아가 솔로몬의 행각이라 칭하는 행각에 모이거늘 베드로가 이것을 보고 백성에게 말하되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일을 왜 기이히 여기느냐 우리 개인의 권능과 경건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한 것처럼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사도행전 3:11-12)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은 자라나게 하셨나니 그런즉 심는 이나 물 주는 이는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나게 하시는 하나님뿐이니라”(고전 3:6)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각양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 같이 서로 봉사하라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 같이 하고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의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 같이 하라 이는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니 그에게 영광과 권능이 세세에 무궁토록 있느니라 아멘”(벧전 4:10-11) 즉 주님으로부터 권징을 받지 않는 성도는 아예 성도가 아닌 것이다.
“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참 아들이 아니니라”(히 12:8)
“ 너희는 주께 받은 바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또 참되고 거짓이 없으니 너희를 가르치신 그대로 주 안에 거하라”(요한 일서 2:27)
교회 내에서 참된 치리와 권징이란 항상 결과적인 고백으로만 등장되는 것이 성령님의 사역이다.
즉 “우리가 치리하지 않았는데 주님께서 친히 치리하셔서 주님의 살아계심을 부인하는 그런 고백을 남기고 우리 곁을 떠나갔습니다”라는 식으로 말이다.
“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지라 어떤 이들이 이 양심을 버렸고 그 믿음에 관하여는 파선하였느니라 그 가운데 후메내오와 알렉산더가 있으니 내가 사단에게 내어준 것은 저희로 징계를 받아 훼방하지 말게 하려 함이니라”(딤전 1:19-20)
사실 누구나 이렇게 치리를 받을 수 밖에(사단에게 물려 지옥갈 수밖에 ) 없는 존재들인데 오로지 예수님의 기도 덕분에 (롬 8:34/히 7:25) 버티고 있는 것이다.
누가복음 22:31-32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단이 밀 까부르듯 하려고 너희를 청구하였으나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
결 론
‘행함’이 아니라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이 말 속에는, 인간들이 자기 구원에 대해서 그 어떤 개입도 할 수 없다는 뜻이 담겨 있다.
이것은 ‘안된다’라는 뜻이 아니라 오히려 반대로 ‘다 이루었다’라는 점을 증거하기 위함이다. 성도에게 있어 십자가에서 ‘다 이루심’이 정말이지 빈말이 아니라면, 참으로 구원받은 사람은 인간의 행함 속에서 여전히 그 어떤 ‘미흡함’에 메우려는 요소가 어떤 식으로 스며나오고 있느냐를 주목하게 된다.
하지만 가짜로 거듭남을 내세우는 사람은 다음과 같은 논리 구조를 여전히 고수하게 된다.
“정말 예수님께서 다 이루었다면 내가 하는 모든 행위가 신의 완벽한 진리라는 뜻일진데 하지만 아무리 봐도 나는 여전히 내가 보기에도 밉고 부족하고 미흡하다. 따라서 비록 예수님은 ‘다 이루셨다’고 위로의 말씀을 주셨지만 나는 그럴수록 겸손하고 정신 바짝차리고 성령님의 도움심으로 날마다 증진 또 증진해서 나에게서 나오는 미흡함을 개선, 보완해서 날로 훌륭한 인격자,(즉 그리스도의 새사람, 새형상을 본받는 것) 나가는 것이 주님께서 원하시는 바다.
성경 말씀은 폼으로 있는 게 아니고 또한 비록 율법은 끝났지만 율법의 의미는 남아 있으니 -십일조도 꼬박꼬박 내고 [예수님 생애 마지막 7일 p132]- 거룩한 주일도 성수하고 [예수님 생애 마지막 7일 p283] - 율법의 요구하는 바를 달성하면 (구약 성도들이 성령 못받아서 못한 것)비로소 하나님 영광이 될 것이다”라고 믿게 된다.
그러니까 가짜 성도는 늘 미흡함에 시달린다. 이것은 시간 의식과 역사 의식의 틀 위에서 성경을 해석한 유대교의 시작의 연속성 상에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진짜 성도의 고백은 다음과 같다.
“나는 미흡하고 날마다 죄를 짓는데 왜 주님은 ‘다 이루었다’고 하셨을까? 아아, 내가 버티고 있는 이 육체와 세상 전체가 다 에덴동산에서 추방된 이후 흙으로 되돌아갈 무가치한 것이기 때문에 그 품고 있는 죄악성이 날마다 더욱 풍성하게 뿜어져나오기 때문이구나. 즉 주님께서는 오로지 십자가 중심으로만 일하시는 이유는, 주님의 죽으심 앞에서 살고자한다든지 구원받고자 하는 그런 의지 밑바탕에 이미 악마의 세력이 자리잡고 있음을 ‘나’라는 인간을 통해 들추어내어 구원받는 자로 하여금 날마다 주님의 이름 앞에 자기 이름을 부정하기 위한 조치였구나, 그리고 평생 이 상태로 가겠구나”라는 고백이다.
바라기는 저자가 근원적으로 십자가에서 다시 시작하기를 바란다. 거기에서 시간조차 박살내버리고 오로지 시간을 초월한 십자가의 묵시적 능력을 마지막 재림 이전에 미리 맛보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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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의 비평은 특정인을 모독하는데 목표점을 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을 기본적으로 어떤 관점에서 보아야 복음적으로 합당한 가를 이광호 목사님의 책을 통해서 알리고자 하는 취지입니다. 이광호 목사님의 책에는 분명히 기존 교회에서 주장하는 해석의 잘못된 바에 대해서 공박하는 해석이 책 세 권 전편에 걸쳐 흐르고 넘치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성경을 해석하면서 예수 그리스도 중심으로 봐야지 윤리도 도덕으로 봐서는 아니된다는 대목이라든지 ('에세이 산상수훈'에서) 그리고 "모든 율법의 의미는 그것이 어떤 형태이건 완벽하게 예수 그리스도와 연관지어야 한다"고 [에세이 산상수훈 p78]에서 언급한 것이라든지
또한 인간의 행함의 구원 능력을 부인한 것이든지(예수님 생애의 마지막 7일)그리고 성전의 의미를 건물에 두어서는 아니된다든지 하는 겁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기존의 교회들의 성경 해석과 얼마나 차이나며 얼마나 멀리 있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기존 교회에만 악마가 들아와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항상 우리 자신이 예수님을 미워하고 싫어하고 죽이고 싶을 정도로 적개심이 수시로 움터는 중심지로 얼마든지 악마가 사용할 수 있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즉 예수님이 말씀하신 십자가 복음이 얼마나 유사성을 지니고 있느냐 하는 점입니다. 기존 교회의 문제점을 낱낱이 반박한다고해서 복음을 증거하고 있다고 봐서는 안된다는 겁니다.
제가 비평한 글에도 나와있듯이 예수님께서 창세기 3:15과 메시야의 도래를 연결시킨다는 사실은 악마도 알고 있는 사항입니다. 그렇다면 참으로 행함이 아니라 믿음에서 믿음에 이르는 모습을 보일려면 뭔가 늘 자신을 부인해야만 하는데 '자기 부인'을 가능케 하는 기준점이 과연 십자가 복음이냐 아니면 십자가 복음 외에 다른 것을 갖다놓았느냐 하는 점을 저는 주의 깊게 관찰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성경 본문 해석에서 십자가를 발췌되지 않는 해석들로 일관하고 있기 때문에 이런 의심을 갖지 않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에세이 산상수훈] p231에서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라는 대목을 해석하시면서, 성령님을 받은 교회에게 순종의 삶을 요구하고 있는 것임을 잘 기억해야 한다"라고 해석했습니다.
그러나 이 성경 본문의 의미는, 우리가 순종을 할 때만 말씀이 비로소 성취되고 순종을 안하면 이 말씀은 성취될 수 없다는 의미가 아니라 이미 이 말씀의 성취가 성령님의 활동 안에 포함되어 있음을 믿으라는 것입니다. 즉 "대접하라는대로 그대로 될지어다!"라고 믿지 않을 수 밖에 없는 영역 속에 교회에 놓여있음을 인정하라는 의미입니다. 이것은 바로, 자기 기준에 맞춘 대접의 기준이 결코 이 말씀 적용과 상관없음이 파악되는 계기로 작용하기도 합니다.)
제가보기에 그분에게 있어 '날마다 자기 부인'이 성립할 수 있는 근거가 십자가 복음이 아니라 다른게 자리잡고 있다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교회의 거룩함'입니다. (에세이 산상수훈 p102)
즉 "주님의 도움의 도우심 없이는 영원히 멸망에 이를 수 밖에 없다"고 이광호 목사님이 누누이 언급하시지만(에세이 산상수훈 p100) 사실 목적하는 바는 인간 자신들이 만족할만한 (혹은 구원이 이르렀다고 스스로 안심놓고 확인할 수 있는 수준까지) 거룩성을 유지하고 증진시키기 위함입니다.
이 논리는 [구약신학의 구속사 이해]라는 책의 '하나님 형상'에 관한 이론에서 잘 나와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이 현 인간에게 완전히 깨어진 것이 아니라 잠재적인 관계성으로 남아있다가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회복된다는 이 형상 이론은 중세 카톨릭에서 확정된 ' 하나님 형상론'이며 루터나 칼빈이 그냥 그대로 차용한 '하나님의 형상론'입니다.
이 이론은 믿음에서 믿음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인간들의 이성에서 나오는 기본적 '자기 반성 행함 기능'의 일반 본성을, 거듭난 자만이 지니고 있는 '회복된 그리스도의 형상'의 본성으로 유지시킨 것에 해당되는 겁니다.
이 형상론의 문제점은, 십지가 복음의 단절(버림받음)의 능력이 전혀 스며들 자리가 없다는 겁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론대로, 잠재태에서 현실태로 등장된 것은 결코 미진함에서 제대로됨으로 구체화된 것 뿐입니다.
그런데 이광호 목사님의 십자가 의의란 바로 이 '하나님의 형상' 회복을 최종 목표점을 삼는 중간 기착의 의미만 지니기에 지속적인 '자기 부인'의 근거로서 십자가 복음의 의의는 탈락되고 만 겁니다.
즉 "왜 제대로 하나님 형상을 회복 안해"라고 다구치면서 자기 부인을 촉구하려는 신학을 품고 있어도 "왜 십자가 복음을 안 믿어!"라는 식으로는 자기 부인을 촉구할 수는 없는 그런 신학을 여전히 갖고 계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분에게 있어 "저 십자가 복음을 받아드렸으니 앞으로 더욱 더 잘해 볼께요(산상수훈처럼 남을 더 잘 대접할께요)"라는 말에 성립이 되어도
"그렇습니다. 제가 또 살아났군요"라는 고백을 성립될 수 없는 겁니다.
믿음이란 갈라디아서 2:20처럼 "나는 날마다 죽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살려내고 있음"에 대한 고백을 뜻합니다. 주님께서 어떤 근거를 기초로 우리를 날마다 살려낼까요? 오직 말씀을 통해서 뿜어져 나오는 십자가 능력 뿐입니다.
즉 늘 말씀 본문을 가지고 우리의 주님의 대한 미움과 적개심을 지적하시면서(이 적개심은 '나도 얼쭈 성경 말씀을 최선을 다하여 잘 지키고 있는데 시-"에서 나오는 적대심입니다.) 오로지 주님의 피의 공로 만을 증거케 합니다. 우리 성도가 피 흘리지 않는데 분명하지 않습니까?
끝으로 당부하고 싶은 것은 유월절날 무시무시한 하나님의 지시만 따르는 심판의 천사가 오직 '양의 피만' 보고서 그냥 넘어간 것입니다. 신학을 하든 목회를 하든 성경을 공부하고 아무리 오랫동안 교회를 봉사했든지 간에 그것으로 심판의 저주가 넘어가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피, 오직 그 보혈의 피 뿐입니다. 그것만 우리 마음에 남아있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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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 신학의 구속사적의 이해]
p59에 보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일부 사람들에 대해 의도적으로 유기하신 것이 아니라고 이해해야 한다. 만일 하나님께서 창세 전부터 유기한 자들이 따로 있다고 한다면 이는 하나님이 죄의 조성자가 되는 난제에 직면하게 된다”라고 되어 있다. 즉 저자의 하나님에 대한 이해에 따르면, 하나님에게는 ‘의도적’으로 못하는 것이 있다는 것이다. 사람들을 지옥을 보내는 일에 대해서는 하나님도 ‘의도적일 수’는 없고 적극적 관여가 안된다는 것이다. 왜 이런 논리를 전개해느냐 하면 그 이유는 ‘하나님을 죄의 조성자로 만들지’ 않기 위해서란다.
이광호 목사님의 주장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선택하신 것은 분명하지만.... 유기는 하나님의 작정에 의한 것이 아니라 사탄의 작품이라는 것 입니다. 위의 내용이 다른 것이 아니라 같은 내용이랍니다. 바로 님께서 말씀하신 그 문제를 지적한 것이예요.
저희 십자가 마을이나 이근호님의 주장은 이미 영원 전부터 택자와 불택자, 긍휼을 베풀자와 긍휼히 여김을 받지 못할 자, 야곱과 에서, 토기장이에게 귀히 쓸 그릇과 천하게 쓰일 그릇, 이미 정해져 버렸다는 것이예요. 좀더 쉽게 이야기 해서 천국 갈자와 지옥 갈자가 아예 처음부터 하나님의 작품이라는 것이지요.
이는 이광호 목사님의 주장하신 내용은 기존 대부분의 신학에서 동일하게 주장하는 바로서 저희들과 조금 다른 것이 아니라 아예 출발 자체가 다르다 할 수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근호가 이단이고, 십자가 마을이 이단이라고 하는 것이랍니다. 설령 같은 언약이라는 말을 쓰고, 같은 작정이라는 단어를 쓰고, 같은 십자가를 사용한다고 해도 저희들이 사용하는 의미와는 전혀 다르다는 것이예요.
이러한 글들은 종교개혁 이후(물론 그 이전에도 마찬가지이만) 신학이 어두움 속으로 빠져 버리게 하는데 결정적인 것이고, 그로 인하여 여러가지 신조들을 중심으로 하는 바른 교회 세우기로 나가면서
그리스도의 십자가 중심 안에서 펼쳐지는 이 세상 역사를 인간들이 빌어서 복받고, 바쳐서 복받고, 착한 일을 해서 복을 받으려는 중세 로마교회로의 회귀하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광호 목사님의 아래의 글들이 앞뒤 문맥을 설령 빼고 더하고 할지라도 주장하시는 바가 아닌 다른 내용을 이근호님께서 발췌를 해서 한 것도 아니고 이렇게 주장을 하고 있는 것이 비단 이광호 목사님의 글들 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신학교에서, 또는 신학자들이 주장하시는 내용들이라 생각합니다.
십자가는 궁극적인 것!
그 어떤 사람도 하나님께서 영광된다고 받아준 적이 없다. 아브라함도, 모세도, 특히 아담도 궁극적이지 않는다. 하나님은 자신의 아들 예수님을 궁극적인 인물로 받아줌으로써 이는 곧 예수님의 행하심 외에서 그 어떤 하나님의 뜻을 찾는 것을 거부하심을 분명히 하셨다.
그런데 예수님은 십자가 사건을 통해서 자신의 전부를 말씀하셨다. "다 이루었다"고. 그렇다면 이러한 궁극성을 궁극성으로 증거하는 것이 주의 종의 할 일이다. 성경의 모든 밑바닥에서 "십자가만이 궁극적입니다"라고 고백이 나와야 마땅하다. '하나남의 형상'도 아니다! '하나님과의 사귐'도 아니다! '삼위일체론'도 아니다! '하나님 영광'도 아니다! 왜냐하면 이 모든 주장에는 인간이 개입되며, 그 인간에서 나온 나름대로의 추상적인 신(神)과 한 세트로 짝이 되어 담겨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곧 자기를 하나님의 일에 집어넣기 위한 의미 찾기에 필요한 사건과 사건을 유발하게 된다.
그러나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사건은 오로지 하나님과 예수님과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유발된 '십자가 사건' 뿐이며 그 십자가 사건은 그 어떤 인간도 배제되어 있다.(가롯 유다만 배제된 것이 아니다) 예수님의 단독 범행(?)이다.
결코 추상적인 신으로부터 출발할 사항이 아니다. 신을 버리고 십자가 사건로부터 시작이 되어야 한다.
만약에 십자가 사건으로부터 출발하지 아니하면 인간이 아무리 노력하고 철학자들이 아무리 노력해도
바리새인과 사도개인을 못 따라가고, 결코 사도가 되기 전의 바울의 현학적인 지식을 따라 잡을 수가 없다.
누가 감히 '바리새인보다 더 나은 의를 만들 수가 있는가!'그들은 한결같이 "하나님의 영광!"을 외쳤던 사람이고 거기에 맞추어 우주를 그려냈던 자들이다. 오늘날 이슬람교 사람들도 이에 못지 않다. 그들은 알라신을 지키기 위해 모든 일생을 건 자들이다.
그러나 정말 주님의 사도인 사도 바울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어리석은 갈라디아 사람들아, 십자가가 눈 앞에 보이거늘 누가 꾀더냐!"(갈 3;1)
따라서 심판권도 주님만이 독점해 있으며 구원권도 그 분만이 독점해 있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예수님의 십자가 공로만을 증거할 수 있는 성경해석이 나오지 않는다면 결국 십자가 외에 다른 것을 자기만의 궁극적인 것으로 따로 챙기고 있다고 의심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심판주 되시는 예수님은 훤히 알고 계실 것이다.
출처:십자가 마을/이근호목사/정판옥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