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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至道無難(지도무난) 唯嫌揀擇(유혐간택)
2. 但莫憎愛(단막증애) 洞然明白(통연명백)
3. 毫釐有差(호리유차) 天地懸隔(천지현격)
4. 欲得現前(욕득현전) 莫存順逆(막존순역)
5. 違順相爭(위순상쟁) 是爲心病(시위심병)
6. 不識玄旨(불식현지) 徒勞念情(도로염정)
7. 圓同太虛(원동태허) 無欠無餘(무흠무여)
8. 良由取捨(양유취사) 所以不如(소이불여)
9. 莫逐有緣(막축유연) 勿住空忍(물주공인)
10.一種平懷(일종평회)泯然自盡(민연자진)
11.止動歸止(지동귀지)止更彌動(지갱미동)
12.唯滯兩邊(유체양변)寧知一種(영지일종)
13.一種不通(일종불통)兩處失功(양처실공)
14.遣有沒有(견유몰유)從空背空(종공배공)
15.多言多慮(다언다려)轉不相應(전불상응)
16.絶言絶慮(절언절려)無處不通(무처불통)
17.歸根得旨(귀근득지)隨照失宗(수조실종)
18.須臾返照(수유반조)勝却前空(승각전공)
19.前空轉變(전공전변)皆由妄見(개유망견)
20.不用求眞(불용구진)唯須息見(유수식견)
21.二見不住(이견부주)愼莫追尋(신막추심)
22.纔有是非(재유시비)紛然失心(분연실심)
23.二由一有(이유일유)一亦莫守(일역막수)
24.一心不生(일심불생)萬法無咎(만법무구)
25.無咎無法(무구무법)不生不心(불생불심)
26.能隨境滅(능수경멸)境逐能沈(경축능침)
27.境由能境(경유능경)能由境能(능유경능)
28.欲知兩段(욕지양단)元是一空(원시일공)
29.一空同兩(일공동양)齊含萬象(제함만상)
30.不見精麤(불견정추)寧有偏黨(영유편당)
31.大道體寬(대도체관無易無難(무이무난)
32.小見狐疑(소견호의)轉急轉遲(전급전지)
33.執之失道(집지실도)必入邪路(필입사로)
34.放之自然(방지자연)體無去住(체무거주)
35.任性合道(임성합도)逍遙絶惱(소요절뇌)
36.繫念乖眞(계념괴진)昏沈不好(혼침불호)
37.不好勞神(불호노신)何用疎親(하용소친)
38.欲趣一乘(욕취일승)勿惡六塵(물오육진)
39.六塵不惡(육진불오)還同正覺(환동정각)
40.智者無爲(지자무위)愚人自縛(우인자박)
41.法無異法(법무이법)妄自愛着(망자애착)
42.將心用心(장심용심)豈非大錯(기비대착)
43.迷生寂亂(미생적란)悟無好惡(오무호오)
44.一切二邊(일체이변)良由斟酌(양유짐작)
45.夢幻空華(몽환공화)何勞把捉(하로파착)
46.得失是非(득실시비)一時放却(일시방각)
47.眼若不睡(안약불수)諸夢自除(제몽자제)
48.心若不異(심약불이)萬法一如(만법일여)
49.一如體玄(일여체현)兀爾忘緣(올이망연)
50.萬法齊觀(만법제관)歸復自然(귀복자연)
51.泯其所以(민기소이)不可方比(불가방비)
52.止動無動(지동무동)動止無止(동지무지)
53.兩旣不成(양기불성)一何有爾(일하유이)
54.究境窮極(구경궁극)不存軌則(부존궤칙)
55.契心平等(계심평등)所作俱息(소작구식)
56.狐疑淨盡(호의정진)正信調直(정신조직)
57.一切不留(일체불유)無可記憶(무가기억)
58.虛明自照(허명자조)不勞心力(불노심력)
59.非思量處(비사량처)識情難測(식정난측)
60.眞如法界(진여법계)無他無自(무타무자)
61.要急相應(요급상응)唯言不二(유언불이)
62.不二皆同(불이개동)無不包容(무불포용)
63.十方智者(시방지자)皆入此宗(개입차종)
64.宗非促延(종비촉연)一念萬年(일념만년)
65.無在不在(무재부재)十方目前(십방목전)
66.極小同大(극소동대)忘絶境界(망절경계)
67.極大同小(극대동소)不見邊表(불견변표)
68.有卽是無(유즉시무)無卽是有(무즉시유)
69.若不如此(약불여차)必不須守(필불수수)
70.一卽一切(일즉일체)一切卽一(일체즉일)
71.但能如是(단능여시)何慮不畢(하려불필)
72.信心不二(신심불이)不二信心(불이신심)
73.言語道斷(언어도단)非去來今(비거래금)
釋解篇(석해편)- 풀어쓰기편
信心銘(신심명)은 중국의 禪宗祖(선종조) 3祖인 승찬조사님의 말씀이다.
信心銘의 뜻은 마음에 깊이 아로새길 믿음이란 말이다.
승찬조사님은 대풍질을 앓으며 삶이란 것에대한 큰 懷疑感(회의감)으로 한때
내가 전생에 무슨 죄가 많아 이런 몹쓸 병에 걸렸을꼬 하며 落心(낙심)하고 挫折(좌절)하여 彷徨(방황)하는 나날의 삶을 살았다고 한다.
대풍질이란 요즘말로 하면 한센병이다.
한센병이란 癩病(나병)으로 문둥이병을 말한다.
몸의 피부가 문드러져 진물이 나고 그러다 살점이 점점 썩어 문드러지는 그런 병이다.
주위의 모든 사람들은 승찬조사를 보기만 하면 다들 화들짝 놀란듯이 피해 버렸고 더러운 벌래라도 씹은 얼굴처럼 싫은 기색들이 역력히 드러나 보였다.
나를 사람으로 나게 하시고 이제 이렇게 문둥병을 앓게 하신 것도 조물자께서 필연코 무슨 뜻이 있어 하시는 일일 것이다라고 곰곰히 생각한끝에 그 당시 도통하신 걸로 장안에 파다하게 소문이 나있던 2조 혜가조사님을 찾아가게 되었고 끝내는 혜가조사님 문하의 불제자로 입문하여 진리를 닦는 도반으로 정진하다가 혜가조사님의 인가로 중국 선종조의 3조로 법맥을 전수 받으신 분이다.
1.至道無難(지도무난) 唯嫌揀澤(유혐간택)이라 하여
道(도)에 이르는 것이 어려운 것이 아닌즉슨
이렇게나 또는 저렇게 내 마음에 들고 아니고에 따라 가리고 택하는 것을 오로지 싫어하는 마음만 탁트이면 도가 그렇게 어려운 것이 아니라는 말씀이다.
我執(아집)에 붙잡힌 自我(자아)에 끄달리지 말고 그 붙잡힘을 탁 놓아버려 나란 자아가 없어져버리면 참인 도에 드는 것이 어려운 일이 아니라는 말이다.
가리고 택한다는 것은 무슨 말인가 하면
自我자아)라는 잣대를 가지고서 모든 是非曲直(시비곡직)과 善惡美醜(선악미추)와愛憎好惡(애증호오)와 高低長短廣狹(고저장단광협)등 시시콜콜 이리재고 저리 재어가며 저 마음에 들고 안들고에 따라 천갈래 만갈래로 갈라내어 고르고 택한다는 것이다.
어떤이는 至道無難 唯嫌揀擇을 풀기를
지극한 도는 어려움이 없어 오직 가리고 택함을 싫어할뿐이라고 한 것도 있는데 그럴듯 해 보이지만 원저자 승찬조사님의 하시고자 하는 말씀의 본뜻 하고는 잘못된 풀이라 감히 말하고싶다.
도면 그냥 도 그 자체인 것이지 도에 무슨 지극한 도가 있고 지극하지 못한 어정쩡한 도가 여럿 있다는 것처럼 괴이하게 인식되기 때문이다.
道란 한마디로 絶對眞理(절대진리)의 當體(당체)를 말하는 것이요 영원한 생명의 本源(본원)을 말하는 것이다.
해서 기독교에서는 이 것 도를 절대자 하나님 이라고 했고
석가붓다님은 이것 도를 佛性.또는 法(다르마)이라 했고
儒敎(유교)에서는 이 것 도를 天生於德予(천생어덕여)라 하여 德이라 했다.
老子와 莊子는 한마디로 道라고 하였다.
요한복음 14장 6절 말씀에 있기를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道)이요 眞理(진리)요 生命(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는 말씀이 있다.
예수님은 진리와 생명보다 먼저 길(道)을 말씀의 맨앞에 두셔 말씀 하셨다.
이 말씀에서 내가라는 것을 몸뚱이 예수로 알아 들으면 잘못 알아듣는 것이 되는데 기존의 기독교인들은 여기서의 내가를 몸예수로 알아 듣다보니 예수님을 하나님 자리로 올려놓는 잘못을 저지르고 만 것이다.
예수님을 하나님의 자리로 올려놓는데서부터 기독교는 잘못되기 시작한 단초라고 할 수있다 하겠다.
몸의 예수님은 우리처럼 밥먹고 똥누던 사람이었지 그 몸뚱이 예수가 목수 요셉의 아들로 사람의 아들이었지 하나님이 아니지 않았던가
예수님은 자기는 하나님이 아니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분명하게 말씀 하셨다.
여기서 말하는 내가란 말은 몸뚱이로서의 예수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성령으로 거듭나 새사람으로서의 하나님(도) 성령의 권능을 덧입은 얼사람으로서의 영적 예수를 말하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 성령으로 온전히 거듭 나기만 하면(본래면목을 회복하면) 예수뿐 아니라 누구나 곧 길이 되고 진리가 되고 영원한 생명의 본원에 들 수 있다는 말씀이다.
길. 진리.생명. 이 것은 한마디로 도를 세가지 말씀으로 풀어놓으신 같은 말씀이라 하겠다.
2.但莫憎愛(단막증애)洞然明白(통연명백)이라 하여
미워하고(싫어하고) 사랑하고(좋아하고) 하는 두 마음을 내지않아 이리 쏠리고 저리 쏠리는 죽끓듯 변덕부리는 마음에 경계가 오로지 없어진다면 도에 이르는 길이 환하게 통하여 밝아 보일 것이다라 하였다.
3.毫釐有差(호리유차) 天地懸隔(천지현격)이라 하여
여기에서 터럭끝 만큼의 다름만 있어도 하늘과 땅사이처럼 요원하게 벌어져 버리는 것이라 도의 냄새도 맡을 수 없다고 하였다.
4.欲得現前(욕득현전) 莫存順逆(막존순역)이라 하여
내 생전에 道에 이르기를 바란다면 도에 순응하고 거슬림을 두지 말아야 한다고 했다.
順應(순응)하고 거슬림을 두어서는 안된다는 말은 老子 道德經(노자 도덕경)
말씀인 爲無爲(위무위)처럼 함없이 하라는 말이다.
本來面目(본래면목)인얼심(靈心)에 좇아 양심에 거슬리지 않게 순응 할 것이지 作爲的(작위적)인 꾸밈을 하지 말라는 말이다.
내가 무엇을 한다거나 했다거나 하는 내란 생각을 내지 말고 하라는 것이다.
내가 작아지고 작아져서 끝내는 나란 我像(아상)이 온전히 없어져 無我가 되라는 말이다.
성경 마태복음 6장 3절 말씀에 있기를
「너는 救濟(구제) 할 때에 오른손의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 」는 말씀도 표현만 다른 것이지 같은 脈絡(맥락)의 말씀이다.
오른손도 왼손도 다 내 몸의 한 枝體(지체)요
다 같은 나의 일부요 또한 하나인데
왼손 오른손이 서로 모르게 한다는 말은 語不成說(어불성설)의 말 아닌 말 이라 할 수 있는데 말도 안되는 이 말을 예수님이 했을 적엔 결국엔 나란 생각 없이 할 것이고 구태어 선행이니 구제니 하고 갈라내어 생각지 말라는 말씀이 아니겠는가.
남의 눈을 의식하고 하는 선행은 털끝만한 선행을 하고서도 자기가 먼저 이런 큰 선행을 내가 했노라고 사람들 앞에서 왕나팔을 불어대는 것이 보통이다.
佛經(불경)말씀에 施惠不念 受恩不忘(시혜불념 수은불망)이란 말씀처럼
누군가에게 작은 은혜라도 베푼 일이 있으면 내가 베풀었다는 생각을 아예 하지 말고 자꾸 내 생각속에 그 것을 떠올리지 말 것이며
누군가로부터 은혜를 입은 일이 있으면 그 은혜가 비록 작더라도 은혜갚기를
잊지 말아야 한다는 것도 같은 含意(함의)의 말씀이다.
5.違順相爭(위순상쟁) 是爲心病(시위심병)이라 하여
어기고 순응함이 서로 티각태각 하면 이 것이 바로 마음을 병들게 한다고 했다.
마음 한편으론 본래면목인 얼심의 良심(양심)을 좇아 하늘 우러러 한점 부끄럼없이 살아야지 옳고 반듯하게 사는 것이지 하면서도 또 한마음은 그래서 당장 내게 득되는게 뭔데 하며 정 반대되는 마음이 불뚝 치밀어 나오는게 사람의 심사라 하겠다.
6.不識玄旨(불식현지) 徒勞念靜(도로염정)이라 하여
깊고 현묘한 뜻을 모르니 생각을 고요하게 하여 평상심으로 살고자 해도 한갖 애쓰고 힘씀일뿐이로다 하였다.
도에 이르러 도를 행하고 살고 싶어도 도에 이르는 현묘한 뜻을 모르니까 생각 생각이 한갖 헛된 수고로움일뿐 도에 다가가는 것이 요원키만 하다는 말이다.
7.圓同太虛(원동태허) 無欠無餘(무흠무여)라 하여
道란 것이 圓滿(원만) 하기가 테두리 없이 無限(무한)한 宇宙空(우주공)의 빔과 같아서 모자람도 남음도 없으니 했다.
8.良由取捨(양유취사) 所以不如(소이불여)라 하여
眞實(진실)로 取(가짐)하고 捨(버림)하는 揀擇心(간택심)으로 말미암는 탓에 그와 같지 않다는 것이라 했다.
사람들이 저마다 제각각 자기 마음의 알량한 잣대로 이리재고 저리재며 재단 하여 버리고 취하는 분별심으로 思量分別(사량분별) 하는 까닭으로 圓同太虛(원동태허)하고 無欠無餘(무흠무여)한 道의 境地(경지)에 들 수 없다는 말씀이다.
9.莫逐有緣(막축유연) 勿住空忍(물주공인)이라 하여
因緣(인연) 있음도 좇지말고 인연 없음에도 머물지 말라 하였다.
이런저런 緣由(연유=일의 실마리)가 있음에도 일일이 졸졸 좇지도 말 것이며
空忍에도 머물지 말라 했는데
여기서 空忍(공인)이란 것에서 忍字(인자)를 破字(파자)해 보면 刃(칼날인)이 心(마음심)위에 있는 글자로 마음이 칼날 밑에 놓여 있다는 글자다.
마음이 칼날처럼 極度(극도)로 銳利(예리)하게 시퍼렇도록 날이 서 있다는 말인데 이 것은 自我(자아)가 꼬장꼬장하게 살아 있다는 것이다.
애써 참아 보려고 하지만 그게 잘 안된다는 것이다.
해서 마음을 칼날처럼 벼루는 공연한 일에 마음 머물지 말라는 말이다.
10.一種平懷(일종평회 泯然自盡(민연자진)이라 하여
온전한 하나(道)를 마음에 바르게 품으면 물에 씻겨 없어지듯이 有緣(유연=인연 있음)을 좇는 마음도 空忍(공인=부질없는 마음씀)에 머무는 마음도 저절로 다하여 없어 진다는 말씀이다.
11.止動歸止(지동귀지) 止更彌動(지갱미동)이라 하여
움직임을 그쳐 그침에 돌아가면 그친듯 하던 것이 다시 더욱 움직인다고 했다.
心亂(심란)한 마음의 움직임을 作爲的(작위적)으로 그쳐 고요히 평상심에 안정코자 해도 無爲(무위)가 아닌 作爲(작위)로 억지로 그쳐보았자
暫時(잠시) 그친듯 하지만 다시 처음보다 더 움직여 마음이 혼란에 빠진다는 말이다.
12.唯滯兩邊(유체양변) 寧知一種(영지일종)이라 하여
오로지 양변인 둘(상대)에 막힘이니 어찌 알겠는가 온통의 하나가 절대의 道임을 말이다.
13.一種不通(일종불통) 兩處失功(양처실공)이라 하여
온통의 하나인 道(절대진리)에 通(통)하고 뚫리어 道와 하나가 되지 못하면
모든 것(兩處인 相對世界)에서 나름데로 이루어낸 功能(공능)이 다 잃어져
참 의미가 없다는 말씀이다.
14.遣有沒有(견유몰유) 從空背空(종공배공)이라 하여
있음을 보내면 있음이란 것에 빠지게되고 그렇다고 空(빔)을 좇으면 빔을 등짝에 짐진듯이 더욱 짐지게 된다고 하였다.
있음(有)에 執着(집착)하던 마음을 애써 떨쳐내 보려고 아둥바둥 애쓰고 생각 할 수록 더욱더 있음이란 것에 수렁에 빨려들어가듯 빠져들게 되고 그렇다고 빔인 없음(無)을 좇고자 해도 생각만 그럴뿐 오히려 빔에 얽매인 생각이란 것에 묶여 버린다는 것이다.
있음인 有에도, 없음인 空에도, 兩邊(양변)에 걸림이 없고 ,있다 없다는 개념에서 자유로워 져야만 온통인 하나(道)에 뚫려 通할 수 있다는 말씀이다.
15.多言多慮(다언다려) 轉不相應(전불상응)이라 하여
말이 많고 생각이 많을 수록 더욱 道와 하나로 서로 應(응)하지 못하게 된다 하였다.
我執(아집=자아에 집착함)에 붙잡혀 金剛石(금강석)처럼 自我(자아)가 굳어진 사람은 自我爲主(자아위주)의 잣대로 이리저리 재고 생각이 많으면 많을 수록 온통인 道와는 점점 거리가 天地差異(천지차이)로 멀어진다는 것이다.
無我가 되도록 나를 버리고 끊어내고 喪我(상아=나란 생각이 죽음)가 되어 單純(단순)해져야만 道에 相應(상응) 할 수 있다는 말씀이다.
16.絶言絶慮(절언절려) 無處不通(무처불통)이라 하여
말이 끊어지고 생각이 끊어지면 通(통)하지 못할 곳이 없다 하였다.
自我(자아)의 알량한 잣대로 뭘 안답시고 촐삭거리며 하던 많은 말들이 다 끊어져버리고 이런 저런 생각의 실타래들이 자아라는 실통에서 툭 끊어져버리고 나면
나라고 우쭐대며 아집으로 내세우던 나란 자아가 온전히 끊어져 無我가 되니 나로인해 걸림이 되었던 모든 境界(경계))들이 다 툭 트여지니 通하지 못할 곳이 없다는 말씀이다.
17.歸根得旨(귀근득지) 隨照失宗(수조실종)이라 하여
根本(근본)인 本來面目(본래면목)에 돌아가면 마루뜻(宗旨)을 얻음이요
비추임을 따르면 根本宗旨(근본종지)인 마루꼭대기(宗) 성품을 잃어버린다 하였다.
根本(근본)인 天稟(천품)의 本來面目(본래면목)을 回復(회복)하면 참뜻인 참 성품으로 돌아가는 것이지만
근본인 본래면목을 따르질 않고 본래면목의 무늬뿐인 비추임을 따르게 되면
근본 성품인 참(道)을 잃어버린다는 말씀이다.
18.須臾返照(수유반조) 勝却前空(승각전공)이라 하여
비록 잠깐이나마 비췸을 돌이키면 이전의 空함보다 나으리라 하였다.
비추임으로 드러나는 것은 근본실체가 아닌 근본실체의 무늬인 虛像(허상)에 지나지 않듯이 이런 무늬에 끄달리는 생각을 잠깐이나마 일순간 돌이키면 무늬에 끄달렸던 지난 생각들의 공허함 보다는 낫다는 말씀이다.
19.前空轉變(전공전변) 皆由妄見(개유망견)이라 하여
이전의 空함이 계속 이런저런 貌樣(모양)의 생각으로 변하여 궁그르는 것은
모두다 요망한 견해로 말미암은 것이라 하였다.
본래면목이 아닌 본래면목의 무늬만 좇던 이전의 공허한 생각들이 이렇게나 저렇게 그때 그때 다른 樣像(양상)의 생각으로 끊임없이 變(변)하는 것은 모두다 自我(자아)에 執着(집착)한 나머지 자아가 갖고 있는 잣대로 인해 派生(파생)되어지는 요망한 견해임을 밝히고 있는 말씀이다.
20.不用求眞(불용구진) 唯須息見(유수식견)이라 하여
참인 道를 求하려 하질말고 오로지 모름지기 자아의 소견을 쉬라고 했다.
본래면목 자체가 온통의 도인 참(眞理)으로 내 속에 있는 것이니 求(구)할 것이 없고 구한다는 생각 자체가 틀렸다는 것이다.
붓다님의 말씀에 모든 衆生(중생)이 다 부처 아닌 것이 없다고 하신 말씀이 바로 이 말이 아닌가.
孟子(맹자)님이 말씀 하신 人人之有貴於己者不思耳(인인지유귀어기자불사이)라 하여 사람 사람이 다 자기속에 귀한 것(본래면목의 참=하나님의 얼성품)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 걸 모르고 따로 진리를 찾아 다닌다고 하신 것도 같은 脈絡(맥락)의 말씀이다.
보통 道를 닦는다고 修道(수도)라고 하고 道를 求한다고 하여 求道(구도)라고 하는데 이런 말 자체가 옳지 않다는 말이다.
珍珠(진주)조가비가 자기 속에 진주를 품고 있으면서 내가 진주를 만들어야지 하고 생각 하는 것과 같다는 말이다.
오로지 모름지기 자아의 잘못된 생각의 실타래들을 근원에서 끊어 도무지 나란 것이 없는 無我가 되면 된다는 것이다.
21.二見不住(이견부주) 愼莫追尋(신막추심)이라 하여
상대성인 두 견해의 양변에 머물지 말고 삼가 생각을 좇아 찾지 말라 하였다.
마음에서 奔忙(분망)하게 끊임없이 일어나는 이런저런 雜多(잡다)한 생각에 붙잡히지도 말고 자기 생각이 옳다고 여겨 찾고 좇는 것을 삼가하여 그치라는 말씀이다.
22.纔有是非(재유시비) 紛然失心(분연실심)이라 하여
옳다 그르다는 是非曲直(시비곡직)의 생각이 막 내 생각속에 있기 시작하면 가루가 흩날리는 것처럼 본래면목인 참성품 마음을 잃어버린다는 말씀이다.
옳네 그르네 굽었네 바르네 하며 경계를 짓는 분별심이 생겼다는 것은 자아심이 여물어졌다는 말로 이렇게 자아가 꼬장꼬장하게 살아나게 되면 날때 받은 天稟(천품)의 本來面目(본래면목)의 성품이 가루가 바람결에 흩날리듯이 자아라는 놈의 잣대아래 본래면목심이 무색해져버려 본디 자기 속에 있는 참인 道를 두고도 그 걸 찾아다니는 망령된 마음으로 떨어져버린다는 말씀이다.
23.二由一有(이유일유) 一亦莫守(일역막수)라 하여
하나로 말미암아 둘이 있음이니 하나마저 또한 지킬 수 없다고 하였다.
相對界(상대계)에 붙잡혀 思量分別(사량분별) 하는 境界(경계)에도 머물지 말고 온통의 하나인 道란 생각에도 붙잡혀 마음을 내어 머물지 말라는 말씀이다.
이 것이 道라고 말해버리면 그 것은 벌써 道가 아니란 말이다.
老子(노자)님 道德經(도덕경)에 있기를
道可道非常道(도가도 비상도) 名可名非常名(명가명 비상명)이라 하여
말로 할 수 있는 도는 늘 그러한 절대의 道가 아니고 이름 지어진 이름은 늘 그러하게 변함없는 이름이 아니라 하였듯이
道란 말로 설명되어질 성질의 것이 아니란 말이며 이 것이 道라고 이름 지어지면 이미 그 것은 도가 아니란 말이다.
24.一心不生(일심불생) 萬法無咎(만법무구)라 하여
한 마음도 일으켜 生心하지 않으면 宇宙法界(우주법계)의 모든 만법이 다 허물이 없다 하였다.
自我心(자아심)이 칼날같이 살아 있어서 한 생각도 일으키지 않아 꼬장꼬장하여 미주알 고주알 하던 자아가 팍 고꾸라져 忘我(망아)가 되어 죽어 버리면 마음이 식은재처럼 죽어지는 것이니 한 생각도 일으켜 비추어 낼 수 없는 것이고 그리되면 無我(무아)가 되니 모든 만법의 이치에 通(통)하여 確然(확연)히 뚫리는 것이니 허물이 있을래야 있을 수 없다는 말씀이다.
25.無咎無法(무구무법) 不生不心(불생불심)이라 하여
허물이 없으면 법도 없고 마음이 없으면 마음 생함도 없다 하였다.
허물이 있고 없음은 다 自我心(자아심)이 내노라 하고 살아 있어서 是非. 善惡. 美醜. 好惡(시비.선악.미추.호오)등을 分別(분별)짓는 마음에 놀아나고 四端七情(사단칠정)에 끄달려서 그러는 것이지
自我(자아)가 죽어 없어지면 無我(무아)가 되니 너니 나니 이 것이니 저 것이니 하는 彼此(피차)의 분별심이 없어지므로 마음이 滅(멸)하여 없어지는 것이고 마음이 없어지니 마음 生함도 없다는 말씀이다.
26.能隨境滅(능수경멸) 境逐能沈(경축능침)이라 하여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境界(경계)를 따라서 滅(멸)하고 境界(경계)는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能(능)을 좇아서 빠지는 것이라 했다.
能(능)은 自我中心(자아중심)의 主觀的(주관적)인 生覺(생각)을 말하고 境(경)은 客觀的(객관적)인 생각을 말하는 것으로서
주관적인 自我(자아)중심의 생각응 나 아닌 다른 객관적인 경계에 따라서 滅(멸)하여지는 것이고
객관적인 경계를 자아의 주관적인 생각을 좇게하면 같이 휘둘려 자아의 주관적인 생각에 빠져 沈沒(침몰)되어버린다는 말씀이다.
27.境由能境(경유능경) 能由境能(능유경능)이라 하여
客觀的(객관적)인 생각은 主觀的(주관적)인 생각을 말미암은 客觀(객관)이고
主觀的(주관적)인 생각은 客觀的(객관적)인 생각을 緣由(연유)로 한 主觀(주관)이라 하였다.
主觀(주관)과 客觀(객관)은 彼我(피아)의 생각 觀點(관점)을 말하는 것으로 동전의 양면과 같은 兩面性(양면성)의 相對性(상대성)을 말하는 것이다.
28.欲知兩段(욕지양단) 元是一空(원시일공)이라 하여
두 갈래로 갈라지는 兩(양)갈림을 알고자 하면 본디 이 것은 하나로 다 빔 그 자체인 것이니라 하였다.
自我(자아)의 我執(아집)에 붙잡혀 極端的(극단적)으로 主觀(주관)에 치우쳐서 잘 모르는 것이지
자아가 터엉 비어 식은재처럼 되고 나면 본디 宇宙萬法(우주만법)이 천만갈래인 것 같으나 실은 다 하나 같이 空(공)인 빔 자체
온통의 하나인 道란 것이란 말씀이다.
29.一空同兩(일공동양) 齊含萬象(제함만상)이라 하여
온통인 하나의 빔인 絶對空(절대공)은 둘과 같아 삼라만상의 무한 우주 전체를 가지런히 다 포함하여 품고 있다고 하였다.
이 말이 무슨 말인고 하면 절대빔인 온통의 하나(道=空)는 테두리 없는 無限(무한)의 빔(空)으로 상대세계인 有限世界(유한세계)가 다 그 온통의 빔속에 內包(내포)되어 있다는 말씀이다.
30.不見精麤(불견정추) 寧有偏黨(영유편당)이라 하여
純一(순일)하여 깨끗한 全一(전일)함과 거칠음을 나누어 보지않는다면 어찌 이쪽 저쪽으로 갈라지는 편당이 있겠는가 하였다.
純粹齊一(순수제일)하여 한쪽에 치우치지않는 마음도 보지않고
精細(정세)하지 못하여 거칠고 소홀함으로 대강대강으로 넘어가는 마음도 보질않고 두 양단의 마음에 걸려 놀아나지 않는다면 어찌 彼我(피아)의 나눔으로 편당이 있고 분별이 있겠는가라는 말씀이다.
31.大道體寬(대도체관) 無易無難(무이무난)이라 하여
큰道는 본디 온통으로 너그러움 그 자체라서 쉬운 것도 아니고 어려운 것도 아니라 하였다.
쉽다 어렵다 이 것이다 저 것이다 하는 것은 자아의 잣대에서 나온 것일뿐이지 자아가 滅(멸)하고 나면 본래면목의 나 자신이 바로 大道(대도)의 성품 그 자체라서 쉽다 어렵다라는 분별의 思量槪念(사량개념) 자체가 있을 수 없다는 말씀이다.
32.小見狐疑(소견호의) 轉急轉遲(전급전지)라 하여
의심 많은 여우처럼 작은 견해에 끄달리면 의심하는 마음이 급할 수록 더욱 道를 이루는 일은 더디어진다고 하였다.
작은 견해란 다름아닌 자아에 붙잡힌 사슬시퍼런 자아심을 말 하는 것으로 그 자아심에 취해서 갖는 견해란 것이 저만 넓고 옳다고 하지 사실은 바늘 구멍으로 온통의 우주를 보겠다는 거나 같은 억지임을 모르는 것이란 말씀이다.
33.執之失道(집지실도) 必入邪路(필입사로)라 하여
너무 집착 하게 되면 법도를 잃게 되어 필연코 삿된 길로 들게된다고 하였 다.
자아심으로 집착하여 我執(아집)에 갇히게되면 大道의 中을 잃어버려 필연코 삿된 길에 들어 헤메게 되고 그렇게 되면 道와는 漸漸(점점) 遙遠(요원)하게 되어 멀어진다는 말씀이다.
34.方之自然(방지자연) 體無去住(체무거주)라 하여
놓아버리면 저절로 그러한 본디 理法(이법)인 것 이라서
본디 이법인 道의 當體(당체)엔 가고 머무른다는 것이 본디 없음이라 하였다.
自我(자아)에 執着(집착)하여 我執(아집)에 갇혀 붙잡혔던 마음을 놓아버리기만 하면 本來面目(본래면목)인 淸精心(청정심)으로 回復(회복)될 것 이고
본래면목은 태어날때 하늘로부터 받은 天稟(천품)으로
온통으로 하나인 道(도)의 당체인지라 오고 가고 머무르고 잡고 놓고가 본디 없는 것이라
다 저절로 그러한 理法(이법)이란 말씀이다.
35.任性合道(임성합도) 逍遙絶惱(소요절뇌)라 하여
본래면목으로 받은 天稟(천품)인 性(성)에 맡기면 온통인 道(도)에 合(합)하고 맞아서 천만갈래의 모든 煩惱種子(번뇌종자)가 끊어지고 逍遙自在(소요자재) 하여 근원적인 대자유에 들 것이라 했다.
본래면목의 性(성)이 하늘로부터 받아나온 천품의 性(성)인지라 온통인 道(도=하나님 조물자)의 성품과 하나이므로 스스로 그러하게 合一(합일)이 되는 것인 까닭으로 自我(자아)의 我執(아집)으로 思量分別(사량분별)하기 때문에 갈라지는 천만갈래의 모든 煩惱(번뇌)를 일으키는 생각의 실타래들이 저절로 끊어져 아무 것에도 걸림이 없이 自由自在(자유자재)하는 逍遙(소요)의 본디 모습으로 돌아 갈 수 있다는 말씀이다.
36.繫念乖眞(계념괴진) 昏沈不好(혼침불호)라 하여
自我(자아)의 생각에 얽혀 매이면 참인 道(도=절대진리)와 어그러지므로 어둡고 어지러운 생각으로 빠져들게 되고 그리되면 좋지않다라고 하였다.
억만갈래로 갈라지는 생각의 실타래에 자아가 빠져들게 되면 참인 道(도)와는 이미 하늘과 땅차이로 懸隔(현격)하게 멀어져버린 것으로서 道(도)에 이르고자 하나 이를 수 없다는 말씀이다.
37.不好勞神(불호노신) 何用疎親(하용소친)이라 하여
정신을 수고롭게 하는 것은 좋지않은 것으로서 어찌 疎遠(소원)하고 親狎(친압)함을 쓰겠는가 라고 하였다.
자아의 잣대로 사량분별하는 천만갈래의 생각으로 정신을 消耗(소모)하는 것은 다 헛된 妄想(망상)의 그림자 같은 것들이라 본래면목인 道(도)에 어긋나는 것으로서
어찌 내 잣대에 어그러진다고 싫어하여 멀리하며 소원해지는 것과
내 잣대에 맞는다고 걸림없이 가깝고 좋아하여 친해지는 것을 가르고 분별하여 道(도)를 닦는데 쓰겠는가 라는 말씀이다.
내 잣대에 어그러진다고 싫어해서 멀리하고 미워하고 비난하고 토라지고
내 잣대에 합한다고 좋아하고 해해거리며 가까워진다는 것은
다 자아란 아집에 붙잡힌 잘못된 인식에서 그런 것이지 이런 좋다 싫다라고 하는 二分法的思考(이분법적 사고)인 兩端(양단)의 妄念(망념)에 붙잡혀 쓸데없이 情神(정신)을 消耗(소모)하는 것은 그림자를 잡겠다는 일처럼 다 헛된짓이란 말씀이다.
38.欲趣一乘(욕취일승) 勿惡六塵(물오육진)이라 하여
一乘(일승)에 나아가고자 하면 六塵(육진=여섯가지 티끌)을 싫어하지 말라 하였다.
여기서 一乘(일승)이란 깨달음을 이룰 수 있는 온통의 하나인 唯一(유일)의 道(도)를 말하는 것으로서
이 온통의 하나인 道(도)에 나아가 道(도)와 하나가 되고자 하면 六塵(육진)을 싫어하지 말라 했는데
六塵(육진)이란 여섯가지의 알음알이인 六識(육식)의 色.聲.香.味.觸.法(색.성.향.미.촉.법)을 말하는 것으로 六賊(육적)이라고 하여 道(도)를 못이루게 본래면목을 도적질 해 가는 여섯가지의 도적이라고도 한다.
이 六識(육식)으로 因(인)하여 生心(생심)하여 마음이 불길처럼 일어나는 여섯가지의 欲情(욕정)을 말하는 것인데 이런 六識(육식)으로 인한 自然發生的(자연발생적)인 生心(생심)을 억지로 싫어 할 것도 없고
作爲的(작위적)으로 그 것에 耽溺(탐닉)하여 좋아 할 것도 없다는 말씀이다.
39.六塵不惡(육진불오) 還同正覺(환동정각)이라 하여
六塵(육진)을 싫어 함이 없으면 또한 바른 깨달음과 같다 하였다.
作爲的(작위적)으로 싫어하는 마음이 없어 順理(순리)에 거스름이 없다면
바른 깨달음과 같다 하였다.
한마디로 싫다. 좋다 하고 分別(분별)하는 마음으로 모든 것을 兩端(양단)의 생각으로 나누질 않고 이 兩端(양단)의 생각을 넘어서서 온통의 하나로 還元(환원)된다면 바로 無爲無我(무위무아)의 本來面目(본래면목)이 되어 바른 正覺(정각)의 제자리로 回復(회복)된다는 말씀이다.
40.智者無爲(지자무위) 愚人自縛(우인자박)이라 하여
智慧(지혜)로운 사람은 무엇을 해도 내가 한다는 마음이 없이 하지만 어리석은 愚人(우인)은 그렇질 못하고 내가 한다는 나란 생각에 捕虜(포로)가 되어 하기 때문에 자기 생각에 스스로 자기가 갇혀 묶인다고 하였다.
爲無爲(위무위)란 말은 해도 함이 없이 한다는 말이다.
智者無爲(지자무위)에서 실은 智者(지자)와 無字(무자) 사이에 爲字(위자)가 省略(생략)된 말이다.
自我(자아)가 온전히 죽어 나라고 내세우던 나란 놈의 잣대가 없어지고 나면 彼此(피차)란 分別(분별)과 나눔이 없어지니
이 것이다 저 것이다 하는 분별의 境界(경계)가 없어지는 것이라 무엇을 하던지 저절로 다 通(통)하는 것이니 우직 내가 한다는 마음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질 못하고 꼬장꼬장하게 자아가 드세게 설쳐대는 마음에선 모든 걸 자아란 잣대로 가늠하고 견줘보고 判斷(판단)하고 取捨(취사)하는 까닭으로 마치 바늘 구멍으로 온 우주를 다 보겠다는 것마냥 어리석은 일이란 말씀이다.
41.法無異法(법무이법) 妄自愛着(망자애착)이라 하여
法(법=절대진리)은 오로지 하나로 다른 법이 없는데 요망하게 스스로 애착하여라고 하였다.
道(도=절대진리)는 온통의 하나로 唯一無二(유일무이)한 不二(불이)의 絶對眞理(절대진리)인 것인데
공연히 자아란 마음에 迷惑(미혹)하여 붙잡히고 애착하다보니 오로지 自我中心(자아중심)의 妄靈(망령)된 생각에 끄달려 이리저리 휘둘리다보니
自我(자아)의 我執(아집)으로 자기만의 고치집을 틀게되어 참인 道(도)와는 遙遠(요원)해지게 된다는 말씀이다.
42.將心用心(장심용심) 豈非大錯(기비대착)이라 하여
마음으로 마음을 쓰니 어찌 크게 어긋나는 것이 아니겠는가 하였다.
여기서 마음이란 自我(자아)가 중심이된 마음을 말하는 것으로
이런 自我(자아)에 沒入(몰입)한 마음으로 자기 고치속에서 아무리 마음을 써본들 자신이 지어놓은 思想(사상)의 틀인 그 고치를 뚫고 道(도)의 세계로 나올 수가 없으니 道(도)에서 크게 어긋나는 것이란 말씀이다.
43.迷生寂亂(미생적란) 悟無好惡(오무호오)라 하여
迷惑(미혹)되면 고요함과 혼란한 어지러움이 생기지만 깨닫고나면 좋다 싫다 함이 없다 하였다.
한 마음이라도 生心(생심)하여 迷惑(미혹)된다면
금방 안정되어 고요해지는가 싶다가도 混亂(혼란)한 마음이 파도처럼 덮쳐와서 엉킨 실타래처럼 뒤죽박죽으로 만들어버려 近原的(근원적)인 고요함에 들 수 없게 하지만
깨닫고보면 나란 마음이 없어지므로 지금껏 兩端(양단)의 생각으로 思量分別(사량분별)하던 境界(경계)로 좋다. 싫다하던 槪念(개념)이 다 사라져 버리고 根原的(근원적)인 寂滅空(적멸공)인 本來面目(본래면목)의 자리로 돌아온다는 말씀이다.
44.一切二邊(일체이변) 良由斟酌(양유짐작)이라 하여
一切兩邊(일체양변)의 思惟(사유)는 眞實(진실)로 斟酌(짐작)함을 말미암음 이로다 하였다.
苦(고=괴로움)다. 樂(락=즐거움)이다. 是(시=옳다)다. 비(비=옳지않다)다.
彼(피=저것)다. 此(차=이 것)다. 美(미=아름답다)다 醜(추=더럽다)다.
好(호=좋다)다. 惡(오=싫다)다.得(득=얻다)이다. 失(실=잃다)이다.하는 이런 兩端(양단)의 思惟(사유)는 다 自我心(자아심)에 中心(중심)을 둔 마음에서 비롯되는 것으로 自我(자아)의 好惡(호오)에 따라 미루어 斟酌(짐작)하는 我執(아집)에서 말미암는 것이니 妄靈(망령)된 自我心(자아심)을 殺心(살심)하여 마음을 죽여 없에는 것이 옳다는 말씀이다.
그런데 殺心(살심)은 아니하고 殺身(살신=자살)을 식은 죽 먹듯 해치우는 뭇 群像(군상)들이 안타까울 따름이다.
45.夢幻空華(몽환공화) 何勞把捉(하로파착)이라 하여
꿈같고 환상같고 허공에 핀 꽃같이 헛것인 것을 어찌하여 힘들여 잡으려 하는가 하였다.
虛空(허공)에 손바닥을 펴서 한웅큼 오므려 힘껏 주먹을 쥐어 잡아 보지만 손아에 잡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듯이
잡긴 분명 잡았는데 잡힌 것이 없는 것이 허공의 빔이 아니던가
허공의 빔이 있음으로 인해
限時的(한시적)으로 存在(존재)하는 모든 생명체의 假存(가존=거짓 존재)들이
그 빔을 잡아 보겠다는 發想(발상)자체가 虛妄(허망)한 헛된 일인 것을.....
絶對眞理(절대진리)인 道(도=하나님)의 理法(이법)을 먼지 입자(알갱이)같은 내 자아의 잣대로 천만갈래의 생각을 일으켜 곤두박질 쳐본들 다 헛되고 無常(무상)한 것으로
결국은 부처님 손바닥위를 활개치며 뛰어 다닌 손오공과 같다는 말씀이다.
46.得失是非(득실시비) 一時放却(일시방각)이라 하여
얻고 잃음. 옳고 그르다를 일시에 놓아버려라 하였다.
얻었다고 헤헤거리며 좋아하는 마음도.
잃었다고 샐쭉해져 싫어하는 어두운 마음도.
이 것이 옳고 저 것은 틀렸다며 자기중심 위주의 자아적 잣대로 편파심을 일으켜 옳다 그르다로 갈라놓던 마음도
모두 한꺼번에 동시에 놓아버리라는 말씀이다.
47.眼若不睡(안약불수) 諸夢自除(제몽자제)라 하여
만약 눈이 잠들지 않는다면 모든 꿈꿍이는 저절로 제거될 것이라 하였다.
몸이 깨어 있으면 모든 꿈꿍이는 있을 수 없듯이
마음이 깨어 깨달음을 얻고 나면 모든 것이 일시에 洞然明白(통연명백)하여
환하게 뚫려 하나로 通(통)한다는 말씀이다.
하긴 白日夢(백일몽)이라 하여 쨍쨍 해 비치는 대낮에 눈을 뜬채 꿈꾼다는 말도 있지만
自我(자아)에 執着(집착)하여 我執(아집)에 끄달린 나머지 億萬(억만)갈래의 생각으로 妄念(망념)의 고치집을 짓는 것이 백일몽이 아니고 무엇이랴.
사람 사는 것 자체가 온통 백일몽 일 터
48.心若不異(심약불이)萬法一如(만법일여)라 하여
마음이 만약 달라지지 않는다면 만법이 하나오 같으니라 하였다.
一(일)인 하나는 절대의 道(도)를 이름이다.
本來面目(본래면목)인 天稟(천품)의 마음 그데로라면 천품의 性(성)인 마음 그 자체가 道(도)와 한 品性(품성)의 마음인지라 宇宙(우주)의 모든 만법의 眞理(진리)가 絶對眞理(절대진리)인 道(도)와 온통으로 하나로 같다는 말씀이다.
一切唯心造(일체유심조=일체의 모든 것은 마음에의해 만들어짐)라 하여
모든 것은 본래면목을 離脫(이탈)한 自我執着(자아집착)의 我執(아집)의 마음으로 인해 만들어지고 비추어지는 헛그림자인 魍魎(망량=도깨비 그림자)에 지나지 않는다는 말씀이다.
49.一如體玄(일여체현) 兀爾忘緣(올이망연)이라 하여
道(도)의 當體(당체)는 玄妙(현묘)하여서 움쩍하지 않으니 因緣(인연)의 말미암음을 잊게한다 하였다,
여기서 兀(올)자는 움직이지 않는다는 뜻으로 풀어야한다.
道(도)란 온통으로 玄妙(현묘)한 絶對眞理(절대진리)라서 變(변)하여 움직이는 相對世界(상대세계)의 因果(인과)의 말미암음을 忘然(망연)히 잊게한다는 말씀이다.
50.萬法齊觀(만법제관) 歸復自然(귀복자연)이라 하여
만법을 하나같이 가지런히 보게되면 저절로 그러한 本來面目(본래면목)으로 돌아간다 하였다.
道通爲一(도통위일)이란 말이 있듯이 도를 통하여 確然(확연)히 확 뚫리면 온통의 하나인 道(도)로 하나가 됨을 안다는 말인데
하나는 絶對眞理(절대진리)인 道(도)를 말함이요
둘로 갈라지면 相對眞理(상대진리)로 떨러지는 것이듯
하나인 道로 온통으로 뚫리면 저절로 그러한 自然(자연)의 理法(이법)인
本來面目(본래면목)으로 回復(회복)된다는 말씀이다.
51.泯其所以(민기소이) 不可方比(불가방비)라 하여
그 이유와 까닭을 근원적으로 없애면 바야흐로 견주어 비교할 것이 없다 하였다.
因果關係(인과관계)에서 因(인)이란 원인적 이유나 까탈을 없애버리면 이렇다 저렇다 하고 견줄 꼬타리가 없다는 말씀이다.
52.止動無動(지동무동) 動止無止(동지무지)라 하여
그치기 위하여 움직이는 것은 곧 움직임이 없게되지만
움직이고자 하면서 그치려고하면 끝내 그칠 수 없다 하였다.
그친다는 생각이 움직이겠다는 생각에 앞서있다면 곧 그치게 되어 움직임이 그쳐지지만
움직이겠다는 생각이 그치겠다는 생각에 앞서 더 강하게 작용한다면 끝내 그치질 못하고 계속 움직임을 벗어날 수 없다는 말로
이게 무슨 말인고 하면
道(도)에 이르고야 말겠다는 한마음으로 마음을 텅 놓아버리면
億萬(억만)갈래로 갈라지던 생각의 실타래가 툭 끊어져 妄念(망념)의 움직임이 그쳐 고요한 禪定(선정)으로 돌아오지만
그 迷惑(미혹)된 마음을 놓아버리지 못하고 自我(자아)에 執着(집착)하여 妄念(망념)으로
움직이는 自我意識(자아의식)으로 무언가 道(도)의 꼬타리를 잡아보겠다고 아둥바둥 해봤자 그럴 수록 마음은 더욱 억만갈래로 더 갈라지고 뒤엉켜서 끝내 고요한 禪定(선정)에 들 수 없다는 말씀이다.
53.兩旣不成(양기불성) 一何有爾(일하유이)라 하여
兩邊(양변)이 이미 이루어짐이 없다면 하나인 道가 어찌 이루어짐이 있을 것인가? 하였다.
兩端(양단=두갈래의 끝단으로 상대성을 일컬음)의 思邊(사변)에서 思量分別(사량분별)의 생각을 훌훌 털어버리고 超脫(초탈)함이 없다면 온통인 하나의 道에 이르름이 있을 수 없다는 말씀이다.
54.究竟窮極(구경궁극) 不存軌則(부존궤칙)이라 하여
구경궁극(절대진리와 하나가 된 경지)이라 좇아야 할 법칙이 존재하지 않는다 하였다.
無上正等正覺(무상정등정각=더이상 위가 없는 바른 깨달음)으로 온통의 道(절대진리)를 꿰뚫어 通達(통달)하여 道와 하나가된 궁극의 경지에선 그 자체가 바로 道의 體(체)임으로 좇아야 할 법칙이 있을 수 없다는 말씀이다.
55.契心平等(계심평등) 所作俱息(소작구식)이라 하여
마음이 아무것에도 치우치지 아니하고 평등심에 꼬 들어 맞으면 짓는 바가 다 쉬리라 하였다.
마음에 差別心(차별심)을 일으켜 생각의 갈라짐이 없이 본래면목심에 꼭 들어맞으면 億萬(억만)갈래로 마음짓던 생각들이 다 한瞬間(순간)에 툭 끊어져버려 텅빈 空心(공심)인 본래면목으로 돌아온다는 말씀이다.
56.狐疑淨盡(호의정진) 正信調直(정신조직)이라 하여
의심하고 의심하는 마음이 깨끗이 다 하고나면 바른 믿음이 고디곧아져서 조화롭다 하였다.
의심많은 여우처럼 이 생각 저 생각으로 나누어져 混亂(혼란)스럽던 마음이 億尺竿頭(억척간두=억척이나되는 장대머리의 끝)에서 잡고 있던 장대끝을 놓아버려 천길 만길로 떨러지듯이 그렇게 텅 한번 마음을 놓아버리면 억만갈래로 의심하던 모든 사량분별의 마음이 툭 끊어져버려 본래면목인 天稟(천품)의 바탕성품인 온통인 道의 體(체)로 회복되는 것이니 바로 거기가 곧고 바른 믿음의 本源(본원)인지라 調和(조화) 그 자체라는 것이다.
57.一切不留(일체불류) 無可記憶(무가기억)이라 하여
一切(일체)모든 것에 머무르는 마음이 없으면 마음에 담아 기억할 것이 아무 것도 없다 하였다.
한 마음을 내었더라도 生心(생심)한 그 마음에 머물러 迷惑(미혹)하지 않는다면 마음에 담아 기억되어 남아 있을 것이 없다는 말씀이다.
일체모든 것에 머무는 마음이 없다는 것은 마음이 텅 비어 무한한 빔인 道의 體(체)에 들어갔다는 말씀이고
道의 體(체)와 하나로 같아지면 더 아무 것도 기억 해야할 그 무엇이 없다는 말씀이다.
58.虛明自照(허명자조) 不勞心力(불노심력)이라 하여
텅 비어서 밝고 스스로 비추이니 마음을 힘써서 구태여 마음을 수고롭게 할 필요가 없다 하였다.
천품으로 받은 본래면목심이 온통의 道와 하나로 같은 것이니
그 온통의 道는 무한한 빔이고 밝음 그 자체라서 스스로 비추이니 구태여 애써 마음을 煩惱(번뇌)롭게 하여 마음을 미혹케 할 일리 아니라는 말씀이다.
59.非思量處(비사량처) 識情難測(식정난측)이라 하여
생각으로 헤아려서 찾아지는 곳이 아니라 사람의 알음알이와 오욕칠정의 생각으로는미루어 측량하기가 어렵다 하였다.
마음을 놓아버려 텅 비어버리면 바로 그 자리가 본래면목의 淸靜無垢(청정무구)한 道의 본원인 것을
사람의 自我(자아)와 我執(아집)의 생각과 알음알이와 오욕칠정에 끄달리는 생각은 한갖 먼지 입자마냥 浮遊(부유)하는 하잘 것 없고 妄靈(망령)된 것들이라서 道의 본원에 이를 수도 없고 찾는다고 찾아지는 것도 아니라는 말씀이다.
60.眞如法界(진여법계) 無他無自(무타무자)라 하여
眞如法界(진여법계)에는 彼此(피차)가 없어 너란 것도 없고 나란 것도 없다 하였다.
진여법계란 절대진리인 온통의 道 그 자체를 말하는 절대계로 온통의 하나뿐이지
彼(피=저것)와 此(차=이것). 他(타=다른이)와 自(자=나). 是(시=옳고)와 非(비=그름) .善(선=착함)과 惡(악=악함). 好(호=좋아함)와 惡(오=싫어함)와. 美(미=아름다움)와 醜(추=더러움). 이런 양단의 생각이 없다는 말로
하나를 떠나 둘로 갈라지면 그건 상대계란 말씀이다.
61.要急相應(요급상응) 唯言不二(유언불이)라 하여
급하고 懇切(간절)하게 서로 상응하길 바란다면 오로지 둘이 아님을 말해야 한다 하였다.
道에 이르러 道와 일체가 되어 하나로 감응 하는 걸 참으로 緊要(긴요)하게 생각하여 寸刻(촌각)을 다투며 精進(정진)키를 원한다면 일체만법이 오로지 둘이 아닌 하나임을 당당히 말할 수 있어야 한다는 말씀이다.
62.不二皆同(불이개동) 無不包容(무불포용)이라 하여
하나로 다 같아서 둘이 아니므로 포용할 수 없는 것이 없다 하였다.
道는 온통의 하나로 전체인지라 절대함으로 둘이나 셋이나 여럿으로 갈라지는 것이 아니므로 道 그 자체는
우주의 무한한 빔 그 자체라서 포용하여 道의 품에 품지 못할 것이 아무 것도 없다는 말씀이다.
63.十方智者(십방지자). 皆入此宗(개입차종)이라 하여
十方(십방)이란 東.西.南.北의 四方과 乾.坤.艮.巽(건.곤.간.손)의 四隅(사우=네모퉁이)인 네모퉁이와 上.下를 말하여 宇宙(우주)를 뜻하는 것으로
우주안에 존재하는 지혜로운 사람은 다 이 마루꼭대기의 진리에 들어간다 하였다.
사람의 생령을 받고 존재하는 모든 지혜로운 사람들은 다 마루꼭대기의 절대진리인 道의 세계에 이르러 道와 일체가 될 수 있다는 말씀이다.
64.宗非促延(종비촉연). 一念萬年(일념만년)이라 하여
마루꼭대기의 진리인 道는 절박할만큼 급하게 재촉한다고 되는 것도 아니고 늘어지게 오래 끈다고해서 되는 것이 아닌 것으로 초발심(初發心)한 생각으로 만년을 가는 자라야만이 道에 이를 수 잇다는 말씀이다.
億萬(억만)갈래의 생각으로 兩端(양단)에 휘둘리게 되면
一念萬年(일념만년)으로 道에 이르고야 말겠다는 一念(일념)이 될 수 없다는 말씀이다.
65.無在不在(무재부재). 十方目前(십방목전)이라 하여
있고 있지않음이 없어서 십방이 눈앞이라 하였다.
온통의 道인 하나로 확 뚫리고나면 相對界(상대계)에서 있다 없다하고 옳다 그르다 크다 작다 하고 착하다 악하다느니 깨끗하다 더럽다느니 하던 것들이 다 허망한 경계에 執着(집착)한 까닭에서 나온 견해임을 알게되고 그래서 온 우주 전체가 바로 하나의 微粒子(미립자)인 먼지나 티끌같은 하잘것 없다던 것에서도 여여히 존재함을 알게된다는 말씀이다.
66.極小同大(극소동대) 忘絶境界(망절경계)라 하여
지극히 작은 것이 지극히 큰 것과같다는 것을 알면 모든 망념의 경계가 끊어진다고 하였다.
크다 작다 하던 상대계의 槪念(개념)이 道의 絶對眞理(절대진리)앞에선 다 끊어져버리고 작은 것속에도 큰것이 다 들러있음을 알게되니 일체의 모든 망념의 경계가 툭 끊어져버려 道와 일체가 된다는 말씀이다.
67.極大同小(극대동소) 不見邊表(불견변표)라 하여
지극히 큰 것도 지극히 작은 것과 같아서 그 테두리를 볼 수없음은 같다 하였다.
크고 작은 것으로 경계짓는 마음은 상대계의 개념인 것이지 우주 본연의 理(리)로 봤을땐 그 구성 어느 것에도 다름이 없어 본질이 다 하나로 같다는 말씀으로 모든 것은 超微粒子(초미립자)의 원형질로는 같다는 것이다
상대계에 갇힌 눈으로는 아무리 좋은 광학 현미경이나 망원경이라해도 그 테두리를 볼 수가 없고 너무 작아도 그 테두리를 볼 수 없다는 말씀이다.
68.有卽是無(유즉시무) 無卽是有(무즉시유)라 하여
있다는 것이 곧 없는 것이고 없다는 것이 곧 있다는 것이라 하였다.
상대적 진리로 보았을땐 있다 없다 하지만
절대적진리로 확 뚫려 通(통)하여 一以觀之(일이관지)로 보게되는 영안이 열리면 있다 없다가 다 허망한 妄念(망념)에서 비롯됬음을 알게된다는 말씀이다.
69.若不如此(약불여차) 必不須守(필불수수)라 하여
만약 이와 같지 않다면 반드시 모름지기 지킬 것이 없다고 하였다.
지금까지 說(설)한 道가 만약 이와 터럭끝만큼이라도 틀림이 있다면 모름지기 지킬 것이 없다는 말씀이다.
70.一卽一切(일즉일체) 一切卽一(일체즉일)이라 하여
온통의 道는 절대한 전체라 唯一不二(유일불이)인 것이어서
하나가 전체요 전체가 곧 하나라는 것이다.
우주삼라만상의 억억만가지 현상으로 나타나 보이는 것들이 다 하나에서 나온 전체의 부분인 개체들로 각기 다른 것같지만 근본은 다 하나인 절대의 道에서 파생되어 나온 것들이고 이 개체들이 다 자기때가 다하면 다시 하나인 道의 전체로 돌아간다는 말씀이다.
예컨데 한사발의 물이 엎질러졌다면 사발에 담겼던 물이 다 없어졌으니 없는 것같지만
그 물은 본래의 자기모습인 수소와 산소로 분자화 되어 우주의 빔으로 돌아갔으니 그 물은 다른 모습으로 여여히 존재하는 것이 아닌가
71.但能如是(단능여시) 何慮不畢(하려불필)이라 하여
다만 이같이 됨을 능히 안다면 끝내어 마치지 못함(道와 일체가 되는 것)을 어찌 염려 하겠는가 하였다.
이와같은 道의 天理(천리)를 꿰뚫어 알아 道와 하나가 된다면 悠悠自適(유유자적)할 터인데
무엇을 염려할 것인가라는 말씀이다.
72.信心不二(신심불이) 不二信心(불이신심)이라 하여
믿는마음도 둘이 아닌 하나이고 둘로 나뉘어지지 않는 것이 참 믿음이라 하였다.
한마음으로 집중몰입하는 그 것이 믿음이라는 말이다.
이러면 될까 저러면 될까 하고 두마음 세마음을 먹는 마음이라면 그것은 벌써 사량분별하는 마음으로 경계가 갈라지는 것이라서 절대한 믿음이 될 수 없다는 것으로 설혹 돌이 떡이 된다했으면 돌이 떡이 되지 않더라도 의심하지 않고 한마음인 초심으로 오롯이 목숨 걸고 가는 것이 믿음이라는 말씀이다.
73.言語道斷(언어도단) 非去來今(비거래금)이라 하여
언어의 길이 끊어지고나면 과거도 미래도 현재도 아님이로라 했다.
말이나 문자로 설명할 수도 없고 또 말이나 문자를 통해서도 바로 이 道란 것을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니 말이나 문자가 다 끊어져 오로지 지금 이 순간에 한 생각으로 확 뚫려 있으면 과거니 미래니 현재니 하고 잣대질 하던 자아가 툭 끊어져 呼吸(호흡)간에 내가 서있음을 알게된다는 말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