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처럼 자유로운가, 아니면 새처럼 도피해야 하나?
(Free as a bird or Flee as a bird)
어릴 때 어떤 책을 읽었느냐에 따라 그 책이 개인의 앞날에 영향을 끼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야생의 위로」”(The Wild Remedy, How Nature Mends Us)의 저자인 에마 미첼(Emma Mitchell)이 그러하다. 박물학자요, 저술가이며, 삽화가인 그녀는 어린 시절(1978) 할아버지 책꽂이에서 찾아낸 「영국 식물도감」(The Concise British Flora in Color)에 매혹되어 식물학이란 별세계로 빠져들었다. 25년간 우울증으로 고통을 당한 그녀에게 이 책은 거실을 나가지 않고도 봄날을 살짝 엿볼 수 있는, 종이와 잉크로 만들어진 항우울제였다고 그 책에서 진솔하게 말하고 있다.
이 책은 그녀가 도시 생활을 정리하고 런던의 북동부 지역인 케임브리지셔(Cambridgeshire)의 펜스(The Fens)라는 곳으로 옮겨 자연에서 우울증과 싸우며, 야생의 꽃과 식물을 수집하고, 새와 동물에 관한 그림과 사진을 모아, 열두 달의 자연 모습을 생생하게 표현한 이야기가 있는 달력이라고 할 수 있다. 마치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월든」과 「야생화 일기」를 읽는듯하다. 소로의 「야생화 일기」는 봄, 여름, 가을, 겨울의 사계의 자연풍경을 차례로 쓴 일기임에 반해, “야생의 위로” 이야기는 10월부터 시작하여 9월에 끝나 조금 이해가 되지 않았다. 처음에는 그 낯선 순서배열이 의아했으나, 2, 3월 이른 봄의 이야기를 읽어나가자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T.S 엘리엇의 시 「황무지」에서 시인이 ‘4월을 잔인한 달’이라고 노래한 것이 연상되었다. 우울증을 앓는 그녀에게 만물이 소생하는 초봄은 가장 고통스러운 것이다. 그때가 되면 그녀의 머리는 “온갖 상념과 통렬한 자기 비난의 소용돌이에 휩쓸려 제대로 하지 못한 일, 완전히 망쳐버린 일을 끊임없이 헤아린다. ‘난 무가치한 인간이야’라는 그 소음은 참을 수 없을 만큼 요란하여 내 머릿속을 완전히 압도한다“라며 절망하고 있다. 그러므로 고통스러운 봄으로 시작하는 것보다 낙엽이 땅을 덮고 개똥지빠귀가 철 따라 이동하는 10월부터 이야기를 풀어가는 것이 그녀에게는 훨씬 자연스러웠을 것이다.
그녀와 소로의 자연관과 자연치유 능력에 관한 생각은 거의 일치했다. 먼저 토양 속에서 미생물과 균류가 식물과 상호작용을 통해 초원이 형성되어왔으나, 오염으로 방치되고 산업적, 집약적 방법으로 거대한 공장이 되어버린 영국 땅을 보며, 이전의 청정한 자연의 경이로움에 대한 아쉬운 향수를 기억했다. 그리고 인간은 태초부터 땅과 강력한 유대가 있었고 야생의 장소에서 살아가도록 진화했으나, 현대인은 자연과의 관계단절로 정신건강에 문제가 생겼다는 것이다. 따라서 자연을 치료 약으로 삼는 그녀는 인간이 온전하려면 자연풍경 속에 있어야 한다는 확신을 체험으로 증거 하고 있다. 한편 소로는 그의 저서 「강」(A week on the Concord & Merrimack River)에서 수많은 향기 진한 자생식물과 향내 나는 좋은 풀과 약초가 동물의 사육으로 제공되어 오늘날 널리 퍼진 많은 질병의 근원이 되었다고 탄식했다. 그리고 인간의 탐욕스러운 땅의 사용으로 자연의 부패속도를 정상이상으로 높여놓아 황폐시켰다고 분노했다.
이 책에서 저자는 계절의 변화에 따라 자라는 수많은 풀과 꽃과 나무, 그리고 새와 동물, 어류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자연 교과서를 보여주듯 자신이 그린 그림과 함께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그중에서 새는 우울증을 완화에 도움이 되어, 주변 경관에 가까이 두었다고 한다. 풍광이 좋은 오두막집에 살므로 숲에는 항상 새들이 지저귄다. 그러나 더 가까이서 소통하기 위해 먹이를 마련하여 정원 안쪽으로 숲속의 온갖 새들을 불러모았다. 재미있는 것은 그 새들끼리 텃새를 부리며 서로 먹이를 차지하기 위한 자리다툼을 한다는 것이다.
이뿐 아니라 저자는 3월 초에 수만 마리의 찌르레기 떼를 보기 위해 이웃 주(州) 바다까지 차를 몰고 친구와 함께 간다. 새떼의 공중 원무(圓舞)는 그녀의 머릿속에 온갖 이미지를 떠오르게 한다. 바다를 향해 나아가다 문득 방향을 틀어 내륙으로 돌아오기도 하고, 작은 무리로 모였다가 흩어지고 또다시 합치기도 하며, 하늘 여기저기서 벌 떼처럼 촘촘하게 뭉쳐 드는가 하면 다른 곳에서는 나무 위로 길게 줄지어 굽이치며 날아간다. 그런데 그 찌르레기의 원무에 낫 모양의 날개가 달린 포식자인 송골매 한 마리가 공격목표를 향해 같이 날아다닌다고 한다. 송골매가 찌르레기 사이에 끼어들어 사냥하는 경우 새 떼는 더욱 촘촘히 날아 포식자를 교란을 시키며 더욱 현란하고 복잡하게 움직인다고 한다. 포식자로부터 스스로 지키는 방어본능의 지혜일 것이다.
또한, 5월이면 그녀에게 생각나는 새가 있는데 가장 놀라운 소리를 내는 희귀 철새인 나이팅게일이다. 그녀는 이 새의 울음소리를 일련의 음악적인 모습으로 섬세하게 표현하고 있다.” 거품을 일으키며 흘러가는 목소리와 견디기 어려울 만큼 감미롭게 반복되는 떨림이 섞인 고음, 반음계 아래로 엔진의 울림처럼 나지막한 저음까지, 나이팅게일의 노래를 들을 때면 다른 모든 감각이 마비되는 것 같다. 청각이 모든 것을 압도하고 새의 울음소리에 반응하여 머릿속의 뇌세포가 폭발적인 환희에 빠진다“라고 그 음색을 그려내고 있는데, 아마도 이같이 새의 노래를 재생하여 해석하는 경우는 들어보지 못하였을 것이다.
흔히 새처럼 자유롭다(Free as a bird)는 말을 한다. 한때는 그런 생각을 가졌다. 11월 임진강 비무장지대 하늘에 편대를 지어 휴전선을 넘나들며 나르는 기러기 떼들의 비상에서 그들의 자유 함을 보았다. 그런데 실상은 새들도 그 머무르는 곳이 일정한 장소로 제한되어 있다고 한다. 또한, ’새처럼 도망하라‘(Flee as a bird)는 찬송이 있다. 이는 우리가 잘 아는 ’사랑하는 나의 고향을 한번 떠나온 후에‘라고 시작되는 ’고향 생각‘이란 번안 가곡이나, 원래는 미국의 쉰들러(Mary Dana Shindler, 1810-1883) 여사가 1840년에 작곡한 찬송이다. 이 찬송의 가사는 ’새처럼 그대의 안식처(산으로)로 피하세요, 죄악에 지친 그대여‘(Flee as a bird to your mountain, thou who art weary of sin)라고 시작된다.
다시 새처럼 자유롭다는 말을 생각해보자. 류시화 시인은 그의 수필에서, 새는 자유를 위해 나는 것이 아니라, 나는 것 자체가 자유라고 했다. 새가 날고 있는 사실 자체로는 맞는 말이다. 그러나 이 말은 새가 자유를 원하는지 아닌지와는 관계가 없는 수사이다. 새장 안의 새는 옛 숲을 사랑한다는 도연명의 시는 자유를 위해 날아가고 싶다는 뜻이다. 그런데 새장 안에서 길들이지 못하는 새의 운명은 어떠할까? 지빠귀가 바로 그런 새이다. 이 새는 인간과의 상호작용을 좋아하지 않는 야성의 기질로 인해 애완(愛玩)용으로 기를 수가 없다. 따라서 미국 대부분 지역에서는 이 새를 애완용으로 소유하는 것이 불법으로 되어있다.
이런 지빠귀의 야성을 순화시키려는 한 소년이 있었다. 그는 훗날 노벨 문학상을 받은 유대계 미국인인 솔 벨로(Saul Bellow, 1915-2005)였다. 그의 집은 숲 근처에 있어 갈색 지빠귀 떼가 날아와서 쉬다가 가곤 했다. 지빠귀의 예쁜 소리에 반한 솔은 새끼 한 마리를 잡아 와 새장에 가두었다. 이튿날 갈색 지빠귀의 어미가 입에 먹이를 물고 새장으로 날아와 새끼에게 정성껏 먹이를 먹였다. 그런데 다음 날 새장으로 가보니 새끼가 새장 바닥에 죽어 있었다. 얼마 후 유명한 조류학자인 아서 윌리가 솔의 아버지를 만나러 왔다. 어린 솔은 조류학자에게 갈색 지빠귀가 왜 갑작스럽게 죽었는지를 물었다. 솔의 이야기를 들은 학자는 이렇게 말했다. “갈색 지빠귀 어미는 자신의 새끼가 새장에 갇힌 걸 알고 일부러 독초를 먹였단다. 평생 새장에 갇혀 사느니 차라리 죽는 게 낫다고 여긴 것이지.” 이는 어린 소년에게 심한 충격이었을 것이다. 그 후로 솔은 절대 야생 동물 채집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같이 어미 새가 오늘날 우리에게 던지는 교훈은 무엇일까? 자유를 빼앗긴 노예로 살기보다 차라리 장렬한 죽음을 택하라는 명령인가? 진실을 존중하는 개인으로서 이 사회에서 스스로 지켜야 하는 자유는 무엇일까? 160년 전쯤 씌어 진 존 스튜어트 밀의 「자유론」은 민주주의의 요체라고 할 '다수의 지배'가 개인의 자유를 억압하는 '다수의 횡포'로 전락할 위험성을 경고하고 있는 것처럼 개인의 진실존중 자유는 위협을 받고 있다. 이런 때에 미국의 마이크 펜스 부통령이 ’자유의 주간‘에 텍사스주 댈러스 교회에서 연설한 내용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미국은 자유의 기반 위에서 건국되었고 자유는 신앙의 기초 위에서 구축되었다는 사실을 천명한 것이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 하게 하리라는 말씀은 진리이다.
야생의 자연에서는, 길 위에서 풀과 꽃과 나무를 문득 만나는 기쁨이 있고, 모두 자유 함을 누릴 것이나, 이 땅이 야생을 빼앗긴 황량한 들판이 되면, 우리의 기쁨은 사라져, 모두 거룩한 산으로 피하여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