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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문경 운달산 김룡사 (雲達山 金龍寺) ①
-일주문에서 대웅전까지-
지난 6월 24일, 사불산 대승사와 윤필암, 묘적암을 순례하고 4시 30분 경, 주차장을 떠나 마지막 순례처인 김룡사로 향했는데 지척지간이지만 갈림길에서 방향을 잘못 잡아 회차하 는 바람에 약간 지체는 되었으나 김룡사로 향하는 마음은 즐거웠습니다. 김룡사가 있는 절은 운달산(雲達山)입니다. 신라의 운달조사(雲達祖師)가 여기에 절을 창건하여 운봉사 (雲峯寺)라 했는데 나중에 김룡사로 이름이 바뀐 것입니다. 김룡사 주차장에서 도착했을 때는 4시 45분 정도 되었습니다.
운달산김룡사(雲達山金龍寺) 일주문
운달산 김룡사 일주문의 이름은 홍하문(紅霞門)이라는 편액이 붙어 있습니다. 두 기둥에 는 주련이 붙어 있는데 전형적인 일주문 주련입니다.
入此門來 입차문래 누구든 이 문안에 들어오거든 莫存知解 막존지해 분별망상 알음알이 내지 말아라. 無解空器 무해공기 알음알이 지해 없는 텅 빈 그릇이 大道成滿 대도성만 대로를 가득히 담는 법일세.
김룡사는 운달조사(雲達祖師)가 처음 창건한 이래 많은 고승대덕을 배출하였는데 근세에 는 성철(性徹) 스님, 서옹(西翁) 스님, 법전(法傳)스님, 권상로(權相老) 스님 등 역대 한국불 교를 빛낸 큰스님들의 향훈이 서려 있는 청정수행 도량입니다.
안쪽으로는 나무아미타불이란 편액이 걸려 있습니다.
김룡사(金龍寺)는 문경시 산북면 김룡리 410번지에 자리한 대한불교조계종 제8교구본사 직지사(直指寺)의 말사로 신라 진평왕 10년인 588년 운달조사(雲達祖師)가 창건하여 운봉 사(雲峯寺)라 하였습니다. 그런데 운봉사의 위치는 운달산 정상 가까운 곳에 있었던 금선 대(金仙臺)라는 암자 자리로서 지금의 위치와는 달랐다고 합니다. 어느 시기인가 산 정상 부근의 운봉사는 지금의 자리로 이전하였는데, 1904년까지 여전히 운봉사라는 이름으로 부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순조 3년인 1803년의 나한탱, 철종 9년인 1858년의 지장탱, 고종 25년인 1888년의 칠성탱 등에 김룡사라는 이름이 보인다고 하니 김룡사와 운봉사는 함께 사용된 모양인데 정확하게 언제 개명되었는지는 모른다고 합니다.
다만 운봉사로 불리던 절이 김룡사로 바뀌게 된 것에 대한 전설이 몇 개 전하는데 다음과 같습니다.
조선후기 문경 부사(府使) 김씨가 산중에 은거하며 득남 불공을 올려 처음에는 딸, 두 번째 는 아들을 낳아 이름을 '용(龍)'이라 지었는데 그후 가문이 번창하여 운봉사를 김룡사(金龍 寺)라 고쳐 불렀다는 설이 있습니다.
김룡사 사명에 대한 또 하나의 전설은 김씨 성을 가진 사람이 죄를 짓고 운봉산 아래 숨어 살면서 매일 불전에 나아가 참회하였는데, 어느 날 용추(龍湫)의 용녀(龍女)와 혼인하여 아 들을 낳고 '용(龍)'이라 이름을 지었는데, 이후 가문이 번창하여 김룡사라 했다는 설이 있 습니다.
이 밖에 금선대(金仙臺)의 '금(金)'자와 용추폭포(龍湫瀑布)의 '용(龍)'자를 글자를 따서 금 룡사(金龍寺)라 했다는 설도 있습니다.
창건 이후의 역사는 오랜 세월 동안 공백으로 남았다가 조선 후기에 들어서서 비로소 역사 를 알 수 있는데 인조 2년인 1624년에 혜총(慧聰) 선사와 그의 제자 광제(廣濟)ㆍ묘순(妙 淳)ㆍ수헌(守軒) 스님 등이 임진왜란으로 폐허가 되다시피한 절을 중창했다고 합니다. 그 후 다시 인조 23년 1643년에 다시 화재를 입었고, 다시 인조 26년 1645년에 의윤(義允)ㆍ 무진(無盡)ㆍ태휴(太休) 스님 등이 대웅전을 중건하였다고 합니다.
그 이후 크고 작은 불사가 계속 이어져 왔고, 근래에 들어 1913년에는 삼장탱을 봉안하였 고, 1930년대에는 육주 인택(六洲仁澤) 스님이 설선당을 중건하였으며, 1940년에는 제허 병호(霽虛炳浩) 스님이 설선당과 만세루를 중수하였습니다.
최근에는 1997년 12월에 큰 화재가 일어나 대부분 전각이 소실되는 비운을 겪기도 했습니 다.
퇴경당 권상로 대종사 사적비(退耕堂權相老大宗師事蹟碑)
일주문에서 조금 오르면 오른쪽 길 옆에 비석이 하나 보입니다. 읽어보니 '퇴경당권상로 대종사사적비'라 쓰여 있습니다.
이 사적비는 제자 석전 이병주(石田 李丙疇)가 짓고 여초 김응현(如初 金膺顯) 선생이 썼 다고 합니다. 그런데 대승사에도 스님이 쓰신 사적비가 있었고, 불교사에서도 빼 놓을 수 없는 석학이기에 어떤 분인가 약술하려다가 이 사적비의 글을 옮기는 것이 좋을 것 같아서 길고 길지만 전문을 옮겨 보았습니다. 국한문 혼용체로 쓰여 있는데 읽기 쉽게 토를 달아 보았습니다.
『운달산 김룡사(雲達山 金龍寺)는 예로부터 많은 고승대덕(高僧大德)이 난 가람(伽藍)이 다. 여기가 교종(敎宗)의 강백(講伯)이자 학단(學壇)의 예학(銳學)이셨던 퇴경당(退耕堂) 권상로(權相老) 선생이 출가(出家)하여 부처의 거룩을 깨치셨으니 이는 그 돈후(敦厚)한 성명(聲名)과 더불어 길이 빛날 사연이다. 선생은 佛紀 2423년(公元 1879) 2월 28일 산 좋고 물 맑은 문경(聞慶) 고을 산북면(山北面) 석봉리(石鳳里)에서 권상영(權賞泳)씨의 맏 이로 태어나 불기 2509년(1965) 4월 19일 향년(享年) 87세로 세연(世緣)을 다하시니 법랍 (法臘) 은 67이셨다.
관향(貫鄕)은 안동(安東)이고 퇴경(退耕)은 아호(雅號)이자 당호(堂號)이며 법계(法階)는 대 종사(大宗師)셨다. 타고남이 슬겹고 다사하신데다 공부가 워낙 뛰어나서 진작부터 대성 (大成)할 조짐이 넘났다고 한다. 일찍이 이웃 마을 사숙(私塾)에서 과업(科業)을 위한 경사 (經史)와 시부(詩賦)를 전심(專心)타가 동학민란(東學民亂)을 둘러싼 내외정세(內外情勢)를 탓하여 발심(發心)한 나머지 불기 2440년(1896) 4월 사무친 원(願)을 세워 김룡사(金龍寺) 서진(瑞眞) 스님을 은사(恩師)로 귀의득도(歸依得度)하여 일대시교(一代時敎)를 마치고 불 기 2447년(1903) 5월 영안(永安) 스님 밑에서 입실건당(入室建幢)하셨다. 이어서 김룡사 부설인 경흥(慶興)과 성의강원의 강사를 역임하고 불기 2450년(1906) 상경(上京)하여 동국 대학교(東國大學校)의 요람(搖籃)으로 신학문(新學問)의 발상(發祥)인 명진학교(明進學校) 를 나오셨다. 다시 사불산(四佛山) 대승사(大乘寺) 주지(主持)를 거쳐 불기 2456(1912)에 는 중앙종무원(中央宗務院) 편집국장(編輯局長)에 선임(選任)되어 조선불교월보(朝鮮佛敎 月報)와 불교지(佛敎誌)를 주관(主管)하시며 중론(衆論)을 통한 종풍진작(宗風振作)에 이바 지한 공이 크셨다.
한편 김룡사중앙학교(金龍寺中央學敎)와 상주보광학교(尙州普光學敎)의 강사를 역임한 뒤 종립학부(宗立學府)인 중앙불교전문학교(中央佛敎傳門學敎) 교수(敎授)로 취임(就任)하여 교사신축(校舍新築)과 아울러 개명(改名)한 혜화전문학교(惠化專門學敎) 교수(敎授) 재임중 (在任中)에 일제(日帝)의 덧없는 특별조치령(特別措置令)으로 억압한 뒤 차마 폐교(廢校)되 자 불교총본산교학연수위원장(佛敎總本山敎學硏修委員長)에 전임(轉任)돼 총무원(總務院) 에서 집무(執務) 불기 2489년(1945) 8.15 광복(光復)으로 복교(復校)되어 개명(改名)한 동국 대학교(東國大學校) 교수(敎授)로 보임(輔任)되어 새로 자리잡은 남산(南山) 기슭 동악(東 岳)을 오르내리시며 교학(敎學)에 몸바치셨다. 그 뒤 불기 2494년(1950) 6.25동란(動亂)으 로 부산(釜山)에 남하(南下)하여 학장직(學長職)을 맡아 교세(校勢)를 확충(擴充)하여 불기 2497(1953) 2월 종합대학교(綜合大學校)로 승격(昇格)시켜 초대총장(初代總長)에 취임하셨 다. 그 해 정년퇴임(停年退任)과 함께 명예교수(名譽敎授)로 추대(推戴)되고 불기 2506년 (1962) 4월에는 동국대학교 대학원(大學院)에서 명예철학박사(名譽哲學博士) 학위(學位)를 받고 8월에는 문화대훈장(文化大勳章)을 타셨다.
가만히 생각하건대 선생의 평생은 오로지 교학(敎學)으로 일관(一貫)하셨지만 모름지기 전 적(典籍)과 씨름하신 용맹정진(勇猛精進)의 연속이셨다. 항상 쓰고 베끼신 인과(因果)가 방대한 등신(等身)의 편저(編著)이니 특히 조선불교사(朝鮮佛敎史)와 조선문학사(朝鮮文學 史)를 비롯하여 70년 과업(課業)인 조선지명연혁고(朝鮮地名沿革考)와 조선사찰전서(朝鮮 寺刹全書)는 금정(金鼎)의 일란(一鸞)이다. 그 호한(浩瀚)한 섭렵과 다함없는 울력에는 그 누구도 경복(警服)치 않을 수 없다.
그리고 시조(時調)의 한시역(漢詩譯)과 당시(唐詩)의 시조역(時調譯)인 퇴경역시집(退耕譯 詩集)과 말씀하시듯 쉽게 풀이한 삼국유사역강(三國遺事譯講)과 관음예문강의(觀音禮文講 義)는 공역(共譯)인 불교성전과 함께 역술(譯述)의 대표작이다. 또한 육서(六書)의 논증(論 證)인 자학관규(字學管窺)는 지음(知音) 동작빈(董作賓)의 지의(贄意)로 중국대륙잡지(中國 大陸雜誌)에 실려 한국자학학(韓國字學)을 과(跨)하였고 시문유고(詩文遺稿)는 정해(正楷) 로 초(草)하신 원고(原稿)대로 동국대도서관(東國大圖書館) 등에 간수되어 두루 활용되고 있다. 무릇 수불석권(手不釋卷)은 박람강기(博覽强記)를 보태어 무불통지(無不通知)의 해 박(該搏)을 자아내서 자전(字典)과 사전(辭典)이오 사전(事典)이 무색(無色)한 학해(學海)라 는 찬탄(讚嘆)을 누리셨다.
그러나 선생은 그 높깊은 학문(學問)을 자리(自利)보다 오히려 이타(他利)에 훈수하신 점이 남다른 위덕(偉德)이시니 그 불성(佛性)으로 가다듬은 자상으로의 지도(指導)와 변증(辨證) 으로 척결(剔抉)한 고증(考證)을 반기를 들리듯 보시(布施)한 존숙(尊宿)이셨다. 이에 선생 의 우람스런 신행(信行)과 무가무불가(無可無不可)의 사적(事蹟)을 우러러 받드는 후학들 이 지성(至誠)을 모아 선생의 인연(因緣)이 깃든 이 김룡사(金龍寺) 앞뜰에 터를 가려 반석 을 다지고 장무상망(長毋相忘)의 기요(紀要)를 명각(銘刻)하는 바다. 비자(碑字)는 제자 이 병주(李丙疇)와 김응현(金膺顯)이 짓고 썼으며 각자(刻字)와 장엄은 김명규(金明圭)가 도맡 아서 마물렸다. (完) 』
이것은 무슨 시추에이션일까요?
엄청 크고 굵어 감탄을 자아냈는데 재보는 중입니다.
두 아름이 넘네요.
김룡사로 들어가는 길의 저 전나무입니다.
엄청 크고 굵어 염화ㆍ미소님이 재 본 뒤로 과객이 정말 크다 하며 지켜보는 모습입니다.
김룡사 가는 길입니다.
일주문을 지나 하늘로 쭉쭉 뻗은 전나무 숲이 일품인 김룡사 가는 길입니다.
무슨 문이 하나 보입니다.
보장문(寶藏門)이라는 편액을 달고 있습니다.
보장문(寶藏門)이란 부처님의 무진장한 법보(法寶)를 찾아가는 문을 뜻합니다. 이 문에는 대문이 달려 있는데 금강역사가 그려져 있습니다. 부처님의 법보를 수호하려는 의지가 보 입니다. 이 문은 일주문을 지나 있는 두 번째 문으로 금강문(金剛門)과 같습니다. 금강역 사는 불교를 수호하는 신으로 인왕(仁王)이라 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금강문을 인왕문(仁 王門)이라고도 합니다.
금강문을 지나 천왕문(天王門)으로 들어섭니다.
천왕문(天王門)입니다.
사천왕문은 보장문을 지나 절 경내로 통하는 세 번째 문입니다. 이 건물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입니다.
여기에 주련이 있는데 다음과 같습니다.
四大天王威勢雄 사대천왕위세웅 사대천왕 위광은 크고도 웅장해라. 護世巡遊處處通 호세순유처처통 호세천왕 곳곳 돌며 모든 곳에 두루하며 從善有情貽福蔭 종선유정이복음 선행하는 중생에겐 복덕을 내려주고 罰惡群品賜災隆 벌악군품사재륭 악행하는 무리에겐 벌을 주고 재앙주네.
안으로 들어가니 사천왕이 눈을 부릅뜨고 사람을 위압합니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한글 이름표를 친절하게 달아 놓아 눈길을 끕니다.
김룡사 천왕문의 사천왕상은 특이한 점이 몇 가지 보입니다. 우선 천왕상이 석상으로 되어 있고 뒤에 사천왕 탱화가 그려진 점입니다. 사천왕탱은 고종 17년 1880년에 조성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사천왕의 배치가 좀 특이합니다. 보통 동방과 남방이 한 세트이고, 서방 과 북방이 한 세트인데 여기는 동방과 북방이 한 세트 이고, 남방과 서방이 한 세트로 되 어 있습니다. 불교에서는 사방을 말할 때 동남서북으로 되어 시계방향으로 순서를 매겨 호칭합니다. 지금 우리가 쓰고 있는 동서남북 상대개념이 아닙니다. 그러니 여기 사천왕 상 배치를 보면 미묘한 차이를 보입니다. ^^
아, 그런데 이름표를 잘못 달았습니다!!! 제가 보기에 사천왕상을 제대로 안치한 것인데 누가 이름표를 잘못 붙이어 엉터리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사천왕상에는 사찰을 찾는 이로 하여금 친절하게 이름표를 붙여 놓았는데 누가 했는지 모 르지만 잘 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누가 착각하고 이름표가 제 주인을 못찾고 하나씩 밀렸다는 사실입니다!!!
동방지국천왕(東方持國天王)과 남방증장천왕(南方增長天王)이 북방다문천왕(北方多聞天 王)과 동방지국천왕(東方持國天王)의 이름표를 달고 있으니 애석한 일입니다.
하나가 틀리다 보니 모조리 틀리게 되었습니다.
동방지국천왕(東方持國天王)과 남방증장천왕(南方增長天王)
동방지국천왕(東方持國天王)과 남방증장천왕(南方增長天王)을 북방다문하느님, 동방지국 하느님이라 잘못 붙여 놓았습니다.
서방광목천왕(西方廣目天王)과 북방다문천왕(北方多聞天王)
서방광목천왕(西方廣目天王)과 북방다문천왕(北方多聞天王)을 남방증장하느님, 서방광목 하느님이라 잘못 붙여 놓았습니다.
동방지국천왕(東方持國天王)
'동방지국하느님'이란 안내문이 적혀 있습니다. 그리고 '모든 사람들에게 용기와 지혜와 희망을 줌'이란 글귀가 적혀 있습니다. ※ 여기의 북방다문 하느님은 잘못 달린 것임.
지국천왕(持國天王)은 건달바(乾闥婆), 부단나(富單那) 등 두 신을 지배하며, 동주(東洲)를 수호하며 다른 주도 겸합니다. 부처님과 제석천이 지국천으로 하여금 동방을 수호하라는 명을 내렸는데 지국천이 나라를 지키고 백성을 편안하게 할 것을 맹세했다고 합니다. 그 런 연유로 지국천(持國天)이라 합니다.
건달바(乾闥婆)는 식향(食香)ㆍ심향(尋香)ㆍ향음(香陰)이라 번역합니다. 제석천(帝釋天)의 아악(雅樂)을 관장하는 신을 말하며 향만을 먹는다고 합니다. 많은 왕과 이를 따르는 많은 사람들이 있다고 합니다. 불법수호(佛法守護)의 팔부중(八部衆)의 하나입니다.
부단나(富單那)는 취(臭)ㆍ취예(臭穢)로 번역하며 냄새나는 귀신인데, 건달바와 지국천의 권속으로 동방을 수호하는 귀신입니다.
지국천왕이 들고 있는 지물(持物)로는 대표적으로 비파입니다. 그러나 일정하지는 않습니 다. 지물(持物)에 대한 경전적 근거는 <다라니집경(多羅尼集經)>에는 왼손에 팔을 내려 칼을 잡고, 오른손을 구부려 보주(寶珠)를 쥔다고 하고, <일자불정륜경(一字佛頂輪經)>에 는 왼손에 창, 오른손을 올려드는 형상이며, <약사여래유리광칠불본원공덕경(藥師如來琉 璃光七佛本願功德經)>에는 비파를 들고 있다 했습니다.
남방증장천왕(南方增長天王)
'남방증장하느님'이란 안내문이 적혀 있습니다. 그리고 '모든 사람들에게 선근을 증장시 켜 복을 내려 줌'이란 글귀가 적혀 있습니다. ※ 북방다문 하느님은 잘못 달린 것임.
증장천왕(增長天王)은 구반다(鳩槃茶), 폐려다(薜荔多) 등 두 신을 지배하며, 남주(南洲)를 수호하며 다른 주도 겸합니다. 증장천은 자타의 선근(善根)을 증진(增進)한다 해서 붙여진 이름입니다.
구반다(鳩槃茶)는 옹형귀(甕形鬼)ㆍ음낭(陰囊)ㆍ형란(形卵)ㆍ면사동과귀(面似冬瓜鬼)ㆍ염 미귀(厭眉鬼)라 번역하며, 사람의 정기를 빨아 먹는 귀신으로 머리는 말, 몸은 사람 모습이 며 남방 증장천왕의 부하로 태장계 만다라 외금강부원에 있다고 합니다.
폐려다(薜荔多)는 범어 프레타로 비리다(卑利多)ㆍ피례다(辟荔多)ㆍ미례다(彌荔多)라 하기 도 합니다. 폐려다는 죽은 사람의 영혼을 부리는 아귀입니다. 아귀(餓鬼)ㆍ조부귀(祖父鬼) 라 번역합니다.
증장천왕의 지물(持物)로는 대표적으로 칼을 잡습니다. <다라니집경>에는 왼손은 펴서 칼을 잡고 오른손에는 창을 잡는다 하고, <일자불정륜경>에는 왼손에는 창을 잡고 오른손은 허리에 댄다 하였고, <약사여래유리광칠불본원공덕경>에는 칼을 잡는다 하였습니다.
서방광목천왕(西方廣目天王)
'서방광목하느님'이란 안내문이 적혀 있습니다. 그리고 '말과 행동과 뜻을 나쁘게 행하는 사람에게 벌을 줌'이란 글귀가 적혀 있습니다. ※ 남방증장하느님은 잘못 달린 것임.
광목천왕(廣目天王)은 용(龍), 비사사(毘舍闍) 등 두 신을 지배하며, 서주(西洲)를 수호하며 다른 주도 겸합니다. 광목천은 입을 벌리고 눈을 부릅떠서 위엄을 나타내어 나쁜 것들을 물리치므로 광목(廣目) 또는 악목(惡目)이라 하며, 여러 가지 웅변으로써 나쁜 이야기를 굴 복시키므로 잡어(雜語)이라고도 합니다.
용(龍 Nāga)은 비와 바람을 일으키는 신입니다. 나가(那伽)라고 음역됩니다. 인도 신화에 서 뱀을 신격화한 동물로서 인면사미(人面蛇尾)의 신입니다. 용은 큰 바다에 살면서 구름을 불러 비를 내리는 마력을 갖고 있다고 믿어졌으며, 경전에는 용에 대한 설화가 많이 실려 있습니다.
비사사(毘舍闍)는 범어 Piśāca로 전광귀(顚狂鬼)ㆍ식혈육귀(食血肉鬼)로 번역합니다. 일명 사람의 정기를 뺏는다하여 담정귀(噉精鬼)라 합니다. 용신(龍神)과 함께 광목천 을 따라 서방을 수호하는 귀신인데 혹은 동방 지국천이 영솔한다고도 합니다.
광목천왕의 지물(持物)은 대표적인 것이 한 손에 용(龍)을 잡고, 다른 한 손으로는 여 의주(如意珠)를 들고 있는 형태입니다.
북방다문천왕(北方多聞天王)
'북방다문하느님'이란 안내문이 적혀 있습니다. 그리고 '많은 야차 귀신을 거느리고 부처 님 도량을 지키면서 설법을 들음'이란 글귀가 적혀 있습니다. ※ 여기에 적혀 있는 명찰 서방광목하느님은 잘못 달린 것임.
다문천왕(多聞天王)은 야차(夜叉), 나찰(羅刹) 등 두 신을 지배하며, 북주(北洲)를 수호하며 다른 주도 겸하여 수호합니다. 다문천은 비사문천(毘沙門天)이라고도 하며, 항상 부처님 의 도량을 옹호하면서 설법을 듣는다고 합니다.
야차(夜叉)는 약차(約叉), 열차(悅叉)라고 음역하며, 능담귀(能噉鬼), 첩질귀(捷疾鬼), 경첩 (輕捷), 용건(勇健), 포악(暴惡) 등으로 한역 됩니다. 인도 신화시대에는 북방 산악지대에 사는 구베라(財寶神)의 권속으로서 사람을 잡아먹는 포악한 신이었지만, 불교에 들어와서 는 팔부중의 하나가 되어 나찰 등과 함께 북방 비사문천의 권속이 되었습니다. 불법 수호 를 목적으로 하고 있으나, 북방의 수호 또는 재보(財寶)를 지키는 역할도 갖고 있습니다.
나찰(羅刹)은 범어로 락샤사(Raksasa)라고 하는데 원래는 고대 인도의 신이었는데, 불교(佛 敎)에 들어온 이후는 악귀(惡鬼)의 총칭이 되었습니다. 가외(可畏)ㆍ속질귀(速疾鬼)ㆍ호자 (護者)라고 번역합니다. 나찰 중에는 지옥에서 사람을 괴롭히는 임무를 맡고 있는데, 이들 을 아방나찰(阿傍羅刹)이라고 합니다. 그들은 바다 가운데의 섬에 나라를 이루고 산다고 합니다. 남성신은 나찰사(羅刹娑) 혹은 나차사(羅叉娑)라고 음사(音寫)하며, 여성신은 나 찰사(羅刹斯) 또는 나차사(羅叉私)라고도 음사합니다. 남자는 추하게 생겼고, 여자는 아름 답게 생겼으며, 언제든지 사람의 혈육(血肉)을 먹는다고 합니다. 공중을 날아다니는데 아 주 빠르며 무섭고 포악한 귀신이라고 합니다.
불교에 수용되어 호법외호신이 된 이후에는 야차와 함께 호법천왕인 사천왕 가운데 비사 문천의 권속에 들어가 활동합니다. 소머리에 사람손을 가진 우두인수(牛頭人手)에 소발굽 모양을 가지고 있으며 힘이 세다고 합니다. 또는 말, 사슴, 양, 토끼 모양의 머리를 하고 있다고도 합니다.
다문천왕의 지물(持物)은 대표적인 것이 불탑(佛塔)입니다. <다라니집경>에는 왼손에 창 (혹은 방)을 잡아 땅을 짚고, 오른손에는 불탑(佛塔)을 든다고 하며, <일자불정륜경>에는 왼손에 창, 오른손에 금강저(金剛杵)을 든다고 하고, <약사여래유리광칠불본원공덕경>에 는 왼손에 막대(棒), 오른손에 불탑을 든다고 되어 있어 일정치 않습니다.
범종각 모습입니다.
보제루(普濟樓) 모습입니다.
대승사에서도 누각을 지나 대웅전으로 향했는데 여기도 똑같습니다.
누각 옆의 건물은 설선당(說禪堂)입니다.
보제루 주변풍경
설선당과 보제루 누각 사이로 난 계단을 오르면 대웅전이 나타납니다.
보제루(普濟樓) ※ 참고로 가져온 사진임.
보제루 사진이 시원치 않아 참고로 사진을 모셔왔습니다. 보제루가 산뜻한 모양을 하고 있 으나 1997년 12월 대화재로 소실된 후 다시 중건한 모습입니다. 이 보제루 옆 설선당도 이 때 불탔다고 합니다.
운달산김룡사 사액과 보제루 편액. 초정 권창륜(艸丁 權昌倫) 선생 글씨
김룡사에는 초정 권창륜(艸丁 權昌倫) 선생 글씨가 많습니다. 아름다운 글씨가 눈을 즐겁 게 합니다. 초정 권창륜(艸丁 權昌倫 1943~) 선생은 예천 용문면 능천리 출신으로 5서(전 서, 예서, 해서, 행서, 초서)를 다 섭렵하고 사군자, 전각, 문인화 등 다양한 분야에 능한 것으로 정평이 나 중국, 일본 등 동남아 서예인들이 선생을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로 유명 하다고 합니다.
이제 대웅전으로 향합니다. 대웅전은 다음에 이어집니다.
☞ 다음은 김룡사 2부가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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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예전에 같다왔던기역이새록새록 납니다
이번에 갔다 온 생각이 난다는 것인지 왕년에 갔다 온 것이 생각이 나시는 건지... _()_
자세한 설명 감사합니다. _()_
감사합니다. 김룡사의 전나무는 강원도 오대산 월정사의 전나무 숲과 더불어 유명한 숲길인데 전나무가 무척 굵고 높습니다. 아름드리 나무가 얼마나 굵은지 증명해 보이셨네요. _()_
자세한 설명 감사합니다.사찰을 순례다녀도 건성으로 다니는데 자세한 설명을 보니 많은 도움이 됩니다._()_
성지순례 다니실 때 옆에 계시면서 자꾸 질문을 해 주셔야 무엇인지 아실 수 있습니다. 저는 사진 찍느라 늘 뒤쳐지기 십상입니다. _()_
사천왕 사진을 찍어 자료로 활용한 분들도 있을 것 같은데 백우님께서 전화를 하셨으니 빨리 고쳐질 것 같군요. 권상로 스님에 대한 사적비도 잘 읽었습니다. 내용이 많이 길군요. _()_
오전에 전화를 하니 안 받아서 오후에 전화를 했더니 받더군요. 천왕문 사천왕상에 대하여 조목조목 이야기 했더니 즉각 시정하겠다고 했습니다. 전에도 누가 이야기 한 적이 있었는데 무심히 넘겼는 모양입니다. 그래서 수많은 사람들이 찾는 사찰이니 빨리 고쳐서 참배객들로 하여금 착각하는 일이 없도록 해 주세요 하고 재 부탁드렸고 시정을 재 약속했습니다. 권상로 스님을 선생이라 표현한 것이 이외였습니다. 권상로 스님은 불교에 대한 지대한 공헌이 있는가 하면 친일승으로 명단에 올랐습니다. 그 당시 내로라하는 학승들이 친일행각을 벌인 사람들이 많습니다. 안타깝게도... 음과 양이 존재합니다. _()_
역시 백우님~~ 좋은(똑바른) 도반 덕분에 늘 행복과 감사할 따름 이지요, 알고(예전에 지적) 있으면서 시정 안한 이유를 모르겠내요....
아, 그렇군요. 새로운 정보를 알게 되었습니다. _()_
어찌 하나도 기억이 안나내요, 그냥 건성으로 들러리 갔던 기억만!! 염화님 미소님 이쁜 모습 다시보니 넘 좋으내요....나무묘법연화경()()()
권상로스님()()() 본향 = = = 안동권 ( 權 ) = = = 산수산 본향 ,,, 산세가 수려한 곳은 큰 스님 들의 수행처로 제격인가 봅니다.. 사찰화재 = 단오절 소금단지 잘 묻어야 합니다. 다음엔소금보시 ()()() 잘 보고 설명을 새기며 ()()() 보제루 화재는 1997. 12 IMF 시기에 관심을 받을수 없 습니다. ...
권상로 스님과 본향이군요. 사찰의 원인 모를 화재 중 정신병자의 소행, 외도들의 소행 등이 많지요. 한 번 화재가 발생하면 전소되기 쉽고, 번지기 쉽고... 복원하려면 수억이 들어가고... 화재 무섭습니다. _()_
사천왕의 잘못된 안내글을 바로잡으셨군요. 아름드리 전나무 숲과 사천왕 석상... 예비 배터리 미 준비로 김용사의 아름다움을 담지 못했네요. 잘 봤습니다. _()_
사찰을 순례하다보면 수많은 오류를 보게 됩니다. 그런데도 당 사찰에서는 고칠 생각들을 안 합니다. 제가 사찰 순례기나 주련에서 그 잘못을 지적한 예가 수도 없이 많습니다. 이를 당 사찰에 보내기 운동을 해야 할 것 같습니다. 당 사찰에서는 오류를 알고 있는지 어쩐지 모르지만 그 얼마나 된다고 바로 잡지 못하는지 모르겠습니다. 하기사 얼굴과 같은 각 사찰의 홈페이지 오자도 고칠 줄을 모르는 것이 현실입니다. _()_
백우님 긴글 쓰시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_()_
세세한 설명 올리시느라 수고 많으셨습니다 김용사 입구 전나무는 오래도록 기억에 남네요 다시한번 가고 싶네요 감사합니다 _()_
아무래도 김룡사를 비롯한 이 일대 다시 가봐야 할 것 같습니다. 월정사 전나무 숲길과 더불어 김룡사 전나무 숲길은 유명하지요. 감사합니다. _()_
김룡사에 대한 글 잘 읽었습니다. 오류도 바로 잡아 주시고... 대단하십니다. 읽는 것만해도 벅찬데 어떻게 이런 글을 올리셨는지가 고개 숙여집니다. 감사합니다. _()_
사찰을 방문해 보면 도처에 오자가 많습니다. 사찰관계자들의 무심함이 도에 지나친 것 같습니다. 많은 분들이 찾는 곳인데도... 읽으시느라 수고 많으셨습니다. 읽어 주시는 것이 감사할 따름입니다. _()_
고향 문경두 다녀오셨군요. 관세음보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