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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13일 – 14일. 고치에 올 때, 처음 생각은 주말이면 88개 사찰의 순례길에 나선다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막상 와보니, 그것이 쉽지 않다. 무엇보다도 고치현의 사찰들이 멀찍 멀찍이 떨어져 있는 곳이 적지 않다는 점이다. 그도 그럴 것이, 시코쿠의 네 나라(현) 중에서 가장 땅이 넓은 곳이 고치가 아닌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절 수는 16개로 가장 적다. 그러니 넓게 분포되어 있을 수밖에 더 있겠는가. 37번 이와모토지(岩本寺)에서 38번 콩코후쿠지(金剛福寺)까지는 81.6킬로미터로 최장거리이다. 38번에서 39번 엔코지(延光寺)까지도 51.4킬로미터나 된다.
이런 거리라면, 걸어가는 일은 보통 일이 아닐 것이다. 하지만 차를 타면 그렇게 먼 거리는 아닐 것이다. 그러나 교통편을 생각하면 그렇게 편이한 것도 아니다. 시코쿠 전체적으로 기차가 안 다니는 곳이 많다. 38번을 가려면, 기차로 가더라도 중가에 내려서 버스로 갈아타야 한다. 약 100분은 다시 더 달려야 한다.
한번 길을 나서서 몇 개의 절을 순례할 수 있을지도 알 수 없다. 거리와 시간, 교통편의 파악이 쉽지 않다. 뿐만인가? 비용도 만만치 않다. 일본의 물가 중에서, 비싼 것은 교통비다.
이런 이유로 고뇌하는 나를 보고서는, 아내가 추천하기를 “여행사에서 투어로 순례하는 수도 있으니, 한번 알아보라”고 한다. 혹시 싶어서, 고치 역에 있는 “WARP”라는 여행사에 문의하는 여러 개의 상품이 있다. 이 여행사의 상품만으로 88개 사찰 순례가 다 가능하도록 마련되어 있다. 토사, 즉 고치현을 순례하는 것은 세 코스로 나누어 놓고 있다. 그 중에 내가 참가를 결정한 것은, 당연히 가장 어렵다는 35번에서 39번까지 가는 상품이다. 거리가 멀어서 시코쿠 순례길에서도 난소(難所)로 분류되는 곳들인데, 보다 편리하게 갈 수 있게 되었다.
더욱 좋은 것은, 고치현만이 아니라 에히메(愛媛/伊豫)현의 사찰들 중에서도 서남부에 뚝 떨어져 있는 절 4개, 즉 40번 간지자이지(觀自在寺)에서 43번 메이세키지(明石寺)까지 절 네 곳을 더 추가해서 1박 2일 코스다. 비용도 1박 4식을 포함해서 2만 5천엔이다. 물론 이 9개의 절을 다 순례하려면, 돈이 얼마나 더 들지는 알 수도 없다.
그래서 이 여행사의 상품에 가입해서 순례를 해보기로 했다. 거리, 교통, 시간, 그리고 비용의 면에서 이익이 되리라 기대되는 이상으로, 나는 “일본사람들은 어떤 마음으로 순례를 하는지” 그 안에 들어가서 알아볼 수 있으리라는 점에서 더욱 기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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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 고민한 것이 복장의 문제였다. 여행사에서 불특정다수에게 판매하는 상품인데, 콩고즈에(金剛杖)를 집고 스게카사(管笠)를 쓰고, 하쿠이(白衣)를 입고 가다면 틔는 것은 아닐까? 혹시라도 사복을 입고 갔는데 일본사람들이 그렇게 갖추어 입고 온다면, 나 혼자 백조(白鳥) 가운데 흑조(黑鳥)가 되는 것은 아닐까? 고뇌에 고니를 거듭한 끝에, 순례복장으로 가기로 했다.
아침 10시에 출발인데, 9시 20분부터 ‘접수’가 시작된다. 미리 예약을 하고 대금결제까지 다 했으므로, 출석만 확인하면 되었다. 그런데 버스에서의 자리를 도표로 그려놓고서, 지정해 준다. 운전사 뒤로 두 번째 자리가 내 자리다.
버스에 타니까 여행사 직원 가이드가 인사를 하고, 유인물과 지도 1장을 나누어 준다. 그 유인물에는 “참배의 마음가짐”, “참배의 방법”, 그리고 절에서 독송하는 경전과 진언들이 적혀 있다.
비로소 나는 일본사람들은 순례를 어떻게 하는지 그 실제를 알고, 경험해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책에서도 읽어보지 못한 이야기들이다. 간략히 제목만 옮겨보기로 한다.
“참배의 마음 가짐”
. 십선계(十善戒)를 지킨다.
. 마음으로 기도하고, 가능하면 “반야심경”을 외운다.
. 납경장(納經帳)에는 먹으로 써서 받고, 붉은 도색을 받자.
. 길이나 절에서 만나는 순례자에게는 인사를 한다.
. 콩고즈에(금강장)를 매일 씻어서 정해진 장소에 둔다.
. 걸으면서는 보호(寶號)인 “나무다이시헨죠콩고(南無大師遍照金剛)”를 외운다.
. 출종(出鐘, 참배 이후에 종을 치는 것)은 하지 않는다.
. 동행이인(同行二人), 코우보 대사와 함께 걷는다.
작년 여름 우리의 강좌기행 때, 콩고즈에를 사서 집고 다니기만 했지, 저녁에 호텔에 도착해서는 땅을 집고 다닌 부분은 스스로 씻어야 한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콩고즈에는 코우보 대사를 상징하는 물건이다. 그러므로 콩고즈에를 씻는 것은 코우보 대사의 발을 씻어드리는 일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
“참배의 방법”
1) 산문을 들어갈 때 ; 합장해서 절을 1번 한다.
2) 손을 씻는다.
3) 종루에서 종을 친다.
4) 먼저, 법당(本堂)으로 간다.
5) 다음에, 대사당(大師堂)으로 간다.
6) 산문(혹은 경내)을 나올 때 ; 합장해서 절을 1번 한다.
이 “참배의 방법”은 실제로 일본의 순례자들과 함께 해보니까, 이해가 되었다. 그동안 특히 알기 어려웠던 것이 본당과 대사당에서 어떤 의식을 행하는가 하는 점이었다.
우선 개인적으로 촛불을 켜고, 향을 사룬다. 이 촛불과 향은 개인적으로 준비해 다닌다. 그것들을 담고 다니는 백이 ‘순례자 백’인데, 당연히 그 역시 하얀 색이고 ‘同行二人’이라 씌어져 있다. 집에서 사경한 것이 있거나, 오사메후다(納 札 : 주소, 이름 등을 쓴 축원지)를 가지고 온 경우에는 그것들을 넣어라고 마련해 둔 함에 넣는다. 그리고 정성껏 불전함에 불전을 희사(喜捨)한다.
그리고는 단체순례의 경우, 작은 목탁을 든 인솔자(센타츠/先達)의 집전으로 독송을 한다. 그 순서는 다음과 같다.
1) 개경게(開經偈)
2) 반야심경
3) 십삼불진언(十三佛眞言) 3창(唱)
4) 광명진언
5) 보호(御寶號)
6) 회향게(回向偈, 일본에서는 ‘회향문’이라 함)
그런데 본당과 대사당에서의의식이 좀 다르다. 본당에서는 1)에서 6)까지 다 한다. 그러나 대사당에서는 1)과 3)은 하지 않는다. 1)은 본당에서 독경을 시작(개경)했으므로 생략하는 것이고, 3)의 경우는 코우보대사를 모신 대사당에서는 당연히 하지 않는 것이다. 3)십삼불진언은 본당에 모시는 불보살님들에 각각 해당하는 진언들을 외는 것이다. 이는 우리나라에서는 보기 어려운 경우라 할 수 있다. 각 절마다 본당에 모신 부처님이나 보살님이 누구냐에 따라서, 그 외우는 진언이 달라진다. 여행사에서 나눠준 유인물에는 이 십삼불진언이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어 있다. 또 우리가 순례를 할 35-43번까지의 9개 사찰의 본당에서 외울 본존의 진언들을 또 따로 모아두었다.
십삼불진언에는 관세음보살진언은 있지만, 십일면관음이나 천수관음의 진언은 없는 것이다. 그것들은 다 다르므로, 그렇게 이중으로 정리해 둘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실제로 40번 간지자이지(관자재사)에서는, 시간관계상 먼저 대사당부터 참배하기로 하였다. 본당에서 먼저 참배하고 있는 다른 팀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이때는 대사당에서이지만 1)개경게를 했다. 그렇게 했다면, 본당에서는 1)개경게를 생갹할 법도 하지만 그렇게는 하지 않았다. 본당에서 다시 1)개경게를 한번 더 하였다.
단체순례를 인솔하는 리더를 ‘선달’이라 함은 앞서 이야기했지만, 우리 순례단의 선달은 바로 여행사의 남자 직원이었다. 중년의 아저씨인데, 하쿠이(白衣)와 와게사(輪袈裟, 가사를 간략히 한 것)까지 착용하고서, 작은 목탁을 치면서 독송을 인도한다. 의식을 시작하기 전에 먼저 순례자들을 향해서 “그러면 잘 부탁합니다.”라고 고개를 숙인다. 그리고 다 끝나고 나서는, 모두 개인적으로 합장을 해서 속으로 뭔가를 염원한다. 그런 시간을 가진 뒤, 다시 선달은 순례자들에게 고개를 숙이고 “감사합니다”라고 인사를 한다.
출발지인 고치역에 모일 때 복장은 거의 사복이었지만, 버스에서부터 옷을 갈아입는다. 16명의 참가자 중 1-2분을 제외하고서 모두 하쿠이와 와게사를 한다. 하쿠이나 와게사는 서로 대체가능하므로, 둘 중 하나만 해도 된다고 한다. 그럼에도 둘 다 하는 분들이 많다.(와게사를 착용한 경우에는, 화장실이나 식당에서 식사할 때는 반드시 와게사를 벗어야 한다. 이 역시, 나는, 작년에는 몰랐다.)
비록 여행사의 순례상품이지만, 여행사나 참가자들이나 결코 ‘관광여행’이 아니라 ‘순례’의 마음가짐으로 임하고 있었다. 의외로 놀라운 장면이 아닐 수 없었다. 순례에 임하는 일본사람들의 마음가짐을 다소나마 엿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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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여행사 주최의 순례에 동참한 분은 모두 16명이다. 나보다 젊게 보이는 분은 보살님 1분 정도, 그 다음에는 내가 가장 젊다. 모두 연배가 있으신 분들이다. 60대 이상, 70대, 80대까지의 할아버지와 할머니들이다. 점심 때, 같은 식탁에서 식사를 함께 한 할머니가 가장 고령자로 보이는데 80대인 것은 확실하다. 상체가 약간 굽은 듯 하지만, 보행에 전혀 이상이 없으셨다. 센다이(仙台)에서 홀로 사신다고 ---. 묻지도 않는 말씀을 많이 하신다.
부부가 함께 동참하신 분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분들이 더 많다. 그래도 1박을 할 때는 헤어져서 자야 한다. 남, 녀 각기 별도의 방에서 잔다. 1방에 5인 정도씩 배정해 준다. 1박의 장소는 38번 콩고후쿠지가 있는 아시즈리 미사키(足@岬)이다. 고치현의 가장 서남부에 있는 곶인데, 고치현 만이 아니라 시코쿠 전체에서도 가장 남쪽에 있는 땅끝마을이다. 아시즈리 미사키의 국제호텔에 도착하기도 전에, 버스에서 방번호가 적혀 있는 작은 종이를 하나씩 나누어 준다. 나는 308호이다.
알지도 못하는 일본 사람들과 함께 같은 방에서 1박을 하는 것도 처음이다. 흔치 않은 경험이다. 저녁을 먹고 나서, 버스에서 내 앞에 앉았던 사카이(酒井) 아저씨와 치바(千葉)에서 온 거사님 한 분과 이야기를 많이 나누었다.
놀라운 것은, 이번 여행의 동참자들 중에 시코쿠나 코치에서 온 분은 별로 없는 것같다는 점이다. 사카이 아저씨는 와카야마(和歌山)에서 오셨고, 또 한 분은 사이타마(埼玉)에서 오셨다.
나는 5월 13-14일의 1박 2일 코스에만 참여했지만, 어제부터 참가한 분들도 있고, 또 이 코스가 끝나고 난 뒤에 다시 마츠야마(松山)로 가서 15일에 행하는 이요(에히메현)의 사찰순례에 또 나서는 분들도 많다. 그런 분들과는 우노마치(卯之町)라는 작은 기차역에서 헤어지게 된다.
일본 사람들도 길이 멀고, 교통비나 숙박비가 많이 들어서 고뇌가 많다. 한번에 다 88개 사찰을 돌지도 못하니까, 몇 번에 나누어서 돌고는 한다.
그런데 와카야마에서 온 사카이 아저씨는 이번이 4번째라고 한다.
“세번이나 도셨는데, 또 도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물어봤다. 대답은, 의외로 간단하다. “쿠세(癖)다”
습관이라는 것이다. 인인 박혔다는 이야기다. 순례에 중독이 되었다는 표현이다. 그런가 하였으나, 이 분은 본당이나 대사당 앞에서는, 소정의 독경의식 외에도 무슨 책을 들고서는 개인적으로 독경을 더 하는 분이다. 정녕, 자신의 표현대로 “중독”이 되어버렸다면, 그분의 순례길은 언제까지 계속될 것인가? 궁금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이, 국적도 다른 사람들이 1박 4식을 함께 하면서 순례를 한 인연은 정녕 부처님 인연 이외에, 그 무엇이겠는가. 이름도 모르고, 다시 만날 일도 기약할 수 없지만, 잊을 수 없는 1박이라 아니할 수 없다.
(2013. 5. 18. 高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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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이 글은 35-43번 납경장을 쓰기 전에 총론으로서 쓰인 것입니다. 그래서 35번 앞에 들어가야 하기에, 34.5번이라 표기해 둔 것입니다. 9개 절을 순례한 순례기를 써야 하는데, 여기 생활이 "바쁘다" 보니까 시간이 잘 안 납니다. 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
사진 3장을 편집해 넣었습니다. 보시는 데 덜 지겨우시길 바랍니다. 나무아미타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