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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학교에 대한 내 최초의 기억은 그리 달갑지 못한 것이었다. 어머니와 손잡고 간 입학식날 말고 혼자 등교했던 첫날로 기억한다. 어머니는 학교의 지시대로 모자도 샀고 뱃지도 샀다. 짧은 채양이 달린 검정색 모자였는데 그 모자의 정 중앙에 구멍을 뚫고 별 모양의 모표를 달았다. 반짝반짝 빛이 나는 황금색 모표였다. 모표 뒤쪽에 납땜으로 양 갈레 발을 붙여 놓았는데 그 발을 모자 구멍으로 집어넣어 양쪽으로 펼치면 고정이 되었다. 등에 멜 가방을 고르는데 어머니가 꽤 고심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결국 그 중에서 제일 비싼 가죽 란도셀을 고르셨는데 덮개엔 말을 타고 로프를 돌리고 있는 카우보이가 새겨져 있었다. 드디어 등교 첫날 하늘은 맑고 태양은 눈부시게 빛났다. 나는 모자를 쓰고 란도셀을 메고 손에는 신주머니를 들고 가슴에는 손수건을 찬 완벽한 차림으로 의기양양하게 등굣길을 혼자서 걸어갔다. 드디어 학교 교문이 보였다. 교문은 활짝 열려 있었고 왁지지껄하게 떠드는 소리와 함께 아이들이 뛰어노는 모습이 보였다. 그러나 나처럼 완벽한 옷차림의 아이는 별로 보이지 않았다. 모자도 안 쓰고 가방도 메지 않고 그냥 동네에서 뛰어놀던 구정물이 줄줄 흐르는 그 모습 그대로인 아이들도 많았다. 나는 좀 어색하긴 했지만 그들과 다른 내 모습이 자랑스러웠다. 아이들이 곧 나를 부러움과 찬탄의 시선으로 바라볼 거야,라고 생각하는 순간 번개처럼 빠르고 억센 손길이 내 모자 위를 덮쳤다. 나는 순간 너무 놀라고 당황하여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나는 얼른 손을 머리 위로 올려 모자를 확인해 보았다. 모자를 쓰지 않은 까까머리 애 하나가 분명 뭘 훔쳐서 달아나고 있었다. 그 애는 어찌 빠른지 내가 제 정신을 차리고 모자를 더듬거리고 있을 때 벌써 교문 밖을 빠져나가 마지막으로 나를 힐끔 돌아보기까지 하였다.모자의 중앙에 모표는 깜쪽같이 사라지고 모표가 있던 자리에 구멍만이 남겨졌다. 모자에 송곳으로 구멍을 뚫고 새 모표를 단단하게 고정시키던 어머니의 모습이 떠올랐다. 거울 속에서 이리저리 모자의 각도를 재보던 나와 어머니의 모습도 떠올랐다. 내가 모표를 도둑맞은 걸 알면 어머니는 나보다 더 놀래시고 실망하실 것이다. 그 애는 내가 태어나서 최초로 겪은 도둑이자 악인이었다. 어머니의 따뜻한 양수에 감싸여 지내다가 생애 최초로 물벼락을 맞은 꼴이었다. 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영문을 알 수 없었지만 자꾸 내가 무슨 잘못을 저질렀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랑스럽던 기분은 순식간에 사라져버리고 버림받은 개처럼 초라하고 비참한 느낌만 들었다. 기쁨으로 빛나던 학교가 악머구리들의 어두운 소굴처럼 보였다. 그것이 내 학교 생활의 시작이었으며 평생 약육강식에 시달렸던 내 인생의 불길한 서막이었다.
오른쪽 동네가 조용하고 부유한 주택가였다면 왼쪽 동네는 큰 차도가 있었고 아이스케키를 팔던 제과점도 있었고 훗날 큰 기공사가 된 선반 공장도 있는 번잡하고 시끄럽고 좀 격이 떨어지는 동네였다. 우리집은 그 두 동네를 잇는 좁은 골목길에 있었다. 그 당시에는 드문 이층집이었는데 일본인이 살았던 적산집을 거의 개조하지 않은 채 우리가 살게 되었다. 나는 이층으로 오르는 나무 계단이 내부에 있는 것이 너무 신기해서 쉴새없이 오르락내리락거렸다. 밥 먹으라고 부를 때면 서너 계단 씩 뛰어내려오기도 하고 떼굴떼굴 구르기도 했다. 그 계단 아래에도 방이 하나 있었는데 따로 출입문과 부엌이 있어서 항상 세를 내주었다. 지금 같으면 층간 소음이네 뭐네 하면서 시비 끝에 흔히 사람도 죽이는 세상이지만 그때만 해도 세입자들은 그 정도 불편은 으레 그러려니 하고 살았던 거 같다. 한 번은 그 방에 혼자 사는 여자가 살았는데 어머니는 그녀를 댄서라고 불렀다. 카바레에서 남자들과 춤춰주는 것이 직업이라고 하는데 그것이 어떻게 돈이 되는지 궁금했다. 어머니와 동네 여자들 사이에 대화를 들으니 대략 짐작이 갔다. 남자들이 춤을 추고 싶으면 티켓을 사야 했고 인기가 있을수록 그 티켓들이 많이 팔린다고 했다. 나는 티켓 한 장씩을 받고 한 번씩 춤을 춰주는 그녀를 상상했다. 그러나 평상시의 그녀를 보면 그런 상상들이 어쩐지 터무니없이 여겨졌다. 그런데 어느 날 우연히 그녀의 진면목을 보게 되는 일이 생겼다. 우리집은 골목길 안에서 또 한번 꺾어지는 작은 골목의 막다른 집이었다. 호젓한 골목 끝에 대문과 변소가 나란히 붙어 있었다. 대문을 열고 들어가려다가 어쩐지 변소에서 인기척이 느껴져 널판 틈새로 안을 들여다보았다. 어둠 속에 그녀의 흰 엉덩이가 보였다. 엄청나게 크고 둥근 엉덩이였다. 나는 곧 눈을 떼고 조심스럽게 대문을 열고 들어갔지만 뭔가 큰 비밀을 보아버린 느낌이 들었다. 나는 남자들이 돈을 주고 티켓을 사서 그녀와 춤을 추는 그 어리석은 행동이 혹시 그녀의 엉덩이와 관련이 있지는 않나 하는 말도 안 되는 의심을 하게 되었다.
앞집은 철이네 집이었다. 철은 내 친구였는데 골목대장 격이었다. 특별히 잘 하는 건 없었는데 놀이 같은 걸 주도하는 능력이 있었다. 죽은 그의 아버지는 차장 검사였는데 그가 슬며시 흘린 말로는 그건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높은 지위라는 것이다. 그것은 어른들의 이야기를 들어서도 사실인 듯싶었다. 지위가 높았던 만큼 일찍 죽은 그의 아버지의 빈 자리는 크고 음험했다. 한 때 그의 아버지보다 더 위세가 당당했다는 그의 어머니는 사람들 앞에 거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으며 몸이 많이 아프다는 소문만 돌았다. 그의 집은 항상 어둠에 휩싸여 있었으며 가끔 철이의 형들이 죽일 듯이 서로 싸우는 소리만 들렸다. 철이 집에서 개를 한 마리 키웠는데 왜 그런 개를 키우는지 의문이었다. 개는 보기에도 끔직하게 엉덩이 밖으로 붉은 창자가 빠져나와 있었고 그럼에도 죽지 않고 동네 안팎을 싸돌아다녔다. 동네 사람들은 탈장한 그 개만 보면 왜 개장수에게 팔지 않누 하면서 혀를 찼다. 철이는 자기 개를 못 본 척했지만 그래도 간혹 개밥을 주는 모습이 눈에 띄곤 했었다. 고시 공부를 한다는 겉늙은 큰형을 비롯해서 누구도 돈벌이에 나서는 사람이 없는 철이 집은 누가 봐도 몰락의 기운이 역연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학교에 다니는 철이 누나는 동네에서 제일 예뻤다. 청초하고 고고하게 보이기까지 했다.
골목길 오른편의 부자 동네에서도 준의 집은 단연 눈에 띄는 부잣집이었다. 큰 대문과 작은 샛문이 있었고 사람들은 샛문으로 출입하였다. 샛문 사이로 가끔 들여다 보이는 마당은 흰 자갈이 깔려 있었고 한 쪽엔 예쁜 그네가 매달려 있었다. 지붕 위에 세모꼴 모양의 뾰쪽지붕이 얹어져 있었는데 그 작은 방에 누군가 살고 있는 것처럼 창문이 달려 있었다. 그 집의 내부를 한 번도 들어가본 적이 없어서인지 어쩐지 그 집은 비밀에 싸여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 집에선 그렇게 부자이면서도 항상 검소한 재건복을 입고 다녔던 준이 아버지, 화장이 너무 짙어서 도대체 어떻게 생긴 건지 알 수 없었던 준이 엄마, 그리고 한결같이 공부를 못했지만 속이 좋았던 준이 형제들, 그리고 얼굴을 본 적이 없는 준이 할머니가 살고 있었다. 그 집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들락거렸지만 지금도 기억에 남아있는 두 사람이 있다. 한 사람은 맹인 안마사였는데 준이 할머니가 안마를 좋아해서 가끔 불렀지만 안마를 자주 받으면 인이 박힌다고 지금은 끊었다고 했다. 그러나 그 안마사는 부르든 안 부르든 해질 무렵이면 검은 안경을 쓰고 스틱을 두드리며 동네에 나타나서 준이 집 앞을 지날 때면 길게 피리를 불었다. 또 한 사람은 준이네 입주 가정교사였다는 젊은 대학생이었다. 그는 무슨 일론가 준이네 형제들과 틀어져서 해고당했다. 그러나 그 후로도 한동안 계속 준이네 집을 들락거렸고 그가 만면에 비굴한 웃음을 띄고 나타나면 준이 형제들은 골목 어딘가로 숨기 바빴다. 하루는 함께 어울려 열심히 놀고 있는데 준이네 가정부가 수박을 먹으라며 준이 형제를 불렀다. 그리고 우리들에게도 수박 한 조각씩을 돌렸다. 그 붉은 수박 한 조각은 얼음처럼 차가웠다. 마치 북극에서 수박을 먹는 느낌이었다. 미지근한 물에 하루 종일 식혔다 먹곤 했던 수박 맛과는 차원이 달랐다. 더욱 놀라운 것은 준이네는 항상 언제라도 이런 수박을 먹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 날 나는 처음으로 냉장고라는 기계의 이름을 들었었다. 그리고 처음으로 경이로운 수박 맛을 보았다. 그것은 사실은 부에 대한 감각적 체험이었으며 부의 위력에 대한 깨달음이기도 했었다. 그리고 왜 그 두 사람이 준이 집을 떠나지 못하고 준이 집 주변을 서성거리고 있는지를 어렴풋이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동네 모퉁이에 허름하고 지붕이 낮은 집이 하나 있었다. 나보다 한두 살 어린 종배라는 애가 살고 있었다. 우리 놀이에 잘 끼지도 않았고 별 특징도 없는 조용한 애였다. 그런 그 애를 내가 왜 지금까지 기억하고 있느냐 하면 특별한 사건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당시 유행했던 놀이가 고무 물총 놀이였다. 가끔 서부영화에서나 보던 권총은 그야말로 환상적인 무기였다. 만약 내 손에 진짜 권총이 쥐어질 수 있다면 아마 나는 내 영혼이라도 팔아먹었을 것이다. 고무 권총은 우리의 그런 환상을 얼마간이라도 달래주었다. 총구와 총신도 있었고 무엇보다도 오돌토돌한 격자 무늬가 새겨진 손잡이도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놀라운 점은 다른 장난감 총과는 달리 총알이 발사된다는 점이었다. 물론 총알은 진짜 총알이 아닌 물총알이었지만. 총구를 물 속에 박고 손잡이를 꽉 쥐면 물이 손잡이 쪽으로 흘러 들어왔고 표적을 향해 손잡이를 누르면 물이 찍하고 발사되었다. 문제는 누구를 향해 쏘느냐였다. 상대를 잘못 고르면 화가 잔뜩 나서 돌을 던지는 놈이 있는가 하면 동네가 떠나가라 울면서 욕을 하는 놈도 있었다. 정말 멋진 건맨으로 맞상대할 만한 놈이 하나도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고무 권총은 며칠간 군것질을 참아야 할 정도의 값이 나갔고 그만큼 참을성이 있는 애들은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어쩌다 친척 어른이 준 용돈으로 고무 권총을 산다 한들 쏠 사람이 없어 애꿎은 누나나 식모애에게 쐈다가 어머니에게 욕만 바가지로 먹고 서랍 속에서 며칠 구르다가 없어져버리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종배가 큰일을 내고야 말았다. 골목길에서 시시껄렁한 이야기나 하면서 놀고 있던 우리를 이끌고 문방구로 데려가 전원에게 물총을 사준 것이다. 우리는 돈의 출처 따위를 물어볼 겨를이 없었다. 우리 눈 앞에 벌어진 기적 때문에 거의 이성을 잃을 지경이었다. 어디선가 소문을 듣고 집안에 틀어박혀 있던 놈들도 죄 기어나왔다. 아마 동네가 생긴 이래로 가장 많은 아이들이 모였을 것이다. 이때도 철이가 대장답게 게임을 하자고 제안했으며 간단한 룰도 정하였다. 일단 덩치가 비슷한 애들끼리 가위바위보를 해서 두 패로 나누기. 몸을 숨기고 있거나 도망가는 상대에겐 총을 쏘지 않기. 몸을 드러낸 상대끼리만 당당하게 총을 쏘기. 나중에 휘슬을 불어 게임 종료를 알리면 어느 팀이 더 많이 젖었나로 승패를 결정하기. 그리고 자신은 고무총을 쓰지 않고 공평한 심판으로서 반칙을 적발하고 분쟁을 해결하며 승패를 결정하는 일만 하겠다고 선언했다. 우리는 너무나 흥분하여 자기도 모르게 와하고 함성을 질렀다. 우리 모두에게 총이 있었으며 상대편을 향해 마음대로 총을 쏠 수 있게 되었다. 우리 모두는 건맨이 되었으며 우리편은 착하고 의로운 카우보이가 되었고 상대편은 더러운 악당이 되었다. 그리고 곧 동네는 총격전이 벌어질 황량한 서부 영화의 무대가 되었다. 문제는 얼마나 빠르게 많이 고무 권총에 물을 채우느냐 하는 점이었다. 우리는 미친 듯이 집으로 달려가 물을 채워서는 보이는 족족 닥치는 대로 총을 발사하였다. 그러나 물총의 총알은 너무 빨리 떨어져버렸다. 나중에는 급한 마음에 흐르는 하수도 물에 총을 담그었다. 곧 아이들은 구정물을 뒤집어 쓴 새앙쥐 꼴이 되었다. 날이 좀 어둑해지자 이젠 니편 내편도 없어졌고 싫증난 꼬마 애들부터 하나 둘 살그머니 사라졌다. 그러나 대 난투극의 결말은 결국 종배 집에서 터지고 말았다. 종배가 제 어머니에게 얻어터지며 울부짖는 소리가 온 동네에 울려퍼졌다. 누군가가 종배가 제 어머니 돈을 훔쳤다고 소근거렸다. 우리는 얼굴이 창백해져서 고무 권총을 주머니에 숨기고 뿔뿔이 흩어졌다. 그 뒤로 며칠간 종배 어머니가 종배를 앞세우고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어머니들끼리 옥신각신하다 결국 돈을 돌려받든지 권총을 회수해갈 거라고 걱정했다. 그렇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고 대신 종배는 그 후로 우리 앞에 얼씬도 하지 않았다. 우리는 곧 종배라는 존재 자체를 깡그리 잊어버렸다. 그러나 나는 지금까지 종배처럼 멋있게 돈을 쓴 자를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대학생 시절에 우연히 만난 여자가 국민학교 동창이었다. 경이는 얼굴이 예쁜데다가 성격도 시원시원해서 금세 우리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특히 용기없고 소심한 나같은 사람에게는 그 거침없는 성격이 경이롭고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내 친구들 역시 그녀에게 매료당한 눈치였다. 그래서 그 해 여름 우리는 내내 뭉쳐다녔다. 그녀는 우리에게 여왕벌같은 존재였다. 어쩔 수 없이 우리는 그녀를 중심으로 움직였다. 우리 모두는 그녀를 사랑했지만 그녀는 누구에게도 기울지 않았다. 남녀간의 사랑 따위에는 초연한 듯 싶었다. 그럴수록 우리는 애가 타서 서로 질투하고 치열하게 경쟁했지만 그녀의 부드러운 웃음만 대하면 모든 것이 해결되었다. 뭔가를 감추면서 가식적으로 상대를 대하는 것이 아니라 그녀에게는 몸에서 자연스럽게 배어 나오는 듯한 타고난 배려심이 있었다. 우리는 각자가 자신만이 사랑받고 있다고 착각하거나, 그녀가 사실은 아무도 사랑하지 않는다고 오해하면서 번민의 나날을 보냈다. 하루는 그녀와 나 단 둘이서 만난 적이 있었다. 둘이서 마주 앉으니 새삼 가슴이 떨리고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을 지경이 되어버렸다. 서로에게 공통된 화제를 모색하다가 그녀가 먼저 국민학교 시절 이야기를 꺼냈다. 같은 학교를 육 년간 함께 다녔으면서도 희한하게 한 번도 같은 반이 되 본 적이 없었다. 시내에서 가장 큰 학교였기 때문에 그럴 수도 있었다. 나는 국민학교 동창을 만나면 꼭 확인하는 일이 하나 있었다. 교사 뒤편에 수영장이 있었는데 혹시 기억하느냐고 물었다. 무슨 수영장? 국민학교에 무슨 수영장이 있었겠노? 한결같이 부인했기 때문에 나는 내 기억이 잘못된 것이 아닌가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그 수영장은 곧 없어지고 그 위에 교실이 신축되었다. 그런데 경이는 그 수영장을 기억했다. 그리고 담장은 원래 벽돌담이 아니라 측백나무가 빽빽히 심겨져 담장을 대신했던 것까지 기억했다. 그건 일제시대 때 일본인이 세운 학교였고 일본인 아이들이 주로 다녔던 학교였기 때문에 그래. 한 쪽 구석에 그들이 신사참배하던 정원까지 있었는데 기억나니? 나는 경이의 기억력에 감탄했다. 그녀와 난 기억의 창고 속 깊은 곳에 몇 개의 기억들을 공유하고 있었다. 그 후로 그녀는 내게 더욱 각별한 존재가 되었다. 물론 우리 중의 누구도 그녀에게서 사랑의 확답을 받지 못했다. 그러다 다들 군대가고 그녀와의 연락이 끊겼다. 멀리로 시집갔단 소문만 들렸다. 친구들과 만나도 경이 이야기는 일부러 피했다. 그리고 다들 다른 여자를 만났고 사느라 바빴고 경이는 정말 까맣게 잊어버리게 되었다. 그런데 나는 기억의 회로가 남들과는 좀 달랐다. 정작 실생활에 필요한 경우는 건망증이 심한 편이지만 엉뚱한 것은 오래오래 기억했다. 나는 그녀를 오랫동안 생각했다. 그녀가 했던 말, 그녀를 만났던 곳을 꽤 상세히 기억하고 있다. 한 번도 사용한 적도 없고 물이 차 있는 것을 본 적도 없는 수영장, 곧 없어져버린 그 수영장을 지금도 기억하고 있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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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살다 보면 모든 것이 사라지고, 기억만이 단단하게 남아있는 것 같습니다. 의미 있는 것은 기억 뿐인 것 같습니다.
짧은 소설 한편을 읽는 듯이 생생하고 재미있는 글이었습니다. 제 어린 시절에서는 아무리 조미료를 쳐도 이런 재미있는 에피소드를 뽑아낼 순 없을 것 같습니다. 이야깃거리가 가득한 추억을 가지신 작가님이 부럽습니다. 어쩌면 문장력의 차이일려나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