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대통령 피격 (朴正煕大統領被擊事件) / 육군대령 박흥주(朴興柱)
육군대령 박흥주(朴興柱)
박흥주(朴興柱, 1939년 11월 15일 ~ 1980년 3월 6일)는 대한민국의 군인 겸 정치가이다.
일제 강점기 평안남도 평원에서 출생하였고 지난날 한때 평안남도 평양에서 잠시 유아기를 보낸 적이 있는 그는 1944년 일가족과 함께 일제 강점기 경성부에 이주하여 1945년 조선 광복 이후로도 서울에서 성장하였다. 1962년 육사 18기 육군 소위로 임관한 후 육군 중위 시절 김재규 장군의 전속부관이 되었으며, 이후 중앙정보부로 발령되었다. 1979년 김재규와 함께 10·26 사건을 주도하였으며 당시 현역 군인의 신분이었으므로 다른 피고인들보다 앞서 처형되었다. 그의 사형 집행에 대해서는 재판이 아직 종료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사건 재판 관련 해당 피고인들 가운데 유일하게 현역 군 장교 신분으로 복무 중 기소 조치 처분자라는 것으로 인하여 단심 집행 처형되었기 때문에 논란이 많았다.
원래 군인으로서의 뜻이 있는 사람은 아니었다. 하지만 가정은 박흥주가 대학에 진학할 수 없을만큼 가난했고 이 때문에 등록금이 면제된 대학교인 육군사관학교에 진학했다. 군인으로서 매우 유능해서 40살(1978년)에 이미 대령이었다.
가난한 집안에서 출생하여 서울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육군사관학교에 입교하여 18기로 졸업 및 임관했다. 그 후 대한민국 육군포병학교를 졸업한다. 중위 시절 당시 육군 제6보병사단장으로 재직하던 김재규 장군의 전속부관이 되었으며 이 때부터 김재규와 인연을 맺게 된다.
이후 김재규와의 개인적 친분으로 김재규가 중앙정보부장으로 재직할 때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의 수행비서관이 되었다. 이때 박흥주는 육군 대령이었다.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이 10.26사건 때, 갑작스럽게 박정희 대통령 살해계획을 말하자 박흥주 대령은 경황 중에 가담하게 됐으며 이 때문에 박정희 대통령이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에게 피살당하고 난 뒤 신군부에 의해 군법회의에 회부되어 사형을 선고받고, 범행 당시의 신분이 현역 군인인 관계로 1980년 3월 6일을 기하여 10.26 사건의 연루자들 중 가장 일찍 총살형이 집행되었다. 사건에 대한 재판이 아직 진행 중인데도 사형을 집행한 것은 전례가 없는 일이었다. 그는 김묘춘(金妙春, 1942 ~ )과 결혼하여 딸 둘과 아들 하나를 두었다.<위키백과에서 인용>
10·26 사건
박정희 대통령 피격 사건(朴正煕大統領被擊事件), 궁정동 사건(宮井洞事件)은 1979년 10월 26일에 대한민국의 중앙정보부 부장 김재규가 박선호, 박흥주 및 안가 경비원들과 함께 박정희 대통령을 시해하고, 차지철 경호실장, 정인형 대통령 경호처장, 안재송 대통령 경호부처장, 김용섭 대통령 경호관, 김용태 대통령 운전기사 등을 살해한 사건이다. 10.26사건이라고 부른다.
1979년 10월 26일, 대통령 박정희는 KBS 당진 송신소 개소식과 삽교천 방조제 준공식에 참석한 후 궁정동 안가(독립운동가 염동진의 아지트가 있던 자리, 지금의 청운효자동의 무궁화동산)에서 경호실장 차지철, 비서실장 김계원,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와 함께 연회를 가졌다. 연회 중에 박정희는 김재규의 총에 가슴과 머리를 맞았고 곧 국군서울지구병원으로 이송되었으나 이송 중 사망하였다. 당시 박정희의 나이는 만 62세였다.
김재규는 민주화에 대한 열망으로 독재자 박정희를 처단하였다고는 하였으나, 권력 암투 과정에서 김재규가 차지철에 밀리는 상황이었고 이에 김재규가 충동적으로 일으킨 범행이라는 견해도 있다. 이 살인 사건을 7년간 준비해왔다는 설이 있고, 박정희 정권의 핵개발 추진과 박동선의 코리아 게이트 사건 등으로 한미 관계가 악화되자 미국 정부가 김재규를 통해 박정희의 시해를 은밀히 조장했다는 설이 있다.
박흥주 대령의 유언
▶사랑하는 아내와 딸들에게.
이제 이 한 장의 편지로 그동안의 내 삶을 마감할까 하오. 비록 죽음을 맞이하지만 결코 두렵거나 아쉬움은 없소. 내 부탁하고 싶은 것은 아이들이 이 아빠가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라고 전해 주시오. 앞으로 꿋꿋이 살아갈 식구를 위해 할 말을 다 하지는 못했지만, 언젠가는 진실이 밝혀질 것이라 믿고 있소. 우리 사회가 죽지 않았다면 우리 가정을 그대로 내버려두지는 않을 게요. 정신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도와 줄 것이라고 생각하오. 설령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의연하게 떳떳하게 살아가면 되지 않겠소.
사랑하는 나의 두 딸들아. 아빠가 없더라도 예전처럼 모든일에 떳떳하게 나서거라. 아빠는 조금도 부끄러움이 없는 사람이다. 부끄러운 사람이었다면 너희에게 이런 글을 남기지도 못할 것이다. ... 우리가 살아가면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바로 선택을 어떻게 하느냐에 달린 것이다. 자기 판단에 의한 선택이면 그 선택에 반드시 책임을 져야 한다. 그러므로 후회없는 선택을 해야 하는 것이다. 슬기로운 선택, 여기에 세상의 성공과 실패가 좌우 된단다.
사랑하는 내 딸들아! 이 아빠가 어디에 있든, 언제나 네 엄마의 말을 믿고 따라야 한다. 네 엄마를 잘 돌보고 자신의 일에 충실하는 것이 나를 기쁘게 하는 일이다. 부디 건강하고 사회가 필요로 하는 사람이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내 어린 아들에게도 같은 마음을 전하며...
▶아내가 죽음을 앞둔 박흥주 대령에게 보낸 편지의 일부
법정에서 의연한 모습을 떠올리면 울 수가 없어요. 명예롭게 떠나는 당신의 아내가 눈물을 흘린다는 것이 될 법한 소리인가요. 여보, 그렇지 않은가요. 울지 않겠어요. 아이들과 저는 당신의 죽음이 헛되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어요. 슬픔이 아닌 자랑스러움으로 당신을 기억하겠어요. 세상은 당신을 잊지 않을 거예요. 먼훗날 역사는 당신의 그 자랑스러운 행동을 후손에게 알릴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여보, 당신을 만나 지금껏 살아온 것이 자랑스럽고 행복해요.
여보, 이제는 서로 웃으며 헤어질 때가 온것 같아요. 당신이 나를 믿고 떠날 수 있듯이 저도 당신을 믿고 살아갈 수 있답니다. 당신의 향기를 영원히 간직한 채 살고 싶어요. 우리의 헤어짐이 헤어짐이 아니라는 것을 당신이 더 잘 알고 계실 거예요. 어디가서든 저를 잊지 말고 아내로 맞아주세요. 당신의 아내는 아이들과 함께 꿋꿋하게 살아가고 있을 거예요. 끝으로 보고 싶은 당신에게 제 아낌없는 사랑을 전합니다. 사랑하는 당신. 어색하기는 하지만 당신의 이름 흥주 씨를 부르며 펜을 놓을까 합니다. 흥주씨! - 당신을 영원히 사랑하는 아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