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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세봉(梁世奉) 장군(1896~1934)】 "조선혁명군(朝鮮革命軍) 총사령관"
1934년 9월 20일, 랴오닝성 환인(桓仁)현 대랍자구(大拉子溝)에서 조선혁명군 사령관 양세봉(1896~1934) 장군이 매복한 일본군에게 포위되어 교전하다가 전사, 순국했다. 향년 38세. 이십 대 초반에 무장 항일투쟁을 시작한 이래, 단 한 순간도 총을 내려놓지 않았던 사람, 양세봉은 전투의 현장에서 죽었다.
그는 조선혁명군으로 싸운 다섯 해 동안 일본군과 만주국 군경과 80여 차례 전투를 벌여 일본군 1천여 명을 죽였고, 흥경성, 노구대, 쾌대무자 전투를 승리를 이끈 이였다. 독립군이 좌우로 갈려 좌익은 중국 공산당 휘하로 들어가고, 우익은 중국 본토로 옮겨갔을 때, 만주에 남아 일제와 싸운 독립군은 그의 휘하 조선혁명군 500명뿐이었다.
그는 부하들의 잘못을 관대하게 감쌌으며, 어떤 상황에서도 욕설로 그들을 나무라지 않았던 지도자였다. 병사들에게 궐련을 사주면서 자신은 잎담배를 피운 지휘관이었다. 그는 만주 지역에서 일본군과 가장 오랜 기간 항전을 이어감으로써 일본군 최대의 표적이 된 독립군이었다.
남북의 국립묘지에 안장된 유일한 독립운동가
민족주의 계열로 좌우익 대립의 중심을 지켜, 좌익으로부터 ‘극우’라는 평가를 받았지만, 그의 헌신은 김일성까지 움직였다. 만주에서 좌익의 실책을 지적하여 공동 반일 투쟁을 제안한 김일성을 성찰에 이르게 한 것도 양세봉이었다. 그가 남의 현충원과 북의 애국열사릉에 안장된 유일한 독립운동가가 된 이유다.
양세봉은 평안북도 철산 사람이다. 호는 벽해(碧海), 본명 외에 양서봉(梁瑞鳳), 양윤봉(梁允奉) 등의 이름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16살 때 부친을 여읜 그는 스물에 혼인하였으나 가난으로 호구가 어려워지자 1917년 엄동설한에 가족과 함께 압록강을 건넜다. 만주 영릉에서 중국인의 소작농으로 생계를 이어가던 그는 1919년 봄 홍묘자(紅廟子)로 옮겼다. 국내에서 3·1 만세운동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는 사립 흥동학교 교장 이세일과 함께 주민들을 규합하여 만세 시위 운동을 벌였다.
1922년 겨울, 양세봉은 의주·삭주·귀성군의 국경선에서 항일투쟁을 전개하고 있던 천마산대에 참여함으로써 이후 죽음의 순간까지 이어진 항일 무장투쟁의 대장정을 시작했다. 그는 의주군 옥상면 주재소 습격, 유수동 습격전 등에 참가하면서 전투를 익혔다.
일제의 이른바 ‘토벌’이 시작되자, 천마산대는 만주 유하현으로 이동하여 서간도 지역의 무장 독립군을 통합한 광복군총영(총영장 오동진 1889~1944, 1962 대한민국장)과 합류하였다. ‘광복군 철마 별영’으로 편제된 뒤 양세봉은 별영의 검사관으로 의용군의 훈련을 맡아 독립군 전사 양성에 힘을 쏟았다.
1924년 만주 집안현에서 조직된 대한민국임시정부 직할의 독립군단체인 육군주만참의부(駐滿參議府)가 결성되자 그는 소대장으로 국내 진입 작전에 참여하였다. 1929년, 남북 만주 일대에서 흩어져 활동하던 참의부·정의부·신민부가 통합해 랴오닝성 신빈현 흥경에 본부를 두고 조직된 국민부 소속 군대로 조선혁명군을 편성하자 제1중대장이 되었다.
▲랴오닝성 신빈현에 있는 조선혁명당 본부 터(현재 중국인 운영 공장)
“조선 혁명의 최후 해결은 조선 노력대중(勞力大衆)의 모든 부대를 동원하여 일본 군대·경찰·헌병·감옥·소방대 등을 근본적으로 격파하고, 정치·경제·문화 기타 제국주의적 제(諸) 시설을 모두 파괴함에 있다. 또한, 조선 민족의 독립 국가 건설을 일본 제국주의의 일체 세력을 구축 박멸하는 것에서만 완성할 수 있다.”
- ‘조선혁명군 선언서’ 중에서
만주사변(1931) 이후 일제가 만주 전역에서 독립군 토벌 작전을 전개하면서 독립군 부대들은 큰 타격을 받았다. 이 난국을 타개하고자 조선혁명당이 신빈현 하북에서 연 긴급회의를 일본 토벌대가 급습하여 조선혁명당의 주요 간부 다수가 붙잡혔다.
만주 유일당 조선혁명군의 대일 전쟁
조선혁명당이 조직을 정비하여 혁명군을 개편할 때, 양세봉은 총사령으로, 김학규(1900~1967, 1952 독립장)는 참모장으로 선임되었다. 그는 중국의 반만(反滿) 항일군인 랴오닝 민중 자위군과 협의하여 한중연합군을 편성하였다. 1932년 3월, 한중연합군은 일본군이 점령하고 있던 영릉성을 공격하여 빼앗았다.
이듬해(1933) 패전한 일본군은 흥경(興京)과 청원(淸原) 지방을 공격했는데, 정보를 사전 입수한 조선혁명군 1천 명 병력은 양세봉의 지휘로 청원지방 수비를 맡고, 1만 명 자위군은 흥경성을 지키도록 했다. 조선혁명군은 비행기까지 동원한 일본군을 기습공격으로 저지하였으나 중국군이 패전하여 남산성으로 퇴각했으며, 대원 30여 명이 희생되었다.
양세봉은 중국군과 연합 작전을 이어가면서 전투에서 잃는 병력을 보충하고자 조선혁명군 군관학교를 설립하고 교장이 되어 직접 군대를 양성하였다. 1934년 7월 중순, 양세봉 부대는 중국 의용군 이춘윤 부대의 잔류병 5백 명과 합세, 무순현 노구대(老溝臺)를 점령하고 1개 연대 규모의 일본군과 교전, 이틀 동안의 격전을 치렀다. 이 승전이 노구대 전투다.
그 뒤 통화현 쾌대무자(快大茂子)에 주둔하고 있는 의용군 최윤용 부대가 일본군 1개 대대의 습격을 받았으나 하였으나 조화선(1892~?, 1995 독립장) 부대의 지원을 받아 물리쳤다. 이때 패퇴하는 일본군을 추격하던 최주봉 부대가 80여 명을 사살하였다.
양세봉은 민족주의 노선을 견지해 만주에서 벌어진 좌우익 대립의 한복판에 있었다. 그는 우익을 대표해 좌익과 맞서 좌익으로부터 ‘극우’로, “조선혁명당 책임자 현익철, 총사령 양세봉, 그리고 참모장 김학규를 ‘3대 살인 반동 영수’”(김학규)로 불릴 정도였다.
출처: 세계한민족문화대전
그러나 그는 중국 공산당의 동북인민혁명군(1936년 동북항일연군으로 확대) 사령관 양정우(본명 마상덕)과 항일의 깃발 아래 함께하기로 합의함으로써 남만주 일대에서 한국과 중국의 연합 항일 기류를 형성케 할 만큼 유연했다. 당시 일본군은 이를 두고 “홍군과 조선혁명군은 이미 함께 보조를 취하기로 합의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동북인민혁명군과의 연합 작전은 양세봉이 전사하고, 1937년 여름 동북항일연군 제1군으로 편입함으로써 조선혁명군이 소멸할 때까지 꾸준히 이어졌다. 쾌대무자 전투와 통화현 강전자에서 일본군 수비대와 벌인 전투 등이 이 연합 작전이 이루어낸 승리였다.
민족주의자 양세봉과 김일성
한편, 만주 안도현 소사하에서 유격대를 창건한 김일성(1912~1994)이 양세봉과 조선혁명군의 명성을 듣고 그를 찾은 것은 1932년이었다. 일찍이 부친인 김형직(1894~1926)과 의형제였다는 양세봉 총사령과 군사적 연대를 제의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이 연대는 이루어지지 못했고, 김일성은 자서전 <세기와 더불어>에서 양세봉의 신랄한 조언에 머리를 조아린 사실을 고백한다. 양세봉은 김일성에게 좌익들이 “투쟁을 과격하게” 하는 바람에 인심을 잃었다는 사실을 날카롭게 지적한 것이다.
“소작쟁의를 해서 농사꾼들을 폭군으로 만들고, 무슨 적색 5월이요, 해가지고서는 지주를 처단하고 이렇게 하니까 중국 사람들이 조선 사람들을 소 닭 보듯이 하거든. 이건 순전히 공산주의자 운동을 한다는 사람들의 실책이야.”
양세봉의 뼈아픈 지적에 김일성은 “초기 공산주의자들이 대중운동을 지도하는데서 범한 좌경적 오류는 유감스럽게도 새 사조를 동경하던 많은 사람의 넋 속에서 공산주의에 대한 애정을 추방하는 가슴 아픈 결과를 빚어냈다. 나는 양세봉 사령과의 담화를 통해서도 만주 지방에서 공산주의 기성세대가 범한 과오의 후과가 얼마나 막대한가 하는 것을 다시 한번 새삼스럽게 절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라고 기록했다.
양세봉의 승전은 역설적으로 일본군의 양세봉 제거 공작을 가속했다. 1934년 9월 19일(음력 8월 11일), 밀정 박창해는 혁명군을 후원하던 중국인 왕명번을 매수한 뒤 중국 항일군과 연합을 논의하자면서 양세봉을 환인현 소황구(小荒溝) 골짜기로 유인했다. 부관들과 함께 왕명번이 보낸 아동양을 따라 대랍자구로 가던 양세봉은 수수밭에 매복하다가 뛰쳐나온 괴한들의 공격을 받아 싸우다가 쓰러졌다.
대원들이 조선족의 집으로 옮겼지만, 상처가 위중하여 한가위를 사흘 앞둔 다음 날 그는 숨을 거두었다. 남만주 일대의 주민들에게 ‘군신(軍神)’으로, 동포들에겐 ‘소작농 장군’으로 불리었던 민족주의자 양세봉의 구국을 위한 헌신이 마침내 마감된 것이다.
혁명군은 양세봉의 시신을 고구려 산성 기슭에 묻었는데, 통화 일본 영사관 경찰이 주민들을 위협하여 묘를 알아냈다. 일제는 묘를 파헤쳐 시신을 꺼내 목을 잘라서 가져가는 만행을 저질렀다. 양세봉의 목은 통화현 시내에 효수되었다.
조선혁명군과 양세봉, 새롭게 조명되어야 한다
해방 후 북한은 양세봉의 부인 임재순과 외아들 의준을 평양으로 초청해 최상의 예우를 다했다. 6·25전쟁 중에는 안전을 위해 다시 중국으로 이주시켰다가 전후에 다시 초청하기도 했다. 1961년 가을, 평양 근교로 이장한 양세봉의 유해는 1986년 9월 평양 애국열사릉에 안치되었다.
남한에서 동작동 국립현충원에 양세봉의 허묘를 조성한 것은 1974년이다. 이로써 그는 남과 북의 국립묘지에 모두 묘를 조성하게 된 유일한 인물이 되었다. 남북 양쪽에서 추인하지 않으면 안 될 만큼 조선혁명군 총사령관 양세봉의 공적이 크고 무겁다는 뜻일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그의 독특한 위상은 그간 남북 대립이라는 시대적 상황에서 양세봉 장군과 그가 지휘한 조선혁명군의 활약상에 대한 적극적인 논의를 불가능하게 만드는 요인”(<조선혁명군 총사령관 양세봉>의 저자 조문기)이라는 사실은 남북과 이념으로 분단된 우리 독립투쟁사의 역설이기도 하다.
민주 지방에서 독자적인 조직으로 활약한 마지막 민족주의 계열 독립군이었던 조선혁명군은 양세봉의 전사 후, 조직을 추슬러 그의 유지를 계승하고자 지속적인 무장투쟁으로 일본을 공격했다. 혁명군은 1935년 중국 의용군과 중한 항일동맹회를 결성하여 연합 작전으로 ‘피의 우의’를 이어갔다.
혁명군은 일본군과 만주국 정부의 수색과 체포 작전으로 내몰리는 과정에서 적지 않은 손실을 겪었고, 일본군과 교전 끝에 포로가 된 중앙집행위원장 고이허(1902~1937, 1968 독립장)는 총살되었다. 이후 전사, 체포, 피살, 처형 등으로 혁명군의 순국이 이어졌다. 1937년 여름, 최윤구(1903~1938, 2005 독립장) 등 60여 명의 간부와 대원들이 환인현에서 정식으로 항일연합군 제1군으로 편입함으로써 조선혁명군은 소멸했다.
랴오닝성 신빈 민족 자치현의 왕청문(旺淸門)은 지금은 퇴락한 시골 마을이지만, 1920년대 말에는 만주 독립군 통합정부인 ‘국민부’가, 1930년대에는 조선혁명군 본부가 있었던 ‘한국 독립운동의 수도’였다. 해방을 10년도 넘게 앞둔 1934년에 스러지고 말았지만, 양세봉이 남긴 흔적은 아직도 전설로 남았다.
지금도 신빈 지역에는 양세봉의 항일투쟁을 기리는 민요가 전하고, 왕청문의 조선족 학생들은 ‘양세봉 장군의 노래’를 불렀다고 한다. 조선족 학교는 폐교되고 말았지만, 교정 한쪽에는 대리석으로 조성한 높이 5.4m의 거대한 조각이 있었다. 1995년 왕청문 인민 정부가 양세봉의 항일투쟁을 기리기 위해 건립한 ‘항일 명장 양서봉’의 흉상이다.
2008년 학교가 한족에게 팔리면서 양세봉 흉상은 2009년에 강남촌 협피구로 이전하였지만, 중국에서 한국의 독립운동가를 기리는 거대한 기념물을 세운 것은 이례적이었다. 그것은 지역 인민들에게 ‘군신’으로 기려지는 양세봉의 ‘기억’과 ‘전설’ 덕분이다.
1962년 대한민국 정부는 조선혁명군 총사령관 양세봉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이 3등급 서훈에 대해 독립운동 단체와 역사학계는 “총칼 한번 안 잡아본 정치인에게는 일등공훈(대한민국장)을 주면서 평생을 총칼 들고 싸운 장군에게 3등 훈장?”이라며 반발했다.
그러나 서훈의 형평성 문제는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문제는 이들의 헌신과 투쟁, 그리고 순국에 이른 역사가 사람들의 기억에서 바래어지고 있는 현실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민족의 위기 앞에 기꺼이 한 몸을 내던진 역사, 그 ‘집단 정체성’과 ‘기억의 쇠퇴’일 터이기 때문이다.
★ 아버지 같고 형님 같은 지도자
양세봉은 군관 업무를 수행한 이후로도 관료 티를 전혀 내지 않았다. 계급의 높고 낮음에 관계없이 평등하게 대했고, 부하들을 사랑했으며, 그들과 동고동락을 같이했다. 군대에 오랫동안 복무했지만 사적으로 자금을 쓰거나 보관하는 일도 없었다. 전투에서 노획한 전리품은 물론이고 친구들에게서 받은 선물도 모두 재정과 회계 관리자에게 넘겨주었다. 다른 장병들과 똑같이 지급받은 보급품 외에 어떤 특별한 대우도 받지 않았다. 그는 호위병과 같이 가마솥에 지은 밥을 나눠 먹었고 거친 천으로 지은 옷을 입었다. 단지 변장을 위해 적군에게서 노획한 황색 일본 군복 한 벌을 받았을 뿐이다. 군마가 한 필 있기는 했지만 총사령부의 용품을 실어 나르는 데 사용했고, 평소에는 늘 군마와 나란히 걸어 다녔다.
1934년 여름에서 가을 사이에 조선혁명군 병사들 중에 탈영하거나 일본군에게 귀순하는 일이 자주 생겨 양세봉은 몹시 화가 났다. 조선혁명군을 배신하고 적군에게 투항한 것이 명백한 자는 반드시 붙잡아 총살형에 처했지만, 일반적인 도망병에 대해서는 관대하게 처분했다. 이러한 공정하고 합리적인 처리에 모든 대원들은 감동했다.
한번은 젊은 병사가 총기를 버리고 도망쳤다. 한 소대장이 이를 눈치채고 즉시 병사들을 보내 붙잡아다가 등나무 넝쿨로 묶고 총살형에 처하려고 했다. 이때 양세봉이 그곳을 시찰하러 왔다. 양세봉이 직접 도망병을 심문했다.
“왜 도망치려고 했는가?”
“최근에 집에서 편지가 왔습니다. 어머니가 상한병에 걸렸는데 돈이 없어 치료를 받지 못해 곧 돌아가시게 되었답니다. 집에 돌아가 어머니를 뵙고 싶었지만 소대장이 말미를 주지 않아 홧김에 총을 버리고 도망쳤습니다.”
“총을 버리고 도망쳤는데, 우리에게 총 한 자루는 한 사람의 목숨과도 같다는 사실을 잘 알지 않는가?”
“제가 총을 버린 건 대단히 잘못한 일입니다. 사령관님이 저를 사형에 처하신다고 해도 아무 할 말이 없습니다.”
“군인으로서 총을 버린 것은 죽을 죄를 지은 것이나, 어머니를 뵙기 위해서 돌아가려고 했다는 것을 보니 자네는 효자라는 것을 알겠네. 오늘 나는 자네를 처벌하지 않겠네. 30원을 줄 테니 집으로 가서 어머니를 뵌 후에 다시 돌아오기 바란다.”
양세봉의 의미심장한 말에 도망병은 목놓아 통곡하며, 양세봉을 생명의 은인으로 여기겠다고 하면서 “이 30원은 인편으로 집에 보내고 저는 그냥 여기에 있겠습니다”고 말했다.
양세봉은 다시 그 소대장에게 병사의 어려운 사정을 알면서 휴가를 주지 않았던 점에 대해 지적하고, 우리 스스로 우리 대원들을 믿어야 한다고 깨우쳐 주었다.
양세봉은 동요하는 장교나 대원들에게 늘 이렇게 말하곤 했다.
“돌아가고 싶다면 언제든 돌아가도 좋소. 하지만 호적이 없는 사람들은 언제가 되든 왜놈 경찰관들에게 죽임을 당할 것이오. 일본의 영사관이 어떠한지는 여러분이 더 잘 알고 있지 않습니까? 그들은 당신들에게 어떤 편의도 제공하지 않을 것이오.”
이러한 권고로 많은 대원들이 도망칠 생각을 품지 않았다.
양세봉은 각급 장교들에게 늘 병사들에게 관심을 갖고, 가정에 어려움을 겪는 병사가 있다면 우리가 그것을 해결하는 데 도움을 줘야 한다고 가르쳤다. 양세봉의 이러한 보살핌에 젊은 대원들은 그를 아버지처럼 모셨고 많은 병사들은 그를 형님으로 여겼다.
양세봉은 부대에 머물 때면 늘 대원들의 숙소를 돌아다니며 잠든 대원의 이불을 덮어 주는 등 자상한 모습을 보였다. 대원들과 함께 불을 피우고 물을 끓였으며 부상자들의 발을 직접 씻겨 주기도 했다. 여물을 썰어 군마에 먹이는 일에도 앞장섰다. 대원들 또한 양세봉과 얘기를 나누며 애국심이 고취되는 것을 느꼈다. 오직 싸움터에서만 매우 엄해서, 그가 눈을 부라리면 모두 두려워했지만 전장에서도 그는 늘 앞장서서 공격했고, 후퇴할 때에는 언제나 맨 마지막에 섰다. 이렇듯 용감하고 과감한 모습에 모든 대원들은 그를 존경했다.
양세봉 장군은 주민들의 생활에도 관심을 가지고 어려움을 겪는 이들의 문제가 잘 해결되도록 발벗고 도왔다. 관할 지역에서 비적들의 약탈이 보고되면 부하들을 보내 빼앗긴 물건을 반드시 찾아오게 했다. 비적을 끌고 와 주민들에게 배상하고 사과하게 한 적도 있었다. 양식이 떨어진 주민을 만나면 사령부에서 절약하여 남긴 양식을 건네주는가 하면, 일본군이나 그들 앞잡이의 창고에서 얻은 것들을 주민들에게 나누어 주며 생계의 어려움을 덜어 주기도 했다.
특히 대원들의 가족이나 희생당한 대원의 집에는 그 지역에서 활동하는 다른 동지들을 시켜서 정기적으로 식량을 보내 생활을 도왔다. 전쟁터에서 얻은 일본군의 의복을 염색해 옷이 없는 주민들에게 나눠 주는가 하면, 농번기에는 대원들을 농가로 보내 일손을 도왔다. 많은 주민이 그에게 고마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양세봉은 조선혁명군의 총사령관을 맡으면서 자신의 지식이 모자라 일하는 데 많은 어려움이 있다는 것을 느꼈다. 그래서 관할 지역 내의 아이들에게 공부를 시켜 나중에 사회에 유익한 일을 할 수 있도록 도와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는 조선인 집단거주지인 촌이나 둔에 학교를 만드는 데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의 노력으로 통화·환인·흥경·관전 일대 곳곳에 조선인 학교가 세워졌다. 또 조선혁명당 교육부에서 직접 교재를 만들어 각 학교에 배포했는데, 이를 베껴 교과서로 삼기도 했다. 교과서의 내용은 민족 사상이나 독립 사상이 풍부해 항일 정신과 조선의 독립을 고취하는 것이었다. 조선인 학교의 설립은 많은 조선인들에게 환영을 받았다.
하지만 장정을 뽑고 세금을 징수하는 문제와 일부 담당자들의 행동상 문제로 주민들 중에는 ‘강제징집’이나 ‘약탈’이라는 나쁜 인상을 갖는 이도 있었다. 또 많은 징집자들이 도망치거나 때로는 적군에게 밀고하기도 했다. 많은 조선인들이 국민부와 조선혁명군 총사령부에 이러한 상황을 보고했다.
양세봉은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조선혁명당 정치부 명의로 간부훈련반을 열었다. 교육을 통해 간부들이 주민이나 대원들의 어려움에 관심을 가져야 하고, 또 대선하는 방법을 모색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동시에 각 부대 혁명당원은 솔선수범하는 모습을 보여야 하고, 자신의 행동으로 다른 장병들에게 좋은 영향을 주며, 대중에게 좋은 인상을 주려고 노력해야 한다고 일렀다.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하부 부대에서는 여전히 이러한 문제가 완전히 해결되지 않았다.
그래서 어떤 조선인은 이렇게 말했다.
“장군님의 방법과 사상은 정말 훌륭합니다. 그러나 아래 일부 사람들이 그것을 흩뜨려 놓는군요.”
어쨌든 당시 양세봉은 사람들에게 높은 위엄을 갖고 있었다.
양세봉은 총사령관이 된 후 강력한 지도력을 발휘하여 과거의 산만하고 단결되지 않았던 상황들을 극복해 냈다. 그는 지휘 능력이 뛰어날 뿐 아니라 너그럽고 후하며 정직했다. 또한 견해가 다른 사람들과 일하는 데도 능했다. 특히 공적인 것을 우선으로 하고 사심이 없어 언제나 대원들의 존경을 받았다. 그가 늘 말하곤 했다.
“위험과 재난 속에서 총사령관을 맡게 되었습니다만, 제가 어디 총사령관 감입니까?”
처음에 조선혁명군 원로 양하산(梁荷山)은 양세봉을 조금 멸시했다. 그는 혁명에 참가한 세월이 누구보다 같다고 생각해서 양세봉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여겼다. 김활석은 교육 수준이 낮은 양세봉에 대해 문제를 바라보는 안목이 짧다고 생각했다. 특히 그는 양세봉이 동북인민혁명군 총사령관 양정우와 연합하려는 결정에 반대했다. 고이허(高而虛)는 그에 대해 조선혁명당 중앙에서 맡긴 직무는 있지만 실제 권한은 없어 자주 문제가 발생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양세봉은 겸손한 품위와 너른 인격으로 마침내 양하산·김활석·고이허 등을 감동시켰다. 그들은 양세봉의 지휘와 지시에 따랐고, 반일과 항일이라는 목표를 위해서 서로 단결해야 한다는 데 동의하고 함께 싸워 나갔다.
★ 친일파에게 암살당하다
일본 제국주의 세력은 항일무장투쟁 단체들을 소탕하기 위해 1934년부터 동북지역에서 이른바 ‘치안 숙정’을 전개했다. 이는 항일무장투쟁 단체들을 대대적으로 포위하여 소탕하려는 대학살작전이었다.
「만주국사」는 이에 대해 “치안 숙정의 주요 목표는 ‘비적’들이다. 하지만 ‘비적’이라기보다는 반일 세력이라고 부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라고 적고 있다.
남만주와 동변도는 일본군 치안 숙정이 중점적으로 벌어지는 지역이었다. 그들은 많은 군경 부대와 특무기관을 이곳에 파견해 항일유격대의 활동을 정찰하고 토벌했다.
일본 관동군과 통화 영사관, 봉천 만주국군 사령부 등이 앞다투어 동변도에 지부를 설치했다. 그들은 특무작업반을 동변도 농촌 깊숙이까지 들어와 온갖 방법을 동원해서 비밀리에 조선혁명군과 항일유격대의 행방을 추적했다.
1934년 8월 말, 만주국군에서 동변도 유격대 특무대장의 직책을 맡고 있는 박장해(朴長海)는 마침내 양세봉의 소재를 알아냈다. 박장해는 통화현 삼과유수촌의 대지주 왕명번(王明番)을 내세워 산림대 우두머리 아동양(亞東洋)을 투항시켯다. 아동양은 예전에 양세봉과 왕래가 있었던 자였다. 박장해는 거금으로 아동양을 매수하고 양세봉에게 사람을 보내 투항을 권유하라고 시켰다. 양세봉은 단호히 거절했다. 박장해는 조선혁명군의 조직력을 와해시키려면 양세봉을 암살할 수밖에 없다고 결론을 내렸다.
9월 19일, 아동양과 관서철 두 사람이 양세봉 부대가 주둔하고 있는 환인현 향수하자촌 북전자둔에 왔다. 그때 양세봉은 한 농가에서 회의를 하고 있었다. 아동양은 양세봉을 만나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그럴듯하게 꾸며 대며 말했다.
“지금 왜놈들의 토벌이 너무 사나워서 저희는 더 견뎌 낼 재간이 없습니다. 제가 부리는 사람들이 장총 70자루와 권총 70자루, 그리고 경기관총도 한 자루를 확보해 보관하고 있습니다. 장군님이 지금 당장 저와 함께 가셔서 받아 주시면 좋겠습니다.”
“저는 이제까지 일관되게 항일 세력의 연대를 주장해 온 사람입니다. 당신의 뜻을 고맙게 받아들입니다만, 지금은 날이 저물었으니 내일 다시 협의합시다.”
꿍꿍잇속이 있던 아동양은 양세봉이 지금 당장 갈 수 없다고 하자, 재차 채근을 했다.
“제가 장군님의 부대에 가세하겠다고 하니 어떤 사람은 이에 반대하여 도망칠 궁리를 하고 있습니다. 장군님이 지금 바로 가시면 여러 무기들과 부대원들을 계속 유지할 수 있을 겁니다.”
이에 양세봉은 그 말을 사실이라 믿고 아동양이 모았다는 장정들과 무기를 인수하기 위해 그날 밤 김두칠·장명도·정광배와 함께 대원 20명을 데리고 아동양을 따라 삼과유수촌에 가기로 결정했다.
아동양이 앞장서서 길을 안내했다. 하늘에 높이 뜬 초승달이 비추는 엷은 달빛만이 조그만 산길을 비추고, 찬바람이 잠을 쫓았다. 일행은 곧 소황구(小荒溝)에 도착했다.
이때 검은 구름이 달빛을 가리면서 산속에 그림자가 지자, 길이 잘 보이지 않았다. 걸음을 재촉하며 앞장서 걷던 아동양이 갑자기 보이지 않았다. 양세봉은 즉시 휘파람을 불고는 “앞에 멈추시오!”라고 소리쳤다. 이때 앞에서 “소변 봅니다”라는 말과 동시에 총성이 울렸다. 변절한 아동양이 권총을 뽑아들고 양세봉을 겨누고 방아쇠를 당겼던 것이다.
순간 수수밭에서 숨어있던 50여명의 만주국군 병사들이 일어서더니 양세봉 일행을 향해 일제히 총격을 가했다. 장명도는 즉시 몸을 엎드리고 총상을 입은 양세봉의 상태를 살폈다. 대원들 일부가 총탄을 맞고 쓰러지자, 김두칠이 황급히 응전하지 말고 후퇴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이 습격으로 6명의 대원이 희생되었다.
장명도·김두칠·정광배는 눈물을 머금고 양세봉을 부축해 향수하자 강변에 사는 조선인 강창준의 집으로 데리고 가 응급조치를 취했다. 양세봉은 곁을 지키던 장명도와 김두칠에게 “나는 더 살 것 같지 않소. 동지들은 끝까지 투쟁해야 하오”라는 말을 남기고 의식을 잃었다.
탄환은 양세봉의 왼쪽 가슴에 정통으로 박혔다. 조선혁명군의 군의관 강해산이 온갖 노력을 다했지만 치명상을 입은 양세봉은 이미 생명이 위독한 지경에 이르렀다. 이튿날 새벽, 양세봉은 조용히 숨을 거두었다. 그의 나이 겨우 41세였다.
슬픈 일이었다. 양세봉 장군에게는 아직 노모와 처자식이 있었다. 딸은 아직 어려서 먹을 것을 가져다 줘야 했고, 아들은 강보에 싸인 젖먹이였다.
조선혁명군 병사들은 양세봉의 시신을 고구려산성 밑에 있는 김도선의 집으로 옮겨 일주일 동안 애도의 뜻을 표했다. 조선혁명당과 국민부, 조선혁명군의 각 로군 책임자들이 다 모여 장례를 치렀다. 9월 25일에는 많은 대원들이 양세봉의 시신을 고구려산성 기슭에 매장했다.
9월 28일에는 일본 통화 영사관 분관에서 양세봉이 피살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군용차에 일본 헌병들을 가득 싣고 향수하자로 달려왔다. 그들은 70여명의 조선인들을 총검으로 위협해 강변에 모아 놓고 즉시 양세봉의 시체를 내놓으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누구 하나 양세봉의 묘지가 어디 있는지 발설하지 않았다. 이때 한 일본군 장교가 오랫동안 조선혁명군을 지원해 왔던 향수하자 둔장 노계풍에게 권총을 겨누며 “양세봉의 시체를 내놓지 않으면 네놈뿐 아니라 여기 모인 사람들을 몽땅 죽여 버리겠다”고 위협했다. 다른 일본 군경들도 일제히 기관총을 들이대고 사람들을 위협했다.
노계풍은 마을 사람들의 안전을 위해 할 수 없이 사실대로 말했다. 일본 군경들은 양세봉의 묘지를 찾아내 시체를 꺼낸 후 마을로 들고 와서 주민들 앞에 내려놓았다. 그러고 나서 김도선이란 노인에게 도끼로 양세봉의 목을 치라고 명령했다. 김도선은 “나는 조선 사람으로서 장군님의 시체를 훼손할 수 없다”며 단호히 거부했다. 그러자 일본 군경들은 그 자리에서 참도(斬刀)를 뽑아 김도선을 베어 죽였다. 동시에 둔장 노계풍을 총살했다. 그러고는 직접 양세봉의 목을 잘라 그 머리를 통화 영사관 분관으로 가져갔다. 그 자리에 모였던 조선인들은 다시 머리 없는 양세봉의 시신을 산성 기슭에 안장했다.
이 비통한 소식이 전해지자 동변도 20여개 현의 조선인들은 큰 슬픔에 잠겼다. 평범한 농민 출신으로 일찍이 독립군에 입대하여 수많은 전투를 치르며 조선혁명군의 총사령관 직위에까지 올라 중국 의용군과의 항일연합전선 구성에 큰 역할을 했던 양세봉 장군의 죽음은 만주 지역의 조선인들에게 비통함을 안겨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