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시절 소묘(素描) 이관수
나이가 들었다는 증표일까?
농가월령가를 읽어보면 내가 어릴 적 농촌풍경이 선하게 떠오른다.
학교에 들어가기 전에는 청천초등(국민)학교 서쪽의 울타리 옆에 있는 허름한 기와집에 살았다.
앞마당엔 해묵은 감나무와 분재처럼 구부러진 복숭아나무가 열매를 맺었고,
뒷마당의 커다란 대추나무에 매달린 그네는 시도 때도 없이 날 불러냈다.
뒷마당에 줄지어 선 탱자나무는 뒷집과의 울타리였다.
학교와 우리 집 사이의 작은 도랑을 따라 골짜기를 타고 산밑으로 조금 올라가면 작은 우물가에
키가 큰 은행나무가 서 있고, 왜가리 떼가 모여앉아 왜~액 왜~액 노래했다.
잠결에 듣던 그 소리는 우물가에 모여든 돼지 떼들이 꿀꿀거리는 꿈이 되기도 했다.
모내기할 때면 동네농악대가 나서서 꽹과리 북 장구를 치며 흥을 돋웠고,
어린 나도 신바람 나서 졸랑졸랑 따라다니며 어깨춤을 추었다.
무더운 여름이면 햇볕에 반짝반짝 빛나는 푸른내에서 벌거벗은 채
‘땅 짚고 헤엄치기’로 해가는 줄 모르던 어린 시절의 여름은 시원하기만 했다.
유월이라 늦여름 되니 소서 대서 절기로다
큰 비도 때로 오고 더위도 극심하다.
초록이 무성하니 파리 모기 모여들고
따 위에 물 고이니 참개구리 소리 난다...
때마침 점심밥이 반갑고 신기하다
정자나무 그늘 밑에 앉을 자리 정한 뒤에
점심 그릇 열어 놓고 보리 단술 먼저 먹세
반찬이야 있고 없고 주린 창자 채운 뒤에
맑은 바람 배부르니 낮잠이 맛있구나
농부야 근심 마라 수고하는 값이 있네 -6월령 중에서-
그때는 왜 그리도 가난했을까? 사실 가난이 뭔지도 모르던 시절이어서 마냥 즐겁고 행복했다.
철부지가 무슨 근심이나 걱정이 있었을까.
그런데 현재와 비교하니 가랑이가 찢어지게 가난했더란 말이다.
원도원리에 사시던 조부는 손바닥만 한 농지를 경작하면서도 일꾼을 두고 살았다니
가난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었다.
해방되자마자 청주로 이사한 우리 가족은 영운동(영월이)에 정착했다.
기와집과 초가집 몇 채가 옹기종기 어우러진 청주 변두리의 작은 마을이었다.
집에서 가까운 곳에는 작은 바위툼벙이 있어서 여름철 놀이터가 되었고,
더울 때면 바위로 기어올라 텀벙텀벙 뛰어내리던 추억이 살아난다.
6.25전쟁 때는 공무원이신 아버지 손에 이끌려 대구까지 피난했다.
다시 돌아와 다니게 된 증앙초등학교에는 군대가 주둔했던 흔적이 남아있었고,
교실의 책걸상은 모조리 사라지고 교실은 맨바닥이었다.
한동안 마룻바닥에서 공부하던 목조 2층은 매우 낡아서 걸음을 옮길 때마다 삐걱거렸다.
수업을 마친 후 청소시간이면 마룻바닥에 양초나 아주까리를 문질러 반질반질 윤을 내는 게
최상의 청소방법이었고 간혹 누군가 고소한 들기름 냄새를 풍기기도했다.
어깨에 책보를 멘 꼬맹이가 영월이에서 학교까지 가는 길은 너~무 멀었다.
그래서 외진 길이었지만 양관(洋館)과 양관을 잇는 구름다리 밑으로 탑동을 거치는 지름길로 다녔다.
여름이면 잘잘잘 노래하며 흐르는 무심천 곁길로 다니기도 했다.
학교 갈 때는 시간에 맞추느라 서두르지만
귀가하는 길은 느릿느릿 느릿... 내 어린 시절은 이미 슬로우시티(slow city)였다.
무심천 길로 들어서면 외진 곳에 허름한 집 한 채가 눈에 들어온다.
6.25전쟁 통에 어디선가 피난 온 한 가족이 살았는데 ‘진태’라는 또래가 있었다.
흙으로 지은 초가집이었는데 그의 어린 동생은 손가락으로 황토방 벽을 후벼 파먹곤 했다.
얼마나 배가 고팠으면! 진태의 큰형은 페인트로 유리에 알록달록 풍경화를 그려
액자에 넣어 내다 팔곤 했던 화가였다.
아마도 그 솜씨에 반해서 난 평생 ‘화가’를 꿈꾸며 살았던가 보다.
진태네 집주변에는 밀밭 보리밭이 길게 누워 있었다.
그곳을 지나노라면 발짝 소리에 놀란 종달새들이 후다닥 하늘 높이 날아오르며 재잘재잘 노래했다.
때로는 밀 이삭을 잘라 손바닥으로 비벼서 입속에 툭툭 털어 넣고 아작아작 씹으면
쫄깃한 껌처럼 입안을 즐겁게 했다. 그건 배고픈 어린 시절에 최상의 간식이 아니었을까?
어떤 때는 동생과 함께 책보(당시엔 가방이 없어서 보자기에 책을 싸서 다녔다)를
무심천 모래언덕에 아무렇게나 내던지곤 물로 텀벙텀벙 뛰어들었다.
그리곤 수초 사이에 숨은 붕어나 미꾸라지를 맨손으로 움켜잡는 즐거움에 빠지기도 했다.
진태와 어울리며 보리피리를 만들어 불기도 했던 어린 시절은 아련한 추억 속에나 남아있다.
“보고 싶다, 진태야!” -觀-
덧글: 상전벽해(桑田碧海)란 말을 이럴 때 쓸 수 있을까?
청천은 물론 청주의 영운동이나 탑동은 별천지나 다름없이 변모했다.
이관수 : 1942년 1월 19일 생
주소 : 충북 괴산군 청천면 도원6길8
덧글: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우리마을 원도원에서는 세 사람이 28회 임꺽정 백일장에 도전했다.
"우리 모두 장원될 때까지 도전합시다!" 격려한 보람이 있어 좋은 결과가 나왔다.
장원에 채성봉 시인이, 차하에 이관수 수필가가, 참방에 채수환 시인이 선택받았다.
길을 몰라 가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갈 길을 알려주는 일도 보람있는 일이라 생각한다. -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