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의 독립에 대한 족적은 영원히 남을 것이자 - 이화림(리춘실) 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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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대부터 문학에 심취되여 이러구러 량산하다보니 그에 따라 받아안은 문학상이20여차는 된다. 수상마다 사연이 있고 감회가 있겠지만 그중 잊을수없는 상이 화림신인문학상이다. 나는 1994년 아동중편소설 “거북구슬”로 제3차 화림신인문학상을 수상했다. 그 상을 잊을수없는건 나의 첫 중편이고 첫 력사소설이며 또 관행대로 그 상의 수상을 계기로 중국작가협회 연변분회 아동분과에 입회할수 있었기때문이다. (지금은 소설분과에 몸담그고 있지만 애초에 나는 아동분과로 작가협회에 입문, 후에 나의 직성에 맞는 쪽으로 분과를 바꾸었다)
리화림녀사를 만나본것은 연변일보사에 입사하여 문화부기자로 뛰던 1994년경이였다. 대련시조선족문화관에서 조선족민속절을 개최했는데 취재차로 대련에 갔다가 그이의 존안을 뵈였다. 민속절이 열리는 운동장의 가녁에 곤색옷에 하얀 운동모를 눌러쓴 가녀린 몸매의 한 로파가 앉아있었는데 역시 나처럼 화림문학상을 수상한 대련의 한 문학도가 그가 바로 리화림할머니라고 알려주었다. 나는 어줍게 다가가 연변에서 왔으며 화림문학상의 수혜자라고 인사를 드렸다.. “연길에서 왔다고?” 반색하며 할머니는 나의 손을 꼭 잡아주었다. 말그대로 신인때이라 어리뜩하기 짝이 없었던 나는 할머니와 몇마디를 나누지 못했고 사진 한장도 남기지 못하고말았다. 하지만 지금도 그 존함이 나오면 당시 하얀 운동모, 안존한 얼굴의 로파가 떠오르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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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2년 4월 29일 아침, 상해의 홍구(虹口)공원. 일본 천황의 생일인 천장절(天長節)기념행사가 열리는 식장에 스프링 코트 차림의 남자와 세련된 양장 차림의 한 젊은 녀인이 도시락과 물통을 들고 들어섰다. 녀인은 남자가 공원안으로 무사히 들어가는것을 확인한 다음 골목으로 사라졌다.
그날 상해는 발칵 뒤집혔다. 스프링코트차림의 남자가 도시락 폭탄을 던져 상해주둔군 일본군 총사령관 시로가와 대장 등 일본인 수십명이 폭사하고 부상을 당한 거사가 발생한 것이다.
사건의 주인공 윤봉길은 현장에서 일본경찰에게 체포되였다. 그날 윤봉길을 도와 삼엄한 검문검색을 통과한 양장을 한 27살의 녀인이 바로 리화림이였다.
1932년, “한인애국단”은 두차례 테러작전으로 일본침략괴수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고 세인을 놀래웠는데 윤봉길 폭탄투척사건 이 일기 몇달전인 1월 8일에는 리봉창의사가 도꾜로 건너가서 일본천황 히로히도를 요격하여 혼비백산시킨바 있는데 당시 김구의 명을 받고 리봉창의사가 폭탄을 숨겨 운반한 그 특제 “훈도시”를 만들어준 사람 역시 리화림녀사였다.
원체 윤의사의 홍구공원 의거에는 리화림 녀사가 윤의사와 부부로 변장해 식장에 들어가기로 돼 있었다. 이에 따라 두 사람은 사전에 공원내 지형을 살펴보고 거사 지점까지 잡아놓았다. 그러나 이 계획은 리녀사가 일본어를 잘 모르는 데다 두사람이 함께 행동하면 로출될 념려가 있다는 념려로 취소되고 결국 윤의사 혼자 거사하는것으로 결정됐다.
리화림 녀사는 홍구공원거사에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직접 개입함으로써 우리 민족의 항일사에 두고두고 전해질 두거사에 직접 참여한 력사의 증인으로 되였다.
리화림은 1905년1월 6일, 평양에서 태여났다. 본명은 리춘실, 미국인 선교사가 운영하는 교원학교에 다닐무렵, 평양의 고등학교 학생들이 주축이 된 력사문학연구회에 들어가 사회주의사상을 익혔다. 열네살때 "3.1"운동에 참가했으며1927년 조선공산당에 가입했다.
1930년 3월 압록강을 건너 중국 상해로 갔다. 상해에 도착한 리화림은 리동해라고 이름을 바꾸고 백범 김구가 이끄는 애국단에 자원했다.
리화림은 심한 재정난을 겪고 있는 조직의 부담을 덜기 위해 나물장사, 빨래, 수놓기 등을 하면서 생계를 꾸리고 푼돈을 모아 활동경비로 썼다. 그러면서 밀정 처단, 연락활동 등 주어진 임무를 충실히 수행하여 김구의 신임을 한몸에 받았다.
비서로 늘 가까이서 일한데서 두 사람이 애인 사이란 소문이 날 정도였다. 테러단으로는 조선의 해방과 혁명을 이룰수 없다는 “고민”으로 계속 함께 싸우자는 김구의 만류를 뿌리치고 혁명의 기지 광주로 떠났다. 1932년 늦가을, 리화림은 의열단의 추천을 받아 광주 중산(中山)대학 법률학부에 입학했다. 중산대학은 손중산이 세운 종합대학으로 본래 광동대학이였다가 손중산의 사후 그를 기리기 위해 중산 대학으로 이름을 바꾼 곳이다. 중산대학에는 조선인 학생들이 상당수 있었는데 그 중 대부분이 광주봉기에 참가할 정도로 혁명운동의 산실역할을 했다.
리화림은 법학부에서 2학기동안 공부한뒤 의학부로 옮겨 대학부속병원 견습간호사로 일하면서 의학공부에 메진했다.
한편 1935년 7월, 남경에서는 김원봉(金元鳳)이 의열단을 비롯한 5개 단체를 통합하여 민족혁명당을 창립했다. 김구의 애국단과 중국공산당 소속 조선인이 참여하지 않아 명실상부한 민족유일단은 못 되었지만, 중국을 무대로 활동하는 여러 세력들을 통합한 민족혁명당의 의의는 매우 크다. 민족혁명당은 1942년 임시정부에 참여하여 김구가 이끄는 한국독립당과 함께 림시정부의 량대 축을 이룬다. 리화림은 1936년 1월 민족혁명당에 입당하여 남경으로 갔다.
남경에서 리화림은 민족혁명당 부녀대 부대장직을 맡아 주로 의료보건사업에 주력했다. 부녀대는 조선녀성의 조직화, 중국녀성들과의 통일전선결성을 목표로 항일선전활동을 폈다. 이때 리화림은 리집중과 가정을 이룬다.
중일전쟁이 한창인 1938년 10월 10일, 한구(韓口)에서 조선민족전선련맹의 무장부대로 조선의용대가 창설되였다. 조선민족전선 연맹은 조선민족혁명당(김원봉), 조선민족해방운동자연맹(김성숙 등), 조선혁명자연맹(유자명, 유림), 조선청년전위동맹이 련합한 좌파연합체다. 그 무렵 김구는 한국국민당(김구), 한국독립당(조소앙 등), 조선혁명당(지청천, 일명 이청천 등)등이 모인 우파연합체 광복단체연합회를 이끌고 있었다. 1939년 3월, 이회림은 조선의용대 본부가 옮겨가 있는 계림으로 가서 부녀대 부대장이 되였다. 당시 조선의용대는 300여명의 대원이 3개 지대와 부녀대, 3.1소년단으로 편성되여있었으며 부녀대의 주된 활동은 선전사업이였다.
조선의용대의 선전활동은 훌륭한 성과를 거두었던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적의 진지 바로 앞까지 접근해서 “염전반전(厭戰反戰)”정서를 불러일으키는 공작을 벌렸고 항일투쟁정서를 높이는 가극을 공연하기도했다. 이같은 선전활동에서 리화림과같은 녀성들의 활약이 특히 두드러졌다.
1940년 11월 열린 조선의용대확대간부회의는 국민당이 소극적으로 항일하는 형세하에 조선의용대는 팔로군의 항일근거지로 가야만 전도가 있다는 견해로 합치되여 화북지방으로 주전장을 옮기기로 결정했다. 우선 20여명의 선발대가 락양으로 파견되었는데 리화림은 이 선발대의 한 사람으로 뽑혔다. 이때 리화림은 전신무장을 하고 일본군진지 앞에 몸을 숨긴 채 메가폰을 들고 일본군에게 선전하거나 삐라 같은 선전물을 적 진지 안에 뿌려넣는 등 무장선전전을 수행한며 락양으로 향했다.
1942년5월에 있은 반소탕전후 조선의용대의 활동중심지는 팔로군 129사단이 주둔중인 태항산(太行山)으로 옮겨졌다. 리화림은 조선인 간부들을 위한 훈련반에 들어가 중국혁명사, 중국공산당의 항일방침 등을 공부하고 부녀대 대장이 되였다. 그무렵 태항산 근거지의 생활은 무척이나 어려웠다. 적들의 진절머리나는 소탕속에서 전사들은 군사훈련도 하고 정치문화학습도 하였다. 당시 의용군부녀대 대장 겸 의사로 있은 리화림도 사회과학원 간부양성반에서 반년동안 배우면서 전투생활을 하였다. 곡식이 제대로 나지 않는 산악지대여서 보통 강냉이가루에다 겨를 섞어 먹었는데 강냉이가루마저 없으면 겨만 먹어야 했다. 조선의용군은 전투가 없는 날이면 감자밭을 일구고 모택동의 대생산운동에 발맞춰 방직공장, 병원, 리발소, 상점 등을 차려서 직접 운영하는 자립활동을 했다. 태항산 기슭에는 돌미나리가 많았다. 리화림은 녀성대원들을 이끌고 돌미나리를 캐여 김치도 담그고 볶아서 반찬을 만들었고도토리를 주워다가 삶아서 가루를 내어 먹기도 했다. 하루는 나물을 캐면서 노래를 지어 동료 대원들에게 가르쳐주고 그 날 점심시간에 합창공연을 했다. 민요「도라지」에 맞춰 가사를 새로 지은 「미나리타령」이 그것이다.
미날,미날,돌미나리
태항산 골짜기의 돌미나리
한두 뿌리만 뜯어도
대바구니가 찰찰 넘치누나
에헤야 데헤야 좋구나
어여라 뜯어라 지화자자 캐어라
이것도 우리의 혁명이란다
대원들은 모두 이 노래를 좋아했다. 특히 “이것도 우리의 혁명이란다”하는 구절을 마음에 들어했는데 당시 대원들이 갖고 있던 “황무지 일구고 산나물 캐는 것이 혁명인가”하는 회의감을 떨치게 해주었기 때문이다.
리화림은 1943년 봄부터 병원에서 일하다가 그해 조선의용군이 연안으로 이동하자 1944년 4월 연안으로가 다음해 1월 연안 의대에 입학하여 못다한 의학공부를 시작했다. 리화림은 연안에서 렬화충천하는 대생산운동에도 참가하고 군정대학 교장 수하에서 자료간사사업도 하였으며 조선의용군 무정총사령의 파견을 받고 중국의과대학에서 공부도 하였다.
공부와 생산로동을 병행하는 고된 생활이였지만 리화림은 근면과 열성으로 이를 감당해나갔다. 뿐만아니라 격주에 한번씩 현지 주민들에게 당 정책과 시사문제를 해결하고 보건위생상식을 가르쳤다. 서툰 중국어이긴했지만 주민들은 그의 이야기를 무척 흥미있어 했다. “일본놈들은 언제 투항하나요?”, “국공합작을 또 하나요?”에서부터 “감기는 왜 걸리나요?” 등등 벼라별 질문을 들이대도 리화림은 짜증내는 일이 없이 일일이 해설해 주군했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항복한뒤 조선의용군은 동북으로 진군을 시작했다. 그러나 리화림은 그대로 남아 의학공부를 계속하기로 했다. 무정은 리화림에게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동무를 의대에 보낸건 앞으로의 우리 혁명사업에 전문훈련을 받은 의학자들이 필요하기때문이요. 지금 항일전쟁이 승리했지만 우리앞에는 더 간고하고 복잡한 혁명과업들이 나서고 있소. 무산혁명은 일조일석에 승리할수 없는 장기적인 사업이고 혁명이 승리한후엔 간고한 건설사업이 우리를 기다리게 될것이요. 동무는 절대 의학공부를 중도에 폐하지 말고 잘 배운다음 우리 부대에 돌아오도록 하오. 그때 가서 남들이 동무를 놓지 않아도 내가 꼭 동무를 데려가겠으니 안심하오.”
1946년 11월 21일 리화림은 중국공산당에 가입했다. 국내해방전쟁과 항미원조전쟁에 뛰여들었고 전후에는 새중국의 의료보건사업에 정력을 몰부었다.
1952년 와방점 후방병원 기술과 과장으로, 심양의사학교 부교장으로, 국가교통부 위생처 기술과장으로 일하였으며 1956년 중앙당학교를 졸업하고는 연변위생학교 교장, 연변조선족자치주 위생처 부처장, 위생국 부국장을 지냈다.
문화대혁명시기 박해를 받다가 1978년에 중앙조직부의 도움으로 억울한 루명을 벗고 연변자치주정치협상회의 상무위원, 기관당위 상무위원으로 있었고 대련시정부시찰원, 대련시정치협상회의 상무위원으로 활약하였다.
1984년에 리직휴양했다. 리직후 리화림은 소박한 가장집물에 1950년대부터 입어오던 옷을 입어가면서 아껴먹고 아껴써서 알뜰히 모은 로임 2만여원을 1985년 한번에 당비로 바쳤으며 1986년에는 아동작품작가들을 장려하도록 1만2천여원을 중국작가협회 연변분회 아동문학상기금회에 기부하였다.
스무살 꽃다운 처녀에서 아흔살 할머니가 되기까지 혁명가로 중국 대륙을 누비며 족적을 남겼던 리화림은1999년 2월 10일 14:30분에 대련에서 서거, 향년 95세였다. 리화림은 림종전에도 유언을 남겨 자기의 전재산인 5만원을 대련시조선족학교에 기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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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전 제9회 연변작가협회 화림문학상 시상식이 있었다. 소설, 수필, 시, 아동문학 등 다양한 장르의 작품 20여부가 접수되였는데 최종 전정옥의 수필 “빛과 그림자”와 조옥자의 수필 “잊혀진 다듬이소리”가 선정, 산재지역에서 온 두 신인이 감격스럽게 상을 받아안았다. 리화림 녀사의 생전 숙원이 오늘도 이어져 빛을 발하는 장면이였다.
그동안 력사의 뒤안길에서 민족을 위해, 주의(主義)를 위해 위해 자신의 안일은 초개와 같이 여기며 산화(散花)해간 선렬들이 있다. 저 작열하는 태양보다 뜨거운 피로 강산을 물들이며 스러져간 이들의 고귀한 희생이 있어 오늘의 행복은 가능했다.
물질만능주의가 팽배하고 우리의 공동체가 흔들림을 의식하고있는 오늘날, 우리에게는 조금씩 잊혀져만 가는 민족정기를 되살리고 발전시키려는 노력이 어느때보다 절실히 요구된다. 우리 조선족공동체 구성원 각자가 자기 위치에서 최선을 다하면서 선각자들의 고귀한 희생정신과 업적을 알고 마음 깊이 되새기면서 민족의 번영과 발전에 전역을 경주해야 할것이다.
우리 모두가 그들이 흘린 피와 땀의 소중함에 대하여 다심금 생각해보는 뜻깊은 시간을 가졌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