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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의 화원] 02
S#1. 도화서 마당 / 작업장 앞 / 낮
홍도, 작업장 옆에서 생도청 쪽으로 향하면,
마치 병풍만 걸어오는 듯 자그만 윤복이 병풍을 앞세우고 따라오다 고개 삐죽 내민다.
윤복 : 여보오!! 그 쪽으로 가면 어떡하오? 저 쪽으로 가야 밖으로 나가는 것인데!
홍도 : (가다가 돌아서서) 거, 참, 귀아프게 무얼 그리 쫑알대느냐? 어서 오지 않고.
윤복 : (병풍 놓고) 아, 그 쪽으로 가면 안 된다니까 그러시네!
홍도 : 어! 그 병풍! 잘 들고 오너라! 수업에 쓸 거니까.
윤복 : 글쎄, 어서 가시라니까!...(하다가) 수업? 수업이라니?
하는데, 화원들이 복도를 줄지어 지나다 멈춰선다.
화원2 : (허리 숙이며) 아니, 단원선생님 아니십니까!
한종일(화원1) : 단원스승님! 그간 잘 지내셨습니까?
홍도 : 이 녀석들, 목소리 큰 건 여전하군.
윤복 : (놀라 눈 커지고, 병풍 놓으며) 다,... 단원 스승님??!! 단원 김홍도?
홍도 : 어? 어? 병풍! 병풍!
마치 윤복을 덮칠 듯 병풍이 스르르 넘어오고,
윤복, 저도 모르게 고개 돌리는데, 홍도, 재빨리 달려간다.
윤복과 병풍, 홍도 쪽으로 스르르... 넘어지는 순간,
홍도, 재빨리 병풍을 발로 받치고, 팔로는 윤복을 잡으며 올라간다!!
작업장 안에 있던 화원들이 밖에서 들리는 소리에 내다보면,
홍도의 한 발은 병풍을 받치고, 두 팔은 윤복의 허리를 안고 있다. 마치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포스터처럼...
바람에 날리는 홍도의 창의자락 보이고.. 화원들, ‘오!’ 소리치면,
윤복 저도 몰래 긴장하여 홍도 보고...
화원들이 보고 있는 것을 의식한 홍도, 윤복을 툭 놓는다.
윤복 : 아이쿠!
홍도 : 뭐하느냐? 단원스승님 수업에 늦겠다.
홍도, 얄밉게 가버리고, 윤복 손 털고 일어서서 따라가는데,
홍도 : (뒤돌아보고) 병풍!
윤복 : 예? 예-
윤복, 병풍 주워드는데, 무거워 자꾸 떨어뜨리며 쩔쩔매고..
S#2. 도화서 생도청 / 교육장 / 낮
생도들, 웅성거리고 있고, 영복, 초조한 듯 문 밖을 두리번거린다.
영복 : 측간 간 녀석이 왜 이리 오질 않지?
술태 : 변을 보러 갔으면, 응-당 변을 만나야 오겠지.
고봉 : (창밖으로 고개 빼고 있다가 뛰어들어오며) 오신다!! 단원스승님 오셔!!
고봉, 자리에 가서 앉으면, 문이 스르르 열리고, 홍도의 발이 슥 들어온다.
생도들, 숨 죽이고 홍도를 보고..
홍도, 뒷짐 진 채 교실에 들어오더니 아이들 사이로 걷는다.
그런 홍도를 신기한 듯 보는 생도들.
홍도, 아이들 얼굴을 하나씩 보면서 지나오다가 만보를 보고,
홍도 : 이 분은 연배가...
만보 : 올해로 삼십 다섯 됩니다.
홍도 : 아이고, 형님이시네. 길티않습니까?
만보 : (쩔쩔매고 고개 주억거리며) 아이고, 아닙니다, 편하게, 편하게 하십시오, 단원스승님.
생도들 : (웃는데)
홍도 : (문 밖 향해) 뭐하느냐? 어서 들어오지 않고.
생도들 보면, 조그만 윤복이가 커다란 병풍을 등에 짊어지고 끙끙대며 들어오고 있다.
홍도 : 거기 두거라.
윤복, 끙끙대며 들어와 병풍 놓는데,
장효원 : (일어서서) 먼 길 오셨습니다 단원스승님.
홍도 : 넌 누구냐?
장효원 : 저는 생도들의 장을 맡고 있는 장효원이라고 합니다. (아이들에게) 뭐하냐! 어서 스승님께 인사드리지 않고!
생도들 : 안녕하십니까!
홍도, 생도들 보는데,
S#3. 정순왕후의 처소 / 낮
정순왕후, 집무실 의자에 앉아있고.. 정조가 반대편에 앉아있다.
정순왕후와 정조, 장기판을 놓고 앉아 차를 마시며 보고 있고..
정조 : 금일은 드디어 단원의 수업이 시작되는 날이군요. 과연 단원이 어떠한 방법을 쓸지 몹시 궁금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정순왕후 : (장기판 보며) 강산도 십 년이면 변한다 하는데, 그 자라고 해서 뾰족한 수가 있을지... 할미는 걱정이 됩니다.
정순왕후, 장기판의 말을 하나 움직이고 정조를 슥- 보면,
S#4. 도화서 / 생도청 / 낮
커다란 병풍 보이는 가운데,
홍도 : 오늘 수업은 이 병풍을 모사하는 것이다.
장효원 : (손 들고) 모사 수업은 저번시간에 이미 했습니다.
홍도 : 그래?
S#5. 정순왕후의 처소 / 낮
정조, 찻잔 들고 장기판 보며,
정조 : 글쎄요... 단원이라면 흔하디 흔한 방법을 쓰지는 않을 듯 한데요...
정조, 말 움직여 정순왕후의 장기말 하나를 잡아 먹으면,
S#6. 도화서 / 생도청 / 낮
생도들, ‘뭘 하려고 하나-’ 홍도를 쳐다보면, 홍도가 병풍을 번쩍 들어올린다.
생도들 놀라면, 홍도, 병풍을 거꾸로 뒤집어 내려놓고 손을 턴다.
홍도 : 오늘은 이걸 그리는 거다.
생도들 : 네???
S#7. 정순왕후의 처소 / 낮
정조, 잡아먹은 장기말을 한 손에 쥐고 굴리는 가운데,
정순왕후가 장기판의 말 하나를 집는다.
정순왕후 : 허나, 그것이 그림을 그린 생도를 찾는데 꼭 맞는 방법일지, 그것은 모를 일입니다. 아니 그렇습니까?
정순왕후, 집어올린 말 움직여 정조의 말을 하나 먹는다.
정조, 장기판 보다가 빙긋 미소 짓고...
정조 : 그렇지요, 꼭 맞는 방법이어야지요..
정조, 들고 있던 차 마시면,
홍도(소리) : 누구나 머릿속에 그리는 사물의 형상이 있다.
S#8. 도화서 / 생도청 / 교육장 / 낮
생도들, 숨 죽이고 홍도 보는 가운데,
홍도 : 사람들은 그림을 그릴 때, 머리로 먼저 생각하고 그림을 그리게 마련인데,
(거꾸로 된 그림 가리키며) 이렇게 거꾸로 보면, 모든 것이 낯설어 보이지 않느냐?
생도들 : (거꾸로 된 병풍그림 보면)
홍도 : 그리하면, (손가락으로 머리 가리키며) 여기 있는 것을 옮기는 것이 아니라,
(눈 가리키고, 눈 앞에 있는 생도들을 하나씩 그리듯 손짓하며) 눈앞에 보이는 그대-로! 사물을 새롭게 볼 수가 있다.
윤복, ‘저런 면도 있나?’하는 얼굴로 홍도를 보는데..
S#9. 정순왕후의 처소 / 낮
정조, 찻잔 내려놓으며,
정조 : 강산은 변해도.. 사람의 근본적인 성정은 변하지 않을 것입니다 마마. (장기말 집어들며) 단원 그 자는,
(장기말 눈 앞에 들어올리며) 예나 지금이나... 최고의 말입니다.
정순왕후 : (정조 보면)
정조 : (장기말 ‘탁’놓으며) 장군입니다 마마.
정조, 웃으며 정순왕후 보면,
S#10. 도화서 생도청 교육장 / 낮
홍도 : 늘 보던 것을 새롭게 보는 것이야말로, 그림을 그리는 자가 가져야 할, 처음이자,.. (생도들 둘러보며) 마지막이다.
생도들, 감동받은 눈으로 홍도 보고...
술태는 서책에 열심히 필기하는데..
S#11. 정순왕후의 처소 / 낮
정순왕후, 정조 보고 웃으며,
정순왕후 : 주상의 실력은 날로 일취월장 하는군요.
정조 : 마마께서 소손에게 백번 양보하시니 가능한 일이지요.
정순왕후 : 과연 그럴까요? (말 하나 집어 들며) 멍군, 그리고.. (말 ‘탁’ 놓으며) 장군입니다.
정조와 정순왕후, 미소 지으며 차 마신다.
정조 : 마마와는 늘 박빙이군요..
정순왕후 : 승부가 어찌될지는... 끝까지 두고 보아야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두 사람 팽팽하게 보는데..
S#12. 타이틀
[바람의 화원] 글씨 나타났다 바람처럼 사라지면,
S#13. 도화서 / 장벽수의 방 / 낮
장벽수 창 밖을 보고 있는데... 한종일(화원1)이 들어온다.
장벽수 : 무얼 하고 있는가? 단원은.
한종일(화원1) : 그것이..
장벽수 : 제대로 찾고 있는 것 같은가? 뭘 시키던가?
한종일(화원1) : (갸우뚱 하며) 그림을... 베껴 그리라 하시던데요?
장벽수 : 모사를 시켰다는 것이냐?
한종일(화원1) : 예.
장벽수 : 모사를 시킨다...
한종일(화원1) : 예. 그것도 거꾸로요.
장벽수 : 거꾸로?
한종일(화원1) : 예.
장벽수 : 거꾸로라... 수사를 하라 했더니 거꾸로 그림이라... 쯧쯧.. 단원 그 골칫덩이의 머릿속에는 당췌 무엇이 들어 있는지...
S#14. 도화서 생도청 / 교육장 / 낮 - 몽타주
홍도, 길게 모로 누워 눈 감고 있고, 고요한 교육장에는 오로지 붓질하는 소리만 들린다.
홍도(소리) : 그린다는 것이 무엇이냐?
생도들, 서책을 열심히 뒤적이는데,
홍도 : (눈 뜨고) 서책에는 없다. 그린다는 것이 무엇이냐? 너희들의 생각을 얘기해 보거라. (술태 보고) 너!
술태 : 예. 그린다는 것은.. (둘러보다가) 눈에 보이는 형상을 조, 종이 위에 옮겨 그리는...
홍도 : 그것은 너무 막연하고!
화면, 휙! 바뀌며
고봉 : (술태 뒤에 앉은..) 이, 그린다는 것은, (손짓 해가며) 붓을 이용하여,
홍도 : 그것은 도구를 말하는 것이지!
휙! 바뀌며
영복 : 예. 그린다는 것은.. 그린다는 것은... 그것은... (생도들 둘러보고, 윤복 보는데)
홍도 : 다음!
휙!
장효원 : 예. 그린다는 것은 시간이 지나면 사라져버리는 천지간의 모든 것을 붙잡아 기록하는 것입니다.
생도들 : 오---
장효원 : (식- 웃고) 이는, 천지간에 주상전하의 눈이 미치지 않는 곳이 없음을 뜻하며, 따라서 화원에게 있어 ‘그린다’는 것은
시간과 공간을 넘어서는 왕실의 권위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고봉 : (감탄하여 둘러보며 박수치는 시늉하고)
홍도 : 네 이름이 무엇이냐?
장효원 : 말씀드렸듯이, 저는 생도들의 장을 맡고 있으며, 장벽자 수-우자 쓰시는 별제 어른을 아버지로 모시고 있는
효원이라고 합니다.
홍도 : 너...
장효원 : (기대에 차서) 예. 단원 스승님.
홍도 : 참- 말이 많다! 넌 시험도 보기 전에 입이 먼저 화원이 되었구나.
장효원 : (얼굴 붉히며 앉고)
홍도 : 또, 대답해 볼 사람 없느냐? 그림을 그리는 자들이, 그린다는 것에 대해서 생각해 본 적이 없어?!!
네놈들은 대체 무얼 하러 도화서에 온 것이냐? 이런, 새끼 환쟁이들 같으니라고!
S#15. 도화서 / 작업실 / 낮
붓 발(=붓을 감는 발) 가득 빨아온 붓들을 깨끗한 수건으로 붓대를 닦아 붓걸이에 하나씩 거는 이인문.
그 옆에 신한평이 창을 열고 밖을 내다보고 있다.
팔짱을 끼고 서서 연못 건너, 생도청 교육장쪽을 보는 신한평. 초조한 듯 손가락을 까딱거리다가,
신한평 : 단원... 말이네..
이인문 : (붓 정리하다가) 예?
신한평 : 혹.. 어떤 수업을 하는지.. 자네는 모르는가?
이인문 : 글쎄요.. 두고 보라는 말만 하던걸요..
신한평 : 그래?
신한평, 걱정스런 얼굴로 교육장쪽 보고...
S#16. 도화서 / 생도청 / 교육장 / 낮
홍도, 맨 앞, 중앙에 놓인 교수용 서안 앞에 앉아 생도들을 하나씩 뜯어보는데,
고개 숙이고 쩔쩔매는 생도들 사이로, 아무 일 없는 듯 붓질을 계속(->병풍모사) 하는 생도 한 명!
마치 아무 것도 들리지 않는 듯, 그림에 빠진... 윤복이다.
홍도, 윤복 보다가,
홍도 : 너! 거기, 혼자 붓질하는 놈!
생도들, 그 소리에 윤복 쪽 보면, 영복이 윤복의 팔을 툭! 치고,
윤복이 붓질 멈추고 홍도를 본다. 얼굴에 먹자국 묻힌 채 홍도를 보는 윤복의 맑은 얼굴.
홍도 : 얼치기 화공. 네놈이 한 번 대답해 봐라. 그린다는 것이 무엇이냐?
윤복 : ....‘그린다는 것’이요?
홍도 : 그래.
생도들 : (윤복 보고)
술태 : (작게) 제대로 걸렸구나
만보 : (작게) 어린놈이 무슨 생각이 있겠냐..
영복 : (윤복 보고)
윤복 : (골똘히 생각하며) ...그린다는 것은... 그린다는 것은.. (하다가, 고개 들고) 그리움을 말하는 것이 아닐지요?
홍도 : 어째서 그렇지?
윤복 : 그리움이 그림이 되기도 하며,... 혹은 그림이 그리움을 낳기도 하지 않습니까?
홍도 : 그래? (눈 지그시 감고, 손짓하며) 계속-
만보 : (영복에게 눈짓하며) 제법인데?
윤복 : (흠! 목소리 가다듬고) 그리운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이 떠올라, 그를 그리게 되니.., 그리움은 그림이 되고..
홍도 : 그리운 사람은 그림이 된다.... 그림이 된다... 그래, 그래서?
윤복 : .. 또한.. 그 사람을 그린 그림을 보면, 잊고 있다가도 그 사람이 그리워지지 않습니까? 그러니 그림이 그리움이 되지요.
홍도 : 그림을 보면 그리워진다.....
윤복 : 예. 그러니,.. 그러니, 그린다는 것은 곧 그리움이 아닐지요?
홍도 : 그리움이라........그림은 그리움이라...
윤복 : (눈 반짝이며 홍도 보고) 아니 그렇습니까?
홍도 : ... 네 이름이 무엇이냐?
윤복 : 신 윤복이라 하옵니다.
홍도, 윤복 본다....
cut to
하얀 종이에 점이 하나하나 찍힌다. 세 개 씩, 아홉 개의 점.
생도들, 그 점 보면..
홍도 : 익일까지 이 문제를 풀어오는 것이 과제다.
생도들 : 과제요?
홍도 : 그래. 붓을 한 번도 떼지 말고, 아홉 개의 점을 모두 지나되 서로 연결된 네 개의 선을 그어 오는 것이다. 알겠느냐?
생도들 : 예??
홍도 : (식- 웃고)
S#17. 단청소 / 조색실 / 낮
어둑어둑한 조색실 내부. 층층이 쌓인 안료들의 유리병이 작은 창에서 들어오는 빛살에 따라 기이하게 빛나고..
장벽수, 그 사이를 천천히 걸어 들어오면,
가장 깊숙한 곳에 놓인 책상 앞에, 책상 가득 쌓인 서책들과 안료통들 사이로 자그마한 노인의 등이 보인다.
뒤돌아 앉아, 안료가 들어있는 작은 유리병 하나를 들고 빛에 비춰보는 그는... 단청실의 원로 허심이다.
장벽수 : 저..
허심 : ....
장벽수 : 백백(주 : 허심의 호)어르신..
허심 : (뒤돌은 채) 무슨 일로 도화서 별제께서 이렇게 누추한 조색실까지 걸음을 하셨는가?
장벽수 : 여쭐 것이 있어서..
허심 : 앉게.
장벽수, 먼지가 켜켜이 쌓이고 책이 던져져 있는 의자에서 책 들어내고 먼지 툭툭 털고 앉으면,
허심이 돌아본다. 자그마한 체구에도 눈빛만은 형형한 허심이 장벽수를 슥 보면,
장벽수 : .. 병풍을 거꾸로 그리는 것은, 무엇을 보기 위한 것입니까?
허심 : 병풍을? 거꾸로?
장벽수 : 예.
허심 : (눈 깜빡이며) 거꾸로 그렸다... 그것은 바로 그린 그림이 없으면 쓸모가 없는데..
장벽수 : 바로 그린 그림이요? (생각해 보다가, 생각난 듯, 손뼉 치며) 병풍 모사 수업은 기본 과정에 속했으니,
바로 그린 그림은 이미 있을 것입니다. 과연 백백 스승님이십니다!
허심 : 그것은, (자기 눈 가리키며) 이걸 보기 위한 거야.
장벽수 : 눈... 이요?
허심 : (머리 가리키며) 여기가 아니라, (눈 가리키며) 여기로 그림을 그리는 능력...그걸 보는 거지.
장벽수 : 눈으로 그린다... 눈으로.. (허심 보며) 그것으로... 화원의 특징을 알아낼 수 있다는 말씀이십니까?
허심 : 그렇다네. 헌데, 누가 그런 과제를 냈는가?
장벽수 : 단원입니다.
허심 : 단원? (손가락 서로 맞대고 톡톡 치며) 단원이라.. 자네가 눈엣 가시처럼 여기는 그 단원?
..이거 도화서가 점점 재밌어 지려는가보군 그래.. 허허..
장벽수 : ...
S#18. 단청장 / 조색실 앞 길 / 낮
허심의 웃음소리 사라지고,
장벽수, 기분 나쁜 듯 조색실 앞 길을 걸어나오다 뒤를 돌아본다.
장벽수 : 저 늙은이는, 언제 봐도 기분 나쁘단 말이야..
장벽수, 안료 묻은 옷을 신경질적으로 탁탁 털다 사라지고,
S#19. 화원 회의실(=경륜당) / 낮
창 밖으로 연못과 도화서 풍경이 보이는 화원회의실 내부.
예조판서와 장벽수, 화원 회의실에 앉아있다.
예조판서 : 그래서, 수사는 제대로 되고 있다는 것인가?
장벽수 : 지켜보고 있습니다.
예조판서 : 이것이 그냥 지켜볼 일인가? 왕대비전에서 엄명이 내려왔네.
장벽수 : 예? 엄명이라니요?
예조판서 : 왕대비전에서는 우리가 김홍도에게 수사를 맡기고 손 놓고 있다 생각하시네.
왕대비마마의 성정으로 보아, 왕대비마마께서는 이번 수사를 대충 넘기려고 하지 않을 것이네.
장파형틀은 한 번 나오면 반드시... 누군가의 손을 잡아먹는다는 것 쯤은 알고 있겠지?
장벽수 : 알고 있습니다. 아이들이 겁을 집어먹고 함구하지 않도록, 원로들과 화원들의 입단속을 철저히 하고 있습니다.
단원이 수사를 하는 것도 그저 수업일 뿐이라 생각하고 있으니, 곧 그 생도의 정체가 밝혀질 것입니다.
예조판서 : 그렇게 천진하게 기다려도 되는지 모르겠네... 만일, 그 생도를 찾아내지 못했을 때,
왕대비마마께서 어느 선까지 책임을 추궁하실지.. 그것은 아무도 알 수 없어. 그 말은...
장벽수 : 그 말은 무엇입니까?
예조판서 : 김홍도를 제대로 관리감독하지 못한 자네와 내 손까지 (왼 손으로 오른 손 내리치며)
장파형 틀에 들어갈 수도 있다는 말이네. 알아듣겠는가?!!
장벽수 : 정녕 왕대비마마께서 그리 말씀하셨습니까? 장파형에 처한다고?!!
예조판서 : (장벽수 보면)
S#20. 화원회의실 옆 / 교무실 앞 / 낮
교무실 앞, 종이 뭉치 들고 서 있는 고봉과 장효원.
고봉과 장효원, 화원회의실 앞에서 문에 귀를 바싹 대고 있다가 깜짝 놀란다.
고봉 : 뭐래? 뭐라는 거야?
장효원 : 장파형에 처한다고 하신다...
고봉 : 누구를? 누구를 장파형에 처한다는 말이냐?
장효원 : 글쎄... 단원... 뭐라고 하고, 장파형이라 하던데?
고봉 : 단원? 단원? 이라...혹시,
장효원 : 뭐냐?
고봉 : 단원스승님이 내준 과제... (장효원 보며) 그걸 못 푼 사람은, 장파형을 시켜버린다는 것 아니냐?
장효원 : 뭐?
한종일(화원1 소리) : 이놈들!!
고봉과 효원, 얼른 내빼고..
S#21. 도화서/ 생도청 / 세면장 / 낮
생도들, 붓을 씻고 있는데..
고봉과 장효원이 나타난다.
고봉 : 큰 일 났다, 큰-일 났어.
만보 : 무슨 일이냐?
고봉 : 단원스승님 말이야, 허, 야, 정말 미친 거 아니냐?
영복 : 왜?
고봉 : 그 이상한 과제... 그걸 잘 풀어내지 못하면..
생도들 : 못하면...?
고봉 : 풀지 못하면, 장파형에 처할 지도 몰라.
생도들 : 자, 장파형!!!
생도들, 붓 씻다 망연자실해 서로 보는데...
술태 : 아무렴.. 과제 하나에 장파형까지 하겠냐?
만보 : 모르는 소리. 도화서에서 화사비장으로 평양에 간 사람은 지금까지 (손가락 여덟 개 펼치며) 여덟 명.
생도들 : (장효원 보고)
만보 : 그 중 실종된 자가 (손가락 두 개 펴며) 두 명이고, 사망자 (손가락 네 개 펴며) 네 명, 그리고, 돌아온 자는...
생도들 : (침 꼴깍 삼키면)
만보 : 단 (손가락 하나 펴고) 한 명. 단원스승님이시다- 이거야. 단원스승님이 그간 어떻게 지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아-무도 몰라. 호랑이를 죽였을지, 사람을 죽였을지, 아니면... 산 속에서 미쳐버렸는지...
생도들 : ........
윤복 : 만보형님. (손가락 꼽다가) 여덟이 아니라 일곱명 아니오?
생도들 : (!)
장효원 :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다. 단원스승이라면,.. 정말로 우리를 죽일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과제 하나 때문에 장파형에 처할 지도 모른다고. 알아듣겠냐?
생도들, 서로 쳐다보고.. 긴장한다.
S#22. 도화서 / 생도청 / 몽타주 / 낮
1. 술태의 방 - 술태, 아홉 개의 점이 그려진 종이 위에 수없이 많은 먹선을 긋고는 구겨서 던지면, 방안 가득한 파지들..
술태, 머리를 쥐어뜯고,
2. 영복의 방 - 영복, 책상 앞에 단정히 앉아, 붓을 얌전히 벼루에 적신 후,
하얀 종이 위에 문진(=종이를 고정시키는 막대)을 정갈하게 놓고, 붓을 들어.. 마치 의식을 행하듯 점 아홉 개를 찍는다.
그리고 붓질을 하려다 말고, 하려다 말고, 다시 벼루에 대고 붓 적시고.. 또 붓을 들다 말고.. 선 하나도 긋지 못하는데,
3. 만보의 방 - 점 아홉 개가 찍힌 종이 위에서 머뭇거리는 붓. 만보, 붓을 들고 머리 긁적거리며 고민하다가,
점 아홉 개를 연결해서 여인의 가슴 모양을 그리다가 지워버리고,
4. 고봉의 방 - 점 아홉 개 위에 선을 직- 긋는 고봉. 몇 번 붓질을 하다가 종이 구기고 벌렁 눕는다.
5. 장효원의 방 - 점 아홉 개를 놓고 신중하게 붓을 긋는 장효원. 선을 긋다가 망치자 붓을 던져버리는 장효원.
설합을 열어 새 붓을 꺼내 손으로 붓 털을 문지른다. (- 새 붓을 처음 쓸 때, 뾰족하게 풀 먹인 부분을 푸는 것임).
6. 윤복의 방 - 여전히 단정하게 앉아 붓을 벼루에 문지르던 영복, 뒤를 돌아보면...
이불 개놓은 데 기대 누운 윤복이 보인다.
윤복, 누워서 아홉 개의 점이 그려진 종이 들여다보며 발 까딱거리고 있다.
그런 윤복을 보는 영복.
S#23. 도화서 전경 / 낮
생도들(소리) : 도저히 못 풀겠다!! 도저히 못 풀겠어!
S#24. 저잣거리 / 세책점 / 낮
김조년 : 전부 다 풀었단 말인가?
세책점 : 예. 필사해 놓은 삼국연의는 모조리 긁어모아 저자에 풀었습니다.
김조년, 세책점에서 책 넘겨보고 있고, 세책점 주인(이하 ‘세책점’)이 장부를 들고 옆에 서 있다.
김조년 옆에는 여자 무사 설청이 조금 떨어져 서 있다.
세책점 : 근자에는 삼국연의를 가장 많이 세책(주; ‘책을 세놓는다’는 뜻으로, 오늘날의 책 대여를 말함)해 가고 있습죠.
김조년 : 그렇군.. 하면, (책 내려놓으며) 필사자를 두어 한 부를 더 필사해 돌리도록 하게. 우리 지전에 일러두겠으니,
종이는 게서 구하고.
세책점 : 예.
김조년 : 가자.
설청 : 예.
김조년, 나가려 하면,
세책점 : 어르신, (종이 내밀며) 이걸 보시지요.
김조년 : 무엇인가?
세책점 : 근자에 어떤 화공이 그려온 속화인데, 겨우 댓 장째 됩니다만... 꽤 반응이 좋아 계속 들이고 있습니다.
김조년 : 그래?
김조년, 종이 받아 펼치면, 신윤복의 [춘의 만원]이 보인다.
그림 보는 김조년. 세책점, 김조년 보면,
김조년 : (그림에 있는 글씨) 춘색이 만원 중 하니, 화개 난만홍이라..
‘봄빛 뜨락에 가득 차니, 꽃은 흐드러지게 붉게 피었구나’..라...허나..
세책점 : 무엇입니까?
김조년 : 허나, 정작 그림 속 나무에는 푸른 잎새만 올라 있을 뿐... 붉은 꽃은 피어 있지 않군.
설청 : (그림 슬쩍 보고)
세책점 : (그림 보며) 그렇습니까? 허면...꽃은 어디 피어있는 것입니까?
김조년 : 철릭을 입은 이 양반의 얼굴에 피지 않았는가? 이렇게 불그스름-하게, 낮술이 오른 것을 꽃이라 표현했군.
참으로 기지가 넘치는군!
세책점 : 그렇지요? 어린 화공이, 재주가 꽤 되는 듯 합니다.
김조년 : (그림 보며) 필선도 좋고... (싸인 보며) 일월산인? 일월산인이라.. 이 자는 갑자기 어디서 나타난 사람인가?
세책점 : 그건 잘 모르겠고... 익일 새 그림을 가지고 온다고 했습니다.
김조년 : 그래? (그림 보며) 일월산인이라.... 값을 잘 쳐주도록 하게.
세책점 : 예.
김조년 나가고, 설청 따라 나가면,
S#25. 저잣거리 / 낮
김조년과 설청 지나가자, 저잣거리의 상인들, 김조년이 앞을 지나가는 것에 맞춰 ‘오셨습니까’ 허리 숙여 인사한다.
김조년 : 일월산인... 일월산인이라..
S#26. 도화서 / 사당 뒤 빈터 / 낮
사당 뒤쪽의 은밀한 공간..
윤복, 바닥에 엎드려 신중하게 그림을 그리고 허리를 편다. (신윤복의 [소년전홍])
윤복 옆에는 여러 자루의 붓과, 벼루, 안료 그릇 놓여있다. 완성된 그림 보이고...
윤복, 그림을 뜯어본 후, 채색을 했던 붓을 놓고 세필을 집어든다.
신중하게 ‘일월산인’이라 쓰는 윤복. 붓을 내려놓는다.
S#27. 도화서 / 홍도의 방 / 낮
화면 가득, 윤복이 모사한 그림 두 장이 보인다.
홍도, 그 그림을 보고 있고, 이인문은 책상 가득 놓인 다른 생도들의 그림들을 뒤적이고 있다.
이인문 : 정말 같은 사람이 그린 것이 맞는가? (그림 두 장 들고) 이렇게 다른데?
홍도 : 거꾸로 그려서 그렇지. 대부분의 사람들은 (머리 가리키며) 여기 있는 것을 옮겨 그리기 때문에,
거꾸로 놓고 낯선 형태를 따라 그리라 하면 (못 그린 그림 가리키며) 그렇게 이상하게 그릴 수 밖에 없네.
이인문 : 허허.. 말은 그럴 듯 하지만... 거꾸로 놓고도 형태를 꼭 같이 그리는 자가 과연 있겠는가?
홍도 : 그래? (윤복의 그림 두 장 보여주며) 이것을 보게.
이인문 : (그림 보고, 놀라) 아니, 이것은... (그림 다시 보며) 두 개가 똑같지 않은가! 어찌 이럴 수가!
홍도 : 머릿속에 있는 사물이 아니라, 눈에 보이는 것을 그대로 그렸기 때문이네. 이것은 배운다고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야.
호랑이보다 매서운 눈썰미를 타고나야, 그래야 가능한 것이네.
홍도, 윤복의 그림 두 장을 본다.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똑같은 그림...
홍도, 그림 귀퉁이를 뒤집으면, 거기 쓰여진 두 개의 이름 ‘신윤복’ ‘신윤복’.
홍도, 그림 보다가 어딘가 보면,
S#28. 도화서 / 생도청 / 식당 옆 담장 / 밤
식당 옆 담장.
만보 : 이게 왠 팔자에도 없는 나머지공부란 말이냐?
술태 : 어쩌겠습니까? (손 잡으며) 손모가지를 지키려면, 다 같이 머리를 맞대는 수밖에요.
만보 : 내 도화서 생도밥 10년을 먹었지만, 이런 경우는,
만보처(소리) : ‘뻐꾹’! ‘뻐꾹’이요!
만보 : 왔군. ‘뻐꾹’
하얀 끈이 담장 밖에서 넘어오고, 술태가 끈을 잡아당긴다. 끈에 딸려오는 것은, 커다란 보자기(음식을 싼 보자기다).
술태, 보자기 풀어보는데,
만보 : (담장 너머로) 고맙네! 자네가 있어 든든하이-
S#29. 도화서 / 생도청 / 담장 밖 / 밤
아이를 업은 만보처, 뚱뚱하고 우스꽝스럽게 생긴 얼굴로 간절하게.. 담장 밖에서 안쪽 향해,
만보처 : 더욱 정진하여, 올해는 꼭 화원 시험에 ‘통’하시어요-
만보(소리) : 정진, 또 정진 하리다-
만보처 : 제가 그쪽으로 갈까요? 서방님 뵈온지 너무 오래 되어..
만보(소리) : 아니! 아니, 아니오! 절대로 넘어오지 마시오.. 아니 보고 그리워하는 것이 더욱 애절하니까..
만보처 : 서방님은 역시 생각이 깊으십니다... 그럼 전 가보겠습니다.
지지미 중에 서방님 드릴 화전도 있으니, 다른 이에게 주지 마시고 꼭 서방님이 드시어요. 꼭이요!
S#30. 도화서 / 생도청 / 식당 옆 담장 / 밤
술태와 생도들, 음식 들고 가고 있고,
만보 : 그리하리다- 늘 건강 챙기는 것 잊지 말게-
만보, 가슴 쓸어내리며 주변 둘러보고 생도들 쫓아간다.
S#31. 도화서 / 생도청 / 식당 / 밤
생도들, 식당에 둘러앉아 지지미, 막걸리, 김치 등 만보처가 싸준 야식을 먹고 있고..
앞에는 하얀 종이를 걸어놓고 고봉이 아홉 개의 점 앞에 붓을 들고 서 있다.
생도들 중, 윤복과 영복도 보인다.
고봉 : 다시, 다시. (붓 들고 점 위로 옮기면) 여기서..
장효원 : 아니, 좌측 하단부터!
고봉 : (좌측 하단으로 붓 가져가) 여기?
장효원 : (막걸리 마시고) 그렇지!
고봉 : (선 그으며) 여기서 이렇-게-
술태 : (지지미 먹으며) 아니! 거기서 (대각선 가리키며) 위로, 아니, 그리 가면 어찌하냐? 아까 했던 것 아니냐!
고봉 : 그래?
만보 : (지지미 입에 문 채, 그렸던 종이 뒤적이다 한 장 꺼내며, 입에 음식 물어서 발음이 이상한..) 했던 것이다-
고봉 : (붓으로 마구 지우며) 도대체 뭐냐!! 이놈의 문제 때문에, 아니, 계월옥에 간다고 한-참 들떴었는데...이런!
이래서야 내일 계월옥에 갈 수나 있겠느냐?
술태 : 분위기도 구구한데, 유희는 다음으로 미루는 것이 좋지 않을까.. 싶네, 생도장.
장효원 : 이런, 얼얼한 놈. 풍류를 모르고 어찌 화원이라 하겠느냐? 자고로 술로써 먹을 삼고 계집의 몸으로써 종이를 삼아야
제대로 된 그림이라 하지 않겠냐?
고봉 : 그럼- 그럼그럼, 이야- 멋-지다! 그럼, 내일 가는 거지? 가자, 응?
장효원 : 한 놈도 빠지지 말고 오거라. 내 너희들에게 풍류를 알려주려고 정향이를 불렀으니..
고봉 : 정향이?
장효원 : 계월옥에 새로 온 금기다.
고봉 : 금기? (가야금 뜯는 시늉하며) 가야금 기생? 이야, 고 년 오자마자 아주 장안에 명성이 쩌르르- 하던데!!
그럼, 어서 문제를 풀어보자- 어디다 찍을까? 여기?
고봉, 옆에다가 다시 점 찍고 붓 가져대려 하면,
윤복 : (지지미 우물거리며) 그 아래서 시작하면 안되냐?
고봉 : 응? 어디?
윤복 : 아래.
고봉 : (아래 점에 붓 가져가고) 여기?
윤복 : 더 아래.
고봉 : 응? 더 아래? 어디?
윤복 : 그 점보다 더 아래, 허공에서?
장효원 : 바보같은 놈아. 저 점들 안에서 풀라고 하지 않으셨냐?
윤복 : (지지미 하나 집어들고) 꼭 그래야 하는가? (한 입 베어물면)
생도들 : 당연하지!
윤복 : (작게) 왜 꼭 그래야 하나...
윤복, 지지미 한 입 더 베어 물려는데, 만보가 윤복의 지지미 빼앗는다.
만보 : (반쯤 베어문 꽃잎 보며) 어허, 젊은 놈이 남의 꽃을 베어먹다니..
만보, 남은 화전 입에 넣고 씹는데,
고봉 : 아니, 도대체 답이 있긴 있는 거야?!!
장효원 : 답이 없으면, 가만두지 않겠다.
S#32. 도화서 생도청 교육장 / 낮
화면 가득 보이는 아홉 개의 점. 그 점 위로 슥- 그어지는 선.
하나, 둘, 셋, 넷. 네 개의 선이 아홉 개의 점을 모두 통과한 순간..
홍도 : 이것이 답이다.
홍도, 뒤를 보면, 생도들 전원, 양 손에 벼루를 들고 바들바들 떨며 서 있다.
홍도 : 이래도 답이 없다 할 것이냐? 네 놈들 전원이 머리를 맞대고 밤새 고민했다면서, 이 문제 하나를 못 풀어냈다는 것이냐?
도대체 모여서 무얼 한 것이냐? 이래서야 장차 어진화사를 수행하고 국사를 짊어질 수 있겠느냐? 응?
도화서도 앞날이 캄캄하군, 캄캄해.. 뭐하느냐! 더 바짝 들어올리거라!
생도들 : (괴로워하며 벼루 든 손 들어올리고)
윤복(소리) : 허나, 그 풀이방식은,
홍도 : (윤복 보면)
윤복 : 그 방식은, (손으로 선의 시작 가리키며) 선의 위치가 사각형의 틀에서 벗어나지 않았습니까?
홍도 : 여기 있는 것은 아홉 개의 점일 뿐, 사각형의 틀은 애초에 없었다. 스스로 이 틀 안에 갇혀 있는 이상, 답은 찾을 수 없지.
틀을 벗어난 곳에 길이 있는 것이다.
윤복 : 그러하다면.. 세 개의 선만으로도 점들을 이을 수 있지 않습니까?
홍도 : 세 개? 세 개의 선이라고? 답이 있을 것 같지 않구나.
윤복 : 답은 있을 것입니다. 다만 찾지 못했을 뿐.
홍도 : 뭐라? 찾지 못했을 뿐이라고? 네 놈은 그 답을 알고 있다는 것이냐?
영복 : (작게) 윤복아.
윤복 : (9개의 점 들여다보고)
홍도 : (붓 내밀며) 그럼, 그려 보거라.
윤복, 벌떡 일어서서 앞으로 간다.
생도들, 조용히 윤복이 하는 모양을 보는데..
윤복, 홍도와 팽팽히 마주본다.
윤복에게 붓을 내밀고 있는 홍도. 윤복, 붓 잡으려 손 내미는데...
S#33. 도화서 생도청 / 교육장 외부 / 낮
한종일(화원1), 교육장 밖에서 생도청 안을 엿보고 있다.
한종일(화원1), 침을 꿀꺽 삼키는데, 한종일(화원1)의 어깨를 잡는 손.
한종일(화원1) : (화들짝 놀라며 돌아보면)
신한평 : (한종일(화원1)의 입 막으며) 시끄럽다.
한종일(화원1) : (인사하며) 이, 일재 어르신!
신한평 : (안쪽 걱정스레 보면)
S#34. 도화서 생도청 / 교육장 / 낮
생도들 모두 주목한 가운데, 윤복, 홍도에게서 붓을 받아든다.
윤복, 아홉 개의 점이 그려진 종이의 가장자리에서부터 길다랗게 선을 긋기 시작한다.
고봉 : 아니, 저, 저!!!
만보 : 허허... 어찌 하려고!
영복 : ....
윤복, 첫 번째 선 다 긋고 두 번째 선, 대각선으로 내리그어 두 번째 줄의 점 세 개를 지나자, 생도들 감탄을 하고,
홍도, 윤복을 유심히 보면, 윤복이 홍도 보고 식 웃은 후 붓을 꺾어 마지막 선을 긋는다.
윤복 : (붓 내려놓고) 답이 되지 않습니까?
홍도 : (윤복의 그림 보다가) 그 그림의 두 번째 획은, 엄밀히 말하면 세 개의 점을 지난다고 할 수 없다.
(그림 속, 두 번째 줄의 점 하나씩 가리키며) 이것은 윗부분, 이것은 중앙부분, 그리고 이것은 아랫부분을 스쳐간 것일 뿐,
정확히 세 개의 점을 꿰뚫었다 할 수 없지 않느냐?
윤복 : 이 그림만 보면 스승님의 말씀이 틀리지 아니하였습니다.
홍도 : 틀리지 않았다? 그것은 무슨 뜻이지?
윤복 : 필선의 기울어짐은 그것이 얼마나 꺾여 있는가에 따라 다릅니다. (손바닥 두 개 맞붙여 각을 만들며) 각이 커지면
그 기울어짐이 가파르고, (손바닥 두 개의 각을 작게해 붙이며) 각이 작으면 기울어짐도 완만해 집니다.
홍도 : 그래서?
윤복 : 만일 필선의 각을 무한히 작게 할 수 있다면, (손바닥 두 개 점점 가까이 하다 붙이며) 그 기울기는 사라질 것입니다.
하면, 세 개의 점을 지나는 두 번째 선은 기울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세 개의 점을 평행한 선으로 지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고봉 : (작게) 뭐야? 지금, 스승님이랑 윤복이랑 붙은 거냐?
장효원 : 윤복이 저 놈이 그럴 깜냥이나 되겠냐?
홍도 : 그것은,
생도들 : (홍도 보면)
홍도 : 궤변이다.
술태 : (작게) 윤복이가 진 거야?
영복 : 더 들어봐야지. (윤복 보고)
윤복 : 왜 궤변이라 하십니까?
생도들 : (홍도 보고)
홍도 : 해법이란 명징해야 한다. 모두의 눈으로 확인할수 있어야해. 여기있는 모든사람의 눈에 네 풀이법을 확인시킬수 있겠느냐?
생도들 : 그렇지! (윤복 보고)
윤복 : 확인시킬 수 있습니다.
윤복과 홍도, 팽팽하게 보면... 생도들 숨을 죽인다.
홍도 : (붓 내밀며) 해 보거라.
윤복 : 단!
생도들 : (숨 죽이고) 뭐야? 뭐야?
홍도 : (윤복 보면)
윤복 : 원하는 만큼의 종이를 저 종이 옆에 붙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홍도 : 원하는 만큼?
윤복 : 예. 그리고 수십개의 벼루에 먹물을 가득 채워 주십시오. 그리하면 반듯한 선을 그어 보이겠습니다.
홍도 : 그 많은 종이와 먹물이 없는 이상, 네 말은 증명될 수가 없다.
윤복 : 허면, 언젠가 종이와 먹물이 주어진다면 증명될 수 있다는 말과 같지 않습니까?
홍도와 윤복, 팽팽하게 보면...
고봉 : 어찌된 것이냐? 누가 이긴거야?
장효원 : 시끄러워!
영복 : (윤복 뿌듯하게 보고)
홍도 : 언젠가 증명될 때 까지, 그것은 마음속에 담아두는 것이 좋겠군. 금일 수업은 이것으로 마치겠다.
생도들 : 수업 감사합니다!!!
홍도, 생도들 사이에 섞여 밖으로 나가는 윤복 본다.
S#35. 도화서 / 교육장 앞 복도 / 낮
생도들, 시끌벅적하게 나가면, 이인문이 교육장으로 들어선다.
S#36. 도화서 / 교육장 / 낮
홍도와 이인문, 윤복의 그림 앞에 서 있다.
이인문 : 아니, (선 보고) 이것은... 정말 파격적인 방법이군! (홍도 보며) 누구인가? 어제 그 생도인가? 두 장의 그림이 똑같았던?
홍도 : (괴롭게 고개 끄덕이고)
이인문 : 허허... 이럴 수가... 아까운 재능을 잃게 되겠군.. 대체 누군가, 이 생도는?
홍도 : ...
이인문 : 나한테도 말을 하지 않을텐가?
홍도 : 서운해 말게. 아직은 때가 아니야...
이인문 : (홍도 보면)
홍도 : .......이 생도를 만나야 겠어.
이인문 : 만나서 무얼 하려고?
홍도 : 그 그림을 그린 자가 맞는지.. 직접 확인해 봐야 겠네.
홍도, 밖으로 나가고.. 이인문, 홍도를 본다.
S#37. 생도청 / 동문앞 / 복도 / 저녁
효원, 작은 거울 앞에서 자기 모습을 이리저리 비춰보고, 이빨도 보는데,
거울 들고 있는 고봉,
고봉 : 멋지다! 이야, 좋아! 응?
효원 : (거울에 얼굴 비추며) 왜들 안나오냐?
고봉 : 글쎄? 데리고 올까?
하는데, 생도들 여덟 명 정도, 한껏 멋을 부리고 장효원 부근으로 온다.
장효원 : 가자.
장효원 가고, 생도들 신나서 따라가며 ‘나비야 나비야 청산가자-’ 신나서 춤추며 흥얼대면,
장효원 : (뒤돌아) 조용히 와라.
장효원 나가고, 생도들과 고봉, 노래 작게 부르며 춤추며 따라간다.
S#38. 도화서 마당 / 저녁
장효원과 생도들, 살금살금 도화서를 빠져나가 사라지면, 도화서 마당을 가로지르는 홍도 보인다.
S#39. 생도청 기숙동 입구 / 저녁
홍도, 기숙동 앞으로 오는데, 술태가 부랴부랴 나오는 모습 보인다.
술태, 신발 대충 꿰고 달려나오다가, 홍도가 보이자 얼른 허리 숙인다.
술태 : 단원스승님 오셨습니까?
홍도 : 어딜 가느냐?
술태 : 예?? 아,.. 그것이.. 술집에 가는 것은 절대로 아니고..
홍도 : 술집?
술태 : 아!! 아니, 그것이.. 금일이 생도장 생일이라, 기생집에..
홍도 : 기생집?
술태 : 아!! 아뇨, 아뇨, 그저 여인을 종이삼아, 술을 먹 삼아, 풍류를 알려주겠다고...
홍도 : 풍류? 이 놈들이!!
술태 : 죄송합니다!
홍도 : 됐다 이 놈아. 그럼, 지금 기숙동에 남은 사람은 누구냐?
술태 : 글쎄요.. 윤복이랑 영복이는, 여자가 있는 술집엘 가지 않는 바른생활 청년들이니...
홍도 : 알았으니, 가 보거라.
술태 : 예, 그럼! (가는데)
홍도, 기숙동 보면... 한 방만 불빛이 밝혀져 있다.
홍도, 그 곳으로 가면..
S#40. 도화서 / 신한평의 방 / 저녁
신한평, 영복을 앞에 두고 앉아있다.
신한평 : 수업 이야기는 들었다. 윤복이 혼자서 어려운 문제를 풀었다지?
영복 : 예. 스승님도 생각하지 못한 방식으로. 참으로 기특하지 않습니까?
신한평 : 그래. 그렇지. 허나.. 모난 돌은 정을 맞게 되어 있다. 너무 뛰어난 나무는 주변의 잡초들이 힘을 합쳐 죽이게 되어 있는
것이야. 무슨 말인지 알겠느냐?
영복 : ...
신한평 : 허니, 네가 윤복이를 잘 살피거라. 알겠지?
영복 : 예 아버지. 심려 놓으십시오.
신한평 : 윤복이는 지금 어디 있느냐?
영복 : 피곤하여 일찍 잠자리에 든다 하였습니다.
신한평 : 그래?
신한평, 생도청쪽 보면,
S#41. 도화서 / 생도청 기숙동 / 윤복과 영복의 방 / 저녁
윤복, (창의를 입은 상태에서) 갓을 쓰고 끈을 꼭- 묶는다.
S#42. 도화서 생도청 기숙동 / 윤복과 영복의 방 앞 / 저녁
홍도, 기숙동 중 홀로 불이 켜져 있는 윤복과 영복의 방으로 걸어간다.
S#43. 도화서 생도청 기숙동 / 윤복과 영복의 방 / 저녁
윤복, 창의 입은 채, 바닥에 깐 이부자리를 점검한다.
이부자리는, 속에 둘둘 말은 보퉁이를 넣어 사람 모양이 만들어져 있다.
윤복 : (방 안 둘러보고) 좋-아, (갓 만지고) 좋- 고. 가 볼까?
윤복, 돌아서는데, 수염을 붙이고 변장한 모습 보이고,..
윤복, 그림 그려진 종이 한 장(주; 신윤복의 [소년전홍])을 잘 말며 훅! 불끄면,
S#44. 도화서 생도청 기숙동 / 윤복과 영복의 방 앞 / 저녁
홍도, 윤복의 방문 앞에서 문고리 잡아당기려는데, 불이 꺼지고 문이 벌컥 열린다.
홍도, 윤복을 부르려는데... 변장용 수염을 만지며 두리번거리는 윤복의 모습 보고 멈칫! 한다.
얼른 옆으로 숨는 홍도.
홍도 : (작게) 어딜 가는 거지?
홍도 보면, 그림을 둘둘 말아 소맷부리에 감추고 밖으로 향하는 윤복 보인다.
수염이 잘 붙었는지 손으로 만지고 주변을 슥 둘러본 후 나가는 윤복.
홍도, 윤복이 사라진 쪽으로 따라간다.
S#45. 저잣거리 / 밤
홍도, 저잣거리를 따라가고.. 홍도가 따라가는 곳 보면,
갓을 쓴 윤복이 사람들 사이에 가려졌다, 나타났다, 하며 저잣거리를 가는데..
홍도 : 자그만 놈이 왜 이리 빨라?
홍도, 윤복 따라가다가 보면, 윤복이 어느 가게 앞에 멈춰 있다.
얼른 벽에 붙어 숨는 홍도. 고개 내밀어 보면,
S#46. 저잣거리 / 방물점 / 밤
윤복, 방물점 앞에 멈춰 나비 노리개를 만지는데,
벽 뒤에서 홍도의 머리가 살짝 나오는 것이 보인다.
홍도, 머리 살짝 내밀었다가 다시 숨는데,
주인남 : 드릴까?
윤복 : (만지던 노리개 놓고) 괜찮소.
S#47. 저잣거리 / 방물점 옆 / 밤
홍도, 윤복쪽을 보면, 윤복이 어딘가로 가는 모습 보인다.
홍도, 살금살금 윤복을 따라가면,
윤복이 방물점 옆 모퉁이를 휙 돈다.
홍도, 얼른 그 쪽으로 따라가면...
S#48. 저잣거리 / 방물점 옆 / 밤
윤복, 저잣거리 방물점 옆 모퉁이를 돌아 주막으로 향하고,
홍도도 따라서 모퉁이 돌아온다.
S#49. 저잣거리 / 가정집 / 밤
윤복, 주막 지나쳐 가정집 안으로 들어가 담 아래 숨고..
화장실에서 눈 비비며 나오던 꼬마 여자애가 윤복 보자, 윤복이 ‘쉿!’ 입에 손가락 가져다대고...
꼬마 여자애는 윤복 뒤쪽으로 두리번거리고 사라지는 홍도 보며, 숨바꼭질이라 생각했는지 진지한 얼굴로 끄덕인다.
홍도 : 꼬마야, (손 얼굴까지 올리고) 요만-한 오라버니 못 봤느냐?
꼬마 : (고개 흔든다)
홍도 : 속 썩이는군. (발길 돌리고)
홍도가 사라지자 윤복,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고 나간다.
S#50. 세책점 / 밤
세책점으로 들어서는 윤복.
세책점, 윤복을 보자, 주변 둘러보고 은밀히 다가선다.
세책점 : (윤복 옆에 붙어) 가져왔소?
윤복 : (은밀히) 가져왔소.
윤복, 슥- 내밀면, 뒤돌아서 그림 펼치는 세책점.
윤복, 궁금해 세책점 뒤에 붙어서 고개 내밀면,
세책점, 그림(신윤복의 [소년전홍]) 보고 ‘카- ’감탄하다가 표정 삭 바꾸고 돌아선다.
세책점 : 양반놈이 계집종의 손목을 (손으로 획! 잡아채는 시늉 하며) 잡아챘군!
윤복 : 어떻소?
세책점 : 여인이 남정네한테 손목을 잡혔으면, 이야기 끝난 것이지, 암. 소재는 참- 좋소! (그림 보며) 허나...
윤복 : 무엇이 잘못되었소?
세책점 : 아직, 이... 바위가 좀...
윤복 : (세책점 보며) 바위가..
세책점 : (뜸들이며) 이... 뭐랄까....
윤복 : (세책점 보면) 무엇이오?
세책점 : 이......(하다가, 갑자기) 약해!
윤복 : 약하다니, 무엇이 어떻게 말이오?
세책점 : 하여튼,... 뭐, 화공은 아직 어리니까 얼마든지 가능성이 있소. 좌절하지 마시고, 계속 정진하시오.
(전대 풀어서 엽전 꺼내며) 옛소.
윤복 : (손에 놓인 동전 다섯 개 보며) 닷냥?
세책점 : 나니까 이만치라도 쳐주는 것이오,
하는데, 남자 세 명이 들어선다.
세책점 : (윤복 등 떠밀며) 어서 가보시오. 정진하는 것 잊지 말고! 내주에 봅시다! (남자들에게) 아이고, 어서들 오시게!!
남자들 : 좋은 것이 좀 들어왔는가?
세책점 : (윤복 보고 ‘나가라’ 손짓) 기다리시게-
윤복 : 그럼, 내주에 보겠소!
윤복, 나가면,
세책점 : (남자1에게 은밀히) 있소. 새 것이.
남자1 : 어서 이리 보이시오!
남자1, 세책점이 든 그림 뺏어들고 보며 감탄한다.
남자2, 남자3도 보면서 감탄하고..
S#51. 세책점 옆 담벼락 / 밤
윤복, 세책점 옆 담벼락, 창문 열린 아래에 기대서 있고,
남자1(소리) : 여인이 은근히 뺀 엉덩이하며, 그러면서도 싫지 않은 듯, 아이고, 요렇게 은근히 웃어주니,
어느 남정네가 그냥 지나치겠소?
세책점(소리) : 그렇지요! 먹선만 죽-죽- 그어댄 문인화보다, 이러한 속화가 훨씬 솔직하고 보는 맛이 있지요.
이, 인간미가 느껴진다고 해야 하나?
남자1(소리) : 게다가, (돌 가리키며) 여기 이 괴석이 있으니.. 은밀-한 분위기가 교교히 살아나는군!
윤복 : (웃으며, 작게) 그렇지!
남자2(소리) : 이 화공은 저잣거리의 천재요!
남자1(소리) : 얼마면 되겠소? 스무냥? 스물 두냥?
세책점(소리) : 장난하시오? 오십냥 이하로는 꿈도 꾸지 마시오.
윤복 : (빙긋 웃고, 엽전 손에서 던졌다 받으며) 닷냥? 화평을 들은 값으로 마흔 다섯냥을 낸 셈 치지!
윤복, 세책점 옆길을 빠져나가는데, 윤복 앞에 서 있는 홍도.
윤복 : 아!! 아니!!! (주변 둘러보다 휙 돌아서 뛰려 하면)
홍도 : (윤복의 손목 잡아 돌려세우며) 어딜!
윤복 : (손목 잡힌 채, 손목 빼려 하며) 이, 이보오! 어허! 이거 보시오-
홍도 : 어딜 가려고? (윤복 얼굴에서 수염 확! 뜯어내면)
윤복 : (얼굴 감싸며) 앗 따거!!
S#52. 주막 / 밤
윤복. 긴장해서 홍도 보면,..
홍도, 한 손에 그림을 든 채(신윤복의 [소년전홍]) 한 손에는 술잔을 들고 마신 후 내려놓는다.
빈 술잔에 술을 채워주는 윤복.
홍도, 그림 보는 채 한 잔 더 마시고 잔 내려놓으면,
윤복이 술을 또 채워주려는데, 홍도가 손으로 술잔을 막는다.
윤복, 홍도 보면,
홍도 : 일월산인?
윤복 : 스승님!
홍도 : 오냐!
윤복 : (무릎 꿇고) 제발 모른 척 해 주십시오. 혹여 아버지가 아시기라도 하면, 사단이 납니다.
홍도 : 그럴 걸 왜 그렸느냐? 돈이 필요했냐?
윤복 : 아닙니다. 제가 무슨 돈이 필요하겠습니까. 겨우 닷냥 받았을 뿐인데.
홍도 : 돈 때문은 아니다?
윤복 : 처음부터 팔려고 한 건 아닙니다.
홍도 : 그럼 도대체 뭐냐? 오밤중에 수염까지 붙여 가면서.
윤복 : 그것이..
홍도 : 그래.
윤복 : 처음에는 그저 심심파적으로 그린 것이었는데...
홍도 : 근데?
윤복 : 예, 근데, 그것이... 은근-히 소문이 돌아, 가져가는 족족 팔리지 뭡니까?
홍도 : 가져가는 족족 팔린다?
윤복 : 글쎄,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근데, 허허, 참, 사람들이 그렇게들 좋아한다고...
홍도 : (자르며, 술상 쾅! 치고) 네 이놈!
윤복 : (헉! 멈추고 보며) 예!
홍도 : 네가 지금 제정신이냐? 그 아까운 실력으로, 겨우 닷 냥짜리 그림을 팔고 있단 말이야? 응?
윤복 : (놀라 홍도 보며) ....
홍도 : 보거라. ([소년전홍] 윤복 앞에 턱 놓으며) 비록 작은 소품이지만, 이 얼마나 감동적이냐? 이 따뜻한 색채 하며,
절묘한 포치하며, 춘색을 놓치지 않는 이 묘사력! 조선천지 어떤 화원이 또 이렇게 그릴 수 있겠느냐?
윤복 : (그림 보고)
홍도 : 말해보거라. 넌 도대체 어떻게 이런 그림을 그렸느냐?
윤복 : (생각해 보더니) 모르겠습니다. 그저, 보이는 것을 종이에 옮겼을 뿐인데..
홍도 : 하....그저 종이에 옮겼다.. (술 한 잔 마시고) 그 놈 참... 타고났구나.. 타고났어..
윤복 : ...
홍도 : 헌데,...그 그림에서는 어찌 여인의 뒷모습을 그렸느냐?
윤복 : 예? 무슨?
홍도 : 그, 도롱이를 들고 돌아선 여인 그림 말이다.
(플래쉬 : [기다림]그림)
윤복 : 아- 그거요? 그것은 송낙이지, 도롱이가 아닙니다.
홍도 : 그래, 맞다, 송낙. 근데 왜 그 여인의 뒷모습을 그렸지?
윤복 : 글쎄요.. 그 뒷모습에는 말입니다... 뭔가가 있었습니다.. 지울 수 없는 안타까움같은...
홍도 : 그래서 그리지 않을 수 없었구나!
윤복 : 예! 저도 모는 사이에 붓이 움직였습니다!
홍도 : 그것이다! 그것이 바로 자기 흥을 만난다는 것이지!
윤복 : 예, 맞습니다! 마치 천지간의 모든 것이 그대로 멈춘 듯,
홍도 : (O.L) 그 순간 그 여인 외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지?
윤복 : 예! 맞습니다! 바로 그랬습니다!
홍도 : 그것이 바로 나를 잊는 것이다! 물아의 경지야!
윤복 : 아...
홍도 : 네가 그것을 경험했구나. (털어 마시고, 빈 잔 보며) 그것을 경험했어.. 거기까지 간게야.. (씁쓸한 얼굴 되면)
윤복 : 스승님.. 왜 그러십니까?
홍도 : 그래, 네가 맞아, 네가 맞는거야. 도화서를 발칵 뒤집어놓은 그 그림을 그린 놈이, 정녕 네놈이었어..
윤복 : (뭔가 잘못됐다 싶어 멈칫 하며) 예?
홍도 : 이 일을 대체 어찌한단 말이냐?
윤복 : 무엇 말씀이십니까?
홍도 : 익일이면... 도화서에서는 장파형이 치러진다.
윤복 : 장파형이요?
홍도 : 그래. 그 그림을 그린 놈을 장파형에 처한단 말이다.
윤복 : 아니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홍도 : 하늘이 내린 재능이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이냐? 이제는 붓도 잡을 수가 없는데...
윤복 : ... 붓도 잡을 수 없다고요?
홍도 : (윤복의 손 보며) 그 손이 장파형틀에 뭉개진단 말이다. 이젠 아무 것도 그릴 수가 없어!
윤복 : 뭉개지다니요.. 선생님, 아니죠?
홍도 : (술 들이키면)
윤복 : (눈물 핑 돌며) 제가 그렇게 잘못한 겁니까?
홍도 : 윤복아..
윤복 : (목이 메여) 물아, 물아의 경지라면서요.
홍도 : 윤복아..
윤복 : 이건 아니야. 말도 안 되. (눈물 그렁한 눈으로 홍도 보며) 저 먼저 일어나겠습니다. (일어나면)
홍도 : 윤복아.. (윤복의 소맷자락 잡으려면) 앉아보거라..
윤복 : 아니요. 저 더 못마십니다. 많이 취했습니다. (홍도의 손 뿌리치고 가면)
홍도 : 윤복아!
윤복 나가고..
나가는 윤복의 모습 보는 홍도. 한없이 가슴아픈...
홍도 : 그래.. 차라리..돌아오지 말거라..
홍도, 술 채우고..
S#53. 길 / 밤
윤복, 정신을 놓은 듯 밤길을 터덜터덜 걸어온다.
(insert : 어린 시절, 붓 잡는 법을 가르쳐주는 신한평)
(insert : 벽에 그려지는 그림자, 등잔쪽으로 가면, 커다란 남자의 손-서징-과 어린아이의 손이 그림자로 나비 모양을 만들고 있다.
어린 윤복의 손을 따라 나비가 하늘하늘 움직이고..)
윤복의 발걸음 점점 빨라지고...
(insert : 1부. 윤복의 붓 쥔 손을 잡는 홍도의 손. 윤복의 손 잡은 채 갈필을 내리긋고..)
급기야 숨이 턱에 차도록 마구 달리는데...
S#54. 계월옥 입구 / 저녁
정신없이 달리다 멈추는 윤복의 발. 헉헉- 한참동안 숨 몰아쉬고 고개를 드는 윤복.
윤복, 올려보면... 눈 앞에 불빛이 새어나오는 계월옥 입구가 보인다.
남자1 : (윤복 치고 지나가며) 길을 막고 서서 뭐하는 것이오?
남자1, 2 웃으며 안으로 들어가고,
윤복, 계월옥 보는데,
밖에서 돌아오는지, 쓰개치마를 쓴 기생1이 얼른 와 윤복의 팔짱을 낀다.
윤복, 기생 보면,
기생1 : 어마? 해사하게도 생겼수. 어서 들어가시어요. 다들 기다리고 있으니까.
윤복 : 누가?
기생1 : (끌고 가며) 누구긴 누구 말이오? 어린 한량들 말이지. 큰 돈 치루신 모양인데, 어서 가십시다. 곧 정향이가 들어갈 테니.
윤복과 기생1 안쪽으로 사라지면,
고봉(소리) : 감축드리오!
S#55. 계월옥 / 큰 방 / 밤
생도들(소리) : 감축드리오!
계월옥 큰 방, 상 둘러싸고 생도들 주루루 앉아있고, 그 중 술태도 보인다.
생도들 일제히 각 맞춰 잔을 들어올리고 있다.
장효원, 부드럽게 웃으며 잔 들어 마시고 머리에 털면,
고봉 : 좌측으로 할까, 우측으로 할까?
장효원 : (왼쪽 눈짓 하면)
고봉 : 그럼, 좌측으로, 순배주(주; 순서대로 마시기)를 시작한다.
술태 : 아니 이거, 꼭 나부터 하게 된다니까- 허허-
고봉 : 드시게- 드시게-
생도들, 고봉과 같이 박수치고, 생도1, 술잔 들이키는데,
문이 열리고 윤복이 툭 들어선다.
기생1, 윤복에게 눈웃음 흘리며,
기생1 : 그럼, 재미나게 노시오-
기생1 나가고.. 생도들, 장효원, 고봉 윤복 보면..
장효원 : 이게 누구야? (생도들 둘러보며, 윤복 보고) 그리움선생! 그림은 그리움이다- 선생 아니야? 빈 손으로 온 건 아니겠지?
윤복 : 마음이 왔으니 된 것이지.
장효원 : 마음이 왔다?
cut to
생도들 가방에서 꺼내는 필통.
붓을 바닥에 비우고 탕! 놓으면, 거기 따라지는 술. 콸콸..
윤복, 그 모습 보는데,
윤복 앞에 탕! 놓이는 필통주.
장효원 : 마셔라. 네가 가져왔다는 그 마음이 얼만큼인지 보자.
고봉 : 기집애 같은 놈이 술이나 마실 줄 알겠느냐? 왜, 울지 그래? 형님~ 형님~
혹 아느냐? 네 형님이 그 소리 듣고 달려와 이 술 마셔줄지? 응?
생도들, 하하- 웃고, 윤복 벌떡 일어난다.
생도들 보면,
윤복 : 이깟 술이 무어라 못 먹겠냐? 이깟 술이..
술태 : 괜찮겠냐?
윤복, 필통주 들고 들이키고...
생도들, 숨 죽이고 보며 놀라는데....
S#56. 계월옥 / 정향의 방 / 밤
가야금 끝에 달린 장신구를 툭 떼는 손, 패옥(정향의 기생 선배)이다.
패옥, 장신구를 만지며..
패옥 : 정인을 만나거라.
정향 : (패옥 보고)
패옥 : 기생이란..전주를 만나서 팔려가면, 그집에 틀어박혀 그 사람의 장신구가 되는 것이다. 그전에, 연모하는 정인을 만나야 해.
그래야 평생을 두고 그리워 할 이가 생기는 것이다.
정향 : (장신구 보며) 평생을 그릴 .. 사람이오?
패옥 : 널 알아봐주는 사람을 만나야 한다. 세상 모두가, 술에 취해 너를 우습게 봐도, 네 소리를 알아줄 단 한 사람.
그 사람을 만나야 해.
계월 : (문 벌컥 열고) 안 나올 것이냐?
패옥 : (놀라며) 어머니!
계월 : (패옥 보고, 패옥이 든 장신구를 보고 버럭) 이년! 아직도 그것을 간직하고 있는 것이냐! (패옥의 장신구 확 빼앗으면)
패옥 : 어머니! 그것은..
계월 : 시끄럽다! 넌 내가 파는 물건이다. 물건에는 고통도, 슬픔도 없는 것이야.
(장신구 흔들며) 단 한 번 스치고 간 자를 어찌 평생을 품고 살려고 하느냐?
패옥 : 하지만..
계월 : 잊거라. 잊고, 그 자리에 어떤 자가 들어와도 그만큼 품어주어라...기생이란 그런 것이야..
패옥 : (눈물 툭 떨구면)
정향 : (계월 보고)
계월 : (나가려다 정향 보고) 어서 매무새를 다듬고 나오거라. 객들이 기다리니.
계월, 장신구 바닥에 툭 던지고 나가면,
정향, 바닥에 떨어진 장신구 주워 들고...
S#57. 계월옥 / 큰 방 앞, 쪽마루 복도 / 밤
정향, 앞장서서 가고 몸종이 가야금 들고 뒤를 따른다.
걷는 정향을 따라 계월옥의 풍경이 보인다.
S#58. 계월옥 / 큰 방 / 밤
생도들, 기생을 끼고 술을 마시고, 기생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노래를 하며 흥청거리고 놀고...
윤복은 말없이 술을 마시고 있는데, 문이 열린다.
생도들, 고운 자태로 들어오는 정향을 보고...
정향, 곱게 절 하고 앉으면, 윤복, 정향을 본다.
고봉 : 아이고, 곱기도 하구나, 응?
장효원 : 네가 정향이로군!
정향 : 정향이라 하옵니다.
술태 : 참으로 곱구나, 고와..
몸종이 정향 무릎에 앞에 가야금을 놓아주고...
장효원 : 그건 됐고, (자기 무릎 툭툭 치며) 이리 와서 앉아 보거라.
정향 : (눈 내리깐 채) 저는 금기(주 : 가야금을 켜는 기생)이지 은근짜(주 : 몸을 파는 기생)가 아닙니다.
윤복(소리) : 여전히 가시투성이군.
정향 : (윤복 슬쩍 보고, 알아보지만 모른 척) 원래 꽃은 아름다울수록 가시가 많은 법이지요
윤복 : 허허.. 자기 입으로 아름답다 하는 꽃은 보다보다 처음보는군.
정향 : 자기 입으로 말하면, 아리따운 꽃이 아름답지 않아진답니까?
윤복 : 누군가 보아주지 않으면 그 꽃이 아름다운들 무슨 소용이 있는가?
정향 : 꽃은 그저 있을 뿐, 아름답다 아름답지 않다 하는 것은 지나가는 한량들의 수작일 뿐이지요.
윤복과 정향, 서로 보면..
고봉 : 니들... 아는 사이냐?
윤복 : (정향 보며 식- 웃는데)
생도1 : (혀 꼬여) 뭐하냐 이 년! 어서 시작하지 않고!
생도1 소리와 함께, 술잔 날아와 정향의 가야금 줄이 끊어진다.
술잔 속의 술은 정향의 얼굴과 옷에 튀어 뚝! 떨어지고, 방 안이 고요해 진다.
생도1, 의외로 너무 큰 사태가 벌어져 자기도 좀 놀라는데,
장효원 : 네 이놈! 뭐하는 짓거리냐?
고봉 : (생도1의 머리 치며) 이놈! 취했으면 곱게 잘 일이지!!
생도1 : 아, 나는 그저...
장효원 : (정향에게) 괜찮으시오? 우리 생도가 많이 취해서 실례를 했습니다.
정향 : (효원 보면) 이미 벌어진 일, 사과하면 무엇한답니까?
장효원 : 줄이 끊어졌으니 가얏고는 그만두고, (술 잔 내밀며) 이리 와서 술을 한 잔 하시지요.
저는 생도들의 장을 맡고 있는 장효원이라고 합니다.
정향 : (모른 척 고개 돌리고, 생도들 보며) 곡명은.. (갑자기 삭- 미소짓는다)
생도들 : (침 꿀떡 삼키며 정향 보면)
정향 : 철공산류산조이어요.
정향, 오른손을 높이 들더니 가야금 줄을 팅! 튕기고, 정향의 연주 시작된다.
장효원, 울그락불그락 인상쓰는 가운데, 정향의 연주 고조되고...
그 연주를 듣는 윤복, 정향을 본다.
윤복의 시야에 정향만 들어오고, 윤복의 귀에는 서서히 다른 소음 없어지고 오로지 가야금 소리만 들리는데,
S#59. 강가 / 낮 / 환상
윤복과 정향 앉아있고, 다른 생도들과 방 안의 풍경은 모두 사라진다.
연주하는 정향과 윤복만이 남은 가운데..
옛날, 갈대가 날리는 저녁 강가가 보인다.
일곱 살쯤 된 어린 윤복이 아버지 어깨에 목말을 타고 있고,
그 앞에는 빛 속에서 하늘하늘 춤추며 노래하는 여인이 윤복과 아버지를 보며 웃고 있다.
강가에 물이 반짝이고, 정향의 가야금소리 속에,
어린 윤복의 팔을 잡고 춤추는 아버지와 윤복을 보고 노래하며 춤추는 어머니(얼굴이 확실히 보이지는 않는다),
활짝 웃는 어린 윤복, 아른거리는 엄마 모습. 하늘하늘거리며 춤추며,
햇살 속으로 사라져 버리고, 연주가 끝난다.
S#60. 계월옥 / 큰 방 / 밤
연주가 끝남과 동시에, 환상은 사라지고 어린 윤복과 어머니, 아버지도 사라진다.
윤복, 안타까운 듯 그들이 사라진 곳 보다가 정향 보면,
정향, 마치 그 장면을 자신도 보았던 듯, 미소지으며 윤복 본다.
장효원 : 뭐하느냐? (박수 치며) 박수들 치지 않고?
생도들, 오- 소리치며 박수 치고.. 윤복, 일어선다.
윤복 : (정향 옆을 스쳐가며) 최고의 연주였습니다.
정향, 윤복 보면, 윤복, 빙긋 웃고 밖으로 나간다.
S#61. 계월옥 / 마당 / 밤
안에서는 시끄러운 생도들의 소리가 멀리서 들리고..
윤복, 계월옥 마당에 걸터앉아 달을 본다.
윤복, 달을 향해 오른손 뻗고 가만히 본다. 하얗고, 작은 윤복의 손..
S#62. 계월옥 / 복도 / 밤
정향, 큰 방에서 나와 복도를 따라 걷는데, 정향 앞을 가로막는 남자.
정향 보면, 윤복이 서 있다.
가야금 들고 따라오다 정향 옆에 서는 몸종.
정향 : 무슨 일이시냐 여쭈어라.
몸종 : 무슨 일이시냡니다.
윤복 : 한 곡조 더 청해들을 수 있을지요. (손 쑥 내밀면)
몸종 : 에그머니!! (정향 눈치 살피고)
정향 : 무엇이냐?
몸종 : (윤복의 손에 올려진 엽전 보고) 닷냥입니다.
정향 : 닷냥? 겨우 닷냥짜리 연주로 보였느냐 여쭈어라.
몸종 : 겨우 닷냥짜리,..
윤복 : (자르며) 이것이 내 전부요.
정향 : 궁금치 않다 전하거라. (지나가려 하면)
윤복 : (정향의 손목 잡아채고)
몸종 : 어마마마마마!! (놀라 두리번거리는데)
정향 : (윤복 팽팽하게 보며) 무슨 짓입니까.
윤복 : 익일이면 이 손이 날아갑니다.
정향 : (윤복 보면)
윤복 : 이 닷냥은.. 이 손으로 그린 마지막 그림을 판 돈입니다. 이것으로 마지막 밤을 보내고 싶습니다. 그 가야금 소리와 함께.
정향 : (윤복 보고)
- 2부 끝.
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