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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분명 공용 주차장으로 들어왔는데 백화점으로 나온 이유는 공용 주차장과 백화점 주차장이 하나였기 때문이었다. 지상에 올라와보니 어찌나 사람들이 많은지 깜짝 놀랐다. 명동 못지않았다. 프라하 시내는 거의 관광객으로 가득 찼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들이 향한 곳은 ‘프라하 오를로이’(Orloj, 독일이나 체코는 j와 i는 같은 음가임), 즉 천문시계였다. 천문시계는 구청사 건물에 붙어 있는데 프라하를 여행하면서 천문시계를 못 봤다면, 그건 마치 서울에 왔는데 남대문시장을 모른다는 것과 같은 말이다. 1410년에 만들어진 이 천문시계는 그동안 많은 수리를 거쳐 지금에 이르렀는데 매 정시마다 정확하게 작동하고 있어 전 세계의 관광객들을 끌어 모은다. 이 시계는 세계에서 세 번째로 오래된 천문시계로 정시가 되면 맨 위에 있는 두 창문이 열리며 12 사도가 나와 모습을 보이고는 사라진다. 그 아래 둥근 시계 양 옆에는 각각 두 조각상이 있는데 왼쪽부터 거울을 든 사람(자만), 주머니를 든 사람(탐욕), 해골, 비파를 든 사람(유흥)이 있어 세상 즐거움에 빠진 사람들에게 죽음을 기억하라는 경각심을 준다. 사실 이 천문시계는 천문에 관한 지식을 가진 사람만 이해할 수 있는 시계라서 일반인에게는 별 의미가 없었기에 그 아래에 또 하나 둥근 시계를 만들었는데 그것은 일반인을 위한 시계다. 이 시계를 만든 이유는 농부들이 농사를 지을 때, 지금은 어떤 일을 해야 하는지를 알려주는 것 외에도 휴일, 중요한 날짜를 알려주기 위해 만든 것이라고 한다. 프라하는 독일 유학시절 때 이미 한 번 와본 적이 있었지만, 꽤 오래 된 일이라 기억이 희미해 다시 한 번 와보고 싶었는데 이번 기회에 또 오게 되니 정말 좋았다. 세계 어디서나 그렇지만, 관광객들이 북적대는 곳에는 반드시 전 세계에서 내로라하는 소매치기들이 모여들기 마련이다. 이태리의 로마, 프랑스의 빠리 등은 물론 프라하도 마찬가지다. 사람도 많은 데다가 모두들 고개를 들고 천문시계를 보고 있을 때 관광객들의 주머니나 가방에는 소매치기들의 손이 들락날락한다. 그래서 관광 가이드들은 천문시계를 볼 때는 항상 가방을 꼭 껴안고 시계를 보라는 당부를 한다. 그런데 관광객들마다 핸드폰으로 사직을 찍으려고 두 손을 올리니 가방과 주머니는 무방비 상태가 되고 만다. 이때가 소매치기들에게는 절호의 기회가 아닐 수 없다. 참 웃지 못할 슬픈 일이다. 이왕 천문시계 얘기가 나왔으니 여기에 얽힌 이야기를 하나 소개한다. 프라하의 천문시계는 1410년에 시계공 미쿨라쉬(Mikuláš)가 디자인하고, 하누쉬(Hanuš)에 의해 완성되어 프라하 시의 자랑거리가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프라하에 퍼지는 소문이 있었는데 그것은 하누쉬가 다른 곳의 지원을 받아 천문시계를 만든다는 것이었다. 이 소문에 시의원들은 분노했고, 하누쉬가 이와 똑같은 혹은 이보다 더 좋은 천문시계를 만들지 못하도록 그의 눈을 멀게 했단다. 그 이후 하누쉬는 제자의 손에 이끌려 시계 내부로 들어갔고, 시계가 더 이상 작동하지 못하도록 자기가 만든 모든 부속품을 일일이 손으로 망가뜨려 자기의 죽음과 함께 시계도 멈추게 했다는 ‘전설 따라 삼천리’가 있는데...
그런데 해마다 엄청난 관광객이 프라하에 오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건 중세시대의 건물과 역사적인 많은 유적들이 잘 보존되어 있기 때문이다. 거기에는 다음과 같은 역사적 사실이 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체코는 일찌감치 히틀러에 항복을 했는데 그 이유는, 프라하에 있는 유적 때문이었다. 이 때문에 프라하는 전쟁의 포화를 피할 수 있었지만, 이를 두고 민족 의식이 강한 어떤 이는 히틀러와 싸워보기도 전에 미리 항복한 당시의 지도자를 역적으로 몰아 부치는 반면, 또 어떤 이는 체코가 미리 항복했기 때문에 그 당시의 건물이 하나도 파괴되지 않아 인명피해도 적었고 또한 옛 유적이 지금까지 그대로 남아 있어 다행이 아니냐며 맞선단다. 지금 프라하는 전 세계의 관광객들을 끌어 모아 앉은 자리에서 엄청난 돈을 벌어들이고 있는 걸 보면, 참 아이러니 한 일이다. 이것은 체코의 명물 ‘트르들로’(Trdlo), 혹은 '트르델닉'(Trdelnik)이라는 전통 빵으로 우리나라에서는 ‘굴뚝 빵’이라고도 한다. 속에 아무 것도 넣지 않은 '트르들로'도 있지만, 대부분 크림이나 과일 혹은 녹인 초콜릿 등을 안에 넣어 판다. 이왕 여기에 왔으니 이것도 먹어봐야 할 것 같아 사먹어 보았는데 특별한 맛은 아니고, 그저 계피 맛이 나는 달달한 빵이었다. 사실 빵만 먹어도 배부른데 안에 크림까지 있어 이거 하나 먹고 나니 제법 배가 불렀다. 이미 언급한 대로, 프라하 시내는 엄청 많은 관광객들로 정신이 없었다. 길을 가도 그냥 밀려간다고 해야 할 정도였다. 물론 한국 관광객은 말할 것도 없고, 일본, 중국 관광객도 엄청 많았다. 트르들로를 먹으며 유명한 ‘카렐 다리’로 가는데 강변에 재미있는 놀이를 하는 곳이 있어 잠시 머물러 구경했다. 시내도 그렇지만, 카렐 다리 역시 사람들이 많았다. 모두 관광객들이었다. 그곳에는 내로라 하는 악사들이 관광객들을 대상으로 연주를 하며 돈을 벌고 있었는데 달인이라고 할 만 했다. 우리나라 TV프로그램 '생활의 달인'을 보면 정말 상상을 초월한 달인들이 많은데 여기도 기가막힌 달인들이 많았다. 역시 세계는 넓었다. 우리나라 지하역사에서 연주하려면 오디션을 거쳐야 하듯, 프라하 역시 카렐 다리에서 연주하려면 오디션을 거쳐야 한다. 괜히 실력도 없는 어중이떠중이가 자기도 돈 좀 벌어보겠다고 나서면 나라의 품격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거리의 악사라고 해도 상당한 실력이 있어야 가능하다. 카렐 다리는 1357년에 건설이 시작되어 1402년에 완성되었으며 길이 621m, 너비 약 10m다. 다리를 걷다보면 양쪽 난간에 약 30개의 조각상이 있으며 그 가운데 제일 유명한 게 네포묵(Nepomuk) 신부의 동상이다. 네포묵은 가톨릭 성인으로 1393년 경에 네포묵 신부에게 고해성사를 한 요안나 왕비의 비밀을 발설하지 않은 죄로 바츨라프 4세의 고문을 받았지만 끝내 입을 열지 않았단다. "만일 이야기를 한다면 왕의 옆에 있는 개에게만 말하겠다"고 하자 분노한 왕은 그를 죽여 블타바 강에 던졌는데 그 이후에 체코 사람들은 그를 기리는 동상을 만들어 카렐 다리에 세웠다. 그의 동상 밑에는 부조가 있는데 그걸 만지면 행운이 있다는 속설이 있어 여기를 방문하는 관광객들은 모두들 왼쪽의 개와 오른쪽의 요안나 왕비의 부조를 만지며 행운을 빈다. 그런데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만졌던지 그만 양쪽의 부조(개와 요안나 왕비)가 반들반들하고 광이 날 정도다. 인파를 헤치며 카렐 다리를 건너 언덕 위에 있는 프라하 성과 대통령 관저 그리고 비투스 성당을 구경하러 올라갔다. 높은 언덕은 아니지만, 제법 경사도 있고 날도 더운데다가 다리가 아파 걷기 힘들어 하는 아내를 뒤에서 밀며 올라가느라 시간이 좀 걸렸다. 하지만, 우리가 도착한 때는 비투스 성당 관람시간이 지났기 때문에 안에 들어가 볼 수는 없었다. 비투스 성당의 겉모습은 독일 쾰른의 대성당과 모양이 비슷하나 규모로 보면 새 발의 피다. 쾰른 대성당을 본 사람이라면, 비투스 성당을 보고도 아무런 감동을 받지 않는다. 그냥 피식 웃을 뿐이다. 처음에 이 성당을 봤을 때도 그랬지만, 이번에도 나는 그냥 웃고 말았다. (이 사진은 독일 쾰른에 있는 대성당이며, 고딕 건물로는 세계 최고다. 한 눈에 봐도 비투스 성당과는 규모에 있어서 확실히 차이가 난다.) 비투스 성당 내부를 들어가지 못해 아쉽지만 겉을 본 것으로 만족하고 다시 시내로 내려오면서 ‘황금소로’에 들렀다. 황금소로는 ‘황금’과 ‘작은 골목길’이 합성된 말인데 '황금'이란 말이 붙은 이유는 금 세공업자들이 여기에 모여 살았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약 15채 정도의 작은 집이 연이어 붙어있으며 대부분 기념품을 파는 집들이다. 하지만, 22번지의 파란색 집은 사람들의 발길을 멈추게 한다. 그건 프라하를 대표하는 실존주의 소설가 프란츠 카프카(Franz Kafka)가 살았던 집이기 때문이다.
고등학생 시절, 카프카의 ‘변신’이란 책이 유명하다고 해 도서관에서 책을 빌려 앞부분을 조금 읽다가 도대체 이게 뭔 말인지 도통 알 수 없어 '에잇, 뭐 이런 책이 다 있어?' 이러며 집어던졌었다. 아마 지금 다시 읽어도 그럴 것 같다. (황금소로를 보고 내려오는 데 또 거리의 악사가 관광객을 맞이한다.) 카프카 집도 구경하고 내려와 블타바 강변에 큰 유람선을 개조해 만든 식당에 들어가 맛있게 식사하고 음료수도 마시며 프라하의 야경을 보았다. (배를 개조해 만든 식당) 그런데 대각선으로 있는 옆 테이블이 정말 시끄러웠다. 중국인들이 모이면 시끄럽다고 하는데 거기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체코인들도 시끄러웠다. 아마 분위기가 분위기인지라, 마음이 들떠 저렇게 떠드는 모양이었다. 나는 이럴 때마다 경찰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시끄러웠지만, 비싼 식사를 잘 마치고 호텔로 돌아가는데 천문시계가 있는 광장을 가로질러 가야했다. 그런데 늦은 시간인데도 불구하고 광장에는 세계 각국의 젊은이들이 삼삼오오 둘러앉아 담소하며 프라하의 밤을 즐기고 있었다. 분위기가 이런데 우리도 그냥 호텔에 갈 수 없었다. 벤치에 앉아 프라하의 밤하늘을 보며 지나가는 사람들도 구경하고,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시간을 보냈다. 참 오랜만의 여유였다. 잠시 분위기에 젖어 앉아 있다가 호텔로 돌아오는데 거의 호텔에 도착할 무렵부터 빗방울이 뚝뚝 떨어지기 시작했다. 조금 더 여유를 부렸더라면 비를 맞을 뻔 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