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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시편 23:1-6
지난주에 하나님께서 주시는 평안에 관한 말씀을 나누면서, 우리 마음에는 두 마리의 늑대가 사는데 근심과 걱정을 하게 하는 늑대와 평안하게 하는 늑대가 있다고 했습니다. 지난 한 주간 동안 어떤 늑대에게 먹이를 많이 주셨는지요? 여러분의 삶을 풍요롭게 하는 늑대에게 많은 먹이를 주시면서 살아가셨을 줄로 믿습니다. 혹시라도 아직도 걱정이나 근심, 두려움이라는 늑대가 여러분 마음에 살아있다면, 오늘 말씀을 통해서 다 물리치시길 바랍니다.
■ 일점 일획도
오늘은 시편 23편 다윗의 시를 통해서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라는 제목으로 하나님이 우리의 삶을 어떻게 인도해 주시는가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지난 한 주간 성경을 읽다가 저는 별로 중요하지 않은 단어 때문에 이틀 정도 고민을 했습니다. 그것은 시편 23편 4절에 나오는 ‘지팡이와 막대기’라는 단어였습니다. 히브리어로 지팡이라는 단어는 ‘미쉬에나’인데 어원은 ‘솨안’에서 왔습니다. ‘솨안’이란, ‘의지하다 혹은 기대다’라는 뜻입니다. 히브리어로 막대기는 ‘쉐베트’라는 단어를 사용하는데, 공격하거나 방어할 때, 혹은 말을 듣지 않을 때 ‘매’로 사용하거나, 물에 빠졌거나 골짜기에 빠진 짐승을 꺼낼 때 쓰는 도구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결론은 이렇습니다. 성경에서 ‘지팡이와 막대기’는 혼용되어 사용되고 있으며, 성경의 내용을 이미지로 그리는 화가들도 지팡이와 막대기를 혼용해서 그렸습니다. 결론은 막대기냐 지팡이냐의 문제가 아니라, 쓰임새에 따라서 막대기도 지팡이도 된다는 점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히브리어 성경의 시편 23편을 보고 계십니다. 물론, 공부를 위해서 영어와 한글이 혼용되어 있지만, 생김새도 이상한 히브리어를 가만히 보시면 알파벳 아래에 다양한 기호들이 있는 것을 보실 수 있습니다. 붉은 펜으로 표시한 부분입니다. 작은 점이나 꺾쇠 같은 기호들이 어떤 모양이고, 어디에 붙어있는지에 따라 알파벳의 발음도 달라지고, 뜻도 달라집니다. 그래서 히브리어에서는 특별히 ‘일점 일획’이 상당히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마태복음 5장 18절에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도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는 말씀도 이런 히브리어의 표기방식과 관련된 말씀입니다.
■ 시편 23편의 중요단어
그러면 이제 시편 23편의 말씀을 살펴보겠습니다.
제가 설교의 키워드로 삼은 단어들은 ‘목자, 쉴 만한 물가, 지팡이와 막대기, 안위’라는 단어입니다. 그리고 본문에는 없으나 ‘목자’와 떨어질 수 없는 ‘양’을 추가했습니다. 물론, 그 외의 중요한 단어들도 많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을 다 담으려면 책 몇 권의 분량이 될 것입니다. 그만큼 다윗의 시편 23편의 내용은 깊이가 있고, 그래서 수많은 이들이 사랑하는 시편이 되었으며, 위로의 말씀이 된 것입니다.
■ 지팡이와 막대기
옛날에 스님들이 길을 갈 때 손에 쥐고 가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지팡이인데 가장 중요한 용도는 무엇이었을까요? 불교는 ‘살생’을 금하는 종교입니다. 그래서 길을 걸을 때, 미리 지팡이로 땅을 쳐서 울림을 줌으로 작은 곤충이나 뱀 같은 것이 미리 피하게 해서 부지불식간에 발에 밟혀 죽는 미물이 없게 하기 위한 용도였다고 합니다.
목자의 지팡이는 양 떼를 인도하는 이정표가 되고, 사나운 짐승으로부터 보호하는 무기이며, 양 떼가 제 길을 가지 않을 때 등을 가볍게 두르려 돌이키게 하는 매로 사용되었으며, 물이나 골짜기에 빠졌을 때 곤경으로부터 건져주는 도구입니다. 또한, 목자가 곁에 있음을 알려주는 표지입니다. 사무엘상 20장 3절 말씀에 다윗을 도와준 요나단에게 다윗이 이런 말을 합니다. “나와 죽음 사이는 한 걸음뿐이니라.” 즉, 목자의 지팡이는 가볍게 등을 쳐줌으로써 한 걸음밖에 차이가 나지 않는 죽음의 길로부터 생명의 길로 양을 인도하는 도구입니다. 또한, 먼발치에서도 목자가 나를 지켜주고 있다는 사인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목자의 지팡이와 막대기는 목자를 위한 것이 아니라 양 떼를 위한 도구입니다.
우리는 생각해 봐야 합니다.
막대기처럼 나의 방향을 교정하고 나의 신앙상태를 점검하실 때 주님께 순종하는지, 지팡이처럼 나를 일으키시고 건지시며 인도하시는 주님을 따라서 살아가고 있는지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막대기와 지팡이로 인도하실 때, 가볍게 등을 치시며 사인을 줄 때 불순종함으로 한 걸음 차이밖에 나지 않는 죽음의 길로 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봐야 합니다. 4절의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신다는 말씀을 통해서 저는 세 가지 위로를 받습니다. 하나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한 도구인 지팡이와 막대기를 들고 계신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우리가 죽음의 길로 달려가려고 할 때에는 가볍게 등을 쳐서 사인을 주시며, 설령 사망의 음침한 길로 잠시 들어섰더라도 구해주시는 분이시라는 점입니다. 주님의 지팡이와 막대기를 통하여 여러분의 삶에 위로가 넘치시기를 바랍니다.
■ 쉴 만한 물가
‘쉴 만한 물가’로 번역된 말씀은 ‘잔잔한’이라는 뜻이 있습니다. 왜 잔잔해야 할까요? 일단, 양은 흐르는 물을 마시지 않습니다. 그런 습성을 가지게 된 이유는 유난히도 털이 많은 짐승이므로 흐르는 물에 들어가서 물을 먹다가 털에 물이 스며들게 되면 물에 빠져 죽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눈이 나쁩니다. 늑대가 앞장서서 가면 동료인 줄 알고 따라갈 정도라고 하니 흐르는 물인지 잔잔한 물인지 잘 알 수 없겠지요. 그리고 다리가 약해서 잘 넘어진다고 합니다. 평지에서 넘어져도 혼자서 일어나지 못한다고 하는데, 물에서 넘어지면 큰일 나는 것이지요. 그래서 양은 잔잔한 물가가 아니면 물을 먹을 수 없고, 잔잔한 물가라고 해도 양이 넘어져도 안전한 정도의 깊이가 되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이런 양을 ‘잔잔한 물가로 인도하려면’ 목자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윗물을 막아 물의 흐름을 조절하고, 바닥을 평평하게 골라야 합니다. 이런 작업을 하면 흙탕물이 생기니 양들이 푸른 초장에서 풀을 뜯고 있을 때 미리 작업해야 깨끗한 물이 될 것입니다. 이렇게 목자가 잔잔한 물가로 양을 인도하는 일에는 치밀한 사전준비가 필요한 것입니다.
시편 23편에서 하나님은 우리를 ‘쉴 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 분’이라고 하십니다. 그러니 이 말씀은 ‘하나님이 먼저 가셔서 우리를 위해 준비하시고 예비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우리를 위해서 다 예비해 놓으시고 우리를 인도하시는 것이지요. 그냥 “오라!”가 아니라, 다 준비해 놓으시고 “오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하나님께서 준비해 놓으신 잔잔한 물가에서 물을 마실 수 있겠습니까? “오라!”고 하실 때에 순종하는 사람들이 아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예비하시고 인도하시는 곳에는 우리를 위한 선한 것, 우리의 목마름과 갈증을 해결할 수 있는 것이 있음을 믿고 순종하시기 바랍니다. 많은 사람이 갈증을 해결하려고 탄산음료를 마십니다만, 순간적으로 시원할지 몰라도 더 목이 마른 법입니다. 타는 목마름을 해결해 줄 수 있는 것은 ‘맑은 물’입니다. 그 ‘맑은 물’을 하나님은 한남교회를 샘물로 삼아 준비하시고, 우리를 이곳으로 인도해 주신 것입니다.
■ 양의 습성
양은 배울 점이 많은 동물입니다. 양의 습성을 살펴보면 우리 사람들과 비슷한 측면들이 많습니다. 그래서이겠지만, 농업혁명 이후 인간에 의해 가축화된 동물 중에서 양은 두 번째입니다. 첫 번째 동물은 ‘개’입니다. 그러나 엄밀하게 말하자면, 개는 감정적으로 교감하는 능력이 뛰어났기 때문에 사냥을 위해 반려견으로 키웠으니 엄밀하게 가축의 범주에 들어가는 첫 번째 동물은 양이라고 봐도 무방합니다.
무엇 때문이었을까요? 털과 우유와 고기를 주면서도 온순하다는 점입니다. 어질고 순한 초식동물일 뿐 아니라, 싸우지 않아서 무리지어 사는 동물이기도 합니다. 털을 깎을 때에는 몸에 상처가 나도 가만히 있습니다. 게다가 어린 새끼들이 엄마 젖을 빨 때에는 무릎을 꿇고 젖을 빠는데 이런 모습을 보면서 ‘은혜를 아는 동물, 감사할 줄 아는 동물’이라고도 알려졌습니다. 죽을 때가 되면 온순해지고, 반드시 갔던 길로 다시 돌아온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양은 한 번 키우면 잃어버릴 염려도 없습니다.
그러나 이런 부분도 있습니다.
깨끗해 보이지만 사실은 지저분한 동물이라는 점입니다. 게다가 엄청나게 게을러서 운동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래서 양우리에 염소를 넣어두는데, 양우리에 염소를 넣어두면 뿔로 박아서 피하느라 운동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풀을 뜯을 때에는 너무 알뜰하게 뿌리까지 다 뜯어 먹어서 양만 있으면 풀밭이 있을 수 없답니다. 그래서 다 자란 이파리만 뜯어먹는 염소를 함께 키워야 풀밭이 유지된다고 합니다. 또 겁이 많아서 높고 험한 길이나 비탈길로 이동해야 할 때에도 요지부동이라고 합니다. 그때 염소를 앞세우면 양도 따라간다고 하니 염소가 돌격대 역할을 하는 것이지요. 게다가 여름철 무더운 날에는 옹기종기 모여있고, 추운 겨울에는 제각기 떨어져 있습니다. 정말인지 모르겠으나, 다른 양 시원할까 봐 여름에도 붙어있고, 다른 양 따뜻할까 봐 겨울에는 떨어져 있다는 것입니다. 참 못된 것이 양이죠. 게다가 방어력이라고는 제로고, 방향감각도 없고, 이기적이고 멋대로라고 합니다.
그런데 양과 인간이 빼닮듯이 닮은 점이 있다면, 목자의 보호가 없었다면 진작에 멸종되었을 동물이 양이었다는 점입니다. 우리 인간도 목자 되시는 하나님이 없으셨다면, 진작에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 해를 당했을 것입니다. 목자 되시는 주님께서 나와 함께 해주시고,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로 지켜주시고, 의의 길로 인도해 주셨기 때문에 우리가 지금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무릎을 꿇고 어미의 젖을 먹는 어린 양처럼 그 은혜를 알고 있습니까? 목자에게 털이 필요할 때, 몸에 생채기가 나도 묵묵히 순종하고 있습니까? 온순합니까? 다시 집으로 돌아오는 양처럼, 하나님 품으로 돌아오고 있습니까?
대관령 횡계에 가면 양떼목장이 있고 삼양목장이 있습니다. 가까운 곳인데 각기 목장에서 키우는 양들이 간혹 경계를 넘어가도 가만두면 다시 자기 목장으로 돌아간다고 합니다. 양의 귀소본능 때문에 그렇습니다. 저는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한남목장을 떠올렸습니다. 이곳에서 자란 양 떼들이 다 돌아오는 꿈을 꾸며 기도했습니다. 그 일을 위해 힘쓰시기 바랍니다. 양에게 귀소본능이 있다고 다 돌아올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그들이 돌아왔을 때, ‘역시 한남목장이 최고야!’라는 목장이어야 하겠지요. 이 일을 위해서도 힘쓰시기 바랍니다.
■ 목자와 양
시편 23편에서는 인간을 양으로 하나님을 목자로 표현했습니다. 양과 목자의 관계로 묘사한 것이지요. 그런데 목자이신 하나님의 어린 양, 희생양으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의 고난을 받으시기까지 순종하심으로, 인간으로서는 더 내려갈 곳이 없는 고통을 다 겪으심으로 우리를 구원해 주셨고, 하늘의 소망으로 위로해 주셨습니다. 이것이 4절에 ‘나를 안위하시나이다’에 축약된 내용입니다. 영어로 ‘comfort me’인데, ‘위로를 받다’는 뜻입니다. ‘보살펴 주신다’는 자동사의 의미보다는 ‘위로를 받습니다’라는 타동사의 뜻이 더 강합니다. 이미,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을 통해서 우리에게 위로를 주셨기 때문에, 우리는 위로를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걸어갈 때에도 이미 그보다 더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도 능히 승리하신 목자이신 예수님이 목자의 지팡이와 막대기처럼 보이니 내가 위로를 받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런 의미를 가진 것이 ‘안위’의 뜻입니다.
여러분, 지난주에 이어 우리를 두렵게 하는 모든 것들로부터 해방되어 평안하게 살아가야 할 이유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선한 목자 되시는 하나님, 그분의 목장 안에 있는 이들에게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시편 23편의 말씀은 이것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7월이 시작되었습니다. 2017년 하반기, 힘차게 살아가셔서 부족함이 없으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승리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