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순절에
2022년 2월 27일 사 53:1-5
1. 죽은 것들
(1) 사순절
부활절은 춘분이 지난 보름 다음 주일입니다. 부활절 전 40일의 기간을 사순절(四旬節)이라고 합니다. 영어로는 Lent라고 하는데, 이는 고대 앵글로 색슨어에서 봄이란 뜻이었답니다. 이 사순절은 그리스도의 수난을 기억하고 기념하며 부활절을 경건히 준비하는 절기입니다. 이 절기는 재(灰)를 머리에 얹거나 이마에 바르며 죄를 통찰하는 재의 수요일(聖灰水曜日, Ash Wednesday) 저녁부터 시작되며, 40일 동안 지속됩니다. 동방정교회, 서방교회(천주교), 개신교가 날짜가 조금씩 다른데, 개신교에서는 주일을 제외하고, 토요일을 포함한 40일을 사순절로 지킵니다. 하지만 개신교에서도 일부 보수적인 교단들은 고난주간 일주일만을 지키기도 합니다.
사순절은 예수님의 십자가에서의 수난과 죽음을 기억하는 절기이기에 이 기간에는 전통적으로 금식, 기도, 고행, 금욕 등으로 자기 절제와 회개를 합니다. 어린이들의 경우 사탕을 먹는 것을 참기도 하고, 어른들의 경우에는 음주를 금하기도 합니다. 그 가운데서도 가장 전통적인 것은 육식의 금지입니다. 고기를 뜻하는 carne와 작별이란 vale가 합쳐서 Carnival이 되었지요. 뜻으로 말하자면 ‘고기야, 잘 가라!’입니다. 사순절이 시작되기 전 아쉬움에 마지막으로 벌이는 큰 축제가 카니발입니다. 오죽하면 성회수요일 전날을 ‘기름진 화요일’(불, 마디 그라 Mardi gras, 영, Fat Tuesday)라고 합니다. 사순절 전에 마지막으로 때려 먹는 것이지요. 성회수요일부터는 고기가 식탁에서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2) 죽은 것들을 돌아보는 때
이번 주 수요일부터 올해 사순절이 시작됩니다. 언젠가 디아코니아자매회에서 보낸 사순절행사 안내편지에 이렇게 적혀있었습니다.
“사순절이란, 우리 안에 죽은 것들을 돌아보는 때입니다. 우리 안에 죽은 것이 있다는 것을 겸손히 인정하면서, 동시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생명을 불어넣으시도록 기회를 드리는 시기입니다.”
정말 잘 썼습니다. 사순절은, ‘우리 안에 죽은 것들을 돌아보는 때’입니다. 우리 안에 죽은 게 뭘까요? 우리가 서로 다 다르니 죽은 것들도 다 다르지요. 다르지만 그러나 죽은 것들이 있지요? 있습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는 알지요. 그런데 그게 다시 살아날 것 같지 않습니다. 고개가 가로저어지지요. 하지만 하나님께서 개입하시면 다릅니다. 달라요. 다릅니다. 그러므로 겸손하게 내 안에 죽은 것들을 살려주십사 하나님의 능력에 맡겨보는 이 계절이 되어야겠습니다. 이 사순절에 우리는 가장 먼저, 우리 안에 죽은 것들에 대해 돌아보아야 합니다.
2. 고난
오늘 본문 이사야서 53:1-5을 함께 봉독합니다.
우리가 들은 것을 누가 믿었느냐? 주님의 능력이 누구에게 나타났느냐? 그는 주님 앞에서, 마치 연한 순과 같이, 마른 땅에서 나온 싹과 같이 자라서, 그에게는 고운 모양도 없고, 훌륭한 풍채도 없으니,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모습이 없다. 그는 사람들에게 멸시를 받고, 버림을 받고, 고통을 많이 겪었다. 그는 언제나 병을 앓고 있었다.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돌렸고, 그가 멸시를 받으니, 우리도 덩달아 그를 귀하게 여기지 않았다. 그는 실로 우리가 받아야 할 고통을 대신 받고, 우리가 겪어야 할 슬픔을 대신 겪었다. 그러나 우리는, 그가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받는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그가 찔린 것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고, 그가 상처를 받은 것은 우리의 악함 때문이다.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써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매를 맞음으로써 우리의 병이 나았다.
바벨론포로 시기 활동한 예언자 - 구약성서학자들은 이 예언자를 제2이사야라 부릅니다. - 에게서 놀라운 통찰이 나타납니다. 그것은 사람들이 겪는 고통과 어려움의 원인에 대한 겁니다. 널리 알려진 ‘죄와 벌’이라는 단순한 설명방식에서 한층 더 고양된 개념이 나타나는데, 그것은 바로 ‘고난’입니다. 이것은 사람이 겪는 어려움, 고통의 원인에 대한 한층 고양, 승화된 개념입니다. 누군가 겪는 고통과 어려움이 자신의 죄 때문이 아니라 남의 허물로 말미암은 것일 수도 있다는 점을 깨닫게 된 겁니다. 이제까지 세상에서 고통 받는 사람들은 모두 다 그 스스로의 잘못 때문에 벌 받는 것으로 알았는데, 그게 아닐 수도 있다는 통찰을 얻게 된 거지요. 가만 들다보니 그가 겪는 고통과 어려움은 그의 죄 때문이 아니라 우리의 죄 때문이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 겁니다. 이는 실로 신앙적으로, 신학적으로, 윤리적으로, 이성적으로 어마어마한 성숙이 아닐 수 없습니다. 4-5절입니다.
그는 실로 우리가 받아야 할 고통을 대신 받고, 우리가 겪어야 할 슬픔을 대신 겪었다. 그러나 우리는, 그가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받는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그가 찔린 것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고, 그가 상처를 받은 것은 우리의 악함 때문이다.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써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매를 맞음으로써 우리의 병이 나았다.
신약시대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의 삶과 죽음 속에서 이 고난 받는 종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이 모든 일들이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죄를 대속(代贖)하기 위함이었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고난과 우리의 구원이라는 기독교신앙에 대한 구속론(救贖論)적 이해는 이런 맥락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런데 가만 들다보면 우리네 삶에는 이와 같은 고난들이 종종 나타납니다. 아니 어찌 보면 고난이란 우리네 삶이 제대로 이루어지기 위해 필수적인 것으로 보입니다. 오늘이 3·1절 기념주일인데, 1919년 3·1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48인)과 드러나지 않은 활동가들, 그리고 만세운동에 참여한 이들을 생각해봅니다. 조선 총독부의 공식 기록으로만 봐도 집회인 수가 106만여 명이었고, 그 중 사망자가 900여명, 구속된 자가 4만 7천여 명이었습니다. 3·1운동에 앞장서 달라는 부탁을 받은 남강 이승훈은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이승훈이가 요에 누워 죽을 줄 알았더니 이제야 죽을 자리를 찾았다.” 남강은 다행히 죽지는 않았습니다만 이 사건으로 투옥되어 모진 수형생활을 하였습니다. 오늘 예배순서 가운데 유관순 열사의 기도문도 함께 봉독하였지요. 3·1운동으로 투옥된 유관순은 이듬해 1920년 9월 28일에 모진 고문을 이기지 못하고 옥사하였습니다. 이때 나이가 만 17세였습니다. 얼마나 고문이 참혹했던지 이화학당에서 시신 반환을 요구했을 당시 서대문형무소에서 거부할 지경이었다지요. 이런 분들의 희생 위에 우리가 복된 나라를 이루었지요. 고난과 대속은 우리네 삶 속에 깊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이 사순절에 우리는 고난과 대속에 대해 생각해야 합니다.
3. 연대(連帶 solidarity)
또한 우리는 이 사순절에 영성수련에 더욱 힘써야 합니다. 영성수련이란 ‘닮고자 하는 이를 마음에 품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닮고자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이름이 Christian입니다. 크리스천에게는 이 그리스도를 마음에 품는 것이 영성수련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불쌍한 사람들과 함께하였습니다. 연약한 사람들과 함께 하였습니다. 구원받아야 할 사람들과 함께하였습니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이었습니다.
설교시간에 보살 얘기를 해서 안됐습니다만 보살 가운데 지장보살이라고 있습니다.
지장보살(地藏菩薩, 줄여서 지장이라고도 합니다)! 중국, 한국, 일본에서 신앙의 대상으로 매우 널리 숭배되어온 보살 가운데 하나가 지장보살입니다. 이 지장보살은 억압받는 자, 죽어가는 자 등의 구원자로서, 지옥으로 떨어지는 벌을 받게 된 모든 이들, 혹은 지옥에 있는 영혼들을 구제할 때까지 자신의 일을 그만두지 않겠다는 서원을 한 분입니다. 지장보살은 흔히 삭발한 승려의 모습으로, 머리 뒤에는 서광이 빛나고, 두 눈썹 사이에는 백호(白毫)가 나 있는 것으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부처가 된다는 것, 소위 ‘성불(成佛)한다’는 것은 깨달음에 이르러 윤회의 업을 끊고 해탈한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이 지장보살은 언제든 성불할 수 있지만, 그러나 인간 세상에 남아 중생들을 구원하고자 성불을 미루는 존재입니다. 마지막 한 사람까지, 한 중생까지 구원에 이르도록 자신의 성불을 미루고 있는 겁니다. 이른바 대승불교(大乘佛敎)의 흐름 속에 있는 위대한 정신의 한 단면이 지장보살 신앙에 나타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얘기하다가 왜 지장보살이 생각날까요? 연약한 사람과 연대(連帶)하는 모습이 꼭 같기 때문입니다.
사순절의 마음은 연대하는 마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연약한 사람들, 불쌍한 사람들, 구원받아야 할 사람들과 함께 하였습니다. 이 사순절에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 연약한 사람들을 돌아보는 우리가 되어야겠습니다. 이제 사순절이 시작됩니다. 이 사순절이, 우리 안에 죽은 것들을 돌아보는 계절, 고난과 대속의 의미를 되새기는 계절, 연약한 사람들과의 연대를 모색하는 계절이 되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