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사달, [01.08.17 15:55]
[아 사달님으로 부터 전달 받음]
예하운 선교회에서 독립유공자 후손들을 위한 기부 프로젝트로 지사열전-엽서를 제작했습니다.
각각의 인물에 대한 3줄약력을 아사달이 썼습니다.
10장 한셋트는 3천원
3셋트 한 봉투는 9천원이랍니다.
젊고 영혼이 건강한 기독인들의 역사운동입니다.
응원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주문/ 김디모데목사 010-7912-3124

아 사달, [01.08.17 15:55]
[아 사달님으로 부터 전달 받음]
김구
1876년 8월 29일(음력 7월 11일) ~ 1949년 6월 26일
동학의 접주로 참여했다.임시정부를 이끌고 의열단을 지원하고, 한인애국단을 창설하여 윤봉길 이봉창 등의 거사를 도왔다. '백범일지'에서 '높은 문화'만이 한없이 부럽다고 하여 그의 평화주의자면모를 볼 수 있다. 남북분단을 막고자 평양에 갔고, 1949년 안두희에게 암살당했다.
김원봉
1898년 9월 28일 ~ 1958년)
그의 의열단활동에 신채호선생이 혁명선언문을 썼다. 가장 활발한 무장투쟁으로 일본의 간담을 서늘케 했다. 하지만 민간인을 다치게 하지는 않았다. 해방후 여운형과 접촉했으며 친일경찰 노덕술에게 체포되기도 했다. 남북연석회의 당시 월북하여 잔류했다. 북한정부수립에 참여했다.
안중근
1879년 9월 2일 ~ 1910년 3월 26일
의병전쟁 중 일본포로를 석방하는 등 평화주의자의 면모. 이등박문이 조선의 독립과 동양평화의 원흉임을 간파, 서른 나이에 이등을 격살한다. 일본법정에 대한 공소를 포기하고 동양평화론(미완)을 집필하는 도중에 여순감옥에서 순국.
여운형
1886년 5월 25일 ~ 1947년 7월 19일
그는 3.1운동 직후 일본을 방문해 그들의 무도함과 잔인한 제국주의를 비판하고 '동양평화'를 위하여는 조선의 독립이 선결과제임을 역설, 해방후 건국동맹-건국준비위원회 활동으로 조선총독부 권력을인수했으며, 좌우합작을 통한 통일정부 수립에 매진하였다. 극우파에의해 암살되었다.
유관순
1902년 12월 16일 ~ 1920년 9월 28일
이화학당 재학 중 3.1운동에 참여했다. 고향으로 돌아와서 아우내장터를 중심으로 만세운동을 전개했다. 체포된 후 그는 극심한 고문에 시달렸다. 형기를 석 달 남기고 서대문 형무소에서 옥사했다. " "3·1독립 운동만세로 인하여 왜병에 피검(被檢)돼 옥중에서 타살(打殺) 당함""-일본측 기록
윤봉길
1908년 6월 21일 ~ 1932년 12월 19일)
"너희도 피가 있고 뼈가 있다면 반드시 조선을 위하여 용감한 투사가 되어라. 태극 깃발을 높이 드날리고 나의 빈 무덤 앞에 한잔 술을 부어 놓으라. 그리고 아비 없음을 슬퍼하지 말라. 사랑하는 어머니가 있으니" 홍구공원에서 열린 천장절행사에 폭탄을 던지고 그는 32년 가나자와 일본육군형무소에서 순국했다.
이봉창
1900년 8월 10일 ~ 1932년 10월 10일
망국의 국민으로서는 누구라도, 어느 때라도 일제에 항거해야 한다는 것을 몸소 실천했다. 한인애국단 1호 단원으로서 그의 의거는 임시정부의 기반을 견고하게 했고 이후 광복군의 성립에도 영향을 미쳤다. 그는 1932년 1월 히로이토를 향해 폭탄을 던졌으나 미수에 그쳤고, 33세의 나이로 순국했다.
이회영
1867년 음력 3월 17일(양력 4월 21일) ~ 1932년 11월 17일
삼한갑족이라 불리던 그는 모든 재산을 정리하고 5형제,60여명의 가솔과 함께 만주로 간다. 신흥강습소-신흥무관학교를 통해 독립운동기지를 건설, 수 많은 독립열사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김원봉의 의열단을 후원했으며 적극적인 아나키스트운동을 했다. 만주에서, 항일무장투쟁을 준비하다가 대련에서 수상경찰서엥 체포, 32년 순국했다.
조만식
1883년 2월 1일 ~ 1950년 10월 18일)
현 숭실대학교의 모체가 되는 숭실중학교에서 수학했다.안창호 이승훈등과 실력양성운동에 활동했다. 오산학교교장, 민립대학설립준비 등 민족교육에 헌신했다. 해방후 평남건준위를 주도했다. 김구, 여운형과 교류했으며. 38선 이북의 인민들을 북정권 하에 방치할 수 없다고 하여 남하권유를 거절했다. 조선민주당의 당수로 활동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