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념 ‘관세음보살’ 화두로 이어져 / 정관 스님
정관 스님은 “수행하는 궁극의 목표는 신통이 아니라
도(道)”라며 “방하착을 통해 평상심을 찾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해인사를 좋아하는 사람은 해인사에 가야만 좋다고 합니다.
통도사를 좋아하는 사람은 통도사에 가야만 좋다고 합니다.
우리는 이런 편협한 인식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좋으면 좋은 대로, 나쁘면 나쁜 대로 적응하고
그 때 그 때 불평 없이 상처 없이 지낼 줄 알아야 합니다.
이런 사람에게는 지옥도 극락으로 변합니다.
옛날 큰 스님들 계실 때는 경제가 참으로 궁핍했습니다.
한 겨울 나무를 때도 마른 나무가 없어
젖은 나무로 군불을 지피다 보니 연기 속에 눈물 흘리기가 다반사였습니다.
그러다 보니 어떤 때는 방이 너무 뜨겁고,
어떤 때는 너무 차 시자노릇 하기가 매우 어려웠습니다.
그런데 당시 큰 스님들 어떠하셨는지 아십니까?
방에 군불을 잘 못 때서 차갑게 될 때 큰 스님은
“괜찮아, 괜찮아, 한 번씩 시원하게 자야 몸이 풀려”하고 넘어 갑니다.
그 다음에 군불을 너무 잘 때어서 뜨거우면
“괜찮아, 괜찮아 한 번씩 뜨겁게 몸을 데워 줘야 확 풀려” 하고
또 넘어갑니다. 밥이 덜 익었을 때도 “아니야, 잘 먹었어.
늙은 사람은 이렇게 꼬돌꼬돌하게 먹어 놔야 위가 튼튼해”하시고,
밥이 죽처럼 되었을 때도 “잘 먹었어. 잘 먹었어.
이런 밥은 소화가 잘 돼 위에 좋아” 하셨습니다.
어떻습니까? 뭔가 느껴지는 게 있지요?
도인에게는 지옥도 극락
화두 드는 사람은 화두에만 전념하기 때문에
밥이 되 든, 질든 개념치 않습니다.
우리도 옛 큰 스님들 발자취를 따라 인생의 목표를 설정하고 걸어야 합니다.
우리가 살아가다 보면 좋은 것이 열이면 안 좋은 것이 7입니다.
안 좋다고 다 불평하면 삶이 피곤합니다.
수행인은 좋은 것은 더 즐겁게 함은 물론 안 좋은 것도
즐거움으로 소화합니다.
제가 수행 한다는 소문이 나니까 사람들이 찾아와 묻습니다.
“우리나라 경제가 왜 이렇습니까? 무슨 방도가 없습니까?
우리나라 정치가 왜 이 모양입니까?
어떤 정치인은 나쁜 사람인데 어찌하면 좋습니까?”
제가 뭐라 하는 지 아십니까? “저는 화두 밖에 모릅니다.
정치경제 전문인에게 물어보시는 게 좋을 듯 합니다.”
이런 질문은 고급에 속합니다. 어떤 사업을 해야 성공하느냐부터
어떻게 하면 우리 애들 공부 잘 하느냐 별의 별 질문을 다 합니다.
이런 것은 점쟁이가 할 일입니다.
부처님 법은 도이지 점이 아닙니다.
경전에도 신통이야기가 많이 나오는데
신통을 보인 연유를 잘 새겨보아야 합니다.
목련존자가 신통을 잘 부렸습니다만
부처님은 신통 부리는 것을 경계하라 하셨습니다.
신통을 부리다 보면 자기 명예에 욕심이 생겨 탐, 진, 치에
빠져 들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탐, 진, 치의 뿌리를 뽑는 수행을 하는
근본 이유는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이지
신통 부리려 하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렇다고 목석같은 사람이 되라는 것은 아닙니다.
잘못하면 자기 밖에 모르는 아만에 빠질 수도 있습니다.
목석같은 사람은 자기가 해야 할 일을 모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어떤 사람이 자신은 절에 가서 기도를 하지 않는다 해서
그 연유를 물어보니 자기는 부처님 전에 빌 것이 없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발원할 게 정말 없을까요?
그 사람은 자신은 잘 추스렸는지 모르지만
타인의 마음은 헤아릴 줄 모르는 사람입니다.
이웃을 위해, 이 나라와 세계를 위한 발원은
왜 생각하지 못하는 것일까요? 그런 목석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잠시라도 부처님께 올리는 발원이 끊어져서는 안 됩니다.
물론 그 발원도 어떤 내용이냐에 따라서 다릅니다.
개인의 소원성취에 머무느냐 아니면 인류평화를 위한 발원이냐는
하늘과 땅 차이입니다. 자신의 사업만 성공시켜 달라는 기도와
수행정진 동안 잘 보살펴 달라는 기도와는 하늘과 땅 차이 입니다.
불교에 입문해서 개인 소원성취 기도를 올리신 분들은
이제 그 기도의 폭을 넓혀보십시오. 분명 달라진 자신을 보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하며 주력 수행을 하는데
이를 송화두라 합니다. 물론 간화선 화두와 송화두는 차이가 있습니다.
그러나 송화두가 일반 불자님들이 아시고 계신 것처럼
그 수준이 낮은 것은 아닙니다.
‘관세음보살’, ‘아미타불’, ‘옴마니반메훔’ 등을
일념으로 반복해서 끊어지지 않게 하면 의문이 생기고
이를 참구하다 보면 간화선의 화두를 드는 것과 같습니다.
저도 처음 입산해서는 관세음보살을 열심히 불렀습니다.
그러다 보니 마음속에 의문이 되었습니다.
관세음보살, 이게 뭔가. 의문이 자꾸 생기니
자연스럽게 참구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송화두 들었다고 너무 낙심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간화선 화두에서 말하는 의문이란 지식과 상식을 초월한 의문입니다.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것은 지식의 범주가 아닙니다.
유명 학자 중에는 자신이 쌓아놓은 지식에 빠져 교만과 거만,
알음알이에 묶여서 평생 분멸망상에서 벗어나지 못 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방하착(放下着). 그런 것들을 잠시라도 놓을 줄 알아야 합니다.
큰 스님들께서 이 공부에 처음 입문한 사람들에게
“놓아라, 놓아라” 하는 것은 그런 지식, 상식을 다 놓으라는 말입니다.
그런 알음알이를 다 비우고 나서야 화두를 들고 앉아도 편하고,
서도 편하고, 걸어도 편합니다. 도를 얻으려는 수행인의 첫걸음입니다.
우리 불자님들도 이적과 도에 대해 좀 아셔야 하겠습니다.
이적(異跡)을 보이지 못 하면 도인(道人)이 아니라고
생각 하시는 분들이 꽤 많은 듯싶습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이적과 도를 모두 가지신 분은 부처님입니다.
다른 종교는 이적은 있으나 도는 없습니다.
불교에는 도는 물론 이적도 있습니다.
그러나 불교는 이적은 하나의 방편일 뿐 도를 구하라 합니다.
그렇다면 도는 무엇이고 이적은 무엇일까요?
신통 집착 말고 道 구해야
어떤 보살님이 몸이 아파서 근육이 굳어 수 십 년 동안 고생하셨다고 합니다.
그런데 얼마 전에 꿈에서 한 번에 큰 침을 여러 번 맞았는데
그렇게 시원하고 개운할 수가 없다고 합니다. 지금은 혈색이 너무 좋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일컬어 가피, 또는 이적이라고도 합니다.
범어사 양익 스님은 공부 잘하시고 건강하셨는데
실명 위기에 직면해 마음고생을 많이 하셨습니다.
스님은 밤에 법당에 가 관세음보살 정진을 했다고 합니다.
그 정진은 얼마나 간절한 것이었겠습니까?
그러다 한번은 부처님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제 눈을 고쳐주시지 않을 거라면 저를 데려가십시오.”
그런데 어느 날 분명 꿈은 아닌 듯 한데
연꽃이 법당에 환하게 차더랍니다.
그 다음에 관세음보살님이 불덩어리를 스님 눈에다 대어 주더랍니다.
그 이후부터는 잔잔한 것까지 맑게 보이더니
시력이 완전히 돌아왔다고 합니다.
이런 일을 또한 가피 또는 이적이라고도 합니다.
물론 아픈 사람은 이적을 통해서라도 치유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 이적 보다 더 중요한 것은 바로 도입니다.
우리는 도인이 되어야 합니다.
오탁악세에 있으면서도 물들지 않는 사람,
어디에 자리하든 수행을 놓지 않는 사람,
부귀영화에 집착하지 않고, 가난에 상처받지 않고
어디에서든지 당당하게 자기 성찰, 자기 제도에
한 생을 바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주영미 기자
이 내용은 정관 스님이 2월 22일 부산 보광선원(선원장 황백 스님)에서
봉행된 병술년 선지식 초청법회 제 2회 법석에서 법문한 것을
요약 게재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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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관 스님은
스님은 1954년 선찰대본산 범어사에서
동산 스님을 은사로 득도, 동산 스님을 계사로 1954년 사미계를,
1957년 비구계와 보살계를 수지했다.
이후 범어사 강원을 수료한 스님은 범어사 선원에서 수선안거 이래
14안거를 성만했다.
쌍계사, 영주암, 범어사 주지를 지낸 스님은 대한불교신문 이사장,
학교법인 금정학원 이사장, 부산광역시불교연합회 회장,
조계종 중앙종회의원 소임을 맡아 봉직했다.
특히 스님은 불교계의 포교에 대한 인식이 부족한
1960, 70년대에 어린이, 중학생, 고등학생, 대학생,
불교 언론 및 사회복지분야에 이르기까지 불교 중흥을 위해 진력했다.
복지사업의 원력으로 사단법인 불국토와 사회복지법인 불국토,
재단법인 불국토 청소년 도량을 설립해 초대 이사장을 지냈으며
20년 전부터 어린이 포교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대한불교어린이지도자연합회 회장을 거쳐 총재를 지냈다.
현재 부산 영주암 회주로 지내는 스님은 매일 철저한
수행을 이어가며 시민선원 대중들을 지도하고 있다.
2006년 03월 14일
법보 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