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언자 없는 시대의 시 [제2편]
메시아의 도래를 예언하고 구원을 약속하는 예언자가 사라진 시대의 삶은 어떨까? 불확실성의 공포가 우리의 머리 위에 그림자처럼 드리워진다. 예언자 없는 시대가 만든 것은 미래를 가늠하고 예측할 수 없는 사회, 속화된 사회, 그리고 불확실성의 위험이 상존하는 사회다. 지그문트 바우만은 예언자 없이 꾸리는 현대 사회에서의 삶을 이렇게 묘사한다. “운명의 횡포가 가진 돌연성과 불규칙성, 그리고 어떤 방향에서도 나타날 수 있는 고약한 능력, 이 모든 것이 그 횡포를 예측할 수 없게 만들고, 따라서 우리로 하여금 무방비 상태에 놓이게 만든다. 위험이 현저하게 제멋대로 떠다니고 변덕스러우며 어이없는 것들로 남는 한, 우리들은 꼼짝 못하고 표적이 될 수밖에 없다.” 모든 사고와 사건들, 재난의 발생은 예측 가능한 범주를 넘어선 불확실성 속에서 갑자기 도래한다. 이를테면 수백 명의 목숨을 차가운 바다에 수장시킨 2014년 4월 16일의 ‘세월호’ 침몰, 2001년의 9.11 뉴욕 세계무역센터 테러, 이슬람국가(IS)추종자들이 저지른 2015년 11월 13일의 파리 테러가 그렇다. 어디에도 구원은 없고, 그 구원 없는 장소에는 희생자들의 비명과 절망적인 탄식, 살아남은 자들의 애달픈 울부짖음만 공허하게 메아리친다. 세계는 비명과 탄식으로 뒤덮이고 있다. 자, 그 “소리 없는 아우성”을 들어보라!
이것은 소리 없는 아우성
저 푸른 해원(海原)을 향하여 흔드는
영원한 노스탈쟈의 손수건
순정은 물결같이 바람에 나부끼고
오로지 맑고 곧은 이념의 푯대 끝에
애수는 백로처럼 날개를 펴다
아아 누구던가
이렇게 슬프고도 애달픈 마음을
맨 처음 공중에 달 줄을 안 그는
-유치환, 「깃발」 전문
바닷가 높은 첨탑에서 깃발이 나부낀다. 시인은 “맑고 곧은 이념의 푯대 끝”이라고 썼다. 그 깃발이 힘차게 나부낀다. 그 깃발을 바라보는 가슴을 적신 것은 “영원한 노스탈쟈”와 “애수”다. 둘 다 무언가를 잃은 자의 슬픔을 지시하는 감정이다. 깃발은 “소리 없는 아우성”이고, “푸른 해원”을 향해 흔드는 “손수건”이다. 깃발의 펄럭임이 “소리 없는 아우성”이 된 것은 어떤 정념이나 신념이 행동화되지 못한 채 내면화에 머문 탓이다. 우리가 잃어버린 것, 우리 삶에서 멀어져간 것은 무엇인가? 영원한 노스탈자의 손수건, 날개를 펴는 백로 같은 이미지들은 실재가 없다. 다만 그 실재 없는 것에서 우리는 잃어버린 이데아, 영원, 낙원, 꿈 따위를 상상할 수 있을 뿐이다. 잃어버린 것들이 지닌 찬연한 광휘에 반해 얻은 것은 삭막하고 고달프고 권태로 찌든 것이다. “깃발”은 동경의 대상과 조악한 현실 사이에서 펄럭이며 가 닿을 수 없는 것, 손에 거머쥘 수 없는 그 아득한 것을 향한 노스탤지어와 애수를 앓는다. 그런 까닭에 “깃발”은 공중에 단 “이렇게 슬프고도 애달픈 마음”이 되는 것이다.
「깃발」은 예언자 없는 사회의 상상력을 펼쳐낸다. 예언자 없는 사회에서는 실재보다는 환상, 사랑보다는 포르노, 정본보다는 위본(僞本)들, 본질보다는 가짜-현상들이 더 활개를 친다. 세속화의 물결 속에서 현실이 사라지고 그 빈자리를 가상적인 것들로 대체할 때, 삶은 속수무책으로 신성성을 잃고 전염병처럼 퍼지는 속화된 권태와 “사람들을 개별화하고 고립시키는 고독한 피로”에 먹힌다. 속화된 권태와 고독한 피로는 카지노 자본주의로 뒤덮인 세계에 넓게 퍼진 질병이다. 이 질병을 ‘신자유주의’라고 부르는데, 이것은 이미 전 지구적 현상이다. 이런 사회 속에서 삶은 기껏해야 ‘대박의 꿈’을 쫓는 도박일 따름이다. 「깃발」의 시인은 “깃발”을 중요한 무엇인가를 상실한 마음을 공중에 매단 것으로 인식한다. 시인은 누가 맨 처음 공중에 매달았는가를 따져 묻는다. 시인은 적어도 자기가 사는 시대가 예언자 없는 사회라는 사실을 깨달은 자이기 때문이다.
장석주 「은유의 힘」
2024. 3. 10 맹태영 옮겨 적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