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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문 날의 삽화(揷話) 4
박 완 서
작년 추석 무렵이었다.
남편이 한 주먹이나 되는 환약을 입 속에 털어넣고 보리차를 주전자째 들이켜는 걸 보고, 나는 상비약이 들어 있는 서랍을 열려다 멈칫했다. 움직일 때마다 무디지만 기분 나쁠 정도로 아픈 무릎에다 파스라도 붙여볼 참이었는데 금세 안 하고 싶어졌다. 그는 파스 냄새를 싫어했다. 나 또한 그가 한 움큼이나 되는 환약을 한꺼번에 삼키려고 목을 길게 빼고 끼룩대는 모습을 보는 게 괴로웠다. 나는 약을 붙이는 대신 옷 위로 무릎을 꾹꾹 주물렀다. 그럴싸해서 그런지 무릎이 부어 있는 것 같았다. 걸음만 좀 걸으면 그 모양이었다. 어제 기운 좋은 동네 여편네들을 따라 경동시장까지 김장 고추를 사러 간 게 잘못이었다. 고추장거리까지 합쳐봐야 열 근도 못 살 걸 무슨 큰 이득을 보려고 도매시장까지 간 건 아니었다. 슈퍼에서 반듯하게 포장되어 정가표 매긴 것만 사먹고 살다보면 가끔 향수처럼 재래식 시장의 원색적인 악다구니나 싱싱한 에누리는 물론 질펀하게 푸성귀나 생선이 썩어가는 냄새까지가 그리워질 때가 있다. 경동 시장에서 백 근짜리라나 이백 근짜리를 포대째 사서 이웃끼리 나누기로 했는데 우리도 한몫 끼지 않겠느냐고 물어왔을 때 열 근만 달래도 될 것을 굳이 따라 나선 것도 누굴 못 믿어서가 아니라 그런 증이 울컥 도져서였다. 그래서 고추 흥정은 동행들에게 맡기고 그 넓은 경동시장을 한 바퀴 골고루 기웃대고 다니다가 마침내 만병에 신효하다는 약초까지 바가지를 쓰고 난 후유증이 무릎통이었다. 벌써 몇 년째 툭하면 도지는 관절염이어서 며칠 푹 쉬면 가라앉는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제 발로 걸어다니는 낙까지 제한을 받아야 한다는 게 서글퍼서 짜증밖에 나는 게 없었다. 실상 며칠 푹 쉴 수 있는 형편도 못 됐다. 추석이 댓새밖에 안 남았으니 몇 군데 해마다 인사 치르던 데 인사도 치르고 차례도 지내려면 내일부터라도 꿈적거려야 될 판이었다. 더군다나 그 다리를 하고 성묘까지 가야 할 생각을 하니 울컥 남편에게 야속한 생각비 들었다. 볼품없는 둔덕이지만 서울 근교에 선산을 가지고 있다는 건 나쁠 게 없었다. 팔대조의 묘소를 정점으로 산세의 흐름을 따라 밑으로 내려쓴 산소는 비석과 상석을 다 갖춘 것도 얼마 안 됐다. 비석만 있는 것도 있고 상석만 있는 것도 있고 둘 다 없는 것도 있었지만 후손들이 사초를 게을리하지 않아 잡풀 없이 잘 자란 떼엔 윤기가 흐르고 봉분이 거하진 않았지만 의젓했다. 팔 내조까지 거슬러올라가봤댔자 높은 벼슬이나 학덕으로 지금까시 이름을 남긴 분은 비록 안 계셨지만 조촐하고 점잖은 가문의 선영일 거라는 잡작이 가게 하는 독특한 분위기를 지니고 있었다. 선조 중 역사에 이름을 남긴 인물이 없는 것처럼 현재 사회의 현역들인 남편 항렬이나 그 밑의 항렬 중에도 아쉴 때 소위
빽 될 만한 인재가 거의 없었다. 그저 서로 신세나 안 끼칠 정도로 아등바등 사는 월급쟁이나 소상인들이 대부분인 별볼일 없는 집안이었다. 이른바 명가(名家)는 아니지만 분수껏 사는 것도 근본 있는 가문 아니면 못 할 짓이다 싶은 편안한 긍지를 느끼게 하는 선산이었다. 그러나 교통은 공원묘지들에 비해 훨씬 불편했다. 행주산성까지 도로가 포장된 후 연장 운행되기 시작한 시내버스가 산 밑 마을 앞을 지나고 있어 예전보다 많이 편리해졌다고는 하나 택시가 들어가기를 꺼리는 비포장도로와 언덕길이 오 리는 넉넉했다. 내 부실한 다리가 느끼는 거리감은 십 리도 넘어 며칠 전부터 절로 엄살을 부리게 되고, 다녀오면 영락없이 몸살이 나곤 했었다. 말로 곰살궂게 굴 줄은 몰랐으나 속으로는 산정이 많은 남편이 이런 나를 위해 택시회사 하는 친구에게 부탁해서 추석날 택시를 대절해서 성묘 간 지가 몇 년 되었다. 한결 편해졌을 뿐 아니라 성묘 가는 일이 기다려지기까지 했었는데 금년부터는 택시 대절을 안 하겠다고 우기고 있었다. 대절 요금이 부담스러울 만큼 그의 주머니 사정이 나빠져서 그러는 거라면 이해할 만하고 또 내가 부담해도 되는 일인데 그게 아니었다. 그는 응졸하게도 덱시회사 김사장한테 속았다고 여기고 있고 그 불쾌감 때문에 택시 대절을 다시는 안 할 기세였다. 김사장이 우리한테 한껏 생색을 내며 보내준 텍시의 대절 요금은 시간당 팔천원이었다. 추석날은 시간당 만원이 보통이지만 자기가 보내주는 거니까 평일 요금만 내라는 걸 우리는 곧이곧대로 믿고 기사에겐 만원씩 쳐서 지불을 했었다. 세 시간 이상은 안 쓰려고 속으로는 안달을 해가면서도 겉으로는 쩨쩨하게 보이지 않으려고 희떱게 굴었다. 평일날 오천원이면 얼마든지 택시를 대절할 수 있다는 걸 남편이 안 건 최근의 일이었다. 늦더위가 기승스럽던 날 친구들 몇 명이서 근교의 계곡으로 발이나 씻으러 가자고 택시를 잡아탔는데 그중 한 친구가 올 때의 교통편을 생각해서 대절을 하자고 기사와 흥정을 하는데 기사는 시간당 오천원을 부르고 친구는 사천오백원만 하자고 깎다가 삼십 분 미만으로 초과되는 분은 기사가 손해 보기로 하고 오천원으로 낙착을 보더란다. 고지식한 남편이 두고두고 괘씸해할 만했다·
“정말 당신 김사장한테 전화 안 하실 거예요?”
나는 무릎통을 과장하기 위해 우거지상을 하고 물었다.
“안 한다면 안 해요. 모르고는 속았어도 알고도 속을까.”
“당신은 그럼 추석날도 시간당 오천원에 텍시를 대절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아니죠? 팔천원 내지 만원은 줘야 할 거예요. 친구간에 오천원짜리를 팔천원 내라는 것보다 만원짜리를 팔천 원 내라는 게 얼마나 하기 좋고 듣기 좋은 소리유. 그쪽에선 밑천 안 들이고 생색내고, 우린 본전치기하고도 이득 본 것 같
고·…·좀 좋아요. 그게 장사꾼의 화술이라는 거예요. 그걸 새겨듣지 못한 건 우리가 너무 순진해서지 김사장 탓할 게 뭐 있어요.“
“이득 본 줄 알고 이천원씩 더 얹어준 건 어떡허구…….”
“이천원씩 다섯 시간이라면 만원이에요. 가난한 집 며느리도 배탈이 난다는 팔월 한가위에 만원쯤 낭비한 걸 뭘 그렇게 오래 속에 담아두고 그래요.”
“만원이 거액이었으면 훨씬 덜 불쾌했을 거요. 친구놈 보기에 내가 기껏 만원 정도 사기당하기 알맞은 그릇으로밖에 안 보였다는 게 화딱지날 뿐이오.”
“홧김에 자가용을 한 대 사면 되겠구려. 아무튼 나는 버스 타고 가서 또 십 리 길 걷진 못하겠으니 그런 줄 아세요. 성묘를 못 가면 못 갔지.”
“예약 안 한다고 택시 못 잡을까.”
“우리 동네 평일에도 택시 잡기 힘든 거 알잖아요. 운 좋게 잡았다고 해도 거기까지 가자고 해봐요. 왕복요금 받고도 온갖 세도를 다 부릴걸요.”
나는 온몸으로 운전기사한테 주눅든 시늉을 해 보이며 말했다.
“글쎄, 걱정을 말라니까. 콜택시라도 대절을 해서 당신 걸리지도 않고 주눅도 안 들게 해주면 될 게 아냐.”
“그래요, 콜택시를 대절해보면 아마 김사장 고마운 줄도 알게 될 테죠.”
“이 사람이 누굴 약올리기로 작정을 했나.”
“다리가 부실하니까 어디 갈 일이 생기면 우선 탈것 걱정부터 되는 게 당연하잖아요. 여보, 공연한 고집 부리지 말고…….”
나는 가뜩이나 분주한 때 탈것 문제만이라도 걱정을 안 하고 있고 싶어서 다시 한번 무릎통을 팔았다. 그러나 그는 은근한 비웃음을 띠고 딴전을 피웠다.
“왜 어제 사온 만병통치약이나 달여 먹어보시지 그래? 사흘 안에 씻은 듯이 거뜬해질 텐데 무슨 걱정 이람.”
어제 내가 경동시장에서 사온 약초를 두고 하는 소리였다. 한약재 생약재 건강차 종류의 도매상이 몰려 있는 거리 끄트머리에 좌판을 벌여놓은 노인한테서 산 거였다. 노인은 연못에서 방금 은도끼 금도끼를 들고 솟아오른 것처럼 상투를 틀고 수염까지 기르고 있었다. 노인은 강인하고도 과묵해 보였고 실제로도 말로 외치는 대신 한자에다 굵은 먹글씨로 그 약초가 잘 듣는 병명을 잔뜩 나열해놓고 있었다. 냉, 대하, 월경통 다음에 신경통, 요통, 관절염까지 눈으로 더듬어가면서 나는 슬그머니 그 좌판 앞에 쪼그리고 앉았다. 그리고 툭하면 도지는 무릎을 호소하면서 그 약초로 고칠 수 있나를 물었다. 물으나 마나 한 물음인 줄 뻔히 알면서도 나는 잠깐 입에 침이 마르게 간절해져 있었다. 나
는 엉뚱하게도 그 시끄럽고 번다한 시장 한복판에서 위로받고 싶었던 것이다. 병원에서 못 받아본 위로와 장담이 듣고 싶었던 것이다. 노인은 내가 기대한 것만큼 속 시원한 장담을 해주었다. 물 한 주전자에 그 약초를 한 움큼씩만 넣고 뭉근한 불에 달여서 차 마시듯 마시면 사흘 안에 씻은 듯이 나을 거라고 했다. 약값은 생각보다 비쌌다. 내가 비싼 양해하니까 밭에서 비료 써서 기른 게 아니라 깊은 산중에 자생하는 거라서 알아보는 눈과 다리품이 그만큼 든 거니까 약효를 보려거든 돈 아까워 말라고 했다.
“그러니까 할아버지가 손수 캐러 다니셨단 말이죠?”
“그럼 누굴 시켰간디? 나 그런 짓 안 해라우. 병이 낫으고 싶으믄 이 늙은일 믿이시소잉.”
나는 일흔도 넘어 뵈는 노인이 깊은 산의 벼랑과 골짜기를 헤메 다닐 수 있다는 게 믿어지지 않아 물은 건데 노인은 손수 캤다는 게 약효를 보증할 수 있다고 여기는 듯했다. 나는 그 약초보다 오만 가지 효험 중 하나도 믿을 마음이 아니면서도 한 근을 샀다. 뿌리째 잘 마른 약초는 한 근이 어른 베개만했다. 그때 웅크리고 앉았다 일어설 때부터 이미 무릎통은 시작되고 있었다. 나는 노인의 군살 없이 깡마르고 뼈마디가 실한 꼬장꼬장한 체격을 훑어보면서 그가 온종일 험준한 산줄기를 탄다는 게 약효 보다 훨씬 믿을 만하다고 생각했다. 내 무릎통은 남편이나 의사의 동정을 사지 못해도 쌌다. 다리는 처넛적의 별명대로 새다리인데 허리와 배와 엉덩이는 군살이 함부로 붙어 뒤룩뒤룩했다. 하중이 과해지니 새다리가 못 견디어하는 건 당연했다. 노인이 내 등뒤에서 쨍하는 쇳소리로 약 먹는 동안은 절대로 괴기나 비린 거 먹지 말라고 악을 썼다.
나는 그 약초의 약효를 믿고 있지 않았지만 속았단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남편이 비아냥거리는 건 더군다나 참을 수 없었다.
“당신이 장복하는 그 환약은 어떻구요. 흰머리가 검어지고 빠진 이가 돋아난다고 했다면서요. 돌팔이도 그쯤 되면 금메달감이라니까.”
우리도 한때 젊었었다는 걸 증거할 만한 흔적은 아무 데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렇다고 우리 몸을 바람처럼 스치고 지나간 젊음을 다시 불러올 수 있다고 꼬드기는 건 사기꾼이나 요술쟁이지 의사는 아니었다. 나처럼 아픈 데가 있는 것도 아닌데 먹는 소위 보약에 대해 익숙해져 있을 터인데도 오래 참았던 불신감을 터뜨린 듯 속이 후련했다.
“그건 그 사람이 한 소리가 아니라 동의보감에 그렇게 나 있더라는 얘기요. 그 사람이 왜 돌팔이야. 어엿한 한의과대학 졸업생인데. 그 사람 중간에서 방향전환하기 참 잘했지. 사십이 다 돼서 그때까지 걸어온 길을 버리고 샛길을 개척하기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거든. 그때만 해도 처자식 거느린 가장으로서 할 짓이 아니다 싶게 무모해 보이더니만 지금은 그 사람이 부러워.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먹고살 만큼 돈을 벌 수 있다는 건 꿈 같은 이야기였는데 그 사람은 마침내 해냈잖아. 게다가 정년도 없으니…….”
남편이 한의사가 된 친구가 처방한 환약을 장복하는 건 회춘의 효능을 믿어서가 아니라 친구에 대한 선망 때문인지도 모른단 생각이 들었다. 그 생각에 속이 쓰렸다. 어쩌다 접어든 길을 나만 처음 접어든 길이라는 이유 하나로 끝까지 완주하고 난 후 꼭 속임수에 당한 것처럼 갑작스립게 엄습한 허망감에다 저렇게 허둥지둥 환약을 털어넣고 있는 것이다. 나는 그가 피할 수 없이 도달한 비소(卑小)에서 눈을 돌려야 했으므로 그와의 부질없는 말씨름이 안 하고 싶어졌다. 그후에도 그는 그 부피 많은 환약을 끼니처럼 하루 세 번 거르지 않았고 나는 그 약초를 달여먹지 않았다. 추석날까지 무릎통이 가라앉을 새가 없이 바쁘기도 했지만 다시는 대절 택시 문제를 입에 올리지 않았다.
좀 시간이 걸리긴 했지만 추석날 택시 잡는 게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한 군데 진득하니 붙어 있지 못하고 이리 뛰고 저리 뛰면서 보낸 시간은 한 시간은 더 되어, 선산이 있는 화전리에 도착한 건 한시 다 돼서였다. 딴 때 같으면 버스길에서 화전리까지 가는 비포장도로를 터덜터덜 걷는 종질(從姪)들을 만나 차를 세워 태워주는 재미도 수월찮았는데 마을 앞까지 이를 동안 한 사람도 못 만난 걸 보면 우리가 제일 꼬마리일 게 확실했다.
“당신 배 놔라 감 놔라 못 하시게 돼서 섭섭하시겠수.”
남편은 외아들이고 우리 또한 외아들밖에 못 두었지만 시아버님은 삼형제 중의 막내여서 남편에겐 종형제가 다섯 명이나 되었다. 그러나 생존해 있는 건 남편뿐이라 지금 한창 활동기에 있는 그 아래 항렬들한테는 남편이 유일한 어른이었다. 친족의 범위가 점점 좁아지는 세상이어서 종숙(從叔)이 변변히 어른 행세할 만한 기회도 없었지만 그래도 추석이나 한식에 선산에서 만나면 잔소리깨나 해댔다. 저희 부모 산소에다 먼저 절을 하려는 당질들을 야단을 쳐서 맨 꼭대기에 계신 팔대조부터 내리 참배하도록 했고 남자하고 똑같이 재배만 하려는 종질부(從姪婦)를 굳이 사배(四拜)를 시키기도 했다. 신식과 약식을 숭상하는 종질부들인지라 제수도 격식에서 너무 벗어나거나 지나치게 간소화하기도 했는데 그럴 때도 종숙의 곱지 않은 눈총과 따끔한 한 마디를 못 면했다.
“우리가 좀 늦었기로서니 저희끼리만 지내기야 했겠소.”
“왜 못 그래요. 얼씨구 허구 휘딱 해치웠겠죠.”
“저런 말버릇이 있나. 해치우다니 뭘 말이오?”
나는 남편의 엄숙주의에 어깨를 움찔했지만 조금도 겁나거나 미안하지 않았다. 내가 이럴 때야 젊은 종질부들이야 말해 뭘 하랴 싶어 그가 조금 안돼 보이는 게 고작이었다.
“그렇게 잔소리가 하고 싶으면 서둘러야죠. 산소까지 타고 올라갑시다.”
이렇게 넌지시 귀띔해보았지만 그는 들은 척도 안 하고 산지기네가 사는 마을에서 차를 세웠다. 영구차가 올라갈 수 있도록 묘소 앞까지 닦아놓은 길이 있건만 그는 택시를 대절했을 때도 꼭 산지기네 마당에서 기다리게 했었다. 그 정도도 불경으로 여기는 그에게 마음으로부터 동조하는 것도 아니면서 나는 삼십 여 년간 길들여진 조신하고 공구스러운 얼굴로 그의 조상이 팔대째 누워 있는 산자락을 밟았다. 무릎이 깊고 무디게 쑤셨다. 그 기분 나쁜 동통이 여직꼇 무의식적으로 순종해왔던 것에 대한 단순하고도 격렬한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생전에 소매 한번 스친 일은커녕 동시대의 공기를 더불어 호흡한 일조차 없는 완벽한 미지의 사람들을 내가 공경할 의무가 있음은 그들이 남편을 있게끔 했기 때문이거늘 나를 있게끔 한 내 조상에 대해선 어째서 남편이 공경의 의무를 지려 들지 않는가. 나는 당장 그걸 따져 그 두 관계를 서로 비기게 하고 싶은 열망으로 헐떡이며 앞서가는 남편을 불렀다. 그러나 그 다음에 내 입에서 튀어나온 건 전혀 엉뚱한 탄성이었다. 저만치 송림 사이로 붉게 타오르는 단풍을 보았기 때문이다. 거기 단풍나무가 있었다는 것도 처음 알았거니와 아직은 나무들이 물들기 전이었다. 철 이른 단풍치곤 그 빛깔이 너무도 선연했다.
“여보, 벌써 단풍이 들었네요. 어쩜 곱기도 해라.”
남편은 나보다 먼저 그걸 발견한 듯 어디냐고 묻지도 않고 곱지 않은 눈으로 나를 노려보고 나서 퉁명스럽게 말했다.
“그것도 눈이라고. 저게 단풍이야? 차야, 차. 누가 자가용을 저기다 세워놓은 거야. 한 대도 아니고 아마 서너 대는 되나본데.”
그러고 보니 며칠째 궂은 날씨로 발이 빠지게 진 길에 깊이 파인 차바퀴 자국을 골라 디디며 올라가고 있는 중이었다.
“참 그렇군요. 누가 남의 산속에다 차를 대놓았을까요?”
“누군 누구겠어. 걸핏하면 자가용 몰고 야외놀이 다니는 족속들이겠지.”
“그래도 그렇죠. 우리 산에 물이 있나 절이 있나, 뭐 볼 게 있다고.”
“왜 볼 게 없어? 행주벌하고 한강줄기가 빤히 내려다뵈는데. 자가용족들이 휴일마다 휘젓고 다니지 않는 데가 없다 했더니만 남의 선산에다 다 판을 벌이네그려. 내 이것들을 그냥…….”
남편은 마치 선영을 도굴당하는 현장을 찹은 종손처림 비장한 사명감에 넘쳐 주먹을 휘두르며 돌진해갔다. 아닌게 아니라 자가용은 한 대가 아니라 넉 대였다. 건조하기 전의 맏물 고추처럼 순전한 빨간 빛깔의 르망과 짙은 회색의 스텔라, 군청색의 프레스토 그리고 흰색 맵시가 길에서 비켜나 송림 사이에 머리를 처박고 정차해 있었다. 그러나 판을 벌이고 있는 건 종질들과 종질부, 그리고 그만그만한 종손들이었다. 휘둘러보아도 딴 행락객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관영, 관수, 관민, 관모, 관희, 관구, 관호·…·관(寬)자 돌림의 종질들과 그 식솔들이 일어서기도 하고 엉거주춤 일어서는 시늉만 하기도 하면서 우리를 맞았다.
“아저씨, 늦으셨어요.”
“관수 형은 아저씨 댁하고 한 동네 아냐? 자가용을 샀으면 오늘 같은 날 아저씨 댁에 들러서 모시고 올 것이지. 노인네가 저 고생도 안 하시고 좀 기특해하셨겠어. 아지씨, 고생하섰어요. 제가 자가용 사면 아저씨 이런 고생 안 시킬게요.”
관호가 넌지시 제 사촌형을 핀잔주면서 너스레를 떨었다. 관수는 미처 생각을 못 했다는 듯이 뒤통수를 긁었지만 영악해 뵈는 관수댁이 가만히 있지 않았다.
“서방님 차 사면 어디 얼마나 잘하나 두고 봅시다. 그렇게 말을 앞세우는 게 아녜요. 막상자기 차를 굴리게 되면 없을 때 생각했던 것처럼 그렇게 인심이 써지는 게 아니라구요.”
우리는 더 듣기가 민망해 얼른 그 자리를 피해 묘역을 윗대서부터 참배하고 맨 나중에 부모님 산소 앞에 가지고 온 간소한 제수를 진설했다. 집에서 아침에 추석 차례를 지냈으면 산소에 따로 음식을 가지고 오지 않는 게 가풍이었으나 워낙 먼 길이라 요기라도 할 겸, 다들 음식을 싸가지고 다니는 시체 풍습도 따를 겸해서 짐이 되지 않을 만큼 가져온 거라 변변치가 않았다. 종질들이 자리를 봐놓은 데로 올라오니까 관호댁이 얼른 보온병에서 종이컵에다 커피를 두 잔 따라다가 공손하게 우리에게 권했다. 야외용 돗자리를 여러 개 이어 펴서 만든 넓은 자리옌 김밥, 통닭, 불고기, 튀김, 샐러드 등 마음먹고 차린 듯한 음식이 풍성했다. 관자 돌림의 형제간 사촌간 중에 해외에 나가 있는 몇몇을 빼고는 남김 없이 다 모인 것도 처음 있는 일이었다. 아마 저희끼러 미리 연통을 해서 성묘를 겸한 야외놀이의 자리를 마련한 모양이었다. 안 하던 짓을 하게 된 건 저희들 사이에 별안간 마이 가족이 반수 이상이 된 것과 무관하지 않을 듯했다. 돗자리로 오르려다 말고 나는 엉덩이만 겨우 걸치면서 돌아앉았다. 치맛자락과 버선등이 말이 아니었다. 고무신도리가 넘게 묻은 진흙은 말라 꾸둑꾸둑했지만 치맛자락에서 버선등으로 옮아붙은 진흙 자국은 주홍 물감을 몽당붓으로 거칠게 문지른 것 같았다. 남편이 택시 대절을 안 하기로 했을 때 나도 한복을 입지 않기로 했어야 했다. 시체 풍습에 따라 한복을 입을 일은 어쩌다나 있었고, 그나마 입어도 그만 안 입어도 그만이었지만 성묘 때만은 꼭 한복을 입어야 하는 줄만 알았다. 제사 때 주과포가 기본인 것처럼 그것만은 감히 변경시킬 수 없는 기본적 예절로 못 박아놓은 게 남편이었다. 나는 내 속에서 일어난 조그만 반란을 남편이 눈치챌 수 있도록 터무니없이 단호한 얼굴로 그를 찾았다. 대각선으로 반대편에 앉은 그의 구두와 바짓부리도 엉망이었다. 그도 그게 신경 쓰이는지 엉덩이만 걸치고 앉아서 으레 하던 짓을 안 했다. 법도를 가르치려면 차를 산소 앞까지 끌고 온 것부터 시작을 하는 게 순서인데 그는 말을 참는다기보다는 뱉괵 싶은 걸 참고 있는 얼굴로 입을 잔뜩 다물고 있었다. 나는 그가 못 참을까봐 조마조마했다. 이 이상 더 초라해지고 싶지 않았다. 종질부들이 은박지 접시에다 먹을 것을 골고루 담아다가 권했다. 내 접시에도 돗자리 위의 질펀한 먹을 것 속에도 송편이나 생률 햇대추 등 추석 차례상에 으레 올라야 하는 걸로 돼 있는 것들은 보이지 않았다. 그들은 우리에게 음식 대접을 하는 것 외엔 전혀 신경을 쓰지 않고 하던 얘기를 계속했다. 주로 차 얘기였다. 남자들은 남자들대로 여자들은 여자들대로.
형님도 면허 따셨다면서요. 그래, 따고 싶어 딴 거 아냐. 저이가 벌써 싫증이 나는지 글쎄 날더러 출퇴근을 시켜달라는 거야. 아이들 때문에도 그렇구 나도 그렇구 집에서 차 쓸 일이 더 많은 건 사실 아냐? 형님은 복도 많지 뭐유. 멀지 않아 차 두 대 굴리시겠네. 웬걸, 그럴 형편까지는 아직아직 멀었어. 그렇지만 내가 시내 연수 끝나면 치는 오토매틱으로 바꿔주겠다나봐. 차 사신 지 얼마 됐다고 벌써 바꾸세요? 아무래도 여자가 운전하려면 오토매틱이 낫다나봐. 그래요? 오토매틱이 더 위험할 수도 있다던데. 우린 현제나 고물차라도 한 대 사나?
느이 회사에서도 차량 유지비 나오지? 네에, 차만 샀다 하면 무조건 이십만원씩 나와요. 신입도? 아아뇨. 계장급 이상만요. 그렇겠지, 안 사면 손해겠네. 그러니까 누가 손해 보나요. 우리 회사도 그 정도는 나오는데, 단A사 차를 사야지 딴 데 거 사면 한푼도 안 준단다. 그런 법이 어딨어? 왜 없나? 우리 회사가A그룹 계열 아니냐? 다랍게 노네. 아무리 다라워도 우리 회사만큼 다라울까. 글쎄, 처음부터 세금 보험은 내몰라라 기름값만 겨우 십만원씩 나오더니만 그것도 아까운지 지난달부터는 통근거리애 따라 기름값에 차등을 두기로 했다나. 그러니까 집이 먼 사람 가까운 사람에 따라 많이도 주고 적게도 준다는 소리냐? 그렇다니까. 대강 나누는 것도 아니고 정확하게 통근하는 거리를 산출해서 그 이상도 이 이하도 아니게 기름값을 주는 거야. 그렇게 했더니 한 달에 경비를 얼마나 줄일 수 있다고 하더라? 벼룩의 간을 내먹지. 보나 마나 어떤 아첨꾼 이사의 아이디어였겠지. 그래도 신기한 건 처음엔 다들 더러워서도 차 안 굴리겠다고 아우성이더니 그후 차가 줄기는커녕 착실하게 늘어만 갑디다. 줄기는 어떻게 주냐? 예전 같은 석유파동이 난다고 해도 아마 차는 안 줄 게다. 일단 제 차 맛을 보면 마누라 없인 살아도 차 없인 못 살게 되니까. 뭐라구요? 당신 시방 뭐라구 그랬어요. 아냐, 왜 이래, 내가 뭐랬게? 차는 곧 자유라고 그랬을 뿐이야. 자유 그 자체라고.
누가 형뻘이고 누가 아우뻘인지 분간이 안 되는 한창 나이의 조카들이 술도 없이 꼬약꼬약 밥과 고기와 야채만 먹으면서 주고받는 수작을 무심히 흘려듣다 말고 나중 말에 나는 퍼뜩 정신이 들었다. 차가 자유라고 한 건 관민이였던가? 맞아 관민이였을 거야. 아직도 관민이댁이 관민이한테 눈을 보오얗게 흘기고 있었다. 느닷없이 튀어나온 자유란 말이 빈속에 마신꾀주의 첫잔처럼 속에 짜릿하고 상쾌하게 꽂혔다. 나의 자유에 대한 관념은 맨 존엄하고 비통하고 난해한 것들뿐이었다. 당장 떠오르는 말만 해도, 진리가 그대를 자유케 하리니, 자유 그것 아니면 죽음을 달라, 자유에서는 왜 피의 냄새가 나는가 등등. 하여 자유에 대한 불가해한 안타까움이 거의 체질화돼 있었다. 그런데 차가 자유라? 자유가 그런 손쉬운 지름길을 거느리고 있다는 건 미처 몰랐었다. 자유의 여신상으로 상징되는 나라에 유학까지 갔다 온 관민이다운 발상에 나는 너무 감탄을 하고 있었다.
남편이 거의 손대지 않은 은박지 접시를 밀어놓으면서 일어섰다. 나도 입 안의 김밥덩이를 급히 삼키고 나서 주섬주섬 거추장스러운 치맛자락을 수습하면서 일어섰다.
"왜, 벌써 가시게요?”
종질들이 더러는 따라 일어서면서 이렇게 물었지만 만류할 기세는 아니었다.
“가실 땐 제가 모셔다드려야 하는 건데. 아저씨 조금만 더 노시다 가세요. 제 차로 모실게요.”
관수가 올 적에 미처 생각이 못 미친 실수를 만회하려는 듯 혼자서 열심이었다. 그러나 우리 때문에 먼저 자리를 뜰 기세는 아니었다.
“아니다. 내려가는 길에 산지기 영감하고 잠시 얘기나 하다 갈란다. 정 그럴 생각이면 그 동안에 내려오렴.”
“아이 아저씨도, 그럼 마음이 안 놓여서 저만 재미없어지라구요.”
관수의 말투에 얼렁뚱땅 어리광이 섞였다.
“마음놓고 놀거라. 나도 기다리지 않을 테니.”
남편이 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별로 안 하던 짓이었지만 우리는 유치원 짝꿍처럼 손에 손을 잡았다. 막 돌아서려는데 관영이가 사무적으로 말했다.
“산지기한테는 제가 봉투 줬으니 아저씨는 모르는 척하세요. 이 사람 저 사람 줘 버릇 안 하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알았다.”
관영이는 종손이었다.
“참, 관우한테서는 편지 자주 옵니까? 돈도 많이 부쳐오구요? 언제 아주 귀국한대요? 이번에 귀국하면 장가들이셔야죠.”
관영이는 우리가 대답할 새 없이 몇 가지의 질문을 연달아 퍼부었다. 궁금해서 물었다기보다는 우리가 하도 고적해 보여서 우리에게도 아들이 있다는 걸 거기 있는 모두에게 상기시키고자 했는지도 모른다. 보호받고 있다는 느낌이 잠깐 환각처럼 왔다. 외아들 관우는 이때쯤 중동 지사에 나가 있었다. 남편은 대답 대신 고개만 끄덕였다.
산지기네는 명 절날답지 않게 고즈넉했다. 그러나 쓸쓸하진 않았다. 산지기 내외가 마루 끝에 노모를 모시고 앉아서 도란도란 얘기를 하고 있었다. 노파가 먼저 우리를 보고 웃었다. 나는 노파를 볼 때마다 세월이 정지돼 있는 것처럼 느끼곤 했다. 내가 한식과 추석 성묘를 거르지 않게 된 지가 한 이십 년쯤 되는데 노파는 이십 년 전에도 오금이 붙어 잘 걷지 못해 양 무릎을 세우고 앉아 있었고 무릎이 어깨보다 높았었다. 불그러친 무릎뼈보다 작고 동그란 두상에 짧게 커트한 흰머리칼이 작은 입김에도 살짝 나부낄 듯이 부드럽게 곤두선 게 꼭 민들레 씨앗 같았다. 이십 년 전에 이미 노파는 더 늙을 수 없이 늙어버려 그후 쭈욱 세월로부터 자유롭게 살 수 있었던 것이다. 노파는 자신의 나이뿐 아니라 자신의 속에서 낳은 자식과 자식의 자식들의 수효도 잊어버린 지 오래라고 했다. 칠남매를 낳아 다 길렀다니 손자 증손자까지 합치면 한 송이의 민들레가 퍼뜨린 씨앗보다 훨씬 많은 수효가 될지도 모르겠다. 집 안으로 한 자는 넘게 들이비춘 가을 햇살이 검게 찌든 마룻장을 뚜렷한 명암으로 양분하고 마루 끝에 앉기도 하고 걸터앉기도 한 세 사람이 도란거리는 대로 미묘하게 일렁이고 있었다. 세 사람은 볕을 쬐고 있는 게 아니라 충만한 빛 속에 몸을 담그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무슨 얘기를 그렇게 재미 있게 하고 계십니까?”
“어머니는 옛날얘기 하시는 걸 좋아하신답니다.”
산지기가 웃으니까 검 게 탄 얼굴에 주름이 파문처럼 퍼졌다.
“옛날얘기를 많이 알고 계시겠지요?”
나는 문득 노파가 알고 있는 무궁무진한 옛날얘기를 기록해놓고 싶단 생각을 했다. 어느 날 바람도 없는데 문득 민들레 씨앗이 자취도 없이 그 송이를 떠나듯 정지된 듯한 시간이 미동만 해도 노파의 목숨 또한 자취도 없이 무산될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웬걸요, 벌써 몇 년째 하나밖에 모르신답니다.”
산지기댁이 부엌으로 들어가면서 말했다. 남편이 얼른 봉투를 꺼내 산지기 잠방이 주머니에 쑤셔 넣으면서 서둘러 댔다.
“아주머니, 아무것도 차리지 마세요. 가볼 데가 있어서 먼저 내려왔으니까요.”
남편은 거짓말을 시키고 있었다. 여기서 지체하다가 종질들과 다시 만나게 될까봐 그러는 거였다.
“차리긴요. 시골 송편 맛이나 보시라구.”
산지기 처는 함지박에 덮어놓은 베보자기를 들치고 두루뭉술하게 빚은 송편을 주섬주섬 목판에다 담으며 말했다. 조카들과 만나고 싶지 않은 건 나도 마찬가지였지만 해마다 먹어본 산지기네의 진짜배기 송편 맛 또한 잊히지 않았으므로 싸달라고 말했다. 산지기 처가 마루로 올라가 함박꽃이 만발한 자개무늬 찬장 서랍을 들쑤셔 비닐봉지를 찾는 동안 나는 산지기에게 말을 시켰다.
“명절날 어째 자제분들이 한 분도 안 보이네요.”
남의 자식은 다 저절로 자라는 것 같다더니 산지기네 아이들도 유난히 쑥쑥 자랐다. 정지된 시간 곁의 질주하는 시간이었다. 고만고만한 붙임성 있는 아녀석들은 울섶처럼 쉬 자라 데면데면한 소년이 되고 다시 인사 대신 불손하게 어른의 아래위나 훑어보는 반항적인 청년이 되었나보다 하면 미끈하니 신사복 입고 예쁜 각시 데리고 왔다가 마지못해 냉랭한 아는 척을 하기도 했었다.
“아침나절엔 다 모여서 차례를 지냈습죠. 차례 지내고 나서 큰아들이 동생네 식구들을 다 몰고 도라이분가 뭔가 하고 오겠다고 나갔습지요. 큰아들이 봉고차를 샀거든요. 임진각까지 갔다 온다고 했는데 거기 뭐 볼 게 있나요. 차 타는 재미죠. 큰애가 젤 먼첨 차를 산 걸 보면 장사밖에 없어요. 공부는 지 동생들이 더 많이 했건만도 다 월급쟁이니 어느 하세월에 차를 사겠습니까.”
“그런 소리 말아. 장슨이 성공해서 내가 여간 기쁘지 않아.”
노파가 처음으로 말참견을 했다. 옛날얘기도 저런 목소리로 했을까? 도란도란이라고밖에 표현할 길 없는 나직하고 정다운 목소리였다. 산지기 처가 서울에 있는 유명한 쇼핑센터 표지가 찍힌 비닐봉지에다 송편을 한 대접이나 되게 쑤셔넣고 아구리를 매듭지으면서 저럴 땐 멀쩡하시다니까요, 했다. 그렇다면 보통 때는 노파가 멀쩡하지 않았다는 소리가 된다. 그러한 산지기 내외에겐 노망 노인을 오래 모시고 산 아들 며느리다운 피곤하고 짜증스러운 기색이 조금도 없었다. 그들 세 사람은 서로 동등하개 그 기이한 화평스러움을 받치고 있을 뿐이었다.
“식구가 많지 않으시니까 쬐금만 쌌구먼요.”
“여보, 시간 없어, 서두름시다.”
남편이 시계를 보면서 재촉했다. 우리는 쫓기듯이 마을을 벗어났다. 동구 밖에서 선산 쪽을 돌아보았으나 무참한 상처처럼 송림을 시뻘겋게 찢어놓은 산길엔 아직 차도 사람도 안 보였다. 그래도 우리는 포장도로까지 걸음을 늦추지 않았다. 버스정류장 못 미쳐서 다행히 콜택시를 잡을 수 있었다. 시트에 기대어 조는 줄 알았던 남편이 눈을 감은 채 푸듯이 말했다.
"관수 있잖아. 걔 대학사학년 때 두 학기 등록금을 다 내가 내준 거 당신 몰랐지? 하긴 알 리가 없지. 당신 모르게 그만한 돈 축내고 메우느라고 생전 처음 대출 브로커 짓을 다 했었으니까.”
“어머, 그런 일이 있었어요? 금시초문이네요.”
“관수 걔 아버지하고 나하곤 다른 사촌간들하곤 다르게 지냈잖아. 꼭 한 형제 같았지. 그 형이 벌어놓은 것 없이 하루아침에 세상을 뜨자 어찌나 안됐던지 내가 자청해서 대준 거였지. 갚을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고 못 박고 대준 건데도 그애가 졸업하자마자 좋은 데 취직했단 소리 듣고 처음 한동안 갚아줄지도 모른다는 공상을 하곤 했지. 돈이 아쉬워서가 아니라, 옛다 너 양복이나 한 벌 해입어라 하면서 갚아온 돈의 일부로 다시 한번 선심을 쓰고 싶어서였어. 그때 가선 물론 당신한테도 자랑스럽게 알릴 작정이었구. 그러나 그런 일은 안 일어나고 말았어. 당신한테도 영영 숨길 수밖에 없었구.”
“영영 숨겼다구요? 지금 얘기했잖아요. 하필 지금 그 얘기를 왜 하는 거죠?”
나는 나도 모르게 남편에게 적나라한 모멸감을 드러내면서 말했다. 남편이 어쩔 줄을 모르고 무안해했다. 나도 곧 남편을 대놓고 무안하게 한 게 무안해졌다. 남편은 내가 무안해하니까 더 무안해지는 것 같았다. 우리는 되게 복잡하고 고약하게 얽혀서 무안해 했다. 나는 다소라도 무안감을 해소해보려고 딴청을 부렸다.
“산지기 영감 자식이 다 잘된 건 좋지만 산지기를 이을 사람이 없어서 어쩌죠?”
“그런 걱정은 우리가 안 해도 돼. 종가에서 어련히 알아서 할라구.”
그가 선산에 관한 일에 그렇게 무관심한 척하는 건 처음이었다. 추석이 지난 지 얼마 안 돼서 나는 세탁을 주려던 그의 양복 주머니에서 운전교습소 쿠폰을 발견했다. 떼낸 자국으로 봐서 며칠 안 된 것 같았다. 그가 운전을 배운다는 건 뜻밖이었고 생각만 해도 웃음이 났다. 배우는 건 아무나 배우지만 면허를 아무나 딸 수 있는 건 아니기 때문에 주책이란 생각밖에 없었다. 나한테 비밀로 한 것도 아마 그런 까닭일 터였다. 그는 천성적으로 기계에 대해 겁이 많았다. 스스로도 자신을 배냇병신이라고 비하할 정도로 그것을 인정하고 있었다. 예전엔 전력난으로 전압이 낮아 두꺼비집 퓨즈가 나가는 일이 잦았는데, 퓨즈를 갈아끼우는 간단한 작업도 나의 몫이었다. 그는 옆에서 전지를 비춰주거나 발판을 잡아주는 정도로 나의 조수 노릇이나 했다. 라디오 다이얼도 그가 맞추면 잘 안 맞았고, 판소리를 좋아해서 툭하면 판은 사들이면서도 오디오를 조작할 줄 몰라 내가 틀어주지 않으면 못 들었다. 그처림 기계에 대해 어설픈 사람을 위해 새록새록 생겨나는 오토매틱이니 리모트 컨트롤이니 하는 건 또 더욱 질색이어서 세탁기나 텔레비전도 굳이 수동을 고집했다. 자기가 조작하는 것도 아니면서 더욱 편리해진 기계일수록 더욱 고장이 잘 난다고 믿고 있었다. 음치가 치료되는 게 아니듯 기계에 대한 그의 저능도 나아질 가망이 보이지 않았다.
“당신, 운전 배워요?”
그날 밤 나는 복받치는 웃음을 어금니 사이에서 지그시 누르면서 지나가는 말처럼 물었다.
“응, 그런 바람이 좀 불었어.”
남편도 들킨걸 그닥 민망해하지 않고 말했다.
“어떤 바람이요?”
“사무실 친구들이 함께 배우자고 해서…… 열 명만 되면 할인 쿠폰을 끊을 수 있다나.”
“그 사무실에 벌써 열 명씩이나 나와요?”
“아니, 그렇지만 딴 데서 끌어서 열 명 만들기야 쉽지 뭐.”
“아무튼 주책들이야.”
남편이 나가는 사무실은 무슨 경제성이 있는 사무실이 아니었다. 젊었을 때의 근검절약과 퇴직금 등으로 노후설계를 착실하게 해놓은 정년퇴직자들 몇이서 단지 출근의 습관을 유지할 목적으로 공동 운영하는 사무실이었다. 도시의 뒷골목의 허술한 빌딩 삼층 방은 웬만한 집 안방만한 넓이에 싸구려 응접세트와 바둑판 장기판 화투, 공짜로 보는 사보들, 석유난로, 선풍기, 물주전자와 컵, 대걸레, 나일론 빗자루 등등이 비품의 전부였다. 그래도 임대료를 생돈으로 낼 수야 있겠느냐는 공론이어서 얼마간씩 공동 출자한 목돈을 그중 이재에 능한 친구가 증권투자, 기업 어음할인 등에 굴려 그 정도는 버티는 모양이었다. 출퇴근이 아닌 단지 출퇴근의 습관을 위해 제 차를 굴릴 것도 아니면서 단
체로 운전을 배운다니 주책이랄밖에 없었다. 그러나 아직은 한창 나이라고 여기고 싶은 장년의 습관을 못 버려서라고 생각하면 측은하기도 했다.
할인받기 위한 인원수를 채우려고 끼워준 걸로 끝날 줄 안 운전교습이었는데 그게 아니었다. 면허를 꼭 따고야 말겠다고 벼르더니 밤잠을 설치면서 필기시험 공부에 들어갔다. 내일이면 필기시험을 본다는 날 그는 밤늦도록 중얼중얼 예상문제집을 읽다가, 나더러 문제를 임의로 골라내라고 했다.
차선이 그려져 있는 도로의 통행 방법은? (1) 자기가 편한 방법으로 차선을 사용한다. (2) 뒤따라오는 차량과 관계없이 차선을 바꿔 운행한다. (3) 법으로 차종별로 지정된 차선을 통행하고 차선을 바꿔서 운행할 때는 뒤따라오는 차량 통행에 장애가 되지 않게 신호를 하여 차선을 바꿔야 한다. (4) 차선을 아무렇게 사용하여도 좋다.
이렇게 읽어주면 남편은 정답의 번호를 대는 거였다. 나는 그짓을 하면서 마치 내가 우리 꼴을 창 밖에서 엿보는 입장이 된 것처럼 웃음이 나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렇게 열심히 한 공부는 헛되지 않아 그는 필기시험에 단박 좋은 점수로 붙었다. 아무리 친구 따라 운전 배우고 필기시험까지 봤다지만 그 정도로 만족하고 처질 줄 알았는데 실기시험을 보기 시작했다. 예상한 대로 실기시시험은 보는 족족 낙방이었다.
"이제 그쯤 해두세요. 우리가 지금 차를 살 것도 아닌데 면허를 꼭 딸 거 없잖아요.”
“그쯤 해두다니? 면허도 따고 차도 살 테니 두고 보시오.”
“글쎄 우리나라 사람들이 몽땅 신발짝 꿰차고 다니듯이 차 한 대씩 굴리고 다닌다 해도 당신은 안 돼요. 두고 보시구려. 누가 당신한테 면허증 주나.”
그 정도로 오금을 박는 것만으로는 모자라 기계에 대한 그의 저능성을 하나하나 열거하기 시작했다. 가장 최근에 있었던 실수는 그의 누님이 가장 아끼는 카세트테이프를 지워버린 사건이었다. 누님의 큰딸은 미국서 살고 있는데 외손자들이 할머니 생신날 녹음해 보낸 카세트테이프를 생신잔치에 모인 손님들 들으라고 온종일 틀어댔다. 아무리 좋은 소리도 한두 번이지 열 번 스무 번 듣는 데 진저리가 난 손님들이 누님이 잠깐 자리를 비운 사이에 그것 좀 끄자고 했다. 하필 성능 좋은 오디오 곁에 앉아 있던 남편이 끈다고 끈 게 지워버린 거였다. 피할 수 없는 노래 자랑 자리에서 음치가 탄로나듯 남편의 기계에 대한 전근대적 무지는 그날 이후 친척들 사이에까지 널리 퍼지게 되었다. 그 사건까지 들먹였는데도 남편은 기죽지 않고 학교 때 자기보다 공부 못한 누구누구도 지금은 제 차를 몰고, 숫제 돌대가리여서 중학교도 못 간 누구는 운전이 직업인 모범운전사라고 맞섰다.
“지능하고 기계에 대한 소질이나 감각은 별개라구요. 재학중에 고등고시에 합격한 젊은 판사가 운전시험을 여덟 번씩 떨어지고 나서 면허 따기가 고시 붙기보다 훨씬 어려운 줄은 미처 몰랐었다고 한탄을 하더래요.”
그 소리엔 그도 낄낄대고 웃었다. 그러나 곧 정색을 하고 반격을 했다.
“한마디로 기계에 대한 소질 어쩌구 몰아붙이지 말라구. 내가 소질이 없는 건 전자제품에 한해서지 기계 모두가 아니야. 내가 바퀴 달린 기계에 얼마나 소질이 있다는 건 당신도 알잖아. 신혼시절의 내 자전거 솜씨 당신 벌써 잊었어?”
나는 나잇값도 못 하고 볼이 달아올랐다. 젊은 그의 자전거 타는 폼도 폼이려니와 그때의 가난과 열정을 어찌 잊을까. 우리는 휴전이 되기 전의 암울하고 불안한 시기에 무작정 결혼을 했고 그는 마땅히 직장을 못 구해 씻은 듯이 가난했다. 그가 처음으로 구한 직장이 미군 부대 보일러실 책임자였는데 그는 퇴근할 때마다 훔친 석탄을 자전거에 싣고 왔다. 미군 싸전한테는 부대에서 나오는 쓰레기 중 땔 만한 걸 집에 가져가도 좋다는 허락을 미리 받았기 때문에 그가 싣고 오는 짐은 집채만했다. 그 집채만한 짐에 눌려 그의 모습은 조그맣고 초라했지만 나는 그렇게 큰 짐을 싣고 쏜살같이 달려오는 그가 얼마나 멋있고 잘나 보였던지. 그 집채만한 허섭스레기는 미군을 속이기 위한 위장이고 그 안 상자 깊숙이 감춰온 화력 좋고 광택이 유별난 석탄을 쏟아놓을 때 그는 더욱 돋보였다. 우리의 신혼 시절은 그렇게 가난하고 따습고 행복했다.
그는 젊은 날의 바퀴 달린 것에 대한 소질만 믿고 우직하고 끈질기게 실패와 도전을 거듭한 끝에 드디어 면허를 땄다. 그리고 시내 연수까지 끝마쳤다. 차를 사는 일만 남았고 그 일도 시간 문제인 것처럼 보였다. 그의 사무실 사람을 부추겨 몽땅 할인요금으로 운전교습을 받게 한 학원 브로커가 당연히 중고차 브로커 노릇까지 할 모양이었다. 남편이 부탁한 백만원 안짝으로 살 수 있는 중고차 정보를 쉴새없이 알아들였다. 나로서는 어찌 해 볼 도리가 없었다. 차도 사기 전에 나는 벌써 차에 탄 것처럼 멀미를 느꼈다. 마지막으로 늙으면 자연적으로 떨어지는 순발력 운동신경 등 노화현상을 들어 차 사는 걸 만류해봤으나 차 사는 일은 벌써부터 내 뜻뿐 아니라 그의 뜻도 어쩔 수 없는 곳에서 저절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나는 가끔 그도 그가 저절로 실려가는 대세에 멀미를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가 괜히 불쌍했다. 나는 우리의 초로(初老)가 정신없이 휘몰아치는 근대화의 소용돝이에 횝쓸리지 않고 다만 관망할 수 있도록 거리를 유지시켜주는 발판쯤은 될 수 있는 줄 알았다. 우리의 초루에 그 정도의 품위는 허용된 줄 알았다. 그 정도도 이룰 수 없는 꿈이 될 줄은 정말 몰랐다. 차량 브로커가 뻔질나게 전화를 하고 어느 날은 새 차처럼 깨끗한 포니2를 남편이 브로커를 태우고 몰고와 집 주위를 한 바뒤 돌고 가는 일까지 있더니 마침내 그 차를 사게 되었다고 했다. 보험회사 직원이 왔다갔다하고 모든 수속이 끝나자 나는 집 살 때부터 연탄광으로 쓰던 차고를 닦아내느라 온종일 걸렸다. 별로 좋지도 않은 집에 폼으로 달린 줄만 안 차고를 진짜 차고로 쓸 날이 있을 줄 누가 알았으랴. 녹슬고 뻑뻑한 셔터문은 숫제 새 걸로 갈고 차를 그 안에 가둔 후에도 나는 그게 우리 차라는 느낌이 나지 않았다. 냉장고를 처음 사고 텔레비전을 처음 샀을 때도 처음 며칠은 일이 손에 안 잡히게 기쁘고 대젼하더니만 적어도 내 차를 처음 샀는데 이렇게 안 기쁠 수가 있나 이상할 정도였다. 집에다 꼭 애물단지를 하나 들인 것처럼 께름칙하고 근심스럽기만 했다. 남편은 그럭저럭 차를 잘 끌고 다녔다. 그러나 매일 아침 목숨을 건 사명을 띠고 출동하는 결사대처럼 비장하게 얼어붙은 남편의 표정을 훔쳐보는 고통으로 피가 마르는 듯했다. 안방 앞 베란다로 나가면 남편이 차고에서 커브를 틀어 통과하는 축대 밑 길이 빤히 보였다. 처음엔 그의 앞모습을, 다음엔 옆모습을 그리고 뒷모습을 안 보일 때까지 배웅할 수가 있었다. 떨어진 거리에서 유리창에 얼비친 남편의 표정은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는 게 아니어서 상상력이 많이 가미된 것이었다. 정말이든 단지 그렇게 보였든 간에 그때 본 남편의 비장한 표정은 온종일 내 뇌리에 늘어붙어 온갖 망상의 근거가 되었다. 늙음과 필사적은 얼마나 안 어울리는 양극인가. 급한 볼일이나 떼돈을 벌러 나간다면 모를까 다만 출근의 습관을 못 잊고 흉내내는 데 불과한 출타에 그런 표정이 가당키나 한가. 그리고 저녁때가 되면 고개를 길게 빼고 그의 틔근을 기다렸다. 안방 베란다에서 상체를 밖으로 한껏 내밀면 우리 골목으로 통하는 큰길까지 내려다볼 수가 있었다. 그 길은 차가 빈번하게 다니
는 길이어서 우리 차와 같은 차종의 남색 차도 빈번하게 지나갔다. 그때마다 행여나 우리 차일까 마음을 졸이다가 허탕을 치기를 수도 없이 되풀이하는 새에 그가 들어올 시간이 넘으면 갖은 방정맞은 생각으로 피가 마르는 듯했다. 내 생애에 그렇게 외곬으로 남편을 기다린 적은 일찍이 없었다. 앙탈을 부리며 서로의 사랑을 자극할 감미로운 기대가 섞인 신혼의 기다림도, 바가지를 긁을 열정으로 지글지글하던 중년의 기다림도 겪었으니 이제 기도처럼 화평한 노년의 기다림이 남아 있을 줄 알았는데 이게 무슨 꼴이람. 나의 기다림은 침이 마른 입 속에 하나 가득 모래를 문 것처럼 삭막하고 깔깔하고 비명도 지를 수 없이 고약한 것이었다. 그가 예고 없이 밤이 깊도록 안 돌아오면 나의 방정맞은 상상력은 최악을 향해 치달았다. 꼭 그 애물단지가 돌이킬 수 없는 잘못을 저질렀을 것만 같았다. 인명의 피해는 남편이 당해도 남이 당해도 안 되는 일이었지만 남이 당하는 경우를 상상하는 게 더 무서웠다. 운전까지는 어찌어찌해서 하게 됐지반 가해자 노릇만은 그가 차마 못 하리라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망상이 이에 이르면 그가 차를 굴리는 것까지 보다니 앞으로 무슨 꼴을 더 보려나 싶어 사는 게 다 싫어지기도 했다. 마치 그가 차를 운전하는 게 최악의 못 볼 꼴이라도 되는 것처럼.
그런 과장된 망상은 사람을 쉬 지치게 했다. 여보, 늦을 땐 늦는다고 꼭 전화해줘요. 같이 늙어가면서 그 정도는 아내에게 신경 써줄 수 있잖아요. 나는 파김치처럼 지쳐서 곧잘 이렇게 하소연했을 뿐 정작 그 까닭을 실토하진 않았다. 남편의 운전은 그 정도의 부담도 주지 싶지 않을 만큼 위태위태해 보였다. 그 애물단지 한테 휘둘리고 있는 건 남편뿐 아니라 나까지인지도 몰랐다.
제 시간에 들어 왔는데도 차고에 차를 넣고 마냥 감감무소식일 때도 있었다. 도대체 차고에서 뭘 하고 있는 걸까. 기다리다 지쳐 내려가보면 그는 보닛을 열고 차의 내장을 골똘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곳을 차고로 쓰고 나서 갈아끼운 촉수 높은 전구를 있는 대로 켜고 구부정한 어깨와 대머리가 지기 시작하는 희끗한 머리를 깊이 수그리고 그 복잡한 기계 속을 들여다보고 있는 모습은 한 폭의 비애였다. 내가 조심스럽게 인기척을 내면 그는 부랴부랴 자신 있고 도통한 표정을 지으며 돌아다보았지만 내 눈은 못 속였다. 아무리 들여다보아도 도무지 아무것도 모르겠는 난감한 낭패스러움과 기계 속에 대한 천성의 이질감을 위장하기엔 그의 도통한 체는 미숙하기 짝이 없었다.
출퇴근에 자신이 생기자 그는 나를 태워주고 싶어했다. 가락 시장에 싱싱한 생선을 사러 가지 않겠느냐는 둥 요다음 곗날엔 자기가 운전기사가 돼주겠다는 둥, 조르다시피 했다. 그가 차를 사는 걸 말리지 못한 이상, 이왕 산 차 자신감을 가지고 끌고 다니도록 응원해주는 뜻으로라도 하자는 대로 하기로 했다. 처음 나들이는 아무런 용건 없이 아는 길로 시내를 한 바퀴 돌고 집으로 돌아오는 거였다.
“내 옆에 앉으라구.”
나는 될 수 있는 대로 그가 운전하는 걸 가까이서 보기 싫었으나 그는 뽐내고 싶은지 옆에 앉히고 싶어했다. 운전석 앞의 너무 많은 각종 계기와 조정장치가 나를 불안하게 했다. 지금까지 택시나 승용차를 수없이 타봤건만 내 관념 속의 자동차는 차체와 핸들만 있으면 되는 극도로 단순화된 거였다. 그렇게 많은 계기를 두 손밖에 안 가진 운전자가 조작해야 되는 줄은 미처 몰랐었다. 운전석에 남편 아닌 딴 사람이 앉았을 때는 조금도 많은 줄 몰랐던 아니 있는 것조차 몰랐던 계기들이 그렇게 많아 보인 것은 아직도 그가 믿어지지 않는다는 증거였다. 나는 그가 행여나 나 때문에 헷갈릴까봐 잔뜩 경직돼 있었다. 차 안에만 신경이 쓰이는 건 물론 아니었다. 왕복 팔차선의 대로로 들어서자 전후좌우로 흐르는 엄청난 차량의 홍수가 나를 압도했다. 늘 버스나 택시로 다니던 길인데도 그렇게 많은 차는 생전 처음 보는 것처럼 느꼈다. 손발로는 운전을 하면서 한편 온몸의 감각과 신경을 외부로 발사해 그 무시무시하게 거대한 흐름과 유연한 조화를 도모해야 하는 그에게 방해가 될까봐 나는 숨도 크게 못 쉬고 손에 땀을 쥐었다. 악, 소리가 나올 것 같은 고비도 끽소리 안 하고 잘 넘겼다. 이렇게 잔뜩 얼어 있는 내가 안돼 보였는지 그가 웃으면서 뭐라고 말을 시컸지만 나는 알아듣지 못했다. 내가 그의 말을 처음 알아들은 건 그의 입에서 거침없이 욕이 튀어나왔을 때였다. 저 새끼 저거 미친 새끼 아냐? 어딜 함부로 끼어들고 있어? 저 여자 순 얌체네. 고 사이에 대가리를 디밀면 어쩌자는 거야. 그냥 콱 박아버릴라. 왜 빵빵대고 지랄이야. 똥 뀐 놈이 화내고 자빠졌네. 얼래 저 간 큰 여편네 보게. 깜박이도 안 켜고 차선을바마꿔 타이탄 앞으로 끼어들면 어쩔 거야. 죽고 싶으면 한강 난간이나 들이받지 누구 못 할 노릇을 시키려고. 야, 초보면 초보답게 발발 기어라, 귀엽기나 하게. 어디서 못된 짓 먼저 배워가지고…… 썅놈의 새끼 싸롱이 아깝다.
그가 중얼대는 소리는 처음부터 끝까지 다 욕이었다. 아아, 이 욕 잘하는 사내는 누군가. 나는 그가 뭔가를 과시하고 싶어 조바심할수록 그가 낯설어 화석처럼 굳어 있었다. 그의 욕에 의하면 그만이 옳고 그만이 익숙하고 딴 차들은 다 그르고 다 서툴다는 게 되지만 내 귀에는 그가 아직도 서툴다는 것과 자신의 탈것을 조작하는 일은 물론 이 탈것들의 홍수를 타는 걸 두려워하고 있다는 비명처럼 들렸다. 흐름이 정체했다. 나는 조심스럽게 손수건을 꺼내 이마의 식은땀을 누르며 사람들이 걷는 인도를 부러워 하며 바라다보았다.
그는 모르고 있었다. 그 동안 집으로 두 번이나 관제엽서가 날아왔었다. 그의 차량 넘버와 통과한 지점과 시일이 명시돼 있고 그날 그 지점을 지난 그 차량의 운전자는 출두하라는 경찰서 교통계로부터의 출두 명령이었다. 그에게 충격과 수치감을 주기 싫어 긍리 끝에 내가 나가보았다. 그런 일을 대리로 치를 수 있는 것인지 아는 바가 없었지만 하여튼 부딪쳐볼 작정이었다. 신호 위반이었다. 소정의 벌금 삼만원만 내면 본인 여부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내가 알기론 그때그때 교통경찰하고 돈으로 해결들을 한다는데 그는 어떻게 미련하게 굴었기에 집에까지 그런 게 날아들게 되었을까. 두번째로 첫번째와는 딴 경찰서에서 관제엽서가 날아왔을 때는 망설일 것도 없이 내가 출두했다. 처음 가보는 변두리 동네의 경찰서였다. 그 경찰서 관할지역은 우리와는 한 번도 인연이 닿아보지 않은 생소한 지역이었다. 서울이란 넓고넓어서 아무리 행동반경이 넓은 사람도 가보지 못한 처녀지가 몇 군데는 있게 마련이다. 이번엔 주차 위반이었다. 이만 원을 물고 돌아왔다. 대리 출두가 가능하다는 걸 알고 나서도 경찰서로부터의 출두명령서는 섬뜩했다. 일단 받고 나면 진드기처럼 의식에 눌어붙어 만사를 재미없게 했고, 가서 해결하고 나도 억울해, 억울해, 왜 우리만 못살게 구느냐 말야 외치고 발버둥치고 싶은 결 참느라 오랫동안 우울해야만 했다.
매일 저녁 우편함에 손을 넣을 때마다 겁이 났고, 엽서의 감촉은 섬뜩했고, 엽서가 그게 아닌 걸 알고 나면 휴우 한숨을 쉬고 형언할 수 없는 슬픔을 맛보았다.
그는 아무것도 모른다. 모르니까 저렇게 으스댈 수가 있는 것이다. 다시 차가 움직이고 다시 욕을 시작한 그의 옆얼굴을 흘깃 훔쳐보며 생각했다.
자가용 타고 친정에 갈 일이 생겼다. 친정 장조카가 지방대학 교수로 가면서 친정집은 솔가해서 그쪽으로 이사를 했다.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발길이 뜸해진 친정이었지만 멀리 이사까지 가고 보니 일 년에 두 번 부모님 제사 참례가 고작이었다. 남편이 우리 차로 가자고 했다.
“고속도로 탈 자신 있어요? 처음일 텐데.”
“처음은, 벌써 몇 번 답사를 해봤으니 염려 말아요.”
답사라. 그럼 그 낯선 거리도 답사를 갔었나. 나는 주차 위반 벌금을 낸 경찰서 주변의 한편 헐리고 한편 솟아오르는 이상한 동네를 떠올리며 생각했다. 내가 뒤처리를 한 사고 말고 그가 홀로 처리한 사고 건수는 얼마나 되는지 알지 못했다. 그러나 여직껏 일어난 사고가 다 운전자가 저지른 잘묫인 것만은 확실했다. 중고차를 사면서 가장 우려한 차가 느닷없이 속을 썩이는 일은 한 번도 일어나지 않았다. 우리에게 차를 소개한 중간 브로커가 가끔 전화로 차의 안부를 물어올 때마다 남편은 사장님이 장담한 찬데 어련하겠습니까, 잘 구르고 있구말구요, 하면서 너털웃음을 웃었다.
그렇게 잘 구르던 차가 하필 친정 나들이 가다 말고 고물차 티를 톡톡히 냈다. 남편이 집에 들어온 것도 늦은 시간이었지만 나도 하룻밤 집을 비우려니 집 볼 사람도 불러야 하고 이것저것 단속하고 나서도 못 미더운 게 많아 집을 떠난 건 해질 무렵이었다. 수원을 지날 때까지 아무 일도 없었다. 고속도로 타기는 시내 운전보다 한결 쾌적해 그는 욕도 안 했다. 수원을 지나자 하행선이 밀리기 시작하더니 꼼짝도 안 했다. 토요일도 아니었으니 단순한 정체 현상이 아니라 앞의 어디선가 사고가 난 모양이었다. 지루해지자 남편은 남들이 하는 대로 밖으로 나가 고개를 빼고 앞을 살피기도 하고 사람들한테 말을 시키기도 했다. 그러기를 한 이십 분 하고 나서 물꼬를 튼 것처럼 차들이 빠지기 시작했다. 얼른 올라탄 남편이 시동을 걸었으나 엔진이 천천히 움직이는 소리만 나고 시동은 되지 않았다. 우리 앞 차선이 확 틔었다. 그는 붉으락푸르락 어쩔 줄을 몰랐다. 우리 차한테 바싹 붙은 뒤차가 빵빵거리기 시작했다.
“당신이 좀 밀어볼래.”
내가 나가서 밀자 뒤의 차에서 젊은이가 내려서 거들어주었다. 그래도 시동은 되지 않았다. 뒤차에서 또 한 사람이 내리더니 암만 해도 주행이 불가능할 것 같다면서 우리 차를 도로 한쪽으로 밀어붙여주었다. 우리는 요지부동하는 차 옆에 서서 물끄러미 물 흐르듯이 유연하게 흐르는 탈것의 행렬을 바라보았다. 유리를 내리고 우리 한테 손을 저으며 비상 경고등을 작동시키라고 일러주고 가는 친절한 차도 있었다.
얼마나 되었을까, 순찰차가 왔다. 그들이 이것저것 물었지만 우리는 갑자기 안 움직인다는 것밖에 할 말이 없었다. 그 밖엔 아는 것도 없었고. 겨우 길들여져가던 차가 다시 낯설고 고약한 애물단지가 되어 있었다. 도망치고 싶었다. 남편 대신 운전석에 앉아 시동을 걸어보던 제복의 사내가 배터리 용량이 떨어져서 그렇다면서 내렸다. 그리고 견인차를 불러야 한다면서 기본요금이 칠만원이라고 했다.
“여기서 제일 가까운 인터체인지가 얼마나 됩니까?”
“왜 밀고 가시게? 참 그래도 되겠군. 바로 조오기예요. 일 킬로도 안 남았을 겁니다.”
당신 어쩌려고? 순찰차가 가버리자 남편이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나를 힐난했다. 인터체인지까지의 거리를 물은 건 나였기 때문이다. 우리 차가 바보처럼 견인차에 끌려가는 걸 보고 싶지 않은 나의 급작스러운 변덕이랄까 애정을 어찌 설명할까.
“돈 아깝잖우. 칠만원 버는 셈 치고 밀어봅시다.”
남편은 앞에서 한 손으로 핸들을 잡고 한 손으로 밀고 나는 뒤에서 힘껏 밀었다. 바퀴 달린 물건이라 생각보다는 힘이 덜 들었다. 날이 어두워 빛을 발하기 시작한 가드레일의 동그란 야광대가리는 멀리서만 빛나고 가까이 가면 노란 도료를 발라놓은 것에 지나지 않았다. 그래서 가드레일에 바싹 붙여 차를 미는 우리는 앞으로 앞으로 동그란 빛의 인도를 받는 것 같기도 하고 뒤쫓는 것 같기도 했다. 그런 느낌이 우리의 힘을 한결 덜어주었다. 인터체인지는 곧 나타났지만 완만한 오르막길이었다. 마지막으로 용을 쓰기 위해 잠시 숨을 돌리는 사이에 남편이 말했다.
“당신 생각나? 우리가 미아리고개 밑에 처음 집 산 해 김장 때 배추 리어카 밀던 일.”
이상한 일이었다. 나도 방금 그 생각이 난 참이었다. 처음 산 집은 높은 언덕바지에 있었다. 다행히 계단은 없어서 배추를 리어카로 들일 순 있었지만 리어카꾼 횡포가 심했다. 그 동네 산다고 말하면 터무니없는 값을 불렀고 부르는 값을 다 주기로 해도 중간에서 리어카채를 놓고 못 가겠다고 엄살을 떨기가 일쑤였다. 그럴 때마다 자아 자아 갑시다, 담뱃값이나 더 얹어드릴 테니 하면서 재흥정을 해야만 했다. 동네 사람한테 그런 사정을 들어서 안 우리는 미리 리어카만 빌려서 손수 나르기로 했다. 그때 우린 정말 리어카 품삯도 아까웠던 것이다. 그때 우리는 얼마나 젊었던가. 그는 미루나무처럼 키 크고 씩씩했고 나는 어여쁘고 팽팽했더랬다.
“여보, 그때는 해마다 백 포기씩 김장을 했으니 그걸 어떻게 다 먹었지?”
남편이 뚱딴지같은 질문을 했다.
“다 못 먹고 버렸을까봐 그래요. 암튼 그때는 김장 때 몇 포기 담갔느냐고 묻는 게 큰 인사였고, 백 포기 했다고 하면 요새 자가용 굴린다고 하는 것보다도 자랑스러웠으니까요.”
“옛날 얘기야. 자아 시작합시다.”
그 옛날, 그 곤궁하고 씩씩하던 날이 합력을 해서일까, 오르막 길도 그닥 힘들지가 않았다. 더 신나는 건 처음으로 내 차를 소유한 것처럼 느낄 수가 있었다. 우리가 마구 휘둘리고 끌려다녀야 하는 애물단지가 아니라 우리 힘에 순종하는 우리의 소유물이었다. 소유한 이상 언제고 마음만 먹으면 자유로워질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완만해 보였지만 힘이 부쳐 숨이 턱에 닿으니까 높은 봉우리를 오르는 것처럼 급박해졌다. 정상에만 올라봐라, 이놈의 차를 낭떠러지 밑으로 굴려버리리라. 그리고 훨훨 자유로워지리라.
오로지 그 희망에 우리는 이십대의 젊은 날처럼 싱그럽게 용솟음치는 힘으로 차를 밀어올리고 있었다.
-끝-
저문 날의 삽화(揷話) ‘ I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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