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혜진 동시집 『초록이가 사는 텃밭』(좋은꿈, 2024)을 읽고
정혜진 작가는 1977년 〈아동문예〉에 동시 천료, 1991년 광주일보 신춘문예에 동화당선. 동시집 《초록이가 사는 텃밭》, 동화집 《핑크와 블루의 아주 멋진 날》 등 26권을 펴냄. 초등 국어, 음악 교과서에 동시 수록. 한국아동문학상, 한국동시문학상 등 다수 수상 경력이 있고, 전라남도 명예예술인으로 지정되었다. 현재 전남여류문학회 회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 작가소개에서 편집
‘동시로 쓴 농사 일기’라는 부제가 있다. 하루도 빠짐없이 일기를 쓴다는 작가는 텃밭에서도 매일 초록 요정을 만나며 동시 일기를 썼다. 초록이를 만나고 싶어서 스스로 텃밭으로 향하는 작가의 초록빛 마음이 너무도 잘 읽힌다. 다음 시를 보자.
푸석푸석 얼어 있는 텃밭
햇볕 맞이 양지쪽에서
삐죽삐죽
고개 내민 봄나물
제일 먼저
녹색 깃발 펼쳐 보이고 싶어서
동동동, 서두르지만
아직은
달력 첫 장도 넘겨지지 않았는걸.
― 「아직은 일러」(p25)
농부만 초록이를 기다리는 게 아니다. 땅속 씨앗들도 따뜻한 봄이 되어 세상으로 나오고 싶어 한다. 동동동 발을 구를 만큼 햇볕을 기다리지만 ‘아직 달력 첫 장도 넘겨지지 않은’ 1월. 가장 추운 달이다. 작가의 마음도 벌써, 초록이가 보고 싶어 마음을 동동거린다.
너
꼼지락거리는 거 다 봤어
기웃기웃
얼굴 내민 풀 찾아내
졸랑졸랑 데리고 나온 초록이
봄은
텃밭 구석구석에서부터
몰래 살짝
슬그머니 일어선다.
― 「초록이가 데리고 온 봄」 전문(p33)
텃밭에 요정이 있다는 말 들어 보았는지? 초록이라고 이름도 참 예쁘다. 계절이 바뀌고, 때가 되면 자연스럽게 싹이 트고, 새싹이 자라는 줄 알았다. 그런데 텃밭 요정이 있다고 작가가 알려 준다. 동화 『벌거벗은 임금님』처럼 착한 사람한테만 보이는 요정인가 보다. 초록빛 맑고 깨끗한 마음을 가진 작가의 눈에만 보이는 요정 초록이를 나도 잘 찾아봐야겠다. 쉿! 어쩌면, 정혜진 작가가 텃밭 요정인지도 모르겠다!!!
일 년 내내
이야기 품어 내는 텃밭
늦가을 햇살 받아
김장배추 무 당근 파 생강
몸무게 불어나고
익어 가는 빨간 감
조랑조랑 매달린 아기 사과
리듬에 맞춰 흔들거린 붉은 대추
풍성한 텃밭엔
덩실대는 어깨춤이 출렁거린다.
― 「텃밭 아리랑」 전문(p61)
동요로 작곡되어 널리 불리고 있는 동시이다. 텃밭의 초록이들과 일 년 내내 즐거운 대화를 이어가는 작가의 모습이 보이는 듯하다. 돌을 골라내고 흙을 다듬어 씨앗을 뿌리는 마음. 새 생명을 키우는 일은 말처럼 쉬운 것만은 아니다. 손도 부르트고, 무릎도 허리도 아프지만, 손수 가꾼 채소들을 사랑하는 가족들과 이웃들과 나누는 것을 삶의 큰 보람으로 생각하는 작가는 힘든 농사일도 마다하지 않고 부지런히 초록이들을 만나러 텃밭으로 나간다.
풀밭에서 노래하던 여치
엄마 찾아가는 길
노랗게 익은 참외
암호 보낸다
― 어두워서 힘들 땐
내 신호등 보면서 가거라
걱정하던 여치
노란 참외 등대 빛이 반갑다.
― 「등대」(p65)
바다에만 등대가 있는 게 아니다. 텃밭에도 노란불 밝히고 여치에게 신호 보내는 노란 참외 등대가 있다. 비단, 여치에게만 등대가 되었을까? 벌레들도 나비에게도 징검다리 되고, 등대도 되었을 터다. 달콤한 참외는 가족들의 사랑을 단단하게 해주는 끈이 되고, 사랑의 마음을 밝혀 주는 등대가 되었을 터다.
작가는 주말마다 손주들과 텃밭 체험을 한다. 직접 씨앗을 심거나 모종을 심고, 체험한 일을 글로 쓰고 그림도 그린다. 아이들 마음에도 초록이를 심고 정성으로 가꾸는 것이다. 아기자기한 손으로 심은 채소와 과일들이 얼마나 사랑스러웠을까. 작은 것에도 기뻐서 소리 지르고 행복해하는 아이들의 모습은 또 얼마나 대견할까?
작가는 텃밭에 씨앗과 모종만 심은 게 아니다. 아이들의 소중한 놀이터인 텃밭에서 생명의 가장 기본인 흙과 식물의 생리를 어렸을 때부터 놀이 삼아 아이들의 마음에 초록 요정을 심었다. 초록이와 보내는 귀한 시간에 마음의 키를 키웠을 아이들의 행복한 웃음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 작가가 쓴 [도움말] "초록이가 들려준 사계절 텃밭 이야기"가 흥미롭다. 이 책이 나오게 된 과정과 책의 내용을 통해서 텃밭 요정이 들려주는 이야기를 더 자세히 알 수 있다. 동시와 함께 삽입된 체험 사진들을 보면 뭉클해진다. 직접 심은 씨앗에서 탄생한 결실들을 만지는 아이들의 행복한 모습이 정말 사랑스럽다.
첫댓글 아니!
이렇게 빨리 초록이 이야기를 풍성하게 담아 놓다니.
농사를 짓고 있는 작가라 따뜻한 마음으로 사랑스럽게 속삭여 줘서 고마워요.
오랜 기간 텃밭과 생활하면서 손주들과 체험한 활동들을 이야기하고 싶었답니다.
민 작가님의 고운 마음이 전해져서 행복합니다.
이렇게 소중한 책이 어디에 또 있을까요? 한 편 한 편 직접 체험에서 길어 올린 동심의 초록 요정이 들려주는 이야기를 읽으며 정말 행복했습니다. 좋은 책 읽을 수 있어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