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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y Nostalgia - The Soft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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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물림
지난 일요일 아버지 산소에 갔었다. 전보다 일찌감치 떠난 길이었다.바쁘다는 핑계로 벌초를 남에게 맡겼던 터라 자책의 심정이 한몫을 했다. 아버지는 돌아가시기 전 선산을 택하지 아니하고 두 아들 사는 중간지점 고속도로 변에 자그만 묘 자리를 미리 마련하시고 틈나는 대로 들러 잔디를 심고 고속도로를 볼 수 있도록 소나무 숲 주변 탁 트인 경관을 만들어 놓았다.
차를 가지고 서울에 들릴 일이 있으면 우회코스인 그 지점을 어김없이 지나며 훤히 보이는 아버지 묘소를 지나치며 꼭 보곤 한다. 비가 올 듯 말 듯 하더니만 음성에 다다르니 기상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농로 길에 접어들자 안개비 물방울들이 몽글몽글 창가에 맺히기 시작했다.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어느 FM방송의 사연이 순간적 슬픔으로 다가선다.
‘16년 전 청주여상을 같이 다녔던 친구 000를 찾고 싶습니다. 가난한 자취생활이라 고달팠는데 그 친구는 우리보다 더 가난했던 것 같아요. 그 친구는 ‘또와 분식’을 하는 엄마를 도와 그곳에 있곤 했는데 우리는 염치없게도 그 덕분으로 공짜로 많이도 얻어먹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 친구는 돈 벌러 가겠다고 학교를 관두고 서울로 가버렸는데 지금 그 친구가 너무도 보고 싶습니다. 000야! 잘 있니.. 그때 그 빚진 외상값도 갚고 꼭 만나고 싶다. ‘
흔한 사연이다 싶으면서도 창가 작은 물방울 맺히듯 그 사연이 가냘프게 머릿속 한편에 내려앉는다. 이윽고 아버지 묘소에 다다랐다. 주변이 왠지 달라져있다 싶어 흠칫 맞은편을 살펴보았다. 늘 덥수룩한 작은 비석 하나였는데 돈을 들여 말끔하게 꾸며 놓았다. 저런 경우 흔히들 후손이 크게 잘 되었나 보네 한다. 정돈 잘 된 묘가 마치 가난한 대물림에서 벗어났다는 표식같이 느껴졌다.
나도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대물림이 있다. 이를 늘 아파하던 아버지. 그 시절도 신체검사라는 것을 했다. 나는 신체검사 할 때면 괴로웠다. 눈이 워낙 나빠 2학년 때부터 낀 안경으로 네 눈, 싸이클 이란 별명이 늘 뒤따라 다녔고 창피하기도 해서 일부러 측정 판 숫자를 외운 적도 있었다. 아버지는 내 눈을 정밀진단 해본다고 수원에 도립병원에 데리고 가 진찰을 했는데, 선천적인 것으로 더 나빠지지 않게 무리한 운동이나 행동을 삼가라는 얘기만 듣고 나왔다. 아버지는 크게 낙담을 하셨는지 바로 앞에서 짜장면을 사주시고 드시지도 않았는데 그때 그 장면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아마도 선천적이란 말에 아버지는 많은 부담을 느끼셨던 것 같다.
아버진 퇴근할 때(당시 아버지는 가축위생연구소에 다니셨다.) 실험을 한 동물들의 간을 가지고 나오시는 횟수가 많았고 ‘간유구’란 영양제가 떨어지면 어머니한테 핀잔을 하시곤 밤길에 나가 사오셨다. 구두쇠로 살았으면서도 전기 값은 아까워하지 않았던 당신. 나는 그런 아버지의 눈에 대한 강박관념을 대물림 받았는지 아이들이 컴컴한데서 책을 보면 습관처럼 야단을 친다. 언뜻 닮은 얼굴이 또한 대물림이다. 대물림은 신체의 유전인자에 국한되지 않는다.
가업을 계승한 대물림에 전통 기술을 전수 받는 등의 대물림도 많다. 일본의 나라라는 동네에 들렸을 때 유과 만드는 일을 8대째 이어받았다는 집은 줄이 끝이 안보였었다. 풍물이나 풍습의 대물림은 전통을 계승한다. 고속도로가 청주 인터체인지를 지나치자 청주여상의 그 사연의 주인공이 다시 떠올랐다. 정말 그 여인은 하늘 아래 어찌 살고 있을까. 묘를 화려하게 단장한 어느 후손처럼 자수성가를 못 이루란 법은 없다.
하지만 요즘 들어 가난이 씨가 되어 자살을 택하는 사람들이 너무도 많다. 가난이 죄가 되어버린 삭막한 세상. 아쉽게도 지금 세상 분명 가난은 죄라 믿어진다. 가난해도 행복한 사람은 많고 부유해도 불행한 사람 또한 많다. 그 척도가 행복의 기준이 될 수는 없겠지만 이 세상은 너무도 먹고사는 빈부에 휘둘려 산다. 이 문제는 간단치가 않아 국가 간에 대립이나 전쟁을 자초하기도하고 이데올로기를 넘어서기도 한다.
동서를 막론하고 권력과 부의 세습은 지속적으로 이루어 왔다. 어떻게 보면 인류 역사는 가난과의 투쟁이다. 한 나라의 백년대계는 무엇을 먹고 살 것인가란 명제와도 같다. 그 시절 라디오 타고 자주 흘러나오던 ‘절망은 없다’란 말에 실효를 요즘 제대로 기대할 수 있을까. 성실하고 부지런하여도 가난을 면치 못하는 많은 사람들과 자본주의의 특혜를 누리는 사람들. 그 균형의 틀은 언제쯤일까.
가난을 대물림으로 나타나는 구조화된 빈부의 격차로 본다면 큰 오산인가. 힘들었던 그 시절을 나는 굳이 가난이라고 말하고 싶지 않다. 모두들 다 가난하였기 때문에도 그렇지만 그 시절은 가난이란 현재로서 ‘절망은 없다.’ 라는 명제가 가능한 현재였으며 무엇보다도 애틋한 정서가 살아 고달프지만 마음 상하거나 힘들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따스한 이웃과 정겨운 사랑이 마냥 아쉬운 참 어렵고 힘든 세상이다.
아무튼 혈족으로서 생김도 닮으며 싫든 좋든 어쩔 수없이 부모는 자식에게 대물림을 한다. 어린 시절 흥얼 거리던 '어머니, 왜 나를 낳으셨나요?" ' 라는 시각장애인 가수 이용복 씨가 부른 노래, 그는 장님이 된 자신이 한탄스러워 부모를 원망하며 이 노래를 부른 것일까. 아니면 삶이 광복이라고 여기며 노래를 불렀던 것일까. 누구든 감성에 빠져 한번쯤 생각해 보았을 그 의미. 부모와 자식, 누구도 다 그렇겠지만 나 역시도 조바심 내며 나를 거둔 당신들의 거룩함으로 지금의 내가 존재한다.
나의 눈에 대해 각별했던 아버지. 나는 당신으로서 본다는 의미에 대해 그 무엇보다도 유념하고 소중하게 생각하고 살았으며 아버지를 생각하는 의미 또한 여전히 나의 작은 눈으로부터 시작한다. 그 시절의 수원 짜장면 집,,.. 맛나게 먹던 그 기억 속에 짙게 남겨진 아버지의 처진 눈빛을 슬프지만 아름답게 지금도 깊이 간직하는 것은 내게 담겨진 대물림 그 가치로서 터득한 고유한 마음의 눈이 아니겠는가 싶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