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총독부 경무국장실
지난 회와 연결된다. 그렇지 않아도 가느다란 단게의 두 눈이 더욱 매섭게 찢어진다.
단게 다시 한 번 말해봐라. 방금 징용을 가지 않겠다고 했나?
두한 몇 번을 말해야 되겠소?
단게 허허... 기가 막혀서 말이 나오지 않는군. 보고서에 적힌 그대로구만.. 물불을 가리지 않는 성격의 소유자라고 하더니...
두한 ......................
단게 경무국장인 내 앞에서 그렇게 불경한 태도로 말을 내뱉는 자는 네가 처음이자 마지막일 것이다. (싸늘하게) 허나.... 더는 나의 인내심을 시험하지 말거라.
두한 ......................
단게 잘 들어라. 징용이란 조선인에게 성전에 참여할 기회를 허락한 것이다. 그것은 반도인들에게는 매우 영광된 일이지.
두한 그것은 당신 생각이겠지.
단게 뭐라........?
두한 당신네 나라의 전쟁에 왜 우리 조선인이 목숨을 버려야 한단 말이오?
단게 당신네 나라? 지금 네가 지껄이는 말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아느냐? 총독부의 시책에 불복하면 곧 죽음뿐이다. 죽음 말이다. 알겠느냐? 죽음!
두한 그런 각오도 없이 이 자리에 왔다고 생각하시오? 어차피 죽을 거라면 할 말은 다 해야겠소.
단게 배짱이 대단한 건가, 아니면 생각이 모자란 것인가? 그래, 네 놈이라면 충분히 그럴 수 있을지 모르겠지. 하지만 종로에 모아놓은 수많은 불량배들도 너와 같은 생각일까?
두한 .............?
단게 그 무식하고 겁 많은 자들이 너처럼 징용대신 죽음을 택하겠느냐는 말이다.
두한 이미 그들은 나와 뜻을 같이 하기로 하였소. 어차피 죽을 거라면 순순히 끌려가지는 않을 것이오.
단게 순순히 끌려가지 않겠다? 폭동이라도 일으키겠다는 것이냐?
두한 못할 것도 없소.
단게 (조소) 지금 나를 협박하겠다는 것인가? 이렇게 막무가내로 나온다고 너의 뜻이 관철되리라 생각하는가? 그렇게 생각한다면 그것은 커다란 오산이야.
두한 당신이 그럴 거라 생각하지는 않았소. 나는 다만 우리의 의지를 말하려고 왔을 뿐이오. (일어서며) 서로의 입장을 확인했으니......한 번 해봅시다.
두한은 모자를 눌러쓰고 밖으로 나간다.
단게 (어이없다는 듯 웃고) 저런 자를 보았는가? 그 아비에 그 아들이라더니...
도리질을 친다.
# 2 거리
두한이 김영태와 정진영과 함께 오고 있다.
김영태 어떻게 되었나? 왜 아무 말도 없는 겐가?
두한 .....................
정진영 두한아........?
두한 징용장을 돌려주고 왔습니다.
김영태 징용장을 돌려주다니.... 그게 무슨 소린가?
두한 말한 그대롭니다.
정진영 그럼 협상이 깨졌다는 거야?
두한 지금으로선 그래. (김영태에게) 일단 우미관에 돌아가서 이야기하지요.
두한은 성큼성큼 걸어간다. 김영태와 정진영은 의혹의 시선으로 두한을 본다.
# 3 경무국장실
단게가 계속 창밖을 바라보며 말이 없다. 옆으로 선 비서가 조바심을 참지 못하겠다는 듯 한 발 다가온다.
비서 각하... 김두한이라는 자를 왜 그대로 보내셨습니까?
단게 ...................
비서 지금이라도 경찰들에게 체포 명령을 내리십시오. 그깟 조선인 불량배들쯤이야 일거에 쓸어버리면 그만이 아닙니까?
단게 그렇게 쉽게 해결할 일이 아니야.
비서 예?
단게 그 자의 눈빛을 보았는가?
비서 ...................
단게 뭔가 일을 저지를 눈빛이었어. 궁지에 몰린 쥐는 고양이를 무는 법. 더구나 김두한은 보통내기가 아니다. 나를 대하는 태도부터가 그랬다. 눈치나 살살 보는 소인배들과는 달랐다는 것이야.
비서 그 자를 너무 과대평가 하시는 듯 싶습니다. 그 자는 조선인 주먹패에 불과합니다.
단게 그래서 더욱 조심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만에 하나 불미스런 사건이 발생하는 날에는 우리 경무국에 커다란 오명이 될 수 있고, 김좌진의 아들을 되려 영웅으로 만들 수도 있어. 그런 식의 처리는 곤란하다.
비서 ...................
단게 하긴 처음부터 불량배들에게 징용장을 보낸 것부터가 잘못된 발상이었다. 불량배들은 징용에 가서도 말썽을 일으킬 소지가 너무도 크단 말이야. 좋지가 않았어. 좋지가 않아.
비서 그렇기는 합니다만...
단게 뭔가 좋은 방책이 있을 듯도 싶은데.... 그자들의 불만을 무마하면서도 요긴하게 써먹을 수 있는 일거양득의 방도 말이야.
비서 과연 그런 방법이 있겠습니까?
단게 ...................
미와 경무국장 각하께서 정말 그랬단 말인가?
오무라 자세한 이야기까진 물어볼 수 없었습니다만.... 비서의 표현을 빌리자면 분위기는 그랬다고 합니다.
미와 음.........이상하구만.. 긴또깡 그 녀석이 뭔가 일을 터트릴 줄로만 알았는데 말이야....
문달영 각하의 앞에서는 우리에게 했던 것처럼 감히 건방진 행동을 할 수 없었겠지요.
오무라 그렇습니다, 경부님.. 아무리 정신이 없는 놈이라도 총독부가 어떤 곳이라는 것쯤은 알고 있지 않았겠습니까?
미와 긴또깡도 어쩔 수가 없었다? 긴또깡도...?
미와가 의아한 듯 갸웃하는데, 책상에 앉아 있던 김태서가 보고 서류를 올린다.
미와 이게 뭔가?
김태서 예. 이번 조선어학회 사건에 대한 중간 보고섭니다.
미와 그래? (훑어본다)
김태서 사건에 관련된 자들이 너무 많아서 정리를 해보았습니다만...
미와 그런대로 구분을 잘 해놓았구만... 거물들은 다 있는 것 같은데.........(한참을 읽어 내려가다가) 최동열.....? 여기 최동열이라는 이름이 왜 있나?
김태서 그 동안 그 자가 상록수라는 잡지를 운영해오지 않았습니까? 그 관계로 조선어학회 인사들과 교류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관련된 혐의가 미미해서 조사대상에서 제외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미와 무슨 소리를 하는 건가? 혐의가 있다면 당연히 조사를 해야지..
김태서 ................
미와 지금까지 발간된 잡지들을 모두 면밀히 검토하도록 해. 때가 어느 때인데 아직까지 조선어 잡지를 발간하고 있단 말인가?
김태서 하이, 알겠습니다.
미와 아니야. 그럴 시간이 없다. 이런 좋은 기회를 놓칠 수가 없지. 지금 당장 기물을 압수하고 잡지사를 폐쇄해.
김태서 지금 말입니까?
미와 내가 직접 가겠다. 그 콧대 높은 자의 얼굴을 직접 봐야겠어.
형사들 .................?
# 6 상록수
최동열이 여느 때와 다름없이 원고를 검토하고 있다. 남직원, 여직원, 사환은 일이 손에 잡히지 않는 듯 걱정스러운 표정들이다.
최동열 (두 사람을 보고는) 아니 일들 안하고 뭐하나?
남직원 사장님.....요즘 그렇지 않아도 조선어학회 사건 때문에 세상이 뒤숭숭하지 않습니까?
최동열 그래서..........?
남직원 잘못했다간 잡지 때문에 사상범으로 몰릴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최동열 그럴 수도 있겠지..
사환 그런데 이렇게 잡지를 내도 되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여직원 당분간 잡지사 문을 닫는 게 좋지 않을까요? 소나기는 일단 피하고 보는 것이..
최동열 당분간은 없네.. 일단 문을 닫으면 다시 기약을 할 수가 없는 것일세.. 언제까지 이 잡지사를 이어갈지 모르겠지만 그 때까지 최선을 다하도록 하세.
최동열은 다시 남은 원고로 고개를 돌리는데, 갑자기 문이 벌컥 열리며 미와들이 들이닥친다.
미와 오.... 최동열씨 오랜만이오.
최동열 미와 경부가 여긴 웬일이오?
미와 이거 왜 이러시요, 최동열씨? 당신이 지금 불법 출판 행위를 한다는 것을 모르는 건 아니겠지?
최동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요? 이것은 그저 내가 좋아서 하는 일이오. 언제부터 종로서 고등계가 일개 개인의 사적인 취미까지 감독하게 되었소?
미와 이봐 최동열........ 내가 당신의 그 약은 말장난에 넘어갈 것 같은가?
최동열 .................?
미와 오늘부터 이 잡지사를 폐쇄한다. 기물들은 압수하고 모든 서적은 거리에 모아 불태워라.
경찰들 하이.
경찰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기 시작한다. 모든 서적들은 창밖으로 내던져지고 큰 기물들은 아예 부숴 버린다.
최동열 그만 하시오, 미와 경부. 내가 스스로 정리하겠소. 그러니........
미와 이봐 최동열씨....그래도 옛정이 있어 이 정도로 봐주는 거요. 난 당신을 체포할 마음도 있어. 그러니 함부로 나서지 마시오. (경찰들에게) 꾸물대지 말고 어서 가지고 나가! 어서!
경찰들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한다. 최동열은 포기한 듯 그저 지켜본다.
# 7 그밖 거리
잡지사의 모든 책들이 길 한복판에서 불태워지고 있다. 미와는 비릿한 미소로 그것을 보고 있다. 잠시 최동열이 나와 보다가 아픈 듯 눈을 감는다.
# 8 다방
김무옥과 문영철, 양코가 모여 앉아 있다. 김무옥이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쉰다.
김무옥 다른 패들 앞에서 큰소리를 쳐놓기는 혔지만서도, 징용 문제가 잘 해결이 될지 모르겄다.
문영철 두한이가 총독부에 들어갔으니까 뭔가 좋은 소식이 있겠지.. 잘 될 거다. 너무 걱정하지 말자.
양코 영철이 형님 말이 맞당께요. 아 두한이가 누구여라우? 구마적부터 하야시까지 못 이긴 사람이 누가 있당가요?
김무옥 그게 이거하고 같냐? 자식이 말이여.. 지는 징용하고 상관이 읎다고 아무 생각도 없이 이야기한당께..
양코 아따 뭔 말씀을 고렇게 섭섭허게 하신다요? 나도 다 걱정이 된께 하는 말인디...
그때 삼수가 똘마니들 몇과 함께 들어와 다가온다.
삼수 형님들, 큰형님께서 돌아오셨습니다.
양코 뭐 벌써야........? 어떻게 됐다고 하냐?
삼수 아무 말씀도 없으셨습니다. 그런데 표정들이 좋지 않아 보이시던데요.
김무옥 (한숨) 아무래도 틀린 모양이다.
문영철 일단 가보자..
문영철이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자 김무옥도 무거운 엉덩이를 떼고 일어난다.
# 9 우미관 사무실
두한과 김영태, 정진영이 돌아와 심각하게 마주 앉아 있다.
김영태 그럼.... 징용을 연기해 달란 말도 못 꺼냈단 말인가?
두한 일부러 하지 않았습니다.
김영태 그건 또 무슨 소린가?
두한 이건 기싸움입니다. 우리가 먼저 굽힐 필요가 있겠습니까?
정진영 하지만 하야시 오야붕이 어렵게 마련해 준 자리인데......
두한 나도 알아. 하지만 우리 쪽에서 약점을 보이면 저들은 그걸 집요하게 물고 늘어질 거야.
정진영 이건 처음부터 우리에게 불리한 싸움이었어, 두한아... 전 조선 주먹패들의 목숨이 네 손에 달려있다구. 지금은 자존심을 내세울 때가 아니야.
두한 (미소) 진영아.... 아무리 상황이 어려워도 언제나 나는 내 방식대로 싸워왔어. 이번에도 마찬가지야. 상대가 누구이건 그건 중요하지 않아.
정진영 ................
두한 김두한은 김두한일 뿐이야. 그걸 잊지 마라.
정진영 ......미안하다.. 내가 너무 흥분했었던 것 같다.
그때 문영철들이 문을 열고 들어온다.
양코 두한아...... 어떻게 됐냐? 총독부에 갔던 일 말이여..
두한 그게 쉽지가 않을 것 같다.
양코 그... 그려? 하긴 뭐.........단박에 해결될 거면 애초에 걱정도 안 했을 것이여..
문영철 아무 소득도 없었던 거야?
두한은 씁쓸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모두들 표정이 어두워진다.
김영태 이제 시작이다. 다 잘 될 테니 너무 걱정들 할 거 없어.
김무옥 ...............
두한 (일어나며) 잠깐 나갔다 오겠습니다.
김영태 어딜 말인가?
두한 최동열 아저씨와 만나기로 했습니다.
김영태 그래. 조심히 다녀오게.
두한은 밖으로 나간다. 모두들 실망이 큰 듯 분위기가 썰렁한데........
김영태 너희들답지 않게 왜 이래? 다들 기운 내라구.
모두들 (힘없이) 예.
# 10 우미관 앞
두한이 삼수와 함께 밖으로 나오는데 막 극장 안으로 들어오던 신영균 패거리와 이천패들이 먼저 허리를 굽힌다. 두한도 모자를 벗고 이천패 보스 장도리에게 정중하게 고개를 숙인다.
두한 어서 오십시오, 장도리 형님. 경성 생활은 할만 하십니까?
장도리 신경을 써주신 덕분에 지낼 만 합니다.
두한 뭐 불편하신 것이 있으시면 제 아우들에게 거리낌없이 말씀해주십시오. 그럼... 일이 있어 먼저 가보겠습니다.
장도리 예.
신영균패들과 이천패들이 두한의 뒤로 다시 한 번 깍듯하게 인사를 한다.
장도리 예의도 깍듯하고 행동거지에 빈틈이 없는 사람일세..
신영균 우미관의 황제가 아무나 되는 거겠습니까? 영철이한테 이야기를 듣고 다시 보니 정말 달리 보이는데요.
장도리 독종 신영균이가 꼬리를 내리다니.... 김두한 오야붕이 대단하긴 대단하구만. 하하하.
신영균 안으로 들어가시죠.
장도리 그러지. 이봐 정재, 들어가자구.
이정재 예, 형님.
이천 보스와 신영균을 따라 모두들 안으로 들어간다. 그러나 이정재는 마지막까지 남아 뭔가 열망 어린 눈빛으로 두한이 사라진 뒷모습을 계속 쳐다보고 있다.
# 11 잡지사
최동열이 엉망이 된 사무실 안에서 넋을 놓고 앉아 있다. 마치 시간이 멈춰버리기라도 한 듯 사무실 안은 조용하기만 하다. 두한이 소리도 없이 문을 열고 들어온다.
두한 아저씨........?
최동열 그래, 왔구나.
두한 아니... 왜 사무실 안이 이렇게 엉망입니까?
최동열 그렇게 되었다. 일단 나가자꾸나..
두한 ...............
# 12 근처 다방
두한과 최동열이 마주해 있다.
두한 무슨 일이 있으셨던 겁니까?
최동열 이전부터 총독부에서 조선어로 된 모든 출판을 금지했었다. 나는 그나마 버틸 만큼 버텼는데..... 경찰들이 들이닥쳐 이 꼴이 되고 말았구나.
두한 그런 일이 있으신 줄도 모르고.....
최동열 이런다고 절대 우리 글과 말이 없어지지 않는다. 걱정 말거라.
두한 ...................
최동열 그래, 총독부에는 다녀왔느냐?
두한 ............예.
최동열 대답하는 걸 보니 결과가 신통치 않은 모양이구나. 하긴 그처럼 간교한 자들이 쉽게 놓아줄 리가 만무하지.
두한 예상했던 대로되었을 뿐입니다.
최동열 누구를 만났느냐?
두한 단게 국장이었습니다.
최동열 단게라면 경무국의 총 책임자가 아니냐?
두한 맞습니다. 바로 그잡니다.
최동열 (한숨) 하필이면 그런 자와 상대를 하게 되었다니..... 첩첩산중이로구나. 총독부의 관리들 대부분이 닳고닳은 자들이라는 것은 이미 알려진 사실이지만 그 중에서도 단게는 최하 말단에서 경무국 최고 자리에까지 오른 총독부 내에서도 전례가 없던 인물이다.
두한 ..................
최동열 누구보다도 조선의 사정을 훤히 꿰뚫고 있는 것은 물론이고 수단 또한 대단하지. 조심하고 또 조심해야 한다.
두한 상대가 누구건 상관하지 않습니다. 만약 제 안을 거절한다면 끝까지 싸워볼 생각입니다. 저로서는 차라리 그 편이 훨씬 편할 것도 같습니다.
최동열 각오는 좋다면 무모하게 덤벼서는 안 된다. 이번 일은 두한이 네가 여지껏 해왔던 거리의 싸움과는 차원이 다르다는 말이다.
두한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아저씨를 찾아온 겁니다.
최동열 글쎄.... 나로서도 뭐라 답을 줄 수 없는 어려운 일이구나. 두한이 너 혼자라면 여러 가지 방법이 있겠지만.... 너는 수많은 부하들을 이끌고 있는 우두머리가 아니냐?
두한 그게 저를 더욱 답답하게 합니다.
최동열 혈기를 앞세우기보다는 멀리 내다보며 침착하게 대처하거라. 구하고자 노력한다면 길은 보일 것이다.
두한 예.
최동열 허나..........(뭔가 말을 하려다가 멈칫거린다)
두한 무슨 하실 말씀이라도.............?
최동열은 묵묵히 두한의 얼굴을 본다.
최동열 두한아.........많은 지식인들이 일제의 탄압과 회유에 못 이겨 변절자가 되었다. 그들이 처음부터 그런 것은 아니었다. 조금씩 그들과 만나고 가까워지다 보니까 그렇게 된 것이다.
두한 ...................?
최동열 그것이 내가 너에게 해주고 싶은 마지막 당부다.
두한 ......................
# 13 우미관 사무실
신영균을 비롯해서 지방에서 올라온 몇몇 패거리들의 오야붕들이 모여 있다. 그들 모두가 답답한 표정들이다.
오야붕1 언제까지 이렇게 마냥 기다리고 있으라는 것이오? 지금쯤이면 어떤 결론이 날 때도 되지 않았소?
김영태 ...................
오야붕2 최소한 일이 어떻게 되어가고 있는지 귀뜸이라도 해줘야 하는 것이 아니겠소?
김영태 지금 내가 드릴 수 있는 말은 기다려 달라는 것뿐입니다. 죄송합니다.
오야붕1 이거야 원....이보시오, 부하들을 다독거리는 것도 한계가 있어요. 우리도 할 말이 있어야 할 거 아니요. 총독부에 들어갔던 경위라도 속 시원하게 털어놓아 주시오.
김영태 아무 것도 결정된 사항이 없습니다. 쉽게 해결될 일이 아니란 것은 여러 오야붕들께서도 잘 아시지 않습니까? 조금만 더 기다려 주십시오.
장도리 자.. 자.... 성급하게 굴지들 말고 기다려 봅시다. 그래도 희망이 있으니 기다리라는 것이 아니겠소?
신영균 맞습니다. 큰형님께 전권을 위임한 이상, 아무 소리 안 하는 것이 돕는 겁니다.
오야붕들 ................?
장도리 여기서 이럴 게 아니라 일어들 납시다. 내가 한 잔 사리다. 우미관 아우님들도 함께 가지. 자 일어들 나게.
김영태 저희는 큰형님이 오실 때까지 여기에 있겠습니다. 영철아....
문영철 예, 형님.
김영태 너희들이 오야붕들을 모시고 가라.
문영철 예, 형님....
모두들 불만이 가득한 얼굴이지만 어쩔 수 없는 듯 일어선다. 문영철들도 함께 일어난다. 그들 모두 밖으로 나가면 김영태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소파에 앉는다.
정진영 이렇게 버티는 것도 이제는 어렵겠습니다.
김영태 그렇군. 뭔가 방법을 찾아야 하는데, 보이지가 않아. 뭘 어떻게 해야 하는 건지..........
정진영 시간이 지날수록 더 많은 불만을 쏟아낼 겁니다. 점점 더 위태해지는 것 같습니다. 그나마 다행인 건 이천의 장도리 형님과 신영균이 우리 손을 들어준 겁니다.
김영태 글쎄......하지만 그들의 인내심도 곧 한계에 다다르겠지.
정진영 제 생각입니다만... 하야시 오야붕에게 구원을 청해보는 것은 어떻겠습니까?
김영태 하야시에게.........?
정진영 그 사람이 나선다면 뭔가 길이 생길 것도 같습니다만...
김영태 하지만 그건 두한이가 찬성하지 않을 걸세. 그렇지 않아도 우리는 그 사람에게 너무 많은 도움을 받았어. 더 이상은 무리야.
정진영 .................
김영태 생각이 거기에까지 미친 걸 보면 자네도 꽤나 조급해진 모양이군. 하지만 모든 건 두한이의 결정에 달려있어. 두한이의 결정에 말이야. 어쨌거나 말이나 한 번 꺼내 보세. (사이) 하야시라.... 하야시..........
# 14 혼마찌 거리 외경
네온 불을 밝히기 시작할 즈음... 전화벨 소리가 더블 된다.
# 15 동 사무실
하야시가 수화기를 든 채, 묵묵히 듣고 있다.
하야시 아 그런 일이 있었습니까? 죄송합니다. (사이) 아닙니다. 소개를 해 올린 제가 사죄를 드려야지요.
# 16 경무국장실
경무국장이 전화를 받고 있다.
경무국장 뭐 그건 그렇고... 이른 시일 내에 김두한 그 자를 다시 만나볼 수 있겠소?
# 17 하야시 사무실
하야시 김두한을 말입니까? 그건 어렵지 않습니다. (사이) 알겠습니다. 그럼 제가 자리를 마련해 놓겠습니다. (사이) 아닙니다. 마땅히 그리해야지요. 예... 그럼 그 때 뵙겠습니다, 국장님..
미우라가 수화기를 받아 내려놓는다.
하야시 하여간 김두한은 못 말릴 사람이야.
시바루 ..............?
하야시 겁도 없이 단게 국장에게 엄포를 놓았다고 하는구만.
시바루 엄포라고 하셨습니까? 경무국장을 상대로 말입니까?
하야시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곧 폭동이라도 일으킬 태세였다는 게야. 이것 참... 웃어야 할지...
시바루 폭동...이라니요?
하야시 그러니까 못 말리겠다는 게야.. 한데 참으로 신기한 것은 그게 먹혀 들어가고 있다는 것이야..
미우라 무슨... 말씀이십니까?
하야시 단게 국장이 김두한을 다시 만나겠다고 하는구만.. 무슨 일인지 자세히는 몰라도 어쨌든 단게 국장이 한 발 물러선 것은 틀림이 없는 것 같다.
미우라 도무지 믿기지가 않습니다. 단게 국장이 왜... 혹시 오야붕의 얼굴을 보아서 그런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야시 단게는 실리적인 것을 중시하는 인물이다. 그런 체면치레에 신경을 쓸 사람이 아니야.
미우라 .................?
하야시 일단 지금 즉시 우미관에 전화를 넣게. 내가 식사를 대접한다고 말이야. 단게 국장 이야기는 꺼내지 말고.
미우라 알겠습니다.
하야시 단게와 김두한이라.. 일이 참 묘하게 돌아가는구만...
하야시의 의미심장한 표정에서...
# 18 종로 거리(밤)
두한이 생각에 잠긴 채, 번화한 종로 밤거리를 걸어온다. 그의 고민스런 얼굴 위로....
최동열 (E) 혈기를 앞세우기보다는 멀리 내다보며 침착하게 대처하거라. 구하려 하면 길은 보일 것이다. 허나 두한아.. 많은 지식인들이 일제의 탄압과 회유에 못 이겨 변절자가 되었다. 그들이 처음부터 그런 것은 아니었다. 조금씩 그들과 만나고 가까워지다 보니까 그렇게 된 것이다. 그것이 내가 너에게 해주고 싶은 마지막 당부다.
두한의 표정은 못내 답답하기만 하다. 그렇게 상가 모퉁이를 돌아갈 즈음, 갑자기 선술집 유리문이 부서져 나가며 한 사내가 나가떨어진다. 곧이어 지방 패거리로 보이는 주먹들과 경성의 한 주먹패들이 쏟아져 나온다.
술집주인 (발을 동동 구르며) 아이구, 이게 무슨 행패들인가?
지방패1 저 자식들이 촌놈이라고 우릴 무시하잖아요. 가뜩이나 열받아 죽겠는데..
경성패1 야 이 자식들아, 촌놈을 촌놈이라고 하지 뭐라고 그러냐?
지방패1 뭐야?
두한이 다가와 말리기도 전에 싸움은 벌어졌다. 서로 사정없이 치고 받는 난투전이 벌어진다.
두한 그만들 둬라. (사이) 그만들 하라니까!
그러나 그 격한 싸움 속에 두한의 목소리는 파묻혀 버린다. 보다 못한 두한이 그 싸움 속으로 뛰어들어가 사정없이 양쪽 모두를 제압하기 시작한다. 하나 둘 주먹패들이 나가 떨어진다. 싸움은 한참만에야 겨우 진정된다. 양 패거리들은 그제서야 갑작스럽게 뛰어든 두한을 적대적으로 노려본다.
지방패1 넌 뭐야?
두한 술을 마시려면 조용히 마셔야지. 이게 무슨 추태들이야?
두한은 자신의 주먹에 쓰러진 사내 하나를 일으켜 세운다. 어이가 없는 듯 잠시 지켜보던 패거리들이 두한을 둘러싼다.
지방패1 넌 뭐냐구?
두한 나 우미관의 김두한이다.
패거리들 ...........?
그러나 대부분은 그 말이 믿기지 않은 듯 서로의 얼굴만 쳐다본다. 그 때 김무옥들이 달려온다.
김무옥 뭐여.....? 뭔 일이여? (다가와) 두한아.. 아니 큰형님?
패거리들은 김무옥의 말에 그제서야 무릎을 꿇고 고개를 조아린다.
패거리1 죄...죄송합니다, 큰형님. 저희들이 큰형님을 몰라 뵙고........
두한 모두들 돌아가 봐.
패거리1 예.
패거리들 모두 아픈 곳을 부여잡고 일어나 사라진다. 두한은 우울한 듯 주머니에 손을 찌르고 천천히 걸음을 옮긴다.
정진영 모두들 불안해하고 있어, 두한아.. 무슨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당장이라도 폭발할 지경이야..
두한 ...................
김영태 대부분의 패거리들이 우리를 신뢰하지 않고 있네. 하긴 총독부를 상대로 싸운다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겠지.
두한 싸우건 싸우지 않건 그것은 각자의 선택에 맡길 수밖에 없습니다. 굳이 강요하고 싶진 않습니다.
정진영 더 엉망이 되기 전에 결단을 내려야만 합니다. 낮에 신불출 선생님을 찾아갔다가 학생들 사이에서 벌어지고 있는 학도병 징집 거부 투쟁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두한 ...............?
정진영 나이 어린 학생들도 일본의 횡포에 당하고만 있지는 않겠다는 결의를 보인 것이지요.
김영태 그예 학생들도 일어났군. 하지만 그것 역시 성공하기는 어려울 걸세. 일본은 호락호락한 상대가 아니야.
정진영 하지만 앉아서 당하는 것보다는 그 편이 낫지 않겠습니까?
김영태 두한이 자네 생각은 어떤가?
두한 제 마음은 변함이 없습니다. 총독부에서 끝내 징용에 보내려 한다면 끝까지 싸우는 수밖에요....
김영태 자네의 의지가 그렇다면 이제는 어쩔 수 없군. 지역 오야붕들에게도 그 뜻을 전하겠네.
두한 ..................
정진영 그리고 두한아..... 조금 전에 혼마찌에서 전화가 왔었어. 하야시 오야붕이 내일 식사를 같이 했으면 한다는데...
두한 갑자기 왜..........?
정진영 글쎄... 그 외에 별 말은 없었어.
김영태 하야시도 자네 처지를 알고 있으니 뭔가 해줄 말이 있는 듯 싶네. 아마도 하야시는 총독부의 생각을 전해 들었을지도 모르니까 겸사겸사 해서 다녀오게.
두한 .....................
# 20 종로서 외근계
마루오까가 순사1에게 보고를 받고 있다.
마루오까 어쨌든 그만하다니 다행일세.. 각지의 주먹들이 모였다기에 내심 걱정을 했는데 말이야..
순사1 하지만 점점 사고가 늘어나는 추세입니다. 강력히 단속을 하지 않으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릅니다.
마루오까 너무 자극하는 것도 좋지가 않아.. 대신 사고를 미연에 방지하도록 경계를 더욱 철저히 하도록 해라.
순사1 ........알겠습니다.
그 때 순사2가 급히 들어온다.
순사2 경부님, 드디어 놈들의 접선 장소를 알아냈습니다.
마루오까 그래? 어딘가?
# 21 어느 창고
아사히마찌패 사내들이 다른 사내들과 거래를 하고 있다.
아사히1과 사내가 가운데 놓인 탁자로 걸어와 가방을 맞바꾸고 열어본다. 한 가방에는 아편이 수북히 들어 있고, 다른 가방에는 돈다발이 들어 있다. 만족한 미소를 띄우는 그들.. 그 때다. 창고 문이 벌컥 열리며 마루오까와 순사들이 들이닥친다. 아편거래를 하던 자들이 경악하며 바라본다.
마루오까 이제야 꼬리를 잡았구만.. 간만에 보람있는 일을 하게 생겼어. (좌우에게) 체포해.
순사들이 대답하고 달려간다. 그러나 사내들은 순순히 체포에 응하지 않고 순사들에게 대항한다. 마루오까가 그 모습을 보며 미소를 짓는다. 고개를 툭툭 풀고 서서히 다가가 한 놈씩 집어던지는 마루오까. 오랜만에 그의 괴력이 발휘된다. 마루오까의 그 모습에서...
# 22 우미관 앞(낮)
승용차가 대기해있다. 두한이 나오자 미우라가 정중히 인사를 한다.
미우라 저희 오야붕께서 보내셨습니다. 타십시오. (차문을 연다)
두한 성의는 고맙지만 난 그냥 걷겠소.
미우라 예?
두한 혼마찌라고 해봐야 바로 코앞이 아니오. 약속 시간에 늦지 않을 테니 너무 염려하지 마시오. (삼수에게) 가자, 삼수야.
삼수 예, 형님.
두한과 삼수는 승용차 옆을 스쳐 지나간다. 미우라도 하는 수 없다는 듯 차문을 닫는다.
# 23 혼마찌 어느 일식점
하야시와 단게가 미리 와 있다.
하야시 다시 한 번 감사의 말씀을 드려야겠습니다. 공사가 다망하실 텐데 제 청을 들어주셔서 말입니다. 제가 한 잔 따라 올리겠습니다.
단게 허허 고맙소..
잔을 받아 마시지 않고 가만히 내려놓는다.
단게 헌데 말이오, 도대체 그 김두한이라는 자는 어떤 자요? 종로서에서 올라온 보고서를 보긴 했지만 곁에서 지켜본 분의 이야기를 듣고 싶소.
하야시 다소 과격하기는 하지만 알고 보면 그리 속이 좁은 사람은 아닙니다. 이 하야시도 예전에 그 사람에게 큰 빚을 진 적이 있습니다.
단게 허허... 무슨 일이기에 빚이라고까지 말씀하시오?
하야시 그런 일이 좀 있었습니다.
단게 어쨌거나 놀랍소. 하야시상과 같은 분께서 그런 조선인 건달을 도와주시다니요.
하야시 ..................
지배인 (문 앞으로 와서) 손님께서 도착하셨습니다.
하야시 안으로 모시게.
지배인 예...
두한이 안으로 들어오다가 단게를 보고는 놀란다. 그러나 단게는 태연스럽게 미소까지 지어 보인다.
하야시 어서 오게.. 실은 단게 국장님께서 자네를 보자고 하셨네..
두한 ..................?
단게 어서 와 앉게.
두한 .................(앉으면)
단게 이 집 음식이 유명하다고 들었는데 정말 맛이 있군. 아주 맛있어.
두한은 의문스러운 듯 하야시를 쳐다본다. 하야시는 고개를 끄덕인다.
단게 군이 그렇게 나가고 난 뒤에 생각이 많았다. 군을 체포할까도 생각해봤지만 한 번 더 군의 의견을 경청한 다음에 결정하기로 마음을 먹었지.
두한 ...............?
단게 제군들의 구체적인 요구사항이 뭔가?
두한 그것은 이미 말하지 않았소?
단게 징용을 철회해달라는 것 말인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럴 수는 없다.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은 군도 잘 알고 있을 터. 하지만 군과 부하들의 처지를 생각해서 구미가 당길만한 제안을 하나 해볼 생각이다.
두한 .................?
단게 사실은 그간 우리 총독부에서도 마구잡이로 징용을 보내는 것에 대해 문제가 있다고 생각해왔지. 그래서 내린 결정이 반도내에서 노력봉사를 할 수 있도록 근로보국대를 만들자는 것이었다. 바로 그 단체를 군이 맡아보는 것이 어떻겠는가?
그러나 두한은 쉽게 대답을 하지 않은 채, 오랫동안 침묵하고 있다.
단게 왜 내키지 않은가?
두한 ..............
하야시 ...............?
단게 지금 당장 대답하지 않아도 좋아.. 시간은 사흘을 주겠다. 아무런 대답이 없을 땐 내 제안을 거부한 것으로 알겠다. 명심해라. 사흘이다. 단 사흘...
두한 ...................
# 24 혼마찌 거리
화려한 일본식 상점들이 즐비하게 늘어선 그 거리를 두한이 걷고 있다. 그 뒤로 몇 발자국 떨어진 채, 삼수가 따른다. 두한은 잠시 걸음을 멈추고 주위를 돌아본다. 어디를 보아도 일인들 일색이다. 그리고 어느 건물에 걸려 나부끼는 일장기. 두한의 눈에 증오가 어린다.
# 25 비너스 첨가
임동호는 답답한 듯 팔짱만 끼고 있고 김이수는 오늘도 술에 절어 있다.
김이수 그래서 동열인 잠시 경성을 떠났단 말인가?
임동호 며칠 쉬고 싶다고 하더군.
김이수 잡지사를 그 모양으로 만들다니..... 빌어먹을 놈에 일본 놈들......이제는 우리의 정신마저도 제 놈들 입맛대로 맞추려는 모양이군.
다른 테이블에서 술을 마시던 일본인들이 인상을 찡그린다.
임동호 목소리 좀 낮추게. 누가 듣겠네..
김이수 들으라면 들으라고 해. (술잔을 들며) 누가 무서워 할까봐.
임동호 자네 왜 이래? 요즘 왜 이렇게 망가지냐구.
김이수 아니... 이제야 좀 제정신이 드는 것 같아. 이 술을 마실수록 용기가 생기고 정신이 더 맑아진다구.
임동호 이수........
김이수 자네는 일본놈들이 하는 짓거리가 분통이 터지지 않냐구. 좀 하는 꼴들을 보란 말이야.
듣고 있던 일본인들이 참지 못하겠다는 듯 벌떡 일어나 다가온다.
일본인 (어설픈 조선말) 거..... 말끝마다 일본놈... 일본놈이노 하는데 조심하시오.
임동호 이 친구가.....좀 취해서 그런 것이니..........
김이수 (벌떡 일어나) 취하긴 누가 취해? (일본인을 똑바로 쳐다보며) 어....이제 보니 쪽발이시구만........
일본인 뭐... 쪽발이...?
동시에 테이블에 앉아있던 일본인들이 모두 일어선다.
김이수 다 나가. 우리 가게에선 더 이상 쪽발이들에게 술을 팔지 않아. 어서 나가라구.
김이수는 막무가내로 일본인을 밀친다. 일본인은 다른 탁자에 부딪쳐 온 몸에 음식물과 술을 뒤집어쓰고 넘어진다.
일본인 경찰을 불러라. 어서 경찰을 불러!
임동호는 난감하기만 한데...김이수는 여전히 취해 비틀거린다.
# 26 종로 회관(밤)
김영태와 정진영이 삼수를 따라 안으로 들어선다. 아직은 한산한 술집 한 구석자리에 두한이 앉아있다. 김영태와 정진영이 다가가 앉는다.
김영태 자네가 웬일인가? 초저녁부터 술을 마시자니.....
두한 ....................
정진영 하야시 오야붕하고 만나서 무슨 이야기를 했어?
두한은 자신의 잔에 술을 채운다. 정진영과 김영태는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며 의문이다.
김영태 두한이........?
두한 그곳에서 단게를 만났습니다. 그 자리를 만든 것도 사실은 그 사람이었습니다.
김영태 단게가? 아니 무엇 때문에...........?
두한 징용은 면하게 해줄 테니 대신 근로보국대에 들어가 일본을 위해 노력봉사를 하라고 하더군요.
정진영 그래? 그건 우리가 원하는 대로 해주겠다는 거잖아?
두한 그랬나? 하지만 아직 대답을 하지는 않았어.
두 사람 ..................?
두한 어쨌거나 일본에 협력을 하는 일이야.
정진영 두한아... 네 마음 모르는 건 아니야. 하지만 구걸을 해서라도 목숨은 건져야하는 지금의 상황에 그건 지나친 욕심이야.
김영태 진영이 말이 맞네. 이 정도면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많은 것을 얻은 것이나 다름이 없네.
두한 ........그렇습니까? 꼭 그렇게 해야만 하는 것입니까?
두한이 괴로운 듯 술을 마신다. 그 고뇌의 눈빛에서...
# 27 보국대 사무실 앞
수많은 주먹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두한이 "근로보국대 청년단"의 현판을 건다. 동시에 우레와 같은 박수와 함께 사방에서 환호성이 터진다. 각 패거리들의 오야붕들이 하나 둘 두한에게 악수를 청한다.
용식 하하하. 수고했네 두한 아우님. 자네가 우리 모두의 목숨을 구했어.
두한 .............
용식 자, 동지들 그 동안 고생한 김두한 오야붕을 위해 만세를 부릅시다. 만세!
모두들 만세! 만세! 만세!
모든 이들이 소리 높여 만세를 부르지만 두한의 표정은 밝지만은 않다.
# 28 동 사무실 안
두한을 중심으로 용식을 비롯한 핵심 보스들이 둘러앉아 회의를 하고 있다.
김영태 앞으로 우리 청년단은 경성 일대에 진행되고 있는 공사에 본격적으로 투입될 것입니다. 여러 오야붕들께서는 계획에 차질이 생기지 않도록 명령 체계를 확실하게 해주십시오.
용식 징용을 가지 않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다행인가? 그 점은 염려할 것 없네. 아이들 단속은 우리에게 맡기게.
두한 원하는 사람들은 누구든 받아들이십시오. 건달이든 학생이든 상관없습니다. 모든 경비는 총독부에서 대겠다고 했으니 단원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습니다.
짝코 하하하. 이거야말로 꿩먹고 알 먹고 아닌가?
용식 그러게 말일세.
김영태 그리고 청년단을 꾸려가자면 아무래도 학력이 있는 사람이 좀 필요할 듯 싶습니다. 혹 오야붕들께서 추천할만한 사람이 있으시면 해주십시오.
용식 학력이라면 어느 정도를 말하는 건가?
김영태 청년단 서기를 맡겨야 하기 때문에 고보 출신 정도는 되어야 할 것 같습니다.
짝코 허허허. 부하들 중에 그런 자가 있을지 모르겠구만. 하나같이 까막눈들이라서 말이야...
장도리 내 부하 중에 고보 출신이 하나 있습니다만..
모두들 이천패 두목 장도리를 쳐다본다.
김영태 지금 당장 불러 올릴 수 있겠습니까?
장도리 물론이오. 이미 나와 함께 경성에 와 있소. 두한 오야붕도 아마 보셨을 거요. (곁에 서있던 삼수에게) 밖에서 이정재라는 친구를 불러 주겠소?
삼수 이정재요? 예, 알겠습니다.
김영태 학력은 어느 정도나 됩니까?
장도리 중앙고보 출신으로 서기 정도는 충분히 맡아볼 수 있을 거요.
용식 그것 참...... 고보 학력으로 주먹패에 끼어 있다니.... 하긴 영태 자네도 그렇지?
김영태 ............
잠시 후, 문을 열고 이정재가 들어온다.
이정재 부르셨습니까?
장도리 김두한 오야붕, 아니 이제는 단장님이시지.. 단장님께 인사를 드리게.
이정재 이정잽니다.
두한 ............
장도리 필요하다면 데려다 쓰시오.
김영태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큰형님?
두한 일을 맡겨 보기로 하지요.
김영태 알겠습니다. 자넨 오늘부터 청년단 서기 일을 맡아보게. 괜찮겠나?
이정재 열심히 해보겠습니다.
김영태 그럼 결정된 것으로 하겠습니다.
두한은 흥미로운 듯 이정재를 바라본다. 이정재는 도무지 표정이 없다.
# 29 종로서 고등계
미와가 굳은 표정으로 앉아 있고, 형사들 또한 불만이 가득한 표정이다.
문달영 긴또깡과 같은 자에게 청년단을 맡기다니 도무지 총독부의 결정을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김태서 이제 불량배도 우리 형사들을 두려워하지 않는 눈칩니다. 거리에서 만나면 으레 피해가던 자들이 이제는 눈도 깜빡하질 않습니다.
오무라 도대체 총독부에서는 무슨 일을 그렇게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미와 이상해... 정말로 이상하단 말이야...
형사들 .............?
미와 단게 국장님은 자네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호락호락한 분이 아니야. 긴또깡과 같은 자에게 절대로 호의를 베풀 분이 아니라는 것이다.
문달영 하지만... 이제껏 상황을 보면 긴또깡에게 날개를 달아준 격이나 다를 바가 없지 않습니까?
미와 그러니 이상하다는 것이 아닌가?
형사들 ...............
미와 단게 국장은 분명 믿지는 장사 따위를 할 분이 아니야. 뭔가 분명히 있어. 뭔가가.......
그때 난데없이 안으로 최동열이 들어온다.
미와 최동열씨가 여긴 어쩐 일이오?
최동열 용건이 좀 있소. 며칠 전에 김이수라는 사람이 붙잡혀 왔을 거요.
미와 김이수........? (형사들 보면)
오무라 그런 사람이 있었긴 있었습니다만.. 사안이 경미해서 사법계로 내려보내 재조사를 받고 있는 중입니다.
미와 죄목은 뭔가?
오무라 대일본제국을 불온한 언행으로 욕한 잡니다.
최동열 그 사람은 절친한 벗이라 내가 잘 아오. 술에 취해 실수를 한 것이니 선처를 부탁하겠소.
미와 못 들으셨소? 우리 소관이 아니오.
최동열 면회도 안 되겠소?
미와 사법계에 가서 알아보시오. 쯧쯧쯧... 그런 자를 위해 우리 종로서에나 출입하다니...... 최동열씨도 참 딱하오. 참 딱해.
최동열은 더 말해도 소용없다는 것을 안다는 듯 그대로 돌아선다.
# 30 사법계 취조실
김이수가 사법계 형사에게 취조를 당하고 있다. 김이수의 눈빛은 정신이 나간 듯 반쯤 풀려 있다.
사법계 형사는 그대로 김이수를 걷어차더니 짓밟기 시작한다. 그러나 그렇게 밟히면 밟힐수록 김이수는 미친놈처럼 웃음을 터트린다.
김이수 그래.....죽여라. 제발 날.....죽여. 죽여달라구........
그러자 사법계 형사가 발길질을 멈춘다.
사법계 이거 완전히 돌은 놈 아냐?
미친 듯 웃는 김이수의 모습에서..............
# 31 수색 공사 현장
이제는 청년단이 된 수많은 주먹들이 감독관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노역을 하고 있다. 잠시 후 두한이 정진영과 함께 그곳에 나타나자 모든 주먹패들이 일손을 멈추고 고개를 숙인다.
# 32 동 현장 일각
두한이 일을 하는 단원들을 격려하듯 어깨를 두들겨주고 걸어가는데 작업반장쯤으로 되어 보이는 건달 하나가 신문을 들고 달려온다.
작업반장 큰형님.... 이것 좀 보십시오. 하하하 글쎄... 형님께서 신문에 나셨지 뭡니까? 우리들 이야기가 신문에 났어요.
두한 무슨 소리야?
두한은 작업반장이 가져온 신문을 뺏어서 본다. 신문에는 두한의 사진과 함께 큼지막한 기사가 실렸다. 두한은 뭔가 불안한 듯 정진영을 쳐다본다.
두한 뭐라고 쓴 거야?
잠시 신문을 읽던 정진영의 얼굴이 사색이 된다.
두한 (다그치듯) 뭐라고 쓴 거냐구!
한참동안 말을 잇지 못하던 정진영은 처참한 듯 고개를 숙이고 천천히 기사를 읽는다.
정진영 거리의 불량아들이.... 대일본제국의 성전에 열성적으로 참가하다. 과거 선량한 사람들을 괴롭히던 건달들이 스스로 황국의 충실한 일꾼이 되겠다고 자청하고 나섰다. 과거 종로의 건달이었던 김두한을 중심으로 청년단원이 된 주먹패들은........천황폐하에 대한 보은과........일선에서 치열한 전투를 벌이는 황군을 위해........
두한은 싸늘하게 굳는다. 정진영도 더 이상은 읽지 못하고 말끝을 흐린다. 주위에 둘러 서 있던 주먹들도 슬금슬금 자리를 피한다. 두한이 신문을 구겨 찢어버린다.
# 33 총독부 경무국장실
단게가 신문을 읽으며 만족한 듯한 미소를 짓는다.
비서 (들어와) 각하, 아침부터 무슨 좋은 일이라도 있으십니까?
단게 날씨가 아주 좋아서 말이다. 아주 화창하지 않은가?
비서 ...............?
단게는 신문을 접으며 미친 듯이 웃음을 터트린다.
# 34 술집
테이블 위로 빈 술병들이 가득하다. 두한은 홀로 앉아 계속 잔을 비운다. 주위로 서있는 삼수들이 불안한 눈길로 두한을 쳐다본다.
삼수 (다가와) 혀.. 형님.... 너무 많이 드셨습니다.
그러나 두한은 아무런 대답도 없이 다시 잔을 채운다. 삼수는 더 이상 말릴 수 없음을 깨닫고 한 발 물러선다. 잠시 후, 문이 열리며 김영태와 정진영이 안으로 들어온다.
김영태 두한이.........
두한 오셨습니까?
김영태 ........신문 기사를 나도 보았네.
두한 그들을 너무 얕잡아 본 제 실숩니다.
김영태 너무 자책하지는 말게. 자네로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어. 이 정도는 감수해야...........
두한 전 단게에게 깨끗하게 당했습니다.
김영태 ..............
정진영 두한아... 그건...
두한 아니.......난 내 스스로 무너진 거야. 미와가 입버릇처럼 하던 말처럼 난 보잘것없는 주먹패에 불과했어. 이제야 그걸 깨달았어.
정진영 ...............
두한 만주의 독립군들처럼 나도 일본과 싸워왔다고 자부했는데... 그게 아니었어. 아무 것도 아니었다구.
모두들 ..............
두한 지하에 계신 아버지께서 날 보며 통곡을 하고 있겠지. 죽음으로도 씻을 수 없는 큰 죄를 지었어.
입술을 깨물어 피가 흐르는 두한의 모습에서..............
# 35 혼마찌 사무실
하야시가 혼자 차를 마시고 있는데 미우라가 신문을 들고 들어와 책상 위에 올려놓는다.
미우라 이것 좀 보십쇼, 오야붕. 김두한에 대한 기사가 실려있습니다.
하야시 그래?
하야시는 곧바로 신문으로 눈을 돌려 기사를 읽는다.
미우라 김두한 오야붕이 창설한 청년단을 대서특필로 다루었습니다.
하야시 (신문을 접으며) 그렇군.
미우라 벌써 다 읽으셨습니까?
하야시 더 볼 것도 없다. 어느 정도는 예상하고 있었던 것이다. 김두한이 꽤나 마음이 상해 있겠구만.........
미우라 하지만 청년단은 김두한 오야붕이 자청하고 나선 일이 아닙니까? 제가 보았을 땐 현명한 선택이었습니다.
하야시 징용에 끌려가기보다는 나은 방법이었겠지. 그러나 이것 때문에 김두한은 많은 조선인들에게 실망을 안겨 주었다. 그가 이제껏 가장 소중하게 생각했던 것을 잃은 것이다.
미우라 .............오...오야붕...그 말씀은 좀........
하야시 불온하다는 것인가?
미우라 죄... 죄송합니다.
하야시 하하하. 미우라 모른 척 애쓸 필요 까진 없다. 내 몸 속에 조선인의 피가 흐르고 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니까..
미우라 오야붕............?
하야시는 미소 지은 채, 더 이상 말이 없고..............
# 36 관철여관(새벽)
아직은 어두운 마당으로 김무옥이 나온다. 그는 아직 잠이 덜 깬 듯 하품을 하며 변소로 향하는데, 김영태가 대문을 열고 들어온다.
김무옥 영태 성님... 일찍 일어나셨구먼요. 그런디 새벽부텀 어딜 그리 다녀오신당가요?
김영태 문소리가 나서 나가봤는데, 두한이가 나간 모양이야.
김무옥 나가다니요?
김영태 글쎄......운동이라도 간 건지 모르겠다.
김무옥 설마요......어제 쓰러질 정도로 그렇게 술을 퍼마셨는디........
김무옥은 고개를 갸웃하며 두한의 방을 쳐다본다. 섬돌 위에 두한의 신발이 없다.
김무옥 정말로 두한이가 나갔나? 어제 일로 기분도 솔찬히 안 좋을 것인디.........
김영태 아마도..... 떨쳐버리고 싶었겠지.
김영태는 한숨을 쉬며 안으로 들어간다.
# 37 삼각산
두한이 맹렬한 속도로 산길을 오르고 있다. 독기를 품은 듯 두 눈은 야수처럼 빛나고 있다. 두한은 잠시도 쉬지 않고 미친 듯이 정상을 향해 달린다.
# 38 삼각산 정상
두한이 정상에 올라 턱 끝까지 숨을 몰아쉰다. 저 멀리 산등성이너머로 동이 터 오른다. 두한은 토해내듯 함성을 지른다. 그 소리가 굽이굽이 메아리치며.............
# 39 삼각상 정상(회상)
그 옛날 어린 두한의 모습이다. 두한의 눈에서 눈물이 흐르기 시작한다. 두한이 저 하늘에 대고 소리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