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 쉴러의 원작에 의한 도니제티의 여왕 삼부작 오페라중의 하나인 마리아 스투아르다(영어로는 “매리 스튜어트”) 입니다.
이 작품은 영국의 포더링헤이 성의 감옥에 갇혀있는 매리 스튜어트에게 이미 사형언도가 내려진 시점에서 사형이
집행되기까지의 사건과 등장 인물들의 심리적 갈등이 도니제티 특유의 아름다운 벨칸토 음악과 잘 결합되어서
긴박한 극적구성 속에서 전개되고 있습니다. 오페라로 각색하는 과정에서 필연적인 산물이라고 여겨지는 원작 및
역사적인 사실과 부합되지 않는 부분이 몇 군데 보이는데 대체적으로 큰 줄거리는 제대로 유지하고있습니다.
대본자체의 내용은 그다지 복잡하지 않지만 이 오페라를 제대로 감상하기 위해서는 당시의 역사적인 배경에
대한 이해가 약간 필요하다고 생각되어서 엘리자베스 여왕과 매리 여왕과의 관계에 대해서 아래에
간단히 적어놓았습니다.
엘리자베스 여왕과 매리 여왕
튜더 가문을 세운 헨리 7세(재위: 1485년-1509년)는 1남 2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헨리 8세이며 두 딸 중에서
매리는 서포크의 공작과, 그리고 마가레트는 스코틀랜드의 왕인 스튜어트 가문의 제임스 4세와 결혼을 하게 된다.
헨리 8세는 몇 번의 결혼 및 이혼 거치며 파란만장의 삶을 사는데 첫번째 부인이었던 캐서린 왕비와 이혼을
위해서 카톨릭교였던 영국의 국교를 개신교로 바꿔가면서 궁중의 시녀인 앤 볼러윈과 결혼을 한다.
이 결혼에서 태어난 딸이 우여곡절끝에 엘리자베스 여왕(1533년-1603년)으로 등극하게 되는데 그녀는
훌륭한 정치와 외교, 물가안정, 복지법등으로 영국 국민들에게 큰 존경과 사랑을 받는 여왕이 되었다.
한편, 카톨릭교가 국교인 스코틀랜드에서 스튜어트 가문의 제임스 4세의 아들인 제임스 5세와 프랑스인인
매리 귀즈의 사이에서 태어난 매리 여왕(1542년-1587년)은 부왕인 제임스 5세가 31세로 죽는 바람에
생후 5일째에 갓난아기로 스코틀랜드의 왕위를 계승하게 된다. 매리는 스코틀랜드와 영국과의 싸움에서
프랑스가 스코틀랜드를 지원해 준 것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1548년 6살의 나이로 프랑스로 보내지고
그곳에서 교육을 받으며 성장한다. 그녀는 1558년 16살이 되던 해에 파리에서 사촌오빠와 호화찬란한
결혼식을 올리는데 남편은 프랑수와 2세로서 이듬해인 1559년 프랑스의 왕위에 오른다. 매리는 장엄한
결혼행렬에서 스코틀랜드와 프랑스의 문장은 물론 영국왕실의 문장까지 내걸었다. 이는 자기가 이 세 왕국의
적법한 여왕이며 이혼을 인정하지 않는 카톨릭 종교에서 볼 때 영국의 엘리자베스 여왕은 시녀에게 태어난
사생아이고 왕위를 찬탈한 자라는 것을 간접적으로 의미하는 것이었다. 행복하게 살던 매리의 운명은 1560년
남편인 프랑수아 2세가 마상경기를 하다가 불의의 사고로 죽음을 당하면서 급변하게 된다. 결국 1561년에 정치적,
종교적으로 복잡한 상황에 놓여있던 스코틀랜드로 여왕의 신분으로 돌아온 매리는 1565년 두 번째 남편인
헨리 다안리와 결혼을 하는데 방탕한 주정뱅이에다가 성병보유자인 다안리는 결혼 후 이 년 만인 1567년에
의문의 죽음으로 당한다. 다안리가 죽은 뒤 불과 삼개월 뒤에 매리는 세 번째 남편으로 당시 실력자였던
보드웰의 백작인 제임스 헵번과 결혼을 하는데 이 결혼으로 매리는 스코틀랜드의 귀족들로부터 남편인 다안리를
살해한 공범이라는 강한 혐의를 받게 된다. 결국 귀족들의 반란이 일어나고 이 싸움에서 패한 보드웰과 마리아는
보드웰은 스칸디나비아로 도주하고 매리는 인접한 영국으로 피신해서 뒷날을 도모하려고 한다.
그러나 영국의 여왕이었던 엘리자베스로서는 당시의 스코틀랜드의 실력자이자 개신교도인 매리의 이복 오빠인
메레이 백작과 협정을 맺고있었기 때문에 이 카톨릭 왕녀가 스코틀랜드에서 다시 자리를 잡게 할 생각도 없었고
프랑스로 보내서 반 영국 정책을 도모하게 할 수도 없었고 영국에 머물게 하자니 카톨릭 세력들이 자기를 내몰고
매리를 여왕으로 옹립하려고 할 것이 틀림없기 때문에 그녀를 영국에서 억류해서 죄수같이 이 성에서 저 성으로
옮겨서 무려 19년이라는 역경의 세월을 보내게 한다. 엘리자베스는 매리를 체포할 권리가 자기에게는 없고
법정에 세울 권리는 더더욱 없다는 것을 잘 알고있었다. 자기가 오류를 범하고 있음을 잘 알기 때문에 매리의
앞에 나서지도 못한다. 그 사이에 영국 내에는 매리를 여왕으로 추대하기 위한 카톨릭 교도에 의한 모반사건이
여러 차례 일어나자 영국의 의회는 죄수같이 갇혀있는 매리를 이 모든 모반의 책임자로 규정하는 법안을 통과시킨다.
의회는 이 법령을 시행하기 위해서 무려 42명의 재판관을 그녀의 마지막 감옥인 포더링헤이 성에 파견하고
매리는 영국여왕의 목숨을 노린 대역모반죄로 법정에 세워지고 재판장은 그녀에게 사형을 선고하여 비운의 여왕
매리는 45세의 젊은 나이로 참수형에 처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