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설명: 법무법인 ‘새날’ 대표 심학무 변호사는 사무실에 마련한 선방에서 날마다 참선을 한다. “타인의 죄를 판단하기 앞서 나 자신을 제대로 관(觀)하기 위해서 스님들로부터 직접 참선을 배웠다”는 심 변호사는 “자비와 용서가 평생 화두”라고 말했다. |
나를 제대로 봐야 제대로 변호할 수 있어
사무실에 선방두고 참선 컴퓨터로 사경 수행도…
“변호사 사무실에 선방을 만들다니요? 직원들이 이상하게 보지 않나요?” “천만에요. 인간들끼리 헐뜯고 고발하고 죽이고 하는 이런 살벌한 세상을 몸으로 부딪치며 사는데, 가끔 눈을 감고 자기를 바라볼 여유가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밤새워 법령집을 눈이 빠지게 본다고 정의로운 해답이 나오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그래도 처음엔 직원들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느날 갑자기 예고도 없이 사무실 창고로 쓰는 작은 구석방을 손수 청소해서 장판을 깔고 좌복을 펼치는 심 변호사를 보면서 직원들은 숙덕거렸다. 선방으로 장엄한 뒤 심 변호사는 전직원 앞에서 이야기했다. “제가 이곳에 들어가면 나올때까지 전화연락이나 일체 보고를 받지 않을 것입니다. 참선을 하면서 나 스스로를 돌아보는 시간을 갖기 위해서입니다. 모두 깊은 혜량으로 이해해주시길.” 며칠 전 기자가 처음 전화를 걸었을 때 여직원이 말한 ‘운동중이시며, 전화연락도 어렵다’는 뜻도 여기에 있었다.
심 변호사는 주말이면 아예 참선정진을 위해 양평 상원사 용문선원에서 산다. 그곳에 주석하는 스님으로부터 참선지도도 ‘제대로’ 받았다. 서울 능인선원 신도인 부인 박은영(49)씨 역시 남편과 함께 주말 참선기도를 한다. “집안에 부처님을 모셔놓고 가끔 예불도 올리고 온가족이 모여 108배를 하기도 합니다. 의대생인 아들과 사회복지학을 전공하는 딸도 우리 부부의 영향으로 불교를 생활화한답니다.” 심 변호사의 수행생활은 이뿐만 아니다. 자동차 안에는 각종 불서(佛書)와 독경테입이 가득하고 날마다 컴퓨터 워드로 불경을 타이핑하는 자칭 ‘워드사경’을 한다. “최근에 사경한 나옹스님의 발원문은 참으로 인상깊더군요. 聞我名者免三途(문아명자면삼도) 見我形者得解脫(견아형자득해탈)이라. ‘나의 이름을 듣는 이는 삼악도의 괴로움을 여의고, 나의 형상 보는 이는 해탈을 얻게 하소서’라는 뜻인데, 저는 얼마나 더 살아야 이같은 사람이 될 수 있을까요.”
심 변호사의 깊은 불심(佛心)은 대학시절 타계한 모친의 영향이 크다. 전북 임실군 삼계면에서 과부의 몸으로 농사를 지으며 6남매를 대학까지 공부시킨 어머니는 조석으로 불공을 드리며 가난한 살림에 ‘기적처럼’ 자식들을 키워냈다. 대학등록금 때문에 6남매가 돌아가면서 휴학도 밥먹듯 했다. 6남매는 심 변호사를 비롯해 은행지점장, 세무사 등으로 활동하는 성공한 중상층으로 자리잡았다. “지금도 어머니를 생각하면 가슴이 저리지요. 혼자되신 몸으로 온갖 거친일들을 마다하지 않으셨던 어머니는 당신은 굶고 병들어가면서 자식들 뒷바라지에 평생을 바치셨으니까요. 한국의 어머니라면 누구나 마찬가지지만…” 눈물을 글썽이며 말끝을 흐리는 모습에 대학시절로 화제를 돌렸다.
고려대 법학도였던 그는 대학생불교학생회 활동을 하면서 틈만나면 스님들을 찾아다녔다. 설법을 듣기 위해서다. “운허스님 청담스님 활안스님 등 스님들이 내려주신 법문과 법어들은 삶의 지평을 세우는데 커다란 기둥이 되었습니다. 갑자기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 눈앞에 캄캄했지만 부처님이 큰 힘을 주신 것 같습니다.” 그가 제23회 사법시험에 합격하고 1983년 사법연수원을 수료할 무렵, 어느날 꿈속에 부처님이 나타났다고 한다. 가부좌를 틀고 고요히 삼매에 든 부처님이 하늘에서 살포시 내려오는 꿈이었다. 꿈속의 부처님을 친견하면서 환희심에 젖었던 그는, 이후 영암경찰서장 화순경찰서장 장흥경찰서장 등을 역임하고 법조인으로 살아오기까지 한순간도 그 부처님을 잊은 적이 없었다고 한다.
판.검사로 피고인이나 피의자를 향해 칼을 겨누는 행위가 자신이 없어서 사법연수원 수료 후 경찰서를 지망했던 심 변호사는 “경찰서 생활도 삭막하긴 마찬가지”라고 회고했다. “경찰은 거칠게 말하면 맹목적이어야 합니다. 집단의 구속을 많이 받고 희열도 없이 승진이나 보직에만 혈안이 집중되니까요. 무거운 계급장을 어깨에 두르고 크나큰 방에 앉아있으면 메마르고 삭막한 기운에 힘이 쏙 빠지곤 했지요.” 경찰서장 시절에 그나마 숨통을 틔워준 역할을 한 것은 지역 인근의 사찰이었다. 쉬는날 틈틈이 산에 올라 사찰을 참배하고 스님들과 다담(茶談)을 나누면서 업무의 힘겨움을 내려놓곤 했다. “스님들로부터 수행하는 법을 배우고 부처님 가르침도 익혔습니다. 특히 평생 모르고 넘어갈 수 있었던 다도(茶道)를 알게 되어 흐뭇합니다. 지금도 진한 커피보다 지방의 스님들이 챙겨주시는 정겨운 차맛에 매료되어 거반은 다인(茶人)의 경지에 들어섰다니까요. 허허허.”
심 변호사는 일할 때만큼은 날카롭고 엄격하나 평상시엔 이웃집 아저씨처럼 푸근하고 정겹다. 특유의 유머로 직원들이나 방문객들의 웃음보를 터뜨릴 때도 많다. “오늘 날씨가 올여름 최고기온으로 무더위가 하늘을 찌르는데, 제가 왜 에어콘을 틀지 않고 이렇게 땀을 줄줄 흘리고 있는지 아십니까.” 다소 뜬금없는 질문에 고개를 젓자, “이놈의 리모콘이 어디로 숨었는지 온 사무실을 다 뒤집어엎어도 안보이네요. 아 글쎄 주문을 했더니 한달을 기다리라고 하니, 어찌해야 좋을런지.” 낡은 벽걸이 에어컨을 가리키며 중얼거리는 표정이 ‘아이처럼’ 순수하다. “요즘은 하루에도 몇 번씩 이혼상담이 들어옵니다. 저야 이혼건수가 많을수록 수입이 많아지지만, 그렇다고 이혼을 부추기겠어요? 항상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이혼하면 극락이 올 것 같으냐’ 그것을 화두로 일주일만 더 생각하고 다시 찾아오라고 합니다. 그러면 십중팔구 안옵니다. 허허 이러다 사무실 문닫으면 어쩌나.”
농담섞인 한마디 한마디에서도 고운 심성이 전해온다. 스님에게 배운 서예솜씨를 십분 발휘해서 그가 직접 쓴 ‘화안애어(和顔愛語)’가 심 변호사 집무실에 걸린 채로 싱긋 웃는다.
심 변호사는…
‘환경분쟁소송’저서 출간
고려대 법학과 71학번으로 법학을 공부한 심 변호사는 제23회 사법시험에 합격해 1983년 제 13기 사법연수원을 수료했다. 법조인의 길에 접어들기 전 그는 경찰을 지망, 영암경찰서 등 3개 경찰서장을 역임했다.
이후 1997년부터 새정치국민회의 통일국제특위 부위원장 및 국민회의 인권특별위원 등을 지낸 심 변호사는, 변호사를 하면서 2002년까지 민주평화통일 자문회의 위원으로 활동했다. 농촌문제를 집중 변호하는 ‘농촌을 걱정하는 변호사 모임’ 대표간사를 맡고 ‘나홀로 소송 시민연대’ 공동대표도 역임했다. 경기 동부 환경운동연합 고문을 맡고 있는 그는 법조계에서는 최초로 〈환경분쟁소송〉이란 단행본을 출간하기도 했다.
어린시절부터 불교를 접하게 돼 대학시절 대불련 활동을 했던 심 변호사는 지난 2001년, 10여년에 달하는 ‘서초동 변호사’ 생활을 정리하고 경기도 남양주시 지금동에 법무법인 ‘새날’을 꾸렸다. 경기도 지체장애인협회서도 활동하는 그는 불합리한 법률로 인해 고통받는 서민들을 변호하고 법으로부터 보호받을 수 있는 지역내 든든한 울타리로 명성이 자자하다.
주민들의 애로사항을 듣기 위해 스스로 발로 뛰어다니면서 현장을 누비는 그는 “앞으로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세간에 적용하고 사람들을 교화할 수 있는 도인정치 성인정치를 하고 싶다”며 정치계에 몸담을 뜻을 비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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