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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8-2 만경능제저수지, 탄허대종사 생가방문
조동화는 김제 만경들녁을 바람쐴 겸 구경 나가, 만경능제저수지 둘레길을 운동하고 왔지요.
만경(萬頃)은 '만(萬)'개의 '이랑(頃)'을 가진 광활한 땅이 바로 김제 만경, 밭 사이의 경계(두둑)가 만 개다.
김제만경들력은 전라도의 곡창지대로, “징게 맹개”는 전라도 사투리로 김제와 만경을 말한다.
만경능제저수지 둘레길 1만보를 걷고, 귀로길에 대동리에 있는 탄허대종사 생가를 방문하였다.
아일랜드의 극작가 버나드 쇼는 이런 명언을 했지요.
“부지런히 몸을 움직여 일에 열중하라. 이것이야말로 이세상에 존재하는 어떤 약보다도 강력한 효력을 지닌 영약인 것이다”
두발만능자기용이 쓸만하여 만경들력과 능제방죽을 걷는일 할수 있어 감사하였고, 두눈으로 대지의 자연을 구경할수 있어 행복하였지요.
탄허대종사 업적을 그려 김제시에서 2016년 11월 복원사업이 추진되어 국비로 2020년에 완공되었다.
탄허스님 생가는 깨끗이 복원되고 관리가 잘 되고 있는 상태를 확인할수 있었다.
70-80년대 한국불교계에서 성철과 탄허대종사는 이름을 날린 스타였다.
우리나라 최고의 학승으로 이름을 떨친 탄허대종사가 태어난 곳이 김제 만경이라니 불교계의 거목이 만경에서 나왔구나.
스님은 속세와 단절하고 입산하여 도를 닦고 고행을 실천한다 그러지요.
탄허스님은 가족의 중매로 16세 결혼하여 아내와 아들과 딸을 두고 22세 되던해 오대산 상원사에 한암스님을 은사로 입산, 3년간 참선한 후 14년간 두문불출 참선과 경전을 공부하며 오대산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속명 김금택 탄허스님은 아내와 1남1녀를 두고 오대산 한암스님을 찾아 도의 요체를 깨닫고 귀향할 계획이었으나 일생을 속세와 단절하며 살았다.
서우담스님이 15년동안 탄허스님을 가장 가까이 모신 시봉이 되었다가 환속하여, 탄허 스님과 숙겁의 인연은 이어져 탄허 스님 속가 딸과 결혼했다.
신동소리 들어가며 어려서 사서삼경을 통달하는등 재주가 남달랐던 탄허스님은 인생의 해답을 얻지못해 세속의 행복을 단절하고, 인간의 근원을 찾기 위해 오대산으로 고행의 길을 떠나 도를 닦던 그도 71세에 1983년6월5일 열반하시었다.
그러고본게 누구나 이세상에 왔다가 떠나가는구나.
속세를 떠나 인생의 근원을 찾아 헤메이던 , 속세에서 희로애락을 느끼면 살던 인간의 삶이란 정답이 없는 것이 정답인 것 같다.
무더운 삼복더위 건강하시고 행복을 빕니다.
탄허대종사 생가방문 소감
대동리 탄허스님의 생가 '간산재(艮山齋)'를 방문한 조동화는 김제가 낳은 큰인물임을 알고 꼬불꼬불한 대동리 시골마을을 찾았다.
탄허 대종사는 소년 시절 신동으로 알려졌으며, 어려서 사서삼경과 노장사상을 두루 섭렵한 후 22세에 오대산 상원사에서 한암 스님을 은사로 출가하여 일찌감치 학승으로 명성을 떨쳤다.
당대 성철스님은 3,000배를 해야 사람들을 만나 친견할수 있었는데 반해, 탄허스님은 해박한 지식을 “지식이 있는 자는 경을 배워 중생에게 이익을 주도록 해야 이 세상 업보도 갚는 것”이라며 "10여년 연장자였던 양주동과 함석헌이 배울 만큼 유·불·선과 주역·정역·성경까지 통달해 동서고금의 지혜를 꿰뚫었던 인물이며, 당대 대학자였던 양주동 박사는 탄허스님의 장자 강의를 듣고 감동해 넙죽 절을 올렸다는 일화가 있으며, 함석헌 선생도 탄허스님에게 장자를 배웠다고 전한다.
이곳에서 탄허스님은 1913년 1월 15일 김제군 만경면 대동리에서 독립운동가 김홍규 선생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13세까지 소년기에 이어 호남학파의 거두이신 아버지의 영향을 받았으며, 17세에는 기호학파인 이극종 선생에게 유교의 진수를 받았고, 노자와 장자의 도교학까지 두루 배웠다.
그후 오대산 상원사에 방한암 선사를 찾아 3년간 참선한 후 14년간 두문불출 참선과 경전을 공부하였다.
1955년 오대산에 수도원을 개설하고 불교의 엘리트 양성과 불교경전 번역에 힘썼으며, 가장 위대한 것은 '신화엄경합론' 47권을 들 수 있다.
이것은 하루 14시간씩 약 10년간에 걸쳐 완성한 것으로 원고지 분량만도 무려 6만3천여장에 이른다.
우리나라 최고의 학승으로 널리 이름을 떨친 스님은 1983년 6월 5일 열반에 들었다.
김제만경 대동리에서 우리나라 최고의 승려가 태어났다고 하니 대동리 마을 뿐만 아니라 전라도 대한민국의 자랑이라고 할수 있군요.
천재 탄허대종사는 아는 불법과 지식을 세상에 널리 알린 그런 스님이셨다.
방랑객 조동화가 대동리 마을에 들어서 동네 아주머니를 만나 탄허스님 생가위치를 물어보니 탄허 스님과 같은 경주김씨이며 이마을에서 자랐던 대동리 고향에 찾아와 산다고 하며 친절히 안내해주며, 탄허대종사의 큰 업적을 얘기해주었다.
탄허대종사 생가 아랫집 “미즈노씨네카페” 답사
☛위치:전북 김제시 만경읍 대동리 656(탄허스님생가 길건너집)
탄허스님 생가를 답사하고 길 아래에 무슨 폐가 비슷한 집이 일길래 들어가 구경했는데 이곳이 “미즈노씨네카페”의 간판으로 사람들의 방문을 기다리고 있었다.
일본인 미즈노씨가 만경 대동리 옆마을의 한국인 아내를 만나 자녀 5명과 살면서 홈카페로 개조한 농촌주택인데 아프리카 우림의 나무위의 집을 연상하듯 이색적인 풍경을 보고온 느낌이요.
동화책에서나 볼수 있는 집을 구경한 조동화는 “미즈노씨네트리하우스카페”에 일본의 국적을 가진 일본인이 이곳에 어떻게 정착하여 여유로운 삶을 살고 있는지 궁금해 지는구먼.
이집의 주인 일본인 미즈노씨!
일본사람이 어떤인연으로 이곳이 왔을까?
헌 나무등으로 아기자기하게 잘 꾸며 놓았네요.
폐가인 한옥을 손수 고쳐서 살다가 나무 위에서도 쉴수 있는 김제 트리하우스를 짓게 되었다고 합니다.
도심의 구중굴궐보다 훨씬 아름다운 풍경입니다.
탄허스님이 태어난 만경 대동리 시골마을 잘 다녀왔습니다.
일본인 미즈노씨가 전북 김제 만경 대동리로 이사를 와서 한옥과 나무위의 집 트리하우스를 짓고 행복하게 살아가는 이야기가 2018년 kbs방송 인간극장에 소개되여 이곳이 사람들한테 많이 알려져 한적한 마을 대동리 "미즈노"씨네 집을 찾는다 합니다.
일본인 남편 "미즈노 마사유키"와 한국인 아내 "최은희"(대동리 옆마을 출신)씨가 결혼을 해서 사랑, 기오, 선화, 태양, 수아 등의 다섯 아이와 한국에서 행복하게 살아가는 이야기가 흥미진진 할 것 같수다.
미즈노씨는 한국인보다 언어구사 능력이 탁월하여 만경 대동리에 살면서 불편함을 느끼지 않아 무궁한 행복의 꽃을 피우시요.
인간극장에 나오는 kbs 영상 보아줄만합니다.
두눈으로 탄허스님 생가를 답사하고, 미즈노씨네 낭만적인 풍경도 구경한 조동화는 오늘하루를 감사한 마음으로 흘러 보냈다.
만경능제저수지
능제(菱堤)는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의 만경현조에도 능제라고 기록되어 있는 오래된 저수지이다.
‘능제’란 이름은 예로부터 이곳에 연꽃과 마름이 많아서 ‘마름 능(菱)’을 붙인 것이 그 시작이다.
만경능제 저수지는 만수위 면적 1,959ha로 1930년대에 축조하여, 현재는 운암호의 물을 받아 저장하는 양수저수지(揚水貯水池)가 되었다.
능제저수지는 귀[굽이·귀퉁이]가 99곳이나 되는데, 귀가 100곳이 되면 나라에 큰 경사가 일어난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능제수변공원은 봄에는 철쭉, 여름에는 창포와 푸르른 녹음이 가득하다.
탄허 대종사(1913~1983)
▶생가위치 : 전북 김제시 만경읍 대동리 300 (대동1길 32)
1913년 1월 15일 전북 김제 만경에서 김홍규의 5남중 둘째아들로 태어났다.
속명은 금택, 법명은 택성이며 법호가 탄허이며, 어려서부터부터 사서(四書)삼경(三經)을 외울만큼 천재였던 탄허스님은 열다섯이 되던 해에 충남 보령에서 기호학파의 거유 최면암의 후학인 이극종 선생에게서 유학 및 도교학을 수료하였으나, 학문의 한계를 느껴 진리를 말해 줄 수 있는 훌륭한 스승을 찾아 나섰다.
오대산 상원사에 있는 방한암 스님의 명성을 듣고 19살에 처음으로 한암스님께 장문의 편지를 보냈다. 무려 삼 여 년 동안 주고받은 편지는 일반인의 상상을 초월하는 대문장이었다.
22세 되던 해 탄허스님은 정든 속세, 부모 형제를 두고 방한암 스님을 찾아 오대산 상원사로 입산했다.
“인허스님”이 속세의 3살 아래 동생이며 탄허스님이 오대산 입산후 2년되 오대산 상원사 한암스님을 은사로 상원사에서 속세의 형님 탄허스님과 불경을 공부하며 도를 닦았다.
탄허 김금택은 22살, 1934년부터 새벽 2시가 되면 어김없이 일어나 반드시 참선을 하고 경전을 읽었다고 한다. 이를 입적하기 전까지 49년간 한결같이 했으며, 한암선사에게 정식으로 승려가 되겠다고 삭발을 하는데, 선사로부터 ‘삼킬 탄(呑)’ ‘빌 허(虛)’라는 법명 ‘탄허’를 하사받았다.
특히 탄허는 스승은 제자에게 “지식이 있는 자는 경을 배워 중생에게 이익을 주도록 해야 이 세상 업보도 갚는 것”이라며 경전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이미 가문의 중매로 16세에 결혼해 아들과 딸을 뒀던 탄허는 22세에 출가하였는데 승려가 되기 전 인물 탄허는 학문에 대한 열정이 남달랐다고 한다.
스님은 나이 쉰아홉부터 돌을 갈아 죽을 쑤어 먹으며 수행을 했다. 중생들은 힘들게 일을 하며 연명을 하고 그러면서도 시주를 하는데 승려가 시주의 은혜를 무겁게 여기지 않으면 수행자로서의 자격이 없다는 것을 몸소 실천에 옮긴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탈이 되었는지 스님은 암에 걸리고 말았다. 제자들의 권유로 병원을 찾았을 때는 이미 손을 쓸 수 없을 지경이었다. 의사들은 고작해야 석 달밖에 살지 못할 것이라고 했다.
이 같은 사실을 전해들은 탄허 스님은 눈물을 흘리며 안타까워하는 제자들에게 오히려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
“이놈아, 병이 사람을 잡아갈 수 있는 것이 아니야. 나는 일흔하나가 되는 1983년 계해년 음력 4월 24일 유시에 갈 것이니라.”
국내 최고의 의사들이 내린 진단을 무시하고 무려 6년 후에나 입적을 하게 될 것이라고 장담을 했으니, 이 말을 들은 의사들이나 제자들은 모두 아연실색했다. 하지만 탄허 스님은 자신의 예언대로 암을 몸에 품은 채 6년여를 살았고 그 사이 능엄경, 금강경 등 사교(四敎)를 완간하는 등 더욱 왕성한 번역 활동을 보여 주었다.
1979년 늦은 봄 대학 여교수가 지인의 소개로 박정희 대통령과 혼담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질문을 하였고, 스님은 부정적인 의견을 제시하였다.
1979년 10월 26일이 지나서 정승화 육군참모총장과의 전화 통화를 원했고, 12월 12일이 지나서는 자격이 없다며 부탁을 거절하였다.
1982년 대통령 전두환의 아호(雅號)를 일해(日海)라고 지었다.
평소 승려 교육에 많은 힘을 쏟은 탄허스님은 불교학의 최고 학설인 화엄경 120권을 번역, 출간한 것을 비롯하여 화엄론 40권, 육조단경, 보조법어, 사교, 사집 등 많은 불전을 번역하였다. 승려 교육의 공로로 생전에 인촌 문화상을 수상한 바 있는 스님의 사상은 한국불교에 크나큰 영향을 끼쳤으며 1983년 6월 5일 오후 향년 71세로 입적하실 때까지 오대산 방산굴에 계셨다. 입적 뒤 종교인으로서는 최초로 국가가 추서하는 은관문화훈장을 받았다.
탄허대종사 속세의 아내이야기
출가를 하기 전 결혼을 한 탄허의 아내는 토정 이지함의 16대 종손으로 학문과 덕망을 고루 갖춘 뼈대있는 선비집안의 규수였다.
어릴 적 남자복장을 하고 글방에 다니며 탄허 보다 먼저 중국 사서삼경(四書三經)을 뗐을 정도로 한학에 깊은 조예가 있었다.
탄허도 출가 전의 자신의 내자(內子)를 일러 부부라기 보다는 훌륭한 수학 도반으로 칭찬을 했을 정도였다.
그런 그가 자신의 남편인 탄허의 출가를, 결혼을 한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도 말릴 수 없었던 이유가 있다.
하루는 주역을 구해 보고 싶어하는 남편(탄허)의 소원을 들어주기 위해 송아지를 팔아 주역 책을 구해 주었다.
주역 책을 본 남편이 어찌나 좋아하는지 책을 받아 가지고 그대로 글방으로 달려가더라는 것.
가만히 뒤따라가 문틈으로 남편의 모습을 살펴보니, 한 손에 책을 들고 읽으며 기쁨을 참지 못하고 덩실덩실 춤을 추고 있는 게 아닌가.
그때 이미 남편은 부부의 연(緣)보다는 공부에 연이 많은 사람이라는 것을 깨닫고 미리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속가 탄허스님의 아내 이씨는 슬하의 딸이 15세 되던해, 딸은 어머니가 손에 쥐어준 여비와 주소를 가지고 아버지를 찾아갔다가 그대로 입산 비구니가 됐다.
딸은 수도 정진중 탄허스님을 15년 모신 서우담 수좌와 인연을 맺어 결혼했다.
정진 중 만난 수좌는 탄허스님의 분신으로 탄허스님이 만든 책을 발간하는 도서 출판 교림 서우담 대표이다.
♣불변의 세가지 진리♣
● 제행무상(諸行無常)
태어나는 것은 반드시 죽는다. 형태 있는 것은 반드시 소멸한다. '나도 꼭 죽는다' 라고 인정하고 세상을 살아라.
죽음을 감지하는 속도는 나이 별로 다르다고 한다. 청년에게 죽음을 설파한들...자기 일 아니라고 팔짱을 끼지만 노인에게 죽음은 버스정류장에서 차를 기다림과 같나니 하늘. 부모. 남편. 아내라 할지라도 그 길을 막아주지 못하고 대신 가지 못하고함께 가지 못한다.
하루하루, 촌음을 아끼고 후회 없는 삶을 사는 것이 죽음의 두려움을 극복하는 유일한 외길이다.
● 회자정리(會者定離)
만나면 헤어짐이 세상사의 법칙이다. 사랑하는 사람. 애인. 남편. 부인. 자식. 명예. 부귀영화. 영원히 움켜쥐고 싶지만... 하나 둘 모두 내 곁을 떠나간다.
인생살이가 한때의 흐름인 줄 알라. 끄달리고 집착하고 놓고 싶지 않는 그 마음이 바로 괴로움의 원인이며 만병의 시초이니 마음을 새털같이 가볍게 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 원증회고(怨憎會苦)
미운 사람, 피하고 싶은 것들과 반드시 만나게 된다.
원수. 가해자. 아픔을 준 사람. 피하고 싶은 사람을 다시 만나게 되며, 가난. 불행. 병고. 이별. 죽음 등 내가 바라지 않은 일도 종종 나를 찾아온다.
세상은 주기적 사이클 나도 자연의 일부인 만큼 작은 사이클이 주기적으로 찾아온다. 이를 '라이프 사이클(life cycle)'이라 한다.
현명하고 지혜롭고 매사에 긍정적인 사람은 능히 헤쳐나가지만우둔하고 어리석고 매사에 소극적인 사람은 파도에 휩쓸리나니 늘 마음을 비우고 베풀며 살라.
- 좋은 글 -
◐ 다섯 가지가 즐거워야 삶이 즐겁다 ◑
첫째, 눈이 즐거워야 한다.
눈이 즐거우려면 좋은 경치와 아름다운 꽃을 봐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여행을 자주 해야 아름다운 경치와 아름다운 꽃들을 볼 수 있다.
그러므로 가능하다면 해외나 국내 여행을 자주 하여야 할 것 같다.
외국 사람들은 돈을 벌어 어디에 쓰느냐고 물으면 여행하기 위해 번다는 사람이 많다.
여행은 휴식도 되고 새로운 에너지를 충전하는 기회도 되는 것이다.
꼭 여행만이 눈이 즐거운 것은 아니다.
개인에 따라 여행이 여의치 않는다면, 하루 시간 중 짬나는 대로 웃기는 글이나, 웃기는 사진을 보면서 맘껏 웃을 수 있는 시간이 주어진다면 그것이 바로 즐겁게 사는 것이 아니겠는가.
둘째, 입이 즐거워야 한다.
입이 즐거우려면 맛있는 음식을 먹어야 한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란 말이 있지 않은가.
어떻게 보면 먹는 것이 제일 중요하다고 볼 수도 있다.
우리 몸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우리 몸에 필요한 영양소를
골고루 섭취해야 하기 때문이다.
식도락가는 아니더라도 미식가는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미식가는 맛있는 음식을 찾는다.
지방에 따라 그 지방의 유명한 향토 음식이 있다.
특별한 향토 음식점을 미리 알아보고 찾아가는 것이 현명하다.
셋째, 귀가 즐거워야 한다.
귀가 즐거우려면 아름다운 소리를 들어야 한다.
계곡의 물소리도 좋고 이름 모를 새소리도 좋다.
자기가 좋아하는 가수의 음악을 듣는 것도 귀가 즐거운 것이다.
조용히 음악을 감상하는 것이 정서에 얼마나 좋은지 모른다.
음악을 즐기는 사람치고 마음이 곱지 않은 사람이 없다.
넷째, 몸이 즐거워야 한다.
몸이 즐거우려면 자기 체력과 소질에 맞는 운동을 하여야 한다.
취미에 따라 적당한 운동을 하면 건강에도 좋고 몸도 즐거운 것이다.
다섯째, 마음이 즐거워야 한다.
마음이 즐거우려면 남에게 베풀어야 한다.
가진 것이 많아야 베푸는 것이 아니다.
자기 능력에 따라 베푸는 것이다.
남에게 베풀 때 정말 마음이 흐뭇한 것이다.
마음으로라도 베풀어야 한다.
남을 칭찬하는 것도 베푸는 것이다.
마음이 즐거워야 진정한 즐거움이 있는 것이다.
-좋은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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