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나기까지의 사연들
우선 파리 여행을 꿈꾸게 된 그 연유부터 적어보겠다.
10여 년 전 어느 날 갑자기 “프랑스어 공부를 해보자.”라고 마음먹은 것이 나중에 파리 여행을 하게 된 맨 처음 시발점이었다고 생각된다. 왜 갑자기 프랑스어 공부를 하려고 생각하게 되었는지 그 점에 대해서는 나 자신도 뚜렷하게 설명하기가 힘들다.
그러나 아마 매일같이 반복되는 일상생활의 지루함에서 벗어나려는 하나의 몸부림이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직업 아닌 무엇인가에 몰두할 수 있는 어떤 대상을 물색하던 중 프랑스어가 그 표적으로 떠올랐던 것이다. 그런데 문법의 이해는 자습으로도 그럭저럭 할 수 있었으나, 그 까다로운 발음만은 자습으로는 도저히 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던 중 다행스럽게 대구에도 ‘아리앙스 프랑세에즈’가 문을 열게 되었다.
프랑스 정부의 후원 아래 프랑스어와 프랑스 문화를 보급하기 위하여 전 세계 수백의 도시에 설립, 운영되고 있는 ‘아리앙스 프랑세에즈’가 서울에 이어 대구에도 생기게 된 것이다. 그래서 거기에 부지런히 드나들며, 프랑스어 공부도 하고 프랑스 영화도 감상하면서 지나는 사이에 처음에는 ‘파리에 한번 가보았으면 얼마나 좋을까’라던 생각이 어느 새 ‘파리에 꼭 가보아야겠다.’라는 마음으로 자연스럽게 바뀌고만 것이다.
그 동안 단체 여행에 따라갈 기회는 여러 차례 있었으나 번번이 그 여행 방법과 여정이 내 생각과 일치하지 않아서 수년간 미루어만 오게 되었다. 그러던 중 50세 이상 관광 여행 허용이라는 새로운 제도 덕분에 나의 오랜 꿈이 늦게나마 이루어지게 된 것이다.
바로 은행에 예치금 수속을 하고 본격적인 준비에 들어갔다. 여행사와의 빈번한 접촉이 시작되었다. 우선 유레일 패스에 관한 팜플렛과 유럽 기차 시간표를 요구했더니, 여행사 직원이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지금까지 유레일 패스를 들고 혼자 유럽으로 떠난 사람이 자기네 여행사에서는 한 사람도 없었다는 이야기였다.
유레일 패스란 것은 유럽과 북아프리카 이외의 지역에 사는 사람들만이 사용할 수 있는 유럽의 기차 특별 할인 티켓인데, 이 티켓은 반드시 출발 전에 자기 나라에서 사가지고 가야지 유럽에 가서는 사지 못하게 되어 있다. 또 ‘유레일 유스 패스’란 것도 있는데, 이것은 26세 이하의 젊은이들을 위한 것으로 아주 싼 값인 대신에 2등 차만을 이용할 수 있게 되어 있는 패스이다.
패스의 유효 기간은 7일, 15일, 21일, 1개월, 2개월, 3개월 등 여러 가지가 있어서 자기의 형편과 여정에 맞추어 구입할 수 있게 되어 있고, 그 기간 안에는 회수의 제한 없이 몇 번이라도 이용할 수 있다. 그래서 나는 230불을 주고 15일 동안 이용할 수 있는 티켓을 사기로 했다.
파리 시내의 지리는 벌써 머릿속에 훤할 때여서(!) 주로 기차 여행에 관한 것을 공부했다. 열차 시간표를 보는 방법, 좌석을 예약하는 방법, 침대차에 관한 것, 바른 열차의 바른 칸에 타는 방법, 그리고 역 구내에서 돈 바꾸고 호텔 예약하는 것들을 익혀 나갔다. 바른 열차의 바른 칸이란 말이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나, 이것이 매우 중요한 점이었다.
가령, 스위스의 제네바에서 밤 침대차를 타고 이탈리아의 로마로 갈 때, 열차만 확인하고 아무 칸에나 올라탔다가는 아침에 눈을 떴을 때 오스트리아에 가 있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로마로 가는 긴 열차에 딴 곳으로 가는 칸이 연결되어 있는 수가 있다는 이야기다.
지도와 열차 시간표를 펴놓고 여정을 짜기 시작했다. 유레일 패스를 가지고 갈 수 있는 나라가 16개국인데, 그중에서 가보고 싶지 않은 나라가 하나도 없으니 여정을 짠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었다. 남쪽으로 스페인이나 포르투갈에도 가보고 싶고, 북쪽으로는 덴마크나 핀란드, 오스트리아에도 가보고 싶었다. 그래서 즐겁고도 힘든 도상 여행을 여러 날 되풀이한 끝에야 여행 코스를 확정할 수 있었다.
아주 정확한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단신 여행이라는 문제만은 그리 쉽게 매듭지어지지 않아 끝까지 나를 괴롭히고 망설이게 만들었다. 혼자 떠나련다는 말에 듣는 사람마다 모두 이상해했다. 그러나 진정 자유로운 여행, 자유로운 몸이 되기 위해 기어코 혼자 떠나기로 했다.
이러한 우여곡절 끝에 지난해 4월 말, 항공권과 여행자 수표와 유레일 패스를 집사람이 만들어 준 귀중품 주머니에 넣고, 그것을 ‘찰스 브론슨’이 찬 권총처럼 왼편 겨드랑이 밑에 매달고는, 그 잘하는 프랑스어(?) 하나만을 믿으며 용감하게 혼자 김포 공항을 떠났던 것이다. ‘긴 여행에서 돌아온 후에도 달리진 데가 하나도 없는 사람’이 되지 않기를 기원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