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4.6.6 역사상 최대의 군사작전인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개시하다
| 독일과 일본, 이탈리아의 파시즘 동맹의 기세는 자못 거셌다. 독일은 프랑스를 점령함으로써 영국을 제외한 서유럽 전역을 집어삼켰고, 이탈리아는 에티오피아를 침공했으며, 에스파냐의 프랑코 정권은 독일과 이탈리아의 지원을 받아 파시즘 정권을 수립했다. 일본은 필리핀 인도네시아 미얀마를 점령하면서 아시아의 패권을 장악하였다. 그야말로 파시스트의 세상이 도래하는가 싶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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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치 독일의 멸망을 가져온 작전, 영웅이 된 사령관 아이젠하워
그러나 전쟁과 영화와 신화는 반전의 드라마이다. 독일은 나폴레옹의 전철을 밟아 러시아 원정에 실패하면서 기세가 꺾이기 시작했고, 일본은 태평양 전쟁에서 미군에 연달아 패하면서 힘을 잃었으며, 아프리카에서도 독일과 이탈리아가 밀리기 시작했다. 무엇보다도 제2차 세계대전을 연합군의 승리로 이끈 결정적인 계기는 1944년 6월 6일 개시된 노르망디 상륙작전이었다. 작전을 성공시킨 최고의 힘은 목숨을 바쳐 싸운 장병들이었겠지만, 이들을 총지휘한 연합군 사령관 드와이트 데이비드 아이젠하워의 리더십도 큰 역할을 했음은 물론이다. 원래 계획은 하루 전인 6월 5일에 감행할 예정이었으나, 거센 비바람이 연합군의 발길을 막고 있었다. 기상 상태를 세심하게 검토한 결과, 6일 오후에는 비가 개고 바람도 잠잠해질 것이라고 예측됐다. “사령관님, 어떻게 할까요?” 부하 지휘관들은 모두 아이젠하워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이젠하워는 지나치게 심각해지지 않으려 노력했다. 그는 아무리 복잡한 상황도 단순화시킬 수 있는 특별한 능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좋다, 하자!” 무심한 듯 낮게 말했지만, 그 목소리의 단호한 어조는 성공에 대한 확신에 다름 아니었다. 운명의 시간이 바다를 건너 노르망디의 육지로 오르고 있었다. 이 작전이 성공하면 대규모의 연합군이 프랑스를 지나 독일의 심장부까지 밀어붙일 수 있을 것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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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6월6일 제101공수사단에게 작전을 지시하고 있는 아이젠하워
특공대가 주요 교량을 점거하고 나치의 통신망을 두절시키는 동안 미군 제82공수사단과 제101공수사단이 생메르에글리즈 시 근처에 상륙하면서 공격이 시작되었다. 연합군 공격부대는 일제히 노르망디 해안의 다섯 곳에 상륙했다. 네 곳에서는 일찌감치 상륙에 성공했다는 보고가 들어왔지만, 오마하 해변 쪽에서는 보고가 늦어지고 있었다. 완전히 날이 밝은 후에야 보고가 들어왔는데, 오마하 해변에서도 상륙에 성공했다는 것이었다. 아이젠하워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낙천적인 아이젠하워였지만 이번 작전에 임하는 마음만큼은 적잖이 긴장했던 터였다. 상륙 당일 수송기 2,316대, 항공기 총 13,000대와 함선 6,000척을 동원하여 7개 사단이 상륙했고, 7월 2일까지 100만여 명의 병력과 57만 톤 가량의 물자, 17만 량의 차량이 상륙하였다. 당연히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 상륙 초기 3주간 동안 연합군은 8,975명이 사망하고 51,796명이 부상했다. 그 대신 약 41,000명의 독일군을 포로로 잡았다. 이 상륙작전에 힘입어 연합군은 치열한 전투를 거듭한 끝에 독일군을 제압할 수 있었으며, 히틀러가 자살한 후 1945년 5월 7일 독일 육군참모총장 알프레드 요들 원수의 항복을 받아냈다. 5년 8개월의 전쟁 뒤에 유럽의 평화가 찾아온 것이었다. 유럽에서의 전쟁을 승리로 이끈 아이젠하워는 세계적인 명장이 되었다. 전쟁에서 얻은 명성은 1952년 34대 미국 대통령에 당선되는 데도 크게 기여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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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움꾼이었던 아이젠하워 형제, 맷집과 배짱으로 친구들 사이에 전설이 되다
드와이트 데이비드 아이젠하워는 1890년 10월 14일 캔자스 주 애빌린에서 데이비드 제이콥 아이젠하워와 아이다 엘리자베스 아이젠하워의 일곱 아들 중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7형제 중 다섯째가 일찍 죽었기 때문에 실제로는 6형제였다. 아이젠하워의 탁월한 리더십은 많은 형제들 사이에서 자연스럽게 길러지게 되었다. 바로 위의 형 에드가와는 늘 함께 다니는 지남철과도 같은 사이였다. 에드가와 드와이트는 무척이나 자주 싸웠지만, 남들과 다툼이 있게 되면 놀라운 결속력으로 똘똘 뭉쳤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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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들과 캠핑을 떠난 어린 시절의 아이젠하워(가운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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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이젠하워 형제들의 싸움 실력은 동네의 화젯거리였다. 특히 에드가의 싸움 실력이 뛰어나 또래 중에서는 당할 자가 없었지만, 드와이트와 웨슬리 메리필드라는 소년의 싸움이야말로 전설이 되었다. 웨슬리 메리필드는 건장한 몸집에 힘이 장사였으나, 당시만 해도 어린 드와이트는 비교적 마른 형으로 힘이 센 편은 아니었다. 지켜보는 소년들은 드와이트가 과연 얼마만큼 버틸 수 있을지 걱정했다. 초반에 심하게 맞았지만 드와이트는 끝까지 버텼다. 웨슬리가 지치자 드와이트의 반격이 시작되었다. 엎치락뒤치락하던 승부는 두 시간이 되어도 나지 않았다. 지쳐서 더 이상 때릴 힘도 없어진 메리필드가 결국 “드와이트, 너한테는 못 당하겠다”라고 말했고, 드와이트도 “웨슬리, 나도 너를 이기지는 못했어”라고 무승부임을 확인했다. 이 싸움은 오랫동안 친구들 사이에 화제가 되었고, 드와이트의 맷집과 배짱은 전설이 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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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젠하워가 훌륭한 청년으로 자란 데에는 현명한 어머니의 교육이 있었다. 어머니는 자식들로 하여금 그날 목표로 한 일은 반드시 달성하게 했다. 목표량을 달성하지 못하면 밤늦은 시각에도 일을 해야 했다. 그 대신 놀 시간도 충분히 주었다. 형제들은 자연스럽게 일하는 시간에는 오직 일에만 몰두하는 버릇이 생겼다. 놀 때는 주로 전쟁놀이를 했다. 스페인인이나 멕시코인을 물리치는 놀이를 즐기다 보면 하루가 금세 저물곤 했다. 어머니는 다른 놀이에 대해서는 참견하지 않았으나 전쟁놀이에 대해서는 반대했다. 어머니 덕분에 형제들은 전쟁은 죄악이라는 생각을 갖게 되었지만, 그래도 전쟁놀이를 멈추지는 못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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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각을 나타내는 일 없이 군인의 길을 걷다 제2차 세계대전을 통해 능력을 인정받다
청년 아이젠하워는 매우 쾌활한 청년이었으며 운동을 좋아했다. 애빌린 고등학교 시절 공부에는 별 흥미가 없었고, 미식축구 선수로서는 상당한 활약을 했다. 육군사관학교에 들어가서도 성적은 별로 좋지 않았지만, 미식축구 선수로서는 좋은 활약을 펼쳤다. 그러나 무릎을 크게 다친 후에는 더 이상 선수생활을 할 수 없게 되었다. 1915년 소위로 임관, 텍사스 주 샌안토니오에서 근무하면서 아이젠하워의 본격적인 군인 생활이 시작된다. 이듬해 사업가의 딸인 매미 제네바 듀드와 혼인하여 두 아들을 두게 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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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로 두각을 나타내는 일 없이 군인의 길에 들어선 아이젠하워가 세계적인 명장이 되리라곤 누구도 예측 못했다. 그러나 그가 미식축구를 하면서, 운동을 못 하게 되자 응원단장을 하면서 쌓은 리더십이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단순 명쾌한 판단력과 집중력, 부하들에 대한 따뜻한 배려는 그의 부대를 최상의 전력으로 끌어올렸다. 제1차 세계대전 중에는 기갑훈련중대의 지휘를 훌륭하게 수행해 훈장을 받았다. 1922~24년에는 파나마 운하 지역에 배속되어 폭스 코너 준장 밑에서 작전명령을 만들었다. 코너 준장의 배려로 입교한 육군지휘참모학교에서는 아이젠하워가 수석으로 졸업했다. 1933년에는 육군 참모총장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의 참모로 다시 한번 능력을 인정받았지만, 미국이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기 전에 아이젠하워는 비교적 음지에서 활약한 편이었다. 1941년 12월 미국이 2차대전에 참여하게 되자 아이젠하워는 당시 육군참모총장인 조지 마셜의 눈에 들어 초고속 승진하게 되는데, 1943년에는 유럽 주둔 미군사령관이 된다. 유럽 주둔 미군사령관은 곧 연합군 사령관을 의미했다. 본래는 영국의 앨런브록이 연합군 사령관이었으나, 미국이 대규모의 병력과 물자를 투입하면서 연합군 사령관은 미군사령관이 맡게 되었다. 영국군은 경험 없는 새로운 사령관에 대해 반발했지만, 아이젠하워는 복잡한 이해관계를 단순하게 해결하는 특별한 능력이 있었다. 아이젠하워는 고도의 균형감각으로 국가간의 의견차를 줄였고, 타고난 유머 감각과 사교력으로 자신의 의견을 관철시켰다. 그리고 유럽에서 빛나는 전과를 거두게 된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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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위로 임관한 이듬해인 1916년 매미 제네바 듀드와 결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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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순 명쾌한 생활태도, 솔직 담백한 성격, 탁월한 균형감각이 성공 비결
1945년 6월 개선장군이 되어 미국에 돌아온 아이젠하워는 세계적인 영웅이 되었다. 그는 참모총장, 컬럼비아 대학교 총장,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최고사령관을 거쳐, 1952년 미국의 서른네 번째 대통령에 당선되기에 이르며, 1956년 재선에도 성공하게 된다. 첫 재임기간에는 미국경제가 호황을 누렸고, 한국전쟁도 휴전으로 이끄는 등 성공한 대통령으로 평가 받았다. 그러나 재선 때는 경제가 정체되고 소련이 먼저 인공위성을 발사하게 되자 비판을 받기도 했다. 특히 1957년 대법원의 흑인차별 위헌 판결에 반대하여 일어난 폭동은 재임기간 중 최대의 암초였다. 1960년 6월에는 미국 대통령으로서는 처음으로 한국을 방문하기도 한다(대통령 당선 직후인 1952년 12월에도 방한한 적이 있다). 1961년 아이젠하워가 임기를 마치고 대통령직을 물러나자 의회는 그에게 군의 원수 계급을 회복시켜주었다. 그는 은퇴하여 펜실베이니아 주 게티즈버그에서 회고록을 집필하면서 노년을 보냈다. 1969년 3월 28일 심장병으로 사망하였다. 8년 동안 미국 대통령의 자리에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젠하워의 최대 업적은 노르망디 상륙작전에 성공하여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끈 것이다. 그것이 또한 그의 이후 인생에도 힘찬 동력을 제공하면서 더욱 위대한 인물을 만들 수 있었다. 미국 대통령학의 전문가 프레드 그린슈타인은 저서 <위대한 대통령은 무엇이 다른가>에서 아이젠하워를 여론이 입혀놓은 강렬한 색채 때문에 제대로 보기 힘든 대통령으로 꼽았다. 그는 대통령이 되기 전에 이미 위대한 영웅이었기에 여러 정책을 자신이 주도적으로 실시하면서도 부하들에게 공로를 돌릴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미 영웅이 되었다 하더라도 그것은 쉽지 않은 미덕일 뿐만 아니라, 부하들에게 공로를 돌리는 따뜻한 배려가 사실상 그를 영웅으로 만든 원동력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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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르망디 상륙작전 승전 뒤 지휘관들과 함께한 기념 촬영. 아랫줄 왼쪽에서 네 번째가 아이젠하워이다.
아이젠하워의 성공 비결은 단순하고 명쾌한 생활태도에 있으며, 솔직하고 담백하면서 소탈한 대인관계, 탁월한 균형감각에 있었다. 단순하고 명쾌한 생활태도는 강한 집중력을 가능케 했고, 단순하고 명쾌한 상사의 뜻은 부하들에게 명확하게 전달되었다. 아이젠하워는 위기가 닥칠수록 복잡한 것을 단순화하여 어려운 문제를 쉽게 해결하곤 했다. 그는 또 대인관계에서 지나치리만치 솔직했다. 아이젠하워의 전기를 쓴 존 건서(John Gunther)는 “그는 공식적이 아닌 회담에서는 옆 사람이 아슬아슬할 정도로 자기가 생각하고 있는 것을 솔직히 말해버리는 버릇이 있다”라고 말한다. 아이젠하워의 이런 솔직한 성격은 그를 신뢰할 만한 사람으로 만들어주었다. 지나치게 솔직하게 말하다가 낭패를 볼 수도 있는 법이지만, 이때는 그의 균형감각이 위험을 막아주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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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가 추천하는 덧붙여 읽으면 좋은 책
앨런 액셀로드의 <아이젠하워의 리더십>(유병태 옮김, 아진, 2007)은 연합군 사령관으로서, 미국의 대통령으로서 아이젠하워가 보여준 리더십의 의미를 밝히고 있다. 최고경영자 또는 최고경영자가 되고자 하는 독자를 상대로 설명했지만, 누구나 크고 작은 사회의 리더가 될 수 있는 것이므로, 모든 독자에게 도움이 되는 책이다. 아이젠하워의 생애를 통해 배울 수 있는 리더의 덕목을 하나하나 짚어주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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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네스 S. 데이비스의 <아이젠하워/루스벨트 부인>(신일성 옮김, 일신서적출판사, 1995)은 드와이트 아이젠하워와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의 부인 프랭클린 델러노 루스벨트의 생애를 정리한 전기이다. 아이젠하워의 경우, 잘 알려지지 않은 어린 시절의 일화들이 특히 재미있다. 아이젠하워가 대통령 시절을 정리한 회고록 <아이젠하워>(한림출판사, 1984)는 재임 시절에 있었던 사건들을 세세하게 기록한 책이다. 대통령으로서의 그가 어떤 고뇌를 갖고 있었으며, 어려운 문제가 있을 때 어떻게 대처했는지 확인할 수 있다. 현재 절판되어 도서관에서 빌려보아야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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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 차창룡 / 시인, 문학 평론가
- 글을 쓴 차창룡은 1989년 <문학과 사회> 봄호에 시를발표하면서 등단했다. 1994년 세계일보 신춘문예 문학평론 부문에 당선됐으며, 제13회 김수영 문학상을 수상한 작가다. <고시원은 괜찮아요>, <해가 지지 않는 쟁기질> 등 다수의 시집으로 독자들과 만나고 있다.
이미지 gettyimages/멀티비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