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6. 25. 주일예배설교(요한복음 강해 63)
요한복음 18장 1~11절
다 아시고
■ 난센스 퀴즈입니다. 닭을 기르는 고등학교는? 닭치고! 모르시고 반대편에 있는 고등학교는? 아시고!
오늘 설교 제목은 ‘다 아시고’입니다. ‘다 아시고’는 모르는 것이 전혀 없다는 의미입니다. 더욱이 앞으로 일어날 모든 일에 대해서도 모르는 것이 전혀 없다는 의미입니다. 대단하지요? 누구신가요? 그렇습니다. 예수님이십니다. 하나님이시니 당연하신 것이지만 대단하신 것은 사실입니다.
그런데 앞으로 일어날 모든 일에 대해서 다 안다는 것이 ‘과연 다 좋기만 할까?’라는 것입니다. 미리 대비하여 마음을 단단히 먹을 수 있으니 좋을 것 같지만, 이는 일어날 일이 좋은 일인 경우에 한해서입니다. 나쁜 일, 고통스러운 일인 경우에는 오히려 더 심란할 수 있습니다.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기 때문입니다.
최근 이세빛 선생이 사랑니를 발치 했습니다. 해야 할 두 개 중에 하나를 한 것입니다. 룰루랄라까지는 아니었어도 행복한 표정으로 치과에 도착했고, 발치실로 입장했습니다. 그런데 발치 후, 표정은 매우 고통스러웠습니다. 곧 다른 사랑니를 발치 해야 하는 데 과연 할 수 있을까를 걱정하고 있습니다. 어떤 일이 일어날지 다 알기 때문입니다.
일어날 모든 것을 ‘다 아시고’ 있는 예수님께서 오늘 본문의 상황을 어떻게 견뎌내셨는지 궁금합니다. 여러분도 궁금해하시길 바랍니다.
■ 오늘 본문의 사건은 앞의 사건과 이어져 있습니다. 1절입니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제자들과 함께 기드론 시내 건너편으로 나가시니 그 곳에 동산이 있는데 제자들과 함께 들어가시니라.” 본문은 앞의 대제사장의 기도를 드리시고 난 후 일어난 사건입니다. 그런데 기도를 끝내신 후 가신 곳이 기드론 시내 건너편에 있는 동산이었습니다. 2절에 설명이 있다시피, 이 동산은 종종 제자들과 만나곤 하시던 곳이었습니다. 그러니 당연히 가룟 유다도 잘 아는 곳이었습니다.
그런데 기도 후 가신 곳이 여기셨습니다. 가룟 유다가 배신을 결심하고 이를 실행하고 있다는 사실을 다 아시는 주님이십니다. 예수님을 잡기 위해 예수님의 동선을 이 잡듯 하고 있는 판에 이곳에 가신 것입니다. 왜? 한 가지 외에는 달리 해석할 게 없습니다. 잡히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렇습니다. 의도적으로 이곳에 가셨습니다. ‘하늘의 거룩한 희생양 속죄 대업’을 이루시기 위해 이곳으로 가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곳은 ‘다 아시고’ 가신 것입니다. 이를 4절 상반절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그 당할 일을 다 아시고” 예수님을 잡기 위해 예수님의 평소 루틴(routine)을 추적하고 있던 가룟 유다는 이 타이밍에 이곳을 떠올린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가 이곳으로 올 것을 이미 ‘다 아시고’ 계셨습니다.
역시 가룟 유다는 이곳으로 왔고,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런데 요한복음은 가룟 유다의 모습을 여기까지 설명하는 것으로 끝냅니다. 3절부터 5절을 보실까요? “유다가 군대와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에게서 얻은 아랫사람들을 데리고 등과 횃불과 무기를 가지고 그리로 오는지라. 예수께서 그 당할 일을 다 아시고 나아가 이르시되 ‘너희가 누구를 찾느냐?’ 대답하되 ‘나사렛 예수라’ 하거늘, 이르시되 ‘내가 그니라’ 하시니라. 그를 파는 유다도 그들과 함께 섰더라.” 딱 여기까지만 가룟 유다를 설명합니다.
그러나 공관복음서인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은 하나같이 가룟 유다의 적극적인 행동을 보여줍니다. 그것은 가룟 유다가 예수님께 입을 맞추려는 행위에 대해서입니다. 이렇게 공관복음서는 가룟 유다를 많은 분량으로 설명하는 데 요한복음은 존재감 없이 처리해버립니다. 이유가 무엇일까요? 요한복음은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드러내는 데 관심이 있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의 관심은 예수님의 신성성, 하나님이심,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드러내는 데 있습니다. 그렇기에 가룟 유다가 무엇을 했다는 것에 그리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이를 “다 아시고”라는 설명으로 이 사건의 메시지를 휘어잡은 것입니다.
“다 아시고”는 하나님만이 가지신 능력입니다. 그렇기에 “다 아시고”는 예수님이 하나님이심을 드러내는데 매우 적합한 표현입니다. 이것이 요한복음의 특징입니다.
그런데 또 하나의 행위가 예수님이 하나님이심을 증거 합니다. 4절부터 6절입니다. “예수께서 그 당할 일을 다 아시고 나아가 이르시되 ‘너희가 누구를 찾느냐?’ 대답하되 ‘나사렛 예수라’ 하거늘, 이르시되 ‘내가 그니라’ 하시니라. 그를 파는 유다도 그들과 함께 섰더라. 예수께서 그들에게 ‘내가 그니라’ 하실 때에 그들이 물러가서 땅에 엎드러지는지라.”
이 상황, 이 행위에 대한 묘사는 요한복음에만 있습니다. 이유는 앞선 설명과 같은데, 예수님이 하나님이심을 드러내기 위한 요한복음만의 특징적 묘사인 것입니다. ‘내가 예수다’라고 하시자 그들이 즉시 뒤로 나가떨어졌는데, 이는 하나님의 능력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이렇게 요한복음은 예수님의 신성성을 드러내는데 전적인 관심이 있습니다.
‘내가 예수다’라는 말씀에 뒤로 나가떨어진 그들에게 다시 누구를 찾느냐고 물으셨습니다. 조금 전과 같은 대답이 나왔습니다. ‘나사렛 예수요.’ 예수님도 역시 조금 전과 같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내가 그다.’ 그런데 이번에는 이 말씀에 부탁을 하나 얹으셨습니다. 8절과 9절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너희에게 내가 그니라 하였으니 나를 찾거든 이 사람들이 가는 것은 용납하라’ 하시니, 이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자 중에서 하나도 잃지 아니하였사옵나이다’ 하신 말씀을 응하게 하려 함이러라.”
왜 이 부탁을 하셨을까요? 제자들을 보전하시겠다는 약속 이행 때문입니다. 요한복음은 예수님의 부탁을 두고 “이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자 중에서 하나도 잃지 아니하였사옵나이다’ 하신 말씀을 응하게 하려 함이러라.”는 해석을 붙였습니다. 이것은 방금 마치신 기도의 한 내용을 상기시키는 것입니다. 17장 12절입니다. “내가 그들과 함께 있을 때에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들을 보전하고 지키었나이다. 그 중에 하나도 멸망하지 않고 다만 멸망의 자식뿐이오니 이는 성경을 응하게 함이니이다.”
이로써 요한공동체는 요한복음만이 갖는 특징을 또 다시 드러냅니다. 하나님이신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목자의 마음입니다. 이 마음은 4장의 우물가의 여인과의 만남에서 볼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8장의 간음 중에 잡혀 온 여인을 대하심에서 볼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10장의 양을 대하는 목자의 비유에서 볼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17장의 대제사장의 기도에서 볼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의 절정이 18장 9절입니다. “이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자 중에서 하나도 잃지 아니하였사옵나이다’ 하신 말씀을 응하게 하려 함이러라.” 결코 지켜주시는 예수님, 끝까지 보호하시는 예수님이십니다.
그런데 굳이 부탁 없이 처리하실 수도 있을 텐데, 왜 굳이 이런 방법을 택하셨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물론 이 내용도 요한복음에만 있는 내용이긴 합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요한복음이 예수님의 신성성을 강조하지만, 예수님의 인간성 또한 놓치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인간적인 부탁을 통해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사람으로 오셨다는 사실을 놓치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의 서술방식은 참으로 성육신적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러한 사실 확인과 함께 더 중요한 사실에 주목해야 합니다. 그것은 ‘다 아시고’ 때문입니다. 이 부탁 뒤에 일어나는 일입니다. 10절과 11절입니다. “이에 시몬 베드로가 칼을 가졌는데 그것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을 쳐서 오른편 귀를 베어버리니, 그 종의 이름은 말고라. 예수께서 베드로더러 이르시되 ‘칼을 칼집에 꽂으라.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아니하겠느냐?’ 하시니라.”
베드로의 행동은 과격했습니다. 원래 성격이 불같기도 하지만, 가룟 유다의 배신행위를 보며 격분했을 수도 있습니다. 또는 예수님을 지켜야 한다는 의리가 작동했을 수도 있습니다. 여하튼 베드로의 행동은 과격했습니다. 대제사장의 종 말고의 오른편 귀를 베어버렸으니 큰 일을 낸 것입니다. 그러나 베드로에게 이 행위는 정당한 것이었습니다. 죄 없는 분을 잡으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은 이 행위를 나무라셨습니다. “칼을 칼집에 꽂으라.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아니하겠느냐?” 무슨 의미인가요? 그렇습니다. ‘자네가 죽어야 모두가 산다. 자, 죽으러 가자.’ 하나님의 이 말씀에 순종하시기 위해 이 땅에 사람으로 오셨고, 지금이 그 일정의 마지막 부분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는 ‘다 아시고’ 오신 분으로서의 태연함, 그러나 고통스러움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 땅에 오신 목적이 모두를 하나님과 화해시키기 위해 오신 것이기 때문에 칼을 휘둘러 불화를 일으키는 베드로의 행위를 용납하지 않으신 것입니다. 더욱이 지금 그 화해의 희생양으로 드려지기 위한 거룩한 걸음을 내딛으시는 순간인데, 베드로의 행위는 이를 방해하는 행위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를 야단치신 것입니다.
그러나 요한공동체는 마태나 마가공동체와 마찬가지로 누가공동체가 서술한 내용을 빠트렸습니다. 의도적이었다고 봅니다. 누가복음만이 말고의 귀를 다시 붙여주신 것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왜 요한공동체는 마태와 마가공동체처럼 이 사실을 빠트렸을까요? 아마 일부나마 베드로의 편을 들어주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을 지키고자 하는 행위를 순수한 행위로 인정하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가끔은 순수함이 과격한 행위를 동반할 때가 있지 않습니까?
■ 결국 이러한 일련의 사건을 예수님은 ‘다 아시고’ 처리하신 것입니다. 그러니 참 쉽지 않으셨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요한복음에는 없지만, 누가복음 22장에는 있는 내용으로, 감람산에서 기도하시는 예수님의 애쓰심입니다. 누가복음 22장 42~44절입니다. “이르시되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니 천사가 하늘로부터 예수께 나타나 힘을 더하더라.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 같이 되더라.”
누가복음과는 달리, 요한복음은 이 사실을 11절에 덤덤히 기록하고 있을 뿐입니다. “예수께서 베드로더러 이르시되 ‘칼을 칼집에 꽂으라.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아니하겠느냐?’ 하시니라.” 그러나 이 또한 ‘다 아시고’ 행동하시는 것으로서 예수님의 신성성을 강조하기 위한 요한공동체의 의도였습니다.
사실 이후를 다 안다는 것, 결코 좋은 것만은 아닙니다. 오히려 모르는 것이 약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죄송할 뿐입니다. 고통의 모든 과정을 ‘다 아시고’도 기꺼이 우리 가운데 오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감사할 뿐입니다. 기꺼이 십자가와 부활의 영광을 공유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다 아시고’ 계신 주님께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어떤 자세로 사는 것이 제자다운 삶일까요? 그렇습니다. 모든 것을 전적으로 맡기고 사는 것입니다.
불안이 아닌 믿음으로, 불평이 아닌 감사로, 불신이 아닌 사랑으로 사는 것, 이것이 주님께 모든 것을 맡기는 삶입니다. 주님은 ‘다 아시고’ 계시니, 이 삶이 우리 모두의 삶에서 늘 보였으면 좋겠습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