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 석가모니, 마호메트, 공자 등 옛 성현들의 가르침을 보자면 다를 것이 별로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다른 성현들처럼 장수하시지 못하고 젊은 나이에 돌아 가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먹혀 죽길 원하셨고, 당신을 먹는 우리 안에 영원히 살아있길 바라셨습니다. 오늘 복음에 예수님은 ‘나를 먹어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을 먹는다는 의미는, 조건 없는 신뢰를 하고 하느님과 하나 될 때 하느님은 우리의 에너지가 되시고, 우리 안에 사시며, 우리를 통해 활동하게 되신다는 뜻입니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있는 빵이다.” 왜 하필이면 ‘빵’이었을까요? 식욕이 당기고 효과가 탁월하다는 웅담이나, 곰 발바닥, 개소주, 산삼이면 어땠을까요? 굳이 빵이라 말씀하신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그것은 매일 먹는 빵, 즉 밥이라는 것이 별맛은 없을지라도 우리가 생존을 위해 꼭 먹어야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빵으로 선언된 사랑이신 예수님의 살, 즉 ‘사랑 덩어리’가 바로 성체(聖體)입니다. 우리가 성체를 먹는 까닭은 참다운 삶을 위해서 사랑이 꼭 필요하기 때문이며, 그 사랑이 바로 영원으로 넘어가는 다리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찮게 여기는 식물도 물과 햇빛을 먹으면 예쁜 꽃을 피웁니다. 우리 인간도 육체의 양식을 먹고 영혼의 꽃을 피우는 존재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미사 때 아무 맛도 없는 성체를 받아먹지만, 그 성체의 힘으로 아름다운 영혼의 꽃, 즉 사랑을 꽃피워야 합니다. 또한 성체는, 몸을 던져 우리를 사랑하다 돌아가신 예수님의 몸뚱이기 때문에 그 성체를 영한다는 것은 예수님의 고뇌와 결단을 우리가 먹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분의 고뇌와 결단을 결코 헛되지 않게 하려면 우리는 먼저, 우리 죄 때문에 당신이 몸을 내놓으셨다는 것을 기억하며 깊이 통회해야 합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사랑을 위하여 가장 소중한 살과 피를 내놓으셨으니, 우리도 사랑을 위하여 가장 소중한 것을 희생하며 살 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성체를 영하는 우리에게, 회개하는 마음과 감사하는 마음과 사랑으로 보답하려는 그 마음이 없다면, 예수님의 죽음은 헛된 죽음이 됩니다.
우리는 오늘도 성체를 먹습니다.
성체를 먹는 사람은 예수님의 사랑을 기억합니다. / 성체를 먹는 사람은 예수님을 닮게 됩니다. / 성체를 먹는 사람은 예수님처럼 늘 하느님의 뜻을 찾습니다. / 성체를 먹는 사람은 예수님처럼 측은지심으로 세상을 바라봅니다. / 성체를 먹는 사람은 예수님처럼 무조건, 한없이 용서합니다. / 성체를 먹는 사람은 예수님처럼 자기 몸을 남에게 먹으라고 내어 놓습니다. / 성체를 먹는 사람은 예수님처럼 의인들을 위해서는 물론 죄인들을 위해서도 죽습니다. / 성체를 먹는 사람은 죽어도 죽지 않고 영원히 살게 됩니다.
7, 8월 삼복(三伏) 더위에는 팥빙수가 먹고 싶다. 그런데 우리는 지난 7월말부터 시작해서 8월말 까지 주일 미사에서 요한 복음 6장(오천 명을 먹이시다 - 생명의 빵)을 봉독하며 빵의 이야기를 듣고 빵을 먹는다.
오늘 요한 복음을 찬찬히 들여다 본다. 8절정도(6,51-58)의 짧은 분량이다. 그 짧은 분량 안에 ‘빵’ 이 51절에 3번, 58절에 3번이나 나온다. 그 사이(52-56)에는 ‘살’ (肉)이 6번 나온다. 빵과 살을 ‘먹는다’ 는 8번이나 나온다. 빵(살)과 피를 먹어 ‘영원한 생명’ 을 얻는다는 내용도 여러 번 나온다. 그리고 예수님 자신을 가르키는 ‘나’ (내)라는 단어는 14번으로 제일 많이 나온다.
오늘 복음은 사실 성체성사론적 가르침이다. ‘먹는 것’ 과 ‘생명을 얻는 것’ 이 근본 주제어이며, 성사적 의미로 말씀되고 있다. 즉, 앞서 말씀하신 ‘생명의 빵’ , ‘하늘에서 내려온 빵’ 이 오늘 복음에서는 ‘생명을 주는 나의 살’ , ‘사람의 아들의 살’ 로 성사적으로 그 단어와 의미가 바뀌고 있다. 그리고 ‘생명의 빵’ , ‘하늘에서 내려온 빵’ 의 표현과 ‘살과 피’ 의 이중적 표현이 이제부터는 ‘나’라는 인격적 표현안에서 통합되어 ‘빵을 ‘먹는다는 것’ 은 ‘나를 먹는다는 것’ 으로 되고 있다.
그러므로 성사적으로 ‘먹는다’ 는 것은 하느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몸을 내어주시어 먹게 하심으로 우리와인격적 일치를 이루시는 특별한 방법이다. 성체성사 안에서 나를 ‘먹는’ 신앙인, 곧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에게 자신의 생명을 나누어 주어 ‘나로 말미암아 ’ 생명을 얻고, 생명을 살게 하는 특별한 배려이고 눈높이 사랑이다.
예수님은 베들레헴(빵집)에서 태어나시고, 카나의 혼인잔치에서 물로써 포도주를 만드시는 첫 기적을 행하시고, 제자들과 함께 복음을 전하면서 ‘먹보’ 라는 별명도 얻으시고, 오천명이나 많은 사람들을 빵 다섯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배불리 먹이기도 하시고, 최후만찬에서는 빵을 손에 들고 감사의 기도를 드리시며 “받아 먹어라! 이는 내 몸(살)이다” 하시고, 오늘도 미사안에서 ‘생명의 양식’ (빵), ‘구원의 음료’ (피)로 우리를 먹이시고 살리신다.
우리는 오늘도 ‘미사’ 에 와서 “미안합니다. 사랑합니다” 라고 통회하며 고백하고, 주님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을 기억하며 말씀과 성체를 받아 모시고 “내 안에 주님 있다” (영성체후) 는 깊은 친밀감 안에서 행복을 느낀다.
누군가 나를 위해 목숨 바치는 사람이 있다면 그야말로 숭고한 사랑, 아름다운 사랑이다. 죽을 때까지 기억하고 감사할 것이다. 그러하기에 우리는 오늘도 미사때 빵(생명의 양식)과 포도주(구원의 음료)를 봉헌하고, 축성하여 받아 먹으며 결심한다.
만일 인간이 스스로 에너지를 만들어 낼 수 있다면 음식을 먹지 않아도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스스로 에너지를 만들 수 있다면 음식을 준비할 필요도 없고, 노동할 필요도 없으며, 다른 사람과 식사할 필요도 없게 될 것이고 자신만을 위해 살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스스로 삶의 에너지를 만들어 낼 수 없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날마다 식사를 거르지 않고‘먹으며’살아가는 존재입니다. 그렇다면 식사를 하는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생명을 유지하기 위함일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신앙인들에겐 밥을 먹는다는 것이 단지 생명을 유지하는 것에만 머무르지 않습니다. 우리가 음식을 먹는 것의 또 다른 이유는 식사를 통해 얻는 에너지로 다른 이들, 내 이웃에게 봉사하기 위함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나 자신을 위해 음식을 먹는다면 헛된 나의 욕심을 충족하기 쉽지만, 다른 사람에게 봉사하기 위해 음식을 먹는다면 그 행위는 나눔이요, 사랑이 됩니다.
예수님도 음식을 함께 먹고 나누는 것을 좋아하십니다.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수많은 사람과 음식을 나누셨고 기쁨이 되셨습니다. 또한, 최후의 만찬에서는 말씀하신 대로 영원히 썩지 않을 생명의 빵, 우리의 구원을 위한 살아 있는 빵이 되셨습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이 다른 사람에게 먹히는 빵이 되셨습니다. 친교와 구원의 양식이 되신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 이 빵을 먹는 사람은 누구든지 영원히 살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의 몸을 믿음으로써 받아 모시는 사람은 예수님의 말씀대로 누구든지 영원히 살게 될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 곧 하느님과 마주하며 산다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일입니까! 믿지 않는 사람들의 눈에는 그저 단순한 빵으로 보이겠지만 주님을 믿는 신앙인들에게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생명의 빵입니다.
우리가 잘해서, 똑바로 살아서 주님의 식탁에 초대를 받은 것은 아닙니다. 그저 우리는 주님께서 부르셨기에 응답한 것 외에는 한 것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한없이 사랑하시기에 당신의 생명을 우리에게 값없이 내어 주십니다. 그렇다면 주님의 몸을 받아 모신 신앙인의 삶은 어떠해야 하겠습니까? 나 자신의 생명을 유지하기 위한 빵으로 여기는 것을 넘어서 예수님께서 빵이 되어 생명을 나누어 주신 그 삶을 닮고자 노력하는 삶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생명을 나누어 주는 삶이야말로 독서의 말씀처럼 지혜로운 삶입니다. 또한, 성령으로 충만한 삶이 됩니다. 그렇게 생명을 나누어 주는 사람은 하느님을 찬양하며 감사를 드리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매일 미사 때마다 우리 마음 안에 오시는 주님이 얼마나 감사한지 모르겠습니다. 나의 죄를 용서하시고 새 생명을 주시기 위해 자신의 몸과 피를 내어 주신 주님을 생각하면 그저 고마움과 기쁨의 눈물을 흘립니다. 그렇게 주님은 오늘도 나에게 생명을 주기 위해 빵으로 내려오십니다. 주님을 받아 모시며 주님께서 내 안에 사시도록 청하며 주님의 손과 발이 되도록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 아낌없이 주 는 나 무”라는 동화를 읽어 보신 적이 있습니까? 옛날에 나무가 한 그루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나무에게는 사랑하는 소년이 하나 있었습니다. 나무와 소년은 함께 놀면서 서로 행복한 시간을 보냈습니다. 하지만 세월이 흘러 소년은 나무보다 돈이나 집을, 자신이 추구하는 일들을 더욱 소중하게 여겼습니다.
그래도 나무는 자신의 열매를, 가지를, 줄기를 내어주면서 소년의 행복을 빌었습니다. 물론 함께 있어주기를 더욱 바랬지만…. 이제는 늙어버린 소년이 돌아왔을 때 나무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얘야, 미안하구나. 이제는 너에게 줄 것이 아무 것도 없구나…. 무언가 너에게 주었으면 좋겠는데…. 나는 다만 늙어 버린 나무 밑동일뿐이야….” 하지만 늙어버린 소년은 그저 앉아서 쉴 조용한 곳을 원합니다. 나무는 자신의 나무 밑동에 소년이 앉아있길 바랬고 그리고 다시 행복해졌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인간을 당신 모습을 따라 손수 흙으로 빚어 만드시고 영을 불어넣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수 천년동안 보호하시고 심지어는 당신 외아드님을 우리 구원을 위해 보내주셨습니다. 오늘 그 예수님께서 당신의 살과 피를 우리에게 내어주십니다. 우리들이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도록…. 세상의 지혜는 자신의 살과 피를 채워 나가는 것을 말합니다. 보다 좋은 차를 타고, 보다 편한 아파트에 살며, 보다 많은 것들을 가지기를 바랍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지혜는 당신의 살과 피를 내어 주는 것을 말합니다. 자식에게 모든 것을 내어주는 부모님처럼, 소년을 위해 아낌없이 주는 나무처럼…. 나무는 소년이 함께 있어주는 것만으로도 행복했지만 동화를 읽던 어린 시절의 저는 소년에게 감사해야 한다고 말해주고 싶었습니다. 더 이상 받기만 해서는 안 된다고…. 바오로 사도는 에페소인들에게 하느님께 감사하는 것이 지혜로운 사람으로서 살아가는 방법이라고 당부하십니다.
오늘 하루는 감사했으면 합니다. 모든 것을 내어주시는 하느님과 나를 위해 희생하시는 분들에게…. 그리고 한 번쯤은 예수님처럼…. 아낌없이 주는 나무처럼…. 사랑하는 이들을 위해 내 몸과 피를 나누어 보았으면 합니다.
남부의 클라라 봉쇄 수도원에서 북부 밀라노까지 순례를 하면서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던 기억을 떠올립니다. 로마 바티칸의 대성전을 보고서도 사실 눈을 감지 못했습니다. 이 자리에 설 수 있다는 것, 그 자체로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몰랐습니다.
그런데 순례 중에서 가슴 뭉클했던 곳은 다름아닌 성체의 기적이 있었던 성당에서의 미사와 성체강복이었습니다. 지금은 그곳 성당 이름도 기억나지 않지만 276년이나 지났는데도 아직 성체가 훼손되지 않고 성체의 모습 그대로라는, 그 성체를 모신 곳에서의 미사는 두근거림과 떨림이 있었습니다.
자연의 모든 만물은 썩어 없어지는 것이 불변의 진리인데, 형태도 색깔도 변하지 않는 말 그대로 있을 수 없는 기적의 성체가 하나도 아닌 대략 90여 개의 성체를 모신 유리성합을 보면서 순례에 참석했던 모든 신자들이 말 없이 응시하면서 놀라움을 금치 못했습니다.
더욱이 그곳 수사 신부님의 배려로 그 성체로 성체강복을 허락하였을 때, 저는 말그대로 멘붕(멘탈붕괴)상태라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성체를 든 손도 떨리고 심장도 떨리고….
매일같이 미사를 봉헌하면서 성체변화를 의심하지 않았지만, 그래서 성체의 기적을 매일 체험한다고 하면서도 이렇게 새로움을 느낄 수 있었다는 것은 미사에서 오는 은총이 아닐까 싶습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당신이 바로 ‘하늘에서 내려 온 살아있는 빵’이라고. 그리고 Tantum Ergo의 성가 가사처럼 오묘하온 성체신비를 믿음으로 밖에 알 수 없음을 가장 낮은 자의 모습으로 고백하면서 살아 있는 주님의 몸을 감히 모실 수 있는 은총을 청해 봅니다.
꽤 오래전에 소개된 유행가 가사의 일부입니다. “인생은 미완성, 쓰다가 마는 편지, 그래도 우리는 아름답게 써 가야 해. 인생은 미완성, 그리다 마는 그림, 그래도 우리는 아름답게 그려야 해. 인생은 미완성, 새기다 마는 조각, 그래도 우리는 아름답게 새겨야 해.”
시편에도 인생은 길어야 70년, 근력이 좋아야 80년을 산다고 했습니다. 길지 않은 인생을 즐기기가 쉽지 않습니다. 어떻게 살아야 후회 없는 삶을 사는지는 우리 모두의 숙제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오늘 복음 말씀에서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배우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삶의 가치를 말씀해 주십니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 누구든지 이 빵을 먹으면 영원히 살 것이다. 내가 줄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나의 살이다.”(요한 6, 51)
오늘을 사는 우리는 예수님께서 사람들을 배불리 먹이셨던 그 빵을 먹어야 합니다. 세례를 통해 주님의 자녀가 된 우리는 주님의 식탁에 앉을 자격이 있습니다. 우리 각자가 그 자격을 갖춘 게 아니라, 주님께서 거저 주셨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식탁에 앉아 주님의 빵을 먹기만 하면 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때로 그 빵을 먹기를 거부하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볼 일입니다. 차일피일 미루고, 혹 빵에 대한 거부감은 없습니까? 일주일에 한 번 주님의 날에 주님의 식탁에 앉아 주님이 주시는 빵을 먹는 게 얼마나 좋은지 생각해 봅니다. 주님은 오늘도 우리에게 오시고자 합니다. 주님은 오늘도 우리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우리가 성당에 오기만 하면 주님은 반갑게 맞아 주십니다. 성체를 통하여 우리에게 오시는 주님은 우리 각자에게 이르십니다. “잘 왔다. 나를 먹으러 온 거지!”하시며 지긋이 말을 걸어오십니다.
“주님이 얼마나 좋으신지 너희는 보고 맛 들여라.”하신 말씀대로 주님이 주시는 음식을 먹고 기쁘게 살아가도록 노력하는 우리는 오늘도 성체성사의 신비 앞에 무릎을 꿇고 기도 합니다. “주님, 주님이 주시는 빵을 먹고 기쁘게 살아가는 저희를 축복해 주시고, 주님과 함께 삶의 보람을 얻게 해 주시며, 자주 성체를 영하여 주님의 삶을 따르게 저희를 이끌어 주소서.”아멘.
산다는 것은 늘 문제입니다. 먹고 입고 자는 것도 문제이지만 올바르고 지혜롭게 산다는 것은 더욱 문제입니다. 수많은 실수와 부족함 속에서 진리를 찾고, 직면하는 모든 삶의 문제를 정의롭고도 현명하게 넘어선다는 것은 모든 사람의 과제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아주 명쾌하게 이 문제를 해결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지 않으면 생명을 얻지 못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왜냐하면 당신의 ‘살과 피’는 ‘참된 양식이요 참된 음료’(요한 6, 55)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의 보증으로 당신의 존재 방식이자 삶의 방식을 우리에게 알려주십니다. 곧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고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6, 57)이 당신의 방식이라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아버지와 일치하여 존재하시고 사신다는 말입니다.
그처럼 우리도 예수님의 존재방식이자 삶의 방식을 따라야 한다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해서 ‘나를 먹는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 것’(6, 57)이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살과 피’는 그리스도인의 생명을 아주 특별하고 탁월한 방식으로 영위시켜 줍니다. 곧 예수님과의 일치를 통해서만이 우리가 생명을 얻을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그 일치는 매우 역동적인 일치로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르는’(6, 56) 일치입니다.
우리는 영원한 생명을 희망합니다. 왜냐하면 영원한 생명을 얻어야 만이 영원한 기쁨을 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를 위해 영원하신 하느님과의 일치 곧 구원을 우리가 희망하는 것입니다. 하느님과의 일치란 다름 아닌 하느님과 함께 사는 것, 하느님과 함께 있는 것을 말합니다. 이는 평이한 말로 하느님과 <의식주>를 함께 나누는 것이기도 합니다.
<의식주>는 인간 삶에 꼭 필요한 요소를 압축시킨 표현입니다. 나아가 <의식주>는 인간존재와 그 양식을 상징합니다. ‘입는 것(衣)’은 신분을 의미하는 것으로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 하느님의 백성으로 자처합니다. 다시 말해 우리는 하느님의 말씀에 따라 일을 수행하는 존재들인 것입니다. 이는 하느님에 대한 우리의 믿음을 바탕으로 합니다. ‘먹는 것(食)’은 생명을 보장하는 방식으로 신앙인은 성체성사를 통해 참된 생명을 영위합니다.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심’으로써 그리스도와의 일치를 이루고 비로소 생명을 이어갑니다. ‘거주하는 것(住)’은 단순히 집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어디에’ 속해 있는가, 곧 자기 존재의 자리를 말하는 것으로 우리는 하느님 나라에 존재합니다. 이는 ‘입는 것’과 ‘먹는 것’의 결과로 이루어집니다. 이렇게 우리 신앙인은 믿음으로 신분을 얻고, 그리스도와의 일치로 생명을 얻어 결국에는 하느님 백성으로서의 우리 존재의 성격이 결정되는 것입니다.
물질적 풍요 속에서 우리는 참된 <의식주>의 의미를 잊고 살아갑니다. 그저 보다 편리하고, 좀 더 풍족하며, 더욱 더 화려한 것만을 쫓아가고 있는 우리들입니다. 넓은 집과 큰 차, 고상한(?) 취미와 운동, 풍족한 식탁 등등이 우리 존재 가치를 결정한다는 분위기입니다. 이웃과 나눔, 소외된 이들이나 장애 있는 이들에 대한 봉사, 사회참여를 통한 정의의 실천 등은 이익 없는 불편하고 귀찮은 것으로 여겨가는 추세입니다. 또한 우리는 신앙의 가르침과는 아무런 관계없이 주변의 여론에만 귀 기울여 세상을 판단하고 활동하고 선택하곤 합니다. 신앙생활은 <의식주>와 직접적 관련을 맺고 있고, <의식주>를 결정하는 것입니다. 주객이 전도되어 혼동해서는 안 됩니다. 분주한 세상일수록 신앙인은 본연의 자세를 찾고 견고케 하며 발전시켜 가야만 합니다. 오늘 하루, 각자의 집안을 둘러봅시다. 그리곤 우리 신앙을 흐리게 하는 것들을 청소합시다.
우리가 자주 사용하는 속담 중에 ‘팔은 안으로 굽는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다들 잘 아시는 것처럼, 가까운 사람의 편을 들거나 정을 주기 쉽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인간사회 안에서 수많은 관계가 존재합니다. 그중에 팔은 안으로 굽는다는 속담이 가장 잘 적용되는 범주는 가족입니다. 왜 그런가요? 네. 바로 가족은 혈연으로 맺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혈육으로 맺어진 끈끈한 인연이 있기에, 미워도 가족의 손을 먼저 들게 되는 것이지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 누구든지 이 빵을 먹으면 영원히 살 것이다. 내가 줄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나의 살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들은 유다인들은, “저 사람이 어떻게 자기 살을 우리에게 먹으라고 줄 수 있단 말인가?”라고 대꾸합니다. 그들은 예수님 말씀의 깊은 뜻을 알아보려고 하지 않고, 단순히 살을 인간의 몸으로 오해했던 것입니다. 사실 사람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신다는 표현은 정말 끔찍한 장면을 연상케 하는 표현입니다. 이 표현 때문에 로마 시대에 많은 그리스도인은 박해를 받았고, 우리나라에서도 포졸들이 미사 드리는 것을 오해하여 사람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신다는 죄명으로 신자들을 체포했습니다.
그럼에도 세상의 참된 양식이며 참된 음료이신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거듭거듭 당신의 살을 먹고 당신의 피를 마셔야만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가족이 혈육으로 불가분의 관계를 맺게 되는 것처럼, 예수님의 성체와 성혈을 받아 모시는 사람만이 세상에 생명을 주는 예수님과 불가분의 관계를 맺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성체를 모심으로써 우리는 예수님과 하나가 되어, 그분의 생명에 참여할 수 있게 됩니다.
예수님과 온전히 하나가 되는 영성체 시간. 다른 사람의 뒤를 따라 나와 아무 생각 없이 받아 모시기보다는, 습관적으로 녹여 영하기보다는 예수님과 온전히 하나가 되겠다는 마음으로 모셨으면 좋겠습니다. 바로 그럴 때 우리 안에 새로운 생명이 시작됩니다. 우리와 불가분의 관계를 맺기 바라시는 예수님의 깊은 뜻을 헤아리면서, 오늘 봉헌하는 이 미사 시간, 열심한 마음으로 예수님의 몸을 모실 준비를 하고 영하셨으면 좋겠습니다.
시작기도
오소서 성령님, 제가 말씀을 ‘참된 양식과 참된 음료’로 삼아 생명의 길을 걷게 하소서.
세밀한 독서(Lectio)
우리가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져 확인할 수 있는 것만이 존재하는 것이라고 확언한다면 보이는 것 뒤에 감추어진 영원한 생명을 어떻게 만날 수 있을까요?
오늘 말씀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있는 빵’, ‘누구든지 먹으면 영원히 살게 하는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나의 살’로 귀결하시며, 이제 ‘성체성사’라는 새로운 가르침을 시작하십니다.(요한 6,51)
생명의 빵을 계시하기 위한 표징으로서 오천 명을 먹이신 빵의 기적이 “파스카가 가까운 때”(6,4)에 일어났다는 것을 떠올리니, “주다” “나의 살”(51ㄷ절)이라는 단어에서 희생적인 죽음과 함께 “파스카의 어린양”(1,29 참조)이 떠오릅니다.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은 하느님 아버지로부터 파견되어 우리 가운데 오신 현존하는 하느님의 선물로서 예수님 자신이십니다.(6,35.51ㄱ; 참조: 1,14) 이제 예수님은 현세적인 ‘생명의 빵’에서 미래적인 선물, 곧 어린양이 되어 “세상에 생명을 주는 살”이 되십니다.(6,51ㄷ; 참조: 12,32) ‘세상에 생명을 주는 나의 살’은 공관복음서에서 최후의 만찬에 언급된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피’(마태 26,28; 마르 14,24)와 비교되는 희생적 사랑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인간이 모르는 것, 체험하지 않은 것은 언제나 논란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더욱이 ‘말씀’을 이해하여 믿고, 받아들인다는 것은 편협한 인간한테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생명을 주는 나의 살’이란 예수님의 말씀은 “저 사람이 어떻게 자기 살을 우리에게 먹으라고 줄 수 있단 말인가?”(요한 6,52) 하고 다시 ‘유다인들 사이에 다툼’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예수님의 계시 말씀을 인간적으로만 듣는 그들의 논란은 결국 예수님에 대한 거부를 드러냅니다.(탈출 17,2-3; 민수 20,3-5 참조) 그러나 그들의 논란은 모세의 천상 선물인 만나를 당신의 몸과 피로 완전하게 하실 것이라는 결론에 이르게 합니다.(요한 6,58)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신 예수님의 ‘살과 피’는 오해나 불신이라는 그 어떤 다툼에도 불구하고 그 실체로서 심판과 구원의 효과를 내포합니다.(53-54절) 사람이 영원한 생명을 얻거나 잃는 것은 그 누군가의 판정에 의한 것이 아닙니다. 영원한 생명을 주는 그분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지 않았다는 자체로 이미 심판을 받는 것입니다.(53절; 참조: 3,18) “길이 남을 양식”은 “사람의 아들”이 줄 것인데(27절), “사람의 아들의 살을 먹지 않고 피를 마시지 않으면, 영원한 생명을 얻지 못할 것”이기 때문입니다.(53절 참조) 이처럼 심판이란 자기 자신의 선택으로 영원한 생명에서 제외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사람은 ‘마지막 날에 그를 다시 살릴 것’이라는 종말론적인 구원에 대한 약속이 6장에서만 4번이나 언급됩니다.(39.40.44.54절; 참조: 3,16-17) 예수께서 ‘참된 양식’과 ‘참된 음료’가 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적 죽음과 사랑으로 우리한테 생명을 부여하고(55절) 그분의 부활로써 우리의 구원을 완성하시기 때문입니다.(3,14-15 참조)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있는 빵”(6,33.41.50.51)은 “내 살과 내 피”(51.54.55.56절)라는 이중적인 표현에서, 다시 ‘나’라는 인격적인 표현 안에 통합되어 “나를 먹는다.”(57절)라는 표현이 됩니다. 이는 단순히 ‘먹는다’는 실제 행위에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살아 계신 그리스도와의 인격적인 일치를 이루는 결속 관계를 뜻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분을 먹는다.’는 것은 말씀이 사람이 되신 그분의 길을 따라 그분의 ‘말씀’을 살아가는 것입니다.(57절; 참조: 13,34; 14,6; 시편 1,1-3) 그래서 우리는 “그분 안에 머무르고, 그분은 내 안에 머무르게”(56절) 될 뿐 아니라 우리는 “그분으로 말미암아 살 것”(57절)입니다.
‘성체’를 받아 모시는 신앙인은 예수 그리스도와 지속적인 사랑의 일치 속에서 이웃과 그리스도의 생명을 서로 나누며,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어야 합니다.(마태 5,13-16) 그렇게 하여 그리스도인은 율법으로 얻을 수 없었던 ‘영원한 생명’을 얻고, 세상은 영원한 생명을 사는 그리스도인으로 말미암아 온 누리가 새롭게 될 것입니다.(요한 6,51.53.58)
묵상(Meditatio)
“내가 줄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나의 살이다.”(51ㄴ절) ‘생명’은 ‘생명’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습니다. 오늘 제게 생명이 되는 일용한 양식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요? 날마다 무턱대고 먹어대던 한 수저의 밥술, 오롯한 성체 앞에서 감사와 죄스러움으로 고개를 숙입니다. 저한테 영원한 생명이 되어 오시는 예수님의 ‘살과 피’에 아무런 조건이 없었듯이 그리고 누군가 저한테 생명이 되어주었듯이, 저도 누군가의 생명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기도(Oratio)
자, 목마른 자들아, 모두 물가로 오너라. 돈이 없는 자들도 와서 사 먹어라. 너희는 어찌하여 양식도 못 되는 것에 돈을 쓰고 배불리지도 못하는 것에 수고를 들이느냐?(이사 55,1ㄱ.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