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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역사평론으로 작성된 글이 아닙니다. 한국사학사를 전공하는 필자가 일본서기를 읽어보고 그 느낌을 적은 것입니다.
창작한 글이라하기에는 현재적 문제의식이 많이 투영되어 있고, 역사평론이라 하기에는 논리의 전개가 칼럼의 제목에 부합하지 않습니다. 이 점 양해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일본서기"의 사학사적 성격
1. 들어가기:
한국과 일본, 중국은 동북아시아에서 오랜 역사를 유지해온 국가이고, 현재 세계사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하는 국가이다. 중국은 14억 인구, 일본은 1억2천명, 한국은 남북한 합쳐 8천만 인구이다. 세 나라는 면적이나 인구에서 큰 차이를 보이고 있으나 국경을 접했거나 가까운 지리적 관계로 이웃국가로서 교역, 관광 등의 밀접한 관계에 처해 있다.
여기서 중국과의 관계는 접어두고, 일본의 역사와 우리역사와의 비교를 위해 일본의 고대의 역사서인 "일본서기"에 대한 평가를 일본역사와 문화의 특수성과 관련지어 살펴보고자 한다. 이는 앞으로 언젠가는 동북아시아 또는 아시아국가가 공동교과서를 집필할 수 있는 날이 오기를 희망하지만 이는 요원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나라 사람은 일본에 대해 잘 알고 있는 것 같으나 실은 역사의 변화와 그 속성에 대해서는 잘 모르고 있다. 일본의 역사는 아시아 역사에서 벗어난 독특한 역사라고 주장되기도 하고 중세, 근세, 근현대의 역사연구는 상당히 깊이 있게 연구되어 있다. 여기서는 고대사에 대한 두 나라 사이에 가지고 있는 인식차이를 염두에 두고 "일본서기"를 소개하고자 한다.
한국의 경우, 비록 우리가 최근에 일본의 식민지 지배를 받았지만 우리는 고대에 일본에 우수한 문화를 전달했던 문화적 선진국이었고, 조선시대까지 문화적으로 우리가 선진이었다고 생각하는 회고적이고 낭만적인 역사인식을 가지고 있다. 일본 고대사에 대한 우리의 관심이 저조한 이유는 일본으로부터 배워올 것이 없었다는 점이다. 이런 학문적 문화적 성향은 조선시대 말까지 일관되게 작용했다.
실제로 일본의 고대사인 "일본서기"는 우리 역사편찬이나 역사학에 거의 영향을 주지 않았다. 김부식의 "삼국사기나 일연의 "삼국유사" 편찬에서도 전혀 참고하지 않았다.
일본은 고대적인 문화유산, 신사제도, 신도주의 신앙, 관혼상제의 전통의 지속, 국호의 지속, 천황제, 연호제, 막부제와 장원제도 등 지속적인 역사의식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현대적 적응에 성공한 역사를 가지고 있다.
일본인 중에는 고대에도 한반도를 지배했다는 일본우월주의 역사인식을 가지고 있고, 현재 역사학계에서 누구도 인정하지 않는 신공황후의 신라정벌설이 오랜 동안 역사인식으로 작용해왔고, 일반 사람들은 이에서 벗어나지 못했는가 하면, 대마도의 이즈하라 시의 신사 안내문에는 신공황후가 신라를 정벌하고 돌아온 첫 기착지라는 안내문이 지금도 써져 있다. 그런가 하면 고대에 일본은 임나부를 통해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의 조공을 받아 왔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는 현대적 의식을 과거에 연장시켜 보는 착시현상이다. 이는 중국에서 현재의 영토에 근거하여 그 땅 위에서 전개한 모든 역사는 중국의 역사라고 주장함과 같은 유형의 도치된 역사인식이다. 만주지역의 고구려 역사를 자신들의 지방정권으로 해석하는 동북공정이 그것이고 고구려의 유적을 유네스코 문화재로 등재하면서 이렇게 서술하고 있다.
그런가하면 한국에서는 일본에 삼한 삼국의 분국이 설치되었고, 일본의 고대문화는 한반도의 전수를 통해 이룩되었다는 설이 제기되고, 심지어는 대마도는 한국 땅이었다는 설까지 등장하고 있으며 인터넷에는 일본이라는 국호는 백제인이 붙여준 것이라는 설까지 나돌고 있다.
그래서 한일 간의 관계를 지리적으로는 가장 가까우면서도 의식적으로는 가장 먼 나라라고 칭한다. 세계에서 일본을 우습게 보는 나라는 우리나라가 유일하다. 운동 경기에서도 일본과의 대결에서는 꼭 이겨야한다는 강박관념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일본 역사의 특수성을 이해함은 반드시 필요한 것이고, 일본을 알기 위해서는 그들의 고대사에 대한 깊은 이해가 필요하다. 일본 고대사의 기본역사자료가 "일본서기"와 "고사기"가 있다. 이 중 고사기는 천왕가의 계보에 대한 이야기를 전하고 있으며, 역사서로는 "일본서기"가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이에 대하여 연민수 등 여러 역사학자들이 상세하게 번역하고 주석을 붙인 "역주일본서기" 3책이 나왔다. 이를 토대로 앞에서 서술한 역사인식을 가지고 이 특성을 살피고자 한다.
2. "일본서기" 편찬과 그 특징
"일본서기"는 28대 천무천황 10년(682)에 국사 편찬의 명을 내려 천도황자(川島皇子) 등 12명의 신료가 참가하여 완성하지 못한 것을 720년에 총31권으로 완성하였다. 마지막 1권은 천황의 계보도이고, 30권이 역사이며, 이는 권, 1, 2는 ‘신대(神代)’라하여 천신과 여러 신의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다. 신대의 맨 처음의 창세기 이야기는 중국 문헌을 옮겨온 것이 확인된다.
"일본서기"는 지금은 ‘니혼쇼키’라고 음독하지만 이 책의 고대발음은 "日本紀”와 함께 ‘야마토부미’이었다. ‘야마토’라는 말은 ‘倭’, ‘大倭’, ‘大和’, ‘日本’을 모두 이렇게 읽어왔다. 일본을 야먀토로 읽는 것은 일본이란 국호를 사용하기 전의 기록을 읽을 때 해당한다. 즉 천황의 일본식 시호명칭으로 올려 진 것은 모두 이렇게 읽는다. 즉 480년 즉위한 것으로 알려진 22대 청녕천황의 시호까지 이에 나오는 ‘일본’이라는 말은 야마토로 읽는다. 이렇게 야마토로 읽는 일본이란 왕의 고유한 칭호는 후일에 정해진 것임을 뜻한다.
일본이라는 국호가 언제부터 사용되었는지는 "일본서기"나 일본의 어떤 문헌에도 나오지 않는다. 일본이라는 국호를 정한 것은 "삼국사기”에 의하면 670년(신라 문무왕10, 일본 효덕천황 大化 원년)이다. 이는 "삼국사기 지리지에서 "신당서 일본전의 기록을 취한 것이다. 이는 당나라에 알려진 시기이고, 실제는 645년 대화개신 때부터 야마토(왜)국에서 동으로 강역을 확장하면서 해가 뜨는 곳이란 칭호를 택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러나 칙령으로 국호의 사용이 천명된 것은 701년의 ‘大寶令’에서이다.
그런데 현재의 일본 열도 내에 살던 원주민을 ‘왜’라고 했다. 왜족이 세운 나라를 총칭해서 왜국이라고도 한다. 3세기 중엽에는 100여 개의 국가가 있었고, 6세기 경에는 50여개 국가가 있었다. “후한서”, “삼국지”에 ‘왜’ 전으로 기술되어 수서까지 ‘왜국’전으로 기록되다가 “구당서”에는 ‘왜국’과 ‘일본국’으로 나누어 기술했으나, "신당서”에서는 ‘일본’으로 기술하되 옛 ‘倭奴國’이었다고 하였다.
"일본서기"가 편찬될 때까지의 과거 ‘日本’을 ‘야마토’라고 읽은 것은 ‘왜’ 또는 ‘왜국’의 역사가 규수(九州)의 국가에서 본슈(本州)의 동쪽으로 국가통합을 이루어 간 모습을 반영한 것으로 판단된다. ‘야마토’란 3세기 경에 구주 지방에 있었던 ‘야마타이(耶馬臺)’라는 국가명칭에서 유래한 것으로 왜는 종족의 이름, 국가이름, 지방의 지명을 뜻한다. 중국 문헌에 일본 땅의 여러 나라를 왜국이라고 총칭하였고, 이는 일본인 자신들도 그렇게 칭한 것이다.
중국문헌에 왜가 알려진 것은 낙랑과 대방을 통해서 알려졌다. 후한 광무제 때에 사신을 파견했다고 하는데 ‘倭奴國’이란 이름이 "후한서”에 최초로 전하고 있는데 이는 신장이 1m 내외의 난장이 족속이라는 뜻으로 이는 아이누 족의 한자식 표현이 아닐까 한다.
3. 일본서기의 특징.
1) "일본서기"가 현전하게 된 이유는 일본이 큰 외침의 전쟁을 겪지 않았던 점이라던지, 천황제가 지속되었다던지 등등 다른 여러 가지 이유를 들 수 있지만 이 책이 편찬된 후 왕실에서 박사들이 이를 강독하는 조처가 7번이나 행해졌고, 그에 대한 훈독방식과 어의 등에 대한 기록을 남겼으며, 강독을 마친 후 연회도 베풀었던 관행에 힘입은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강독 시에 사용된 필사본 3~4부가 현전하고 있으며, 편찬 직후부터 한자를 일본식으로 읽었다고 판단된다. 12세기 경 "석일본서기"라는 책이 편찬되어 이를 보완하는 조처가 취해졌다. 이는 사마천의 "사기”가 편찬된 후 이에 대한 주석서가 곧 바로 나온 점과 유사한 점이다. 이에 반해 한국의 경우, 고구려의 "유기”, 백제의 "서기", 신라의 "국사”가 편찬되었으나 그 책이 전하지 않는 것이라든지. 고려 초의 "구삼국사”, 중기의 "삼국사기”가 편찬된 후 그에 관한 주석서는 나오지 않아 하마터면 이들 책도 전해지지 않았을 가능성이 있었던 점과 대조된다.
2) "일본서기"에는 이전의 왕과 대왕으로 칭하였던 사실을 모두 천황으로 승격시켜 조작함으로써 연대에 신빙성이 있는 기사가 대단히 적다는 사실이다. 즉 연대표기를 천황의 연대로 기록하면서 원년 조 말미에 이해의 간지는 무엇이다로 기록했다. 년 간지는 60년마다 반복됨으로 이는 절대 연대로 확정할 수 없다. 단지 비교연대가 나오는 것은 백제 말기의 왕실 자료에 관한 기록이 보이고 있는 점이다. 이런 백제관련 자료는 인용서목에 보이는 "백제신찬, "백제기, "백제본기라는 서명이 나오고 있어 이들은 백제가 멸망한 후에 일본에 귀화한 사람들이 자신의 선대 역사 기록을 남긴 것으로 이해되고 있고, 이들 자료가 천왕가의 권위를 높이는 방식으로 윤색되어 이용되었다고 이해되고 있다.
백제에서 파견된 인물 예컨대 오경 박사 왕인이나 아직기, 다른 기술자의 후손들이 그들을 자기 씨족의 선조라고 기록되었기 때문에 "일본서기"에 기록을 남기고 있다고 판단된다.
연·월·일을 갖추어 기록한 자료는 "일본서기"가 편찬되기 시작한 권 28~29의 천무천황과 마지막 권30의 지통천황 연간의 기록이다. 이들 자료는 사료적 신빙성이 높고, 그 이전의 성덕태자의 기록, 대화개신의 기록 등을 제외하면 다른 이전의 기록은 몇 년 어느 달의 초하루 간지를 기록한 월, 또는 연만을 기록한 자료가 대부분이다.
"일본서기"는 고대의 분열되어 있던 여러 나라를 천황의 통일국가로 기술함으로써 고대국가가 어떻게 성장 확대되었는지에 대한 내용이 거의 없다. 각 씨족의 조상도 천황과의 관계가 설정되는 경우에만 기록으로 남았다. 그 기록 자체를 믿기 어려운 내용이 대부분이다.
3) "일본서기"는 천황의 본기와 같은 자료로서 그 칭호를 새로이 만들어 넣은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국왕의 칭호를 천황이라고 신격화하고 왕의 칭호를 사용하지 않은 점도 특색이다. 이들 천황은 거대한 고분을 남겼으며, 이들은 철기문화를 가지고 한반도로부터 건너간 기마족의 문화였다. 전방후원분이라는 일본의 고분은 우리나라에서도 그 선례가 다수 확인되고 있다. 이런 고분은 552년 불교의 공인으로 화장제가 행해지면서 서서히 소멸하였다.
또한 "일본서기"에는 당시 불렀다는 노래의 가사가 전하고 있으나 당시의 사용되었던 노래인가에 대한 실재성은 의심스럽다. 권 13까지의 간지 기록이 당 나라 책력인 의봉력에 의거한 것이고 그 이후의 기록은 남조인 송나라 원가력에 의거하였음이 밝혀졌다.
4) 많은 지명과 씨쪽의 기록이 나오고 있다. 이는 천황족과 씨족과의 연관성을 보여주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상고의 기록은 천신 중심, 각종 신의 이야기를 ‘神代’라 하여 다양한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신의 종류는 천신, 지신, 섬 신, 산과 바다, 바위, 동식물 신, 조상신, 칼과 활 등 181명의 신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 이들 신 중 최고신은 천황족의 계보로 확보하고 있는 천신족이다. 신에 대한 이야기로 내용을 달리 전하는 이야기까지 함께 실었다.
이 점에서 "일본서기"는 일본의 신앙인 ‘神道’ 사상의 기본 자료로 큰 의미를 가진다. 일본서기의 역사관은 천황중심, 신 신앙 중심의 역사서라고 할 수 있다. 천황과 관련을 가진 씨족들의 기록을 남기는 데도 깊은 관심이 두어졌다. 이에 나오는 임나에 대한 관심은 유별날 정도로 깊은 관심을 표명했다. 이는 가야를 통한 교류가 활발했음을 뜻한다고 할 수 있다. "일본서기"에는 국내의 법령의 반포에는 많은 자료를 남겼으나 외교적 표문은 한 건을 보이고 있지 않다. 고구려, 백제, 가야, 신라가 조공을 바친 것으로 기술한 것은 천황 중심, 자국 중심의 역사로 윤색된 것을 뜻한다고 할 수 있다.
5) 한자의 읽는 방식에 고유한 음가를 밝히는 훈독(석독)과 음을 따른 음독이 일찍이 발달하여 지명과 관직, 인명을 훈독으로 읽는 방안은 현재의 일본학을 이루게 되는 기초 자산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일본서기" 연구의 기초가 된 것은 카마쿠라 시대인 卜部兼文과 그 아들 兼方이 1275~1301년 경에 강의 노트로 남긴 28권의 "釋日本紀”이다. "일본서기"에 대한 훈고학적 저술이다, 근세 이후 일본에서의 이에 관한 연구는 깊이 있는 많은 연구결과물이 축적해 왔다.
6) 역사를 자국 중심으로 기술하였다. 자기 나라를 천하로 의식함, 고유 연호의 사용, 중국문화를 수용하면서도 자국 중심주의가 강하게 표출되었다. 고대의 율령제도가 확립된 후 정치적 문제를 스스로의 방식으로 해결하여 문화의 독자성을 축적하여 왔다. 또한 한자의 형태를 빌려 50자의 자기 글자를 만들어내고, 한문을 자기 식으로 사용하였다. 이는 과거제도의 수용이나 유교적 의례를 수용하지 않고, 관혼상제를 일본식으로 치루는 전통을 강하게 존속시키는 神祠문화는 이후 정치 문화의 역사성과 연계되었다.
이런 문화의 독자성은 당시의 정치를 이야기체로 서술하는 물어체의 역사서술에서도 찾아진다.
4. 맺음 말
일본 열도는 한국의 남단에서 겨우 200km 떨어져 있다. 동쪽은 망망한 태평양의 바다이고, 오직 서쪽인 한반도는 일본의 청동기, 철기문화와 불교, 유교 문화를 받아들이는 젓줄과 같았다. 이러한 위치로 인해 근대 이전 동아시아의 정치적 변화의 충격을 거의 받지 않았고 독자적인 문명을 이룩하여 왔다. 근세 이전 외침은 1374,1381년 원나라와 고려 연합군이 공격을 취한 것이 유일한 것이었다. 이때 일본은 전력을 모아 대항하였고, 태풍은 일본을 방어함에 크게 효과적이었다.
일본은 7세초 중엽 일본이라는 국호를 사용하기 시작했고, 그 후 지금까지 국호의 개칭이 없었다. 그러나 국호가 언제부터 어떻게 사용되었는지를 모르고 있다. 이는 이에 대한 정확한 역사기록이 없기 때문이다. "일본서기"가 720년에 편찬이 완료되었으나 이에 대한 서문이나 발문이 없다. 그리고 일본 국호에 대한 서술이 없다.
일본의 고대사는 야마토국을 바탕으로 발전했다. 야마토라는 말은 ‘왜’, 대화(大和), ‘日本)이란 글자를 그렇게 읽었다. 야마토국은 3세기 경에 한반도에서 건너간 기마민족이 원주민인 야요이족을 지배하여 고분시대를 열었다. 당시 이주민은 일본 토착민의 20%정도였다.( 80%였다는 인터넷 상의 기록은 오류이다.) 이들은 철기문화를 가진 집단으로 야요이족을 지배할 수 있다. 야마토 국가는 규수지방에서 시작하여 본슈의 동쪽으로 동쪽으로 발전하여 갔다. 100여개의 작은 국가를 통합하여 6세기 경에는 30여 국가가 존재하였다.
야마토 국가의 쇼가(蘇我)씨 가문이 황실의 외척으로서 정권을 장악했다. 이 가문의 쇼토쿠 태자는 552년에 공인된 불교신앙을 지지 후원하여 아스카에 법륭사 등 대사찰을 건축하였다. 아스카 문화가 그것이다. 정권이 쇼가씨에서 후지하라(藤原씨) 가문으로 옮겨지자 645~646년 대화개신에 의해 천황권의 강화, 대화라는 연호의 사용, 조세제도의 중앙 집중화 등 당나라의 율령제에 의한 개혁이 이루어지고 불교와 신교가 융합 절충되는 혁신이 이루어졌다.
668년과 701년의 율령 반포로 토지와 인민을 천황의 직속으로 법제화하고 모든 관료의 등급제를 실시. 씨성의 사여 등 고대국가 체제를 완성했다. 이런 바탕 위에 일본식의 문자가 마련되고 일본식의 역사편찬이 이루어졌다. 이것이 "일본서기"의 편찬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이후 천황이 지방의 호족 세력을 통제함에 실패하고 실권을 무사들에게 빼앗김으로 막부체제와 장원제도를 낳게 되었다. 이는 천황족의 통치술에 한계가 있었기 때문이며, 이는 중국의 통치술의 수용이 중단된 결과에 기인한다고 생각한다. 이후 일본은 과거제도의 수용을 통한 문치나 유교의 정치적 이념이 지배하는 역사를 가지지 않게 되었다.
"일본서기"는 이전의 역사를 고분시대의 주인공인 대왕(오카미)의 시대의 역사를 천황의 역사로 변형시켰다. 중국문헌으로부터 하늘과 땅이 생겨나는 창세기의 이야기를 ‘신대 神代’의 이야기로 꾸며 놓았고, 흡수한 호족들에게 씨성을 내린 고대국가의 율령체제 하에 전승의 이야기를 수집 정리된 것이 "일본서기" 편찬으로 나타났다. 이에는 신들의 이야기를 주로 하고 있는 일본의 고대신앙인 천신을 포함한 잡신사상과 불교사상이 습합되어 신사와 사찰이 함께 공존했다.
"일본서기"는 이런 고대국가의 신도사상을 뒷받침하는 성전이 되었다. 이를 완성한 후 국가에서 이를 강독하고 연구하며, 읽는 방법도 일본식으로 개발하면서 독자적인 일본문명을 건설하게 되었다. 8세기 중엽 당나라 인구는 4,800만명 통일신라는 300만명, 일본의 인구는 600만 명이었다. 이러한 인구는 독자적인 문명을 발전시킬 수 있기에 충분하였고, 일본이 처한 지리적 여건이 역사의 자주성, 이념을 벗어난 현실적 정치를 뒷받침하였다.
일본이 백제가 멸망한 후 백제를 지원하다가 철수하자 당나라 문화 수용도 중단되었으니 894년 이후 견당사 파견이 폐지되어 국내문제를 스스로 힘으로 해결하는 조처를 취했다.
요컨대 720년에 완성된 "일본서기"는 일본이 고대국가의 체제를 유지하는 중요한 문헌으로서 작용하는 사학사적 의의를 지닌다. 역사에서 국제적 조류에 따른 변화가 중요한가, 전통문화의 체제를 지속함이 중요한가의 문제는 단순 비교해서 평가할 수 없다. 각 시대의 평가는 그 시대 대부분의 사람들의 삶이 행복했는가. 억압되었는가라는 새로운 관점에서 살펴야한다고 생각한다.
"일본서기"에 기록된 임나부의 문제는 사료의 신뢰성이 있는 시기의 기록이 아니다, 즉 일본서기가 편찬된 720년으로부터 200~300년 전 이상의 한반도에 관한 기록은 사료적 신뢰성을 확보하지 못한다. 이는 한반도로부터 물품의 교역, 철의 수입, 한자문화, 불교문화 달력, 건축 술 등을 수용할 수 있는 창구가 주로 가야지방이었기 때문이다. 서쪽의 문화수용의 창구가 중요함을 간접적으로 보여주는 자료라고 할 수 있다. 임나부를 통해 가야, 고구려, 백제, 신라의 조공을 받아들였다거나 지배를 했다는 것은 허구라고 할 수 있다. 임나부와 관련된 것으로 광개토대왕의 능비문에 임나가야라는 기록이 보이고 한반도 남부지방에 왜족이 많이 퍼져 있다는 기록이 임나부를 적극적으로 중시하는 경향을 띄게 되었다.
그러나 "삼국사기”에서 배제된 신라통일 전후의 신라 사신의 파견 자료는 적극적으로 수용할 필요가 있는 사료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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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일본은 지금도 여전히 세계가 인정하는 강대국이며 선진국입니다. 우리는 그 동안 일본 역사를 너무 천대시 하였으며, 또한 알려고도 하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역사란?
더 나은 미래를 위해 통찰력을 키우는 것이라면 이젠
우리도 경제적으로나 정치적으로 덩치가 커진만큼 좀더 큰 판단을 하였으면 합니다.
일본서기!
저도 꼭 정독해서 읽어 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한번 꼭 읽어보세요. 신들의 이야기가 자신들의 시조가 천황족과 어떤 관련이 있다는 내용이 여러 설이 있습니다. 이번 광복절은 쓸쓸히 지난 감이 있습니다. 대한민국 건국절인데도 행사없이 지낸듯합니다. 더구나 장마
속에서 의미도 없이 보내지 않았는지요. 역사에 관심을 가지셔서 감사합니다.
많이 배우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일본서기와 일본 고대사를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특히 큰 틀의 전체적인 이해에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선생님. 저 또한 많이 배우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