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의 남단에 웅장하게 솟은 지리산은 총 면적이 440.4km2에 이르며, 1967년 12월 29일에 우리나라의 최초로 국립공원 제1호로 지정되었으며, 전북, 전남, 경남의 3도 1시 4군 15개 읍.면의 방대한 지역에 동서로 약45km의 장대한 능선을 이루고 있으며, 전북관내(107.86km2)에는 지리산의 제2주봉인 반야봉(1752m)과 뱀사골(12km)의 경관을 비롯하여 전적기념관과 실상사의 문화유산과 풍부한 관광자원을 보유하고 있어 사계절 관광객이 끊이지 않고 있다.
지리산은 백두산, 한라산과 더불어 우리나라의 3대 명산으로 꼽히고 있으며, 옛부터 고승들이 대가람을 창건하였고, 대학자인 고은 최치원, 풍수지리에 달통한 도선이 편력하였고, 임진왜란, 일제시대, 6.25 전후의 민족수난의 현장으로 온갖 이픔을 지닌 산으로 문학에 있어, [토지/박경리], [지리산/이병주], [남부군/이태], [태백산맥/조정래]의 작품의 배경이 되기도 했다.
지리산에는 1,400m가 넘는 고봉이 20여개나 되며, 산능에는 천왕일출(天王日出), 반야낙조(般若落照), 노고운해(老姑雲海), 직전단풍(稙田丹楓), 세석철죽(細石철죽), 벽소명월(壁소明月),불일폭포(佛日瀑布), 연하선경(烟瑕仙境), 칠선계곡(七仙溪谷), 섬진청류(贍賑淸流)의 손꼽는 지리 10경이외에도 수림지대와 고원지대가 어우러져 있다.
지리산은 장(壯)하나 수(秀)하지 못하고, 금강산은 수하나 장하지 못하고, 묘향산은 장하며 수하다 했다. '장하다'는 말은 '휼륭하다' '웅장하다'는 뜻이다. 동쪽의 주봉인 천왕봉에서 서쪽의 응봉, 반야봉까지 백여리라 하나 천왕봉의 북쪽 하봉으로부터 반야봉에서 노고단, 종석대를 돌아 만복대, 세걸산을 거쳐 바래봉까지 합하면 이백여리가 넘는다.
이병주의 [지리산학]에 의하면 이 웅장한 지리산 넓이 1,500km2에 3개도 1시4군 15개 읍.면이 들어 있고, 큰 산줄기만도 15개가 되며, 1500m 이상의 봉우리가 18개고, 1000m 이상의 봉우리는 모두 40개에 이른다.
사람들이 넘어 다니는 재가 33개며, 그윽하고 깊숙하며 이름다운 계곡이 73개에 이른다. 여기에 드넓은 고원, 원시림에 가까운 숲이 있으며, 산등성이 곳곳에 음양수, 선비샘이 있고, 계곡에는 불일폭포 등 수많은 폭포와 소와 담이 어우러져 있으며 곳곳에 기암과 괴봉이 솟아있다.
천왕봉, 촛대봉, 반야봉, 노고단 등에서 천하를 조망할 수있다. 남덕유산, 기백산, 남북두개의 백운산, 가야산, 황매산, 응석봉, 자굴산, 와룡산, 무등산, 장수의 팔공산, 진안의 운장산 등 많은 명산들을 조망할 수 있다
* 지리산의 유래
고려때의 [삼국사기], 그뒤의 [삼국유사], [고려사], 조선때의 [신증동국여지승람] 등에 智異(지이), 地理(지리), 地異(지이), 頭流(두류) 등 한자가 통일되어 있지 않고 서로 다르다는 점이다.(두류외에는 모두 자기의 음을 가짐)
지리산의 이름이 한자로 처음보이는 기록은 쌍계사에 있는 고운 최치원(崔致遠)이 쓴 진감선사 대공탑비의 제목에 '故康州智異山雙溪寺(고강주지리산쌍계사)'란 구절이 있다. 뇌천 김부식의 [삼국사기 32권 잡지 1] 제사조에는 '南 智異山(남지리산)'으로 되어 있고, 열전 견훤전에도 '地理山竹箭(지리산죽전)'으로 쓰여있다. 도 그 뒤 [삼국유사]에는 두가지 이름이 다 보인다. 연재우적편에는 '落髮爲從同隱地異(낙발위종 동은지이)'라 했고, 가락국기편에는 '西北地理山(서북지리산)'으로 되어 있다.
[고려사]에는 [삼국사기]의 내용을 옮겨 적었으면서도 '智異山竹箭(지리산죽전)'으로 되어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地異, 地理를 혼용하고 있고, [택리지] [대동지리] 등에는 지리산(智異山)으로 되어 있으며, 일명 두류산(頭流山)이라 한다 했다. 점필재 김종직(金宗直), 탁영 김일손(金馹孫), 남명 조식(曺植), 청파 이륙(李陸) 등의 산행기에는 모두 두류산으로 되어 있다.
[택리지]에는 특히 '백두산의 맥이 크게 끝난 것이므로 두류산이라고도 한다'라는 내용이 있다. 방장산(方丈山)이란 이름은 중국쪽에서 쓴것이며, 삼신산(三神山)도 그와 맥락을 함께하는 이름이라 할 수 있다.
智異山(지이산)을 '지혜가 다른산' '천재이변을 미리아는 지혜있는 산'이라 하거나 智理를 智利의 변형으로 보고 지리(智利)는 대지문수사리보살(大地文殊師利菩薩)의 지(智)와 리(利)를 땄다는 주장이 있으나 무리한 주장들이다.
지리산의 이름은 뜻도 연관성도 분명치 않고 한가지로 통일도 되지않은 한자이름을 써놓고 그것이 옳다 그르다 따질것이 아니라 한글로 '지리산'이라하던지 아니면 지리산의 본뜻을 밝히는데 심혈을 기우려야겠다.
* 전적지
지리산에는 일본에 대항하고 일본을 배척한 것과 관련된 많은 유적이 있다. 노고단에서 남쪽으로 뻗은 왕시루봉, 산줄기가 섬진강과 만나는 지점에 있는 석주관(石柱關/전남사적 제106호/구례군 토지면 소재)은 충의사들의 피맺힌 전적지다.
정유재란때 이곳에서 왜적과 두 차례의 싸움이 있었고 왕득인과 왕의성 부자, 이정익, 한호성, 양응록, 고정철, 오종 등 7의사가 많은 의승병, 의병과 함께 순절했다. 그래서 여기에 남원싸움에서 전사한 구례현감 이원춘의 위패와 7의사를 기리는 7의단이 있고 승병 153명(주로 화엄사 승려)과 의병 3,500명을 모신 '전몰의병지위'라고 새긴 비석이 있으며, '정유전입의병추념비'가 세워져 있다.
또 남원 실상사의 범종은 일본지도를 새겨넣어 종을 때려 종소리가 울려퍼지면 일본이 망하게 된다는 소문이 옛날부터 있다. 그뿐만아니라 지리산은 그 옛날 왜구와 왜란을 피하여 백성들이 찾아든 피난처였으며, 일제때에는 징병과 징용을 피하고 왜놈들의 꼴이 보기 싫어서 도피처로 이용되었고, 6.25때에는 빨치산들은 근거지가 되기도했다
* 사찰과 문화재
지리산은 큰산이라서 큰절이 많다. 옛날에는 골짜기마다 꽤 높은 곳까지 많은 절이 있었다고 한다. 점필재, 뇌천, 남명 등의 명사들이 남긴 산행기와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지금은 없는 절의 이름이 많이 나온다. 장터목 근처의 향적사를 비롯해서 영신사, 천불암, 단속사(최치원이 섰다는 관애암문에, 짚신을 벗어두고 절구경을 하고 나면 짚신이 썩어 못 신는다고 하리만치 큰절이 있었다고 한다), 엄천사 등에 묵거나 거쳐갔던 것이다.
지금도 노고단 아래의 구례에는 화엄종찰인 화엄사와 명필현판이 많은 천은사가 있고, 피아골에 독립운동의 근거지였던 연곡사가 있으며, 하동 화개골에 우리나라 선종불교의 요람이며, 고운 최치원의 자취가 남아있는 쌍계보찰 삼신산 쌍계사가 있다. 또 화개동천 토끼봉 줄기 높은곳에 칠불사가 있다.
남원 산내면 만수천 냇가에 신라 선종 구산 가운데 최초의 산물인 실상사도 큰절이며, 깊고 길고 경관이 아름다운 칠선계곡 들머리에 있는 벽송사도 지리산의 8대 사찰중의 하나이다. 그밖에 산청군 삼장면에 대원사, 내원사, 천왕봉 남쪽 턱밑의 법계사는 정상에서 가장 가까운 절이다. 지리산 주변에는 국보 7점 보물 24점이 있다.
* 지리산 의 의미
1. 사람의 산
한 해 동안 지리산을 찾는 사람은 300만명 정도이고 지리산 주변까지 오는 사람들을 합치면 약400만명에 이르고 있다. 지리산은 말 그대로 하나의 산이다. 하지만 지라산은 그 덩치가 어마어마한 산이다. 천왕봉에서 서쪽 노고단까지 거리가 45km이고 산의 둘레는 320km이다. 지리산은 우리나라 국립공원 제1호로 공원면적이 485제곱킬로미터이고 1억 3천만 평 이상이다. 또한 천왕봉을 포함한 해발고도가 1,000m가 넘는 준봉이 20여개이고 15개의 지능선과 계곡들이 어울려 있는 산이 아닌 산괴라고 불려야 하는 산이다. 무엇보다 이 산은 경남, 전북, 전남등 3개 도와 함양, 산청, 하동, 구례, 남원의 5개군과 그리고 화개, 토지, 산내, 시천, 삼장, 등 15개 면의 행정 구역에 걸쳐있다. 지리산은 그 자락마다 사람들의 마을을 안고 있다. 이 산은 다른 곳에서 찾아오는 탑승객이나 등반객 이전에 3개도, 5개군, 15개 면에 살고 있는 현지 주민들의 삶의 터전이다. 천왕봉에 구름처럼 많은 인파가 몰려드는 것은 등산이 레저 활동으로 대종화된 오늘날의 형상만은 아니다. 이 영봉에는 이미 1000년 전에 성모사란 사당이 세워지고 거기에는 성모 석상이 봉안되었으며, 이 사당을 모시는 남악사가 있다. 이 사당에서는 성모신을 국토 수호의 성신으로 받들어 나라에서 매년 봄과 가을에 중사의 예로써 국태 민안과 풍년을 비는 제사를 지내왔다. 이처럼 지리산은 한국 제1의 자연의 산이자, 사람의 산으로 의연하게 자리하고 있다.
2. 신앙의 산
반야봉, 종석대, 노고단과 같은 봉우리 이름들이 상징하듯이 지리산은 신앙의 산이다. 구름 위에 떠 있는 고봉 준령마다 영기가 서리고, 영봉 준령에서 이어지는 계곡은 웅장하면서도 유현함을 잃지 않고 있다. 지이산이라 쓰고 지리산으로 부르는 이 산은 예부터 금강산, 한라산과 더불어 신선이 내려와 살았다는 삼신산의 하나로 방장산이라 일컬어 왔다. 방장이란 중국에서 먼 옛날부터 동해 가운데 신선이 살고 불로초가 많다고 전하여지는 미지의 신비경인 봉래, 방장, 영주 삼신산의 이름 하나를 따온 것이다. 고대 중국의 진시황이 불로초를 캐러 삼천동자를 지리산으로 보냈다는 전설은 지금까지 전해온다. 우리 민족은 지리산을 신앙의 산으로 받들면서 숭배해 온 것은 남악사, 성모사에서도 전해온다. 신라 때는 시조 박혁거세의 어머니 선도 성모를 지리산의 산신으로 남악사에 봉안했고, 고려 때는 태조 때는 태조 왕건의 어머니 위숙황후를 지리산의 산신으로 성모사에 봉사하였다. 지리산의 국가의 수호신으로 숭앙되는 것은 신라 때부터 5악 가운데 하나인 남악으로 불린 것에서도 알 수 있다. 지리산은 또한 영산으로 무속 신앙의 발원지로 파악되고 있다. 지리산은 또한 영산으로 무속 신앙의 발원지로 파악되고 있다. 천신으로 딸 성모 마고가 지리산에 하강하여 딸 여덟명을 낳아 모두 무당으로 길러 팔도에 보내 민속을 다스리게 했다는 무조설이 그것이다. 천왕봉의 성모 석상은 석가여래 어머니인 마야 부인을 산신령으로 모셨다는 또 다른 주장도 있다. 지리산(智異山)을 地理山
으로 표기한 것도 있는데, 이것은 불교에서 되었다. 고대 불교에서는 지리산을 문수 도량으로 불렀다. 지혜의 보살 문수대성이 이 산에 머물면서 불법을 지키고 중생을 쌔우치는 도량을 삼아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문수사리의 리(理)를 따서 地利山으로 표기했는데 이것이 변형되어 地理山으로 변했을 것으로 보는 것이다. 지리산은 또 다른 이름은 두류라고 불린다. 백두산에서 시작된 백두대간이 여기에 이르렀다는 뜻과 백두산의 맥이 바다에 이르러 잠시 정류하였다는 설이 있다. 두류는 우리말 둘러, 두루에서 연유되었다고 한다. 신앙의 산으로서 지리산은 태조 이성계가 전국 산신을 찾아 기도를 드릴 때 유독 지리산에서만 소지가 올라가지 않았다고 한다. 이성계가 등극한 뒤 지리산을 불복산 또는 반역산이라 부르고 지리산록을 전라도로 귀양을 보냈다고 한다. 지리산의 또 다른 이름은 적구산이라 불린다. 여수반란과 6·25전쟁을 거치는 동안 빨치산이 활동근거지가 됨으로써 얻은 이름이다.
3. 생명의 산
지리산은 사람과 신앙의 산이었고 또 다른 이름의 산은 바로 생명의 산이다. 지리산은 영호남의 지붕으로써 수많은 주민들에게 삶터의 뿌리를 내리게 해주고 있다. 지리산은 15개의 지능선과 15개의 계곡이 남북으로 흐르는 큰 강으로 연결해 주고 있다. 바로 남원, 구례, 하동 땅을 적시고 흐르는 섬진강이다. 해발 1,800미터의 천왕샘을 비롯해 주능선 곳곳에서 끊임없이 샘물이 샘솟고 있다. 청정한 계류가 능선과 골짜기를 끼고 돌면서 옥류청계를 만들어 그 하나하나가 비경을 간직한 채 12동천을 이루고 있다. 칠선골, 뱀사골, 피아골, 밤밭골처럼 담, 소가 비폭과 함께 선경을 빚어 내는 곳 또한 수두룩하다. 지리산은 만년장기의 산괴로 시생대 화강 편마암과 섬록암이 혼합된 지질로 되어 있으며, 암반의 노출부가 적고 평탄부가 많아서 전체의 토질은 매우 비옥하다. 또한 지리산은 한온대가 공존하는 기후이기에 한온대 식물이 무성하게 자라고 있다. 지리산의 식물도 매우 다양하여 식물245종과 초본식물 579종 모두 824종에 이른다. 이 가운데 약용식물 174종 식용식물 285종, 식용겸 약용식물 92종 경제 수종 16종 전식약용 367종 그 밖의 미이용 식물 423종이 군락을 이루고 있다. 울창한 원시림에 동물들과 낙원을 이루고 있다. 포유류 15과 41종, 조류 39과 165종 곤충류 215종 등 모두 421종을 이룬다. 지리산 식물가운데 백두산에서만 자생하다는 백두산초와 금강산에서만 자생한다는 여우꼬리풀이 지리산에서 자생하는 것으로 확인되었다. 그 밖에 화엄사 올벚나무를 비롯한 나도 옥잠화등 희귀식물을 포함하여 사향노루(천연기념물 216호), 하늘다람쥐(천연기념물 328호), 반달가슴곰 수달등 천연기념물을 포함한 희귀동물들도 지리산에 서식하고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언젠가는 호랑이가 발견되고(이야기로는 호랑이를 본 사람들은 있다.) 학설로 인정받는 날이 오지않을까? 지리산은 이처럼 우리들의 삶의 터전과 생명을 주는 산이다. 이렇게 생명을 가지게 된 것은 국립공원
제 1호로 지정된 것에 큰 힘이 된 것으로 우리나라 다른 산천초목도 가꾸고 보살펴야 할 이유가 여기서 느껴진다.
4. 아픔의 산
지리산은 생명과 신앙, 그리고 사람의 산이라고 불려지지만 그 이면에는 아픔을 간직한 산이다. 1951년 2월 5일 설날 다음날인 이 날 지리산 가현 마을에 국군이 들이닥쳤다. 이 군인들은 80가구의 마을에 불을 지르고 사람들을 뒷산으로 집합시킨 뒤 "아무 죄도 없는 우리들을 또 많은 젖먹이들을 왜 죽이려고 하는가, 우리는 죄가 없으니 살려주소"란 말을 사격개시란 말처럼 들으면서 기관총으로 양민을 학살하였다. 이때 시체더미에서 한 청년이 일어나 오른손에 총을 맞은 또 다른 한 여인을 업고 50리 길을 달려가 구했다. 그 때 그 여인은 27세로 가족 모두가 그 학살에 희생되었다. 이 사건은 1960년 지리산 양민 학살 사건 국회 조사단이 현지에서 주민들의 증언을 청취하면서 드러난 비극의 한 면이었다. 1948년 10월부터 1955년 5월까지 지리산은 토벌대와 빨치산의 치열한 싸움터였다. 이 기간동안 지리산은 피의 전장으로 피비린내와 아우성이 절규로 뒤덮인 산이었다. 이때 민간을 빼고 2만 여명의 국군과 빨치산이 계곡 곳곳에서 사라져갔다. 지금까지 말한 부분은 한국전쟁의 일부일 뿐이다.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면 마한, 진한, 가락국, 신라, 백제 등의 국경 전쟁의 한쪽은 항상 지리산이었고 왜구들의 침입이 지리산 주변 마을들을 쑥대밭을 만든 것도 부지기수였다. 정유재란 당시 석주관을 지키던 구례현감 이원춘이 왜군의 대군에 밀려 병사 이복남, 방어사 변은정은 같이 전사했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민간인들은 의병 대열에 나섰는데 모두 왜구의 무기와 병력에 한을 묻고 죽어갔다. 지리산은 또한 동학을 비롯한 크고 작은 농민의 봉기를 하고 넋들이 스러져간 곳이기도 하다.
* 지리산 자연조건.
산이 높으면 비가 그칠 날이 없고, 계곡이 깊으면 물길이 끊어지지 않는다는 옛말처럼 지리산은 구름 없는 날이 없고 계곡 어딘가에는 비가 내리지 않는 날이 없다. 실제로 지리산이 맑은 날은 일년에 80일에서 100일 남짓 된다고 한다 지리산은 중생대 쥬라기 대지각 변동으로 인해 이루어진 만년장기의 산괴이다. 지리산은 아주 거대해서 그 깊이와 끝을 알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지리산을 20번쯤 찾은 사람은 이 산을 죄다 아는 것처럼 우쭐거리나, 그러나 200번 가량 찾는 횟수가 많아지면 이 산에 대해 아는 것이 하나도 없구나"라고 하게 된다고 한다. 이 말은 부산 산악인이 천왕봉 200회를 등정하고 말한 부분이다. 지리산은 남해와 가까이 있으면서도 산세가 높아 대륙성 기후의 영향이 강해 일교차와 한서의 차이가 심하다. 천왕봉의 최고기온은 영상25도 최저 기온은 영하30도라고 한다. 하지만 이건 체감온도가 아니라 온도계의 온도일 뿐이다. 체감온도는 이보다 훨씬 격차가 심할 것이다. 또 표고차의 온도가 현저하여 7월 중순 산밑은 35가 넘지만 산정의 온도는 20도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지리산 여간 강수량은 1,200mm이고 이중 5,6,7,8월에 60%이상이 내린다고 한다. 또 지리산은 강설량이 많은데 지리산 심원 계곡 등은 5월이 되어야 눈이 녹는다고 한다.
* 양왕릉의 의문
지리산의 산봉우리 중 인간과 관계된 산봉우리 이름은 왕산 하나뿐이다. 이 기슭에는 우리나라식 피라미드 돌무덤이 있다. 계단은 7단으로 높이가 7.15미터 최하단의 길이가 20.6미터이다. 중앙에는 감실이 있는데 신주나 성체를 모셔두는 방이라고도 하고, 영혼이 쉬는 곳이란 말도 전해 온다. 돌무덤 앞의 비석에는 신라에 나라를 넘겨준 가락국 왕인 양왕릉이라고 새겨져 있다. 신라에 나라를 넘겨주고 지리산에 있는 별궁으로 들어와 살았기 때문에 나라를 넘겨준 왕이라는 뜻에서 양왕이라 불리는데 실제 이름은 구형왕이었다. 왕산의 돌무덤이 과연 구형왕릉인지에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도 없지 않다. 그러나 김해 김씨 문중에서는 이미 시조라고 생각하고 성역화 작업을 시작했다. 양왕릉이 갔는 역사적 의미는 가락국의 10대 왕으로써 그 실체를 갔고 있어 지리산 일대에 왕국이 형성되어 있음을 알수 있다. 재미있는 것은 양왕 후손이 바로 삼국통일에 큰 힘을 더하고 우리에게 존경받는 김유신장군이라는 점이다.
* 운상원의 옥피리
지리산의 운상원은 아시아반도에 처음 불교가 전래되어 운상원에서 꽃을 피웠다. 이때 불교와 함께 이크탈과 분지라는 현악기라는 피리를 토속 음악에 수용 새로운 음악을 만들게 되었다. 얼마 뒤 운상원은 칠불암으로 이름을 바꾸고, 그곳에 만들어진 아자형 온돌은 긴 겨울을 나기에 쾌적한 공간으로 수도처가 되었다. 칠불암의 전신인 운상원은 그 기원이 지금으로부터 무려 1,800여년전으로 우리나라 최초의 불교의 등불을 밝혔고, 국악의 원류인 범패 음곡의 발상지로 지리산 문화의 꽃을 처음으로 개화시킨 곳이다. 하지만 학계에서는 불교의 지리산 입산은 연기조사가 창건한 화엄사와 연곡사를 창건한 544년으로 보고 있다.
* 운상원의 창건설화
허황옥 공주는 수로왕의 왕비가 되어 왕자 열 명과 공주 두 명을 낳아다. 이중 일곱 왕자가 보옥선사에게 인도되어 입산 수도의 길을 떠났다. 왕자는 가야산에서 3년동안 수도를 하고 지리산에 들어와 운상원을 짓고 이곳에서 보억선사와 함께 2년 동안 수도를 했다. 103년 대보름날 왕자들은 보옥선사와 함께 달을 지켜 보며 시를 짓거나 깊은 상념에 잠겨 머리를 조아리고 있었다. 이때 보옥선사가 지팡이를 내려치자 일곱 왕자들은 갑자기 깨달음을 얻어 성불했다고 한다. 이때 붙여진 이름으로 금왕광불, 금왕당불, 금왕상불, 금왕행불, 그뫙향불, 금왕성불, 금왕공불이 그것이다. 일곱 왕자의 성불 소식을 듣고 김수로왕이 일곱 왕자의 성불한 의미를 살려 칠불암이라고 했다고 한다.
*지리산 십경
1.천왕 일출.
사방이 탁 트인 해발 1,915미터 천왕봉에서 맞는 일출의 장관을 일컫는다. 잿빛 구름바다 저 멀리 동쪽 지편선상에 홍일점이 희미한 서기가 어리어 거대한 태양이 진홍빛 햇살을 내뿜으며 불쑥 떠오른다. 천왕봉의 아름다운 일출은 3대 공적을 쌓아야만 맞이할 수 있다는 전해온다.
2.직전 단풍.
지리산 제1의 활엽수림 지대인 피아골이 가을철에 단풍이 절정으로 물든 황홀한 선경을 말한다. 이 계곡에 단풍이 든 시기에 가면 산도 붉고, 물도 붉게 비치며, 사람도 붉게 물든다 하여 삼홍이라 일컬어진다.
3.반야낙조.
반야봉에서 지켜 보면 낙조의 경건한 모습이다. 마지막 남은 여력을 다해 빛을 뿌린 태양이라는 거함이 잿빛 노을 속으로 지는 순간 감동의 물결이 가슴에 파고든다.
4.벽소명월.
지리산 등뼈의 한가운데인 벽소령에서 맞는 밝은 달을 말한다. 밀림과 고사목 위로 떠오르는 달은 천추의 한을 머금은 듯 차갑도록 시리고 푸르다한 정적이 감싸고 돌아 현묘한 유수가 흐른다.
5.세석 철쭉.
매년 5월 하순부터 6월 초순. 또에 걸쳐 1,600미터의 수십만평 세석 고원은 수만 그루의 철쭉꽃이 청려한 자색 꽃망울을 터뜨려 고원 특유의 아름다운 정경이 펼쳐진다.
6.불일 현폭.
쌍계사 동북쪽 3킬로미터 협곡에 창학봉과 백하봉을 좌우로 두고 백척 단애에서 쏟아지는 폭포수는 백옥이 부서지는 것 같다.
7.연하선경.
세석 고원과 장터목 사이의 연하봉은 층암 절벽이 솟고 기암 괴석사이로 기화 요초가 만발하여 고사목과 어울려 절경을 빚고 있다. 운무가 이 봉우리에 잠깐 머물면 꼭 신선이 나타날 것 만 같은 곳이다.
8.칠선계곡.
울창한 원시림과 푸른 옥류같은 계곡수의 심연이 연속된 지리산 최대의 계곡이다. 태고의 신비함을 간직한 채 천왕봉에서 시작된 이 계곡은 지리산 최대의 원시림으로 꼽히고 있다.
9.섬진 청류.
지리산 자락을 그림자로 드리운채로 남해로 흘러가는 섬진강의 푸르디 푸른 맑은 강물은 은빛 백사장과 더불어 지리산 서정의 상징이 되고 있다. 예로부터 섬진강의 석양은 뭇시인들이 노래하고픈 하나의 거대한 시제였다는 것은 잘 알고 있는 우리다.
* 지리산에 얽힌 전설
1.지리산녀
지리산은 남도 여인들의 정절의 규범인 지리산녀의 아름답고도 애틋한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지리산녀에 대해서는 동국여지승람의 인물 열녀항에 기록이 전한다. "지리산녀는 구례현의 여자인데 자색이 아름답고, 지리산 아래에 살았으나 역사에는 그 이름이 전해지지 않았다. 집이 가난하나 부도를 다하였다. 백제의 왕이 그 아름다움을 소문으로 듣고, 아내로 맞이들이려 했으나 한사코 따르지 않았다. 이 지리산녀가 지었다는 지리산가가 있었다고는 하지만 지리산가는 전해지지 않고 왕은 백제의 개루왕이고 도미의 처 였다고 추측을 할 뿐이다.
2.종녀촌
지리산녀와 더불어 비극적인 여이상으로 종녀촌이란 전설이 있다. 피아골 깊은 곳에 종녀촌이 있었다. 씨받이 여인들이 모여사는 마을이었다. 이 종녀촌에는 성신어머니라고 불리는 절대자가 많은 씨받이 여인들과 시동을 거느리고 살았다. 성신은 인근 마을에 아들을 못 낳는 집이 있으면 종녀를 보내 아들을 낳게 해주고, 그 대가로 먹고 살수 있는 물품을 받아왔다. 종녀가 딸을 낳으면 종녀촌으로 데려와 종녀가 되게 하였다. 씨받이의 대물림이었다. 종년촌을 지배하는 성신 어머니는 성신굴에서 성의 제전을 마음 내키는 대로 펼치고, 성신굴에는 성신상과 남근을 만들어 놓았다. 성신은 종녀들의 생산 능력을 빈다는 기원제를 핑계로 성신 제단 앞에서 주문을 외다가 시동들과 향락을 즐겼다. 많은 종녀들이 보는 앞에서 성신 어머니는 수많은 시동들과 욕정을 불살랐고 종녀들은 그 모습을 지켜보기만 했다.
3.칠불암과 허왕후
가락국 김수로왕 허왕후는 일곱 왕자가 성불하여 속세와 인연을 끊고 세상에 나오지 않게 되자 와자들을 만나 보기 위해 지리산으로 찾아갔다. 그러나 불법이 엄하여 허왕후조차 여자라고 하여 선원에 들어갈 수 없었다. 여러 날은 선원 밖에서 안타깝게 기다리던 허왕후는 차마 못해 성불한 아들들의 이름을 불렀다. 그러나 "우리 형제는 이미 출가하여 성불하여 속인을 대할 수 없으니 돌아가시라"는 음성만 들렸다. 허왕후는 아들들의 얼굴이 보고 싶다고 간청하였다. "그러면 선원 앞 연못가로 오시라"고 했다. 연못 주변을 아무리 둘러봐도 아들들이 없자 실망하여 돌아갈 찰나 연못속에 일곱 왕자가 합장을 하고 있었다. 찰나에 아들들 모습은 사라지고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 그 뒤 연못은 영지라 하였고, 허왕후가 머물렀던 곳은 대비촌으로 일컬었는데, 지금은 쌍계사 아래편에 대비리로 변해있다.
4.노고단
옛날 노인 부부가 자식이 없어 애를 태웠는데, 영산에서 기도를 하면 자식을 얻을 수 있다는 말을 듣고 찾아든 곳이 노고단이었다. 두 부부는 천 일 기도를 했는데, 그 기도가 끝난 날 안타깝게도 천왕봉을 향해 두 손을 곱게 모은 채 함께 숨지고 말았다. 노부부는 바위 할매와 바위할배로 변했는데, 그 뒤 이곳을 지나는 산사람들이 간단한 산재를 지냈다. 또 그 주변에는 할미꽃이 만발한 꽃밭을 이루었고 철쭉, 백합, 나리꽃이 점차 늘어나 바위 주변을 단장을 했다고 한다.
5.세석 고원 음양수
자녀를 갖지 못한 부부의 슬픈 전설은 음양수에도 전해진다. 아득히 먼 오래전 지리산에 제일 먼저 들어와 산 호야와 연진은 대성 계곡에서 한 쌍의 원앙처럼 행복한 나날을 보냈으나 자녀를 갖지 못해 애를 태웠다. 어느날 남편이 산열매를 따러 간 사이 검은 곰이 연진 여인에게 세석 고원 으양수 샘물을 마시면 아들, 딸을 낳을 수 있다고 일러주었다. 연진 여인은 곧 음양수로 달려가 샘물을 실컷 마셨다. 그 사이, 곰과 사이가 좋지 않았던 호랑이가 이를 지리산 산신에게 고해 받쳤다. 지리산 산신은 음양수의 신비를 인간에게 발설한 곰을 토굴속에 가두고, 호랑이는 그 공으로 백수의 왕이 되었다. 연진 여인에게는 무거운 벌을 내려 평전의 돌밭에서 외로이 철쭉을 가꾸게 하였다. 흐르는 눈물과 닳아 터진 손가락 사이에서 흘러내린 피가 철쭉을 더 붉게 하였고, 밤마다 죄를 사하는 기도를 하다 촛대봉에서 그대로 돌이 되었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6.우투리 전설
지리산의 우투리 전설은 지리산이 모성의 산에 머물지 않고 민중에게 얼마나 혁명의 꿈을 심어준 장소인지가 잘 드러나는 이야기이다. 걸어나오는 산 이야기 역시 정적인 산이 아닌 세상을 향해 걸어나오는 지리산의 면모가 잘 드러나는 이야기이다.
우투리 전설은 지리산 기슭 산골마을에서 평민영웅 아기 장수 우투리가 탯줄을 억새로 끊으며 태어나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그는 지리산과 바다를 오가는 비밀스러운 자기수련과정을 거쳐 군사와 식량을 모아 세상을 평정할 꿈과 힘을 키우던 중 결국 자기와 가장 가까운 어머니의 고발로 인해 좌절과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는 줄거리이다. 여기서 '우투리'는 '우두머리'라는 뜻으로 해석될 수 있는데, 지리산은 단지 패배자와 은둔자들만의 보금자리, 자양분을 안겨다주는 그런 모성적 의미의 산으로서만 기능하는 곳이 아닌, 새로운 변혁의 꿈과 그 지도자의 출현을 갈망하는 능동적인 공간임을 증명해주는 하나의 전설인 것이다.
7.걸어나오는 산 이야기
걸어나오는 산 이야기는 화개면 정금마을 '노루목'에 얽힌 전설로서 지리산이 세상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나오던 중 개울가에서 빨래하던 어느 요망한 여자가 "산이 걸어나온다"고 소리치는 바람에 그만 그 자리에 우뚝 멈추어 버렸다는 이야기이다. 여기서 지리적으로 고정불변의 존재인 산이 들판(세상)을 향해 걸어나왔다는 것은 바로 산의 생명성과 능동성, 지향성을 뜻하는 것으로서 지리산의 모성적 토대 위에서 자생력을 회복한 저항과 변혁세력이 새 세상을 꿈꾸며 들판을 향해 내려오던, 나아가 들판문화를 크게 위협하기도 했던 역사들을 상징적으로 잘 보여주고 있다.
사실 산은 들을 향해 '열린 공간'이자 또한 들보다 높고 험해서 '닫힌 공간'이 되기도 한다. 때문에 들판문화가 강고하고 압도적인 영향력을 행사할 때 산은 그 압력을 자연히 받게 되지만 역으로 들판문화가 느슨해져 산 자체의 동질성과 자생성을 확보하기에 이르면 산은 들판문화에 저항하고 나아가 크게 위협하는 이중적인 모습을 띤다.
이와같이 지리산은 모성의 산으로서의 모습과 부성적인 산으로서의 모습 양면을 띠는데, 이것을 흔히 '지리산의 이중성'이라 부르며 고 박현채 교수는 '수동성'과 '능동성'이란 말로 정리한 바 있다. 분명 지리산은 정치사회적인 과도기나 이행기에서 이제까지의 수동적인 모습을 벗고 능동적으로 역사 전면에 나서곤 했다. 또 그러한 역할은 근대로 올라올수록 더욱 큰 비중으로 우리에게 다가왔다.
8.흥부전
남원에는 일찍부터 <흥부전>의 주인공 흥부가 실존인물이라는 이야기들이 있어왔다. 그 가운데서도 동면 성산리와 아영면 성리가 흥부와 관련된 마을이라고들 하는데, 내용인즉 성산마을은 흥부가 출생한 곳, 성리마을은 흥부가 놀부에게 쫒겨나 유랑 끝에 정착하여 복을 누리고 살았던 곳이라는 것이다.
성산리는 남원과 함양을 잇는 팔랑치 아래쪽에 자리잡고 있다. 고대소설 <흥부전>과 판소리 <흥부가>에 "전라도는 운봉이요, 경상도는 함양이라. 운봉,함양 두 얼품에 흥보가 사는지라......"라는 대목이 운봉과 함양 사이에 있는 성산리를 떠올리게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성산리에는 흥부와 관련된 지명이 많다. 연비봉, 화초장 바위, 흥부네 텃밭, 연하다리 등등. 성산리에 전해오는 박첨지라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도 <흥부전>과 비슷하다.
박첨지는 부자임에도 인색했을 뿐만 아니라 재물을 믿고 소작인들과 이웃을 혹독하게 괴롭혔다고 한다. 심지어 하나밖에 없는 동생을 내쫒는 것은 물론 다시 찾아왔을 때도 매만 줘서 내쫓았다고 한다. 이후 함양 땅에서 민란이 일어나 박첨지가 죽임을 당하였는데도 마을사람들은 박첨지의 시체조차 거두어주지 않았다고 한다. 어느 새 부자가 된 아우가 형의 참변소식을 듣고 찾아와 동네사람들에게 돈과 제답을 주며 해마다 형의 제사를 지내 달라고 부탁하여 성산마을에서 박첨지 제사를 지내 오게 되었다고 한다.
그런가 하면 아영면 성리에는 <흥부전>에서 놀부가 아우가 부자가 되었다는 소문을 듣고 흥부를 찾아가는 대목 중에 나오는 "고향 근처 한 곳에 당도하니 촌명은 복덕"에 나오는 지명 복덕과 같은 복덕촌(복성)이 있다고 한다. 성리에도 <흥부전>을 연상시키는 인물로 '춘보'라는 사람의 얘기가 전해오는데, 가난 끝에 부자가 되었다든지, 선덕을 베풀었다든지 하는 인생역정이 흥부의 그것을 떠올리게 한다. 성산마을처럼 화초장 바위, 허기재 등 흥부전의 내용과 관련된 땅 이름이 많이 남아 있다.
"흥부전"은 이와 같은 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것으로 짐작되지만 어디까지나 추측일 뿐이다.
9.피아골 종녀촌
옛날 피아골의 깊은 골짜기에는 종녀(種女)마을이 자리잡고 있었다고 전해온다. 종녀란 자식을 낳지 못하는 집에 팔려가서 아이를 낳아주는 것을 자기 생업으로 하는 소위 '씨받이 여자'를 말한다. 피아골에 있었다는 종녀촌에는 절대자로 군림하는 성신(性神)어머니를 비롯하여 그 밑에 많은 종녀들과 시동(侍童)들이 절대순종과 희생을 강요당하며 살아가고 있었다고 한다.
남존여비의 가부장제 사회속에서 가능했던 이 기이한 풍습 때문에 때때로 종려들은 갖은 수모와 학대를 감내해야만 했다. 어느 집에 팔려 들어가서 만약 아들을 낳으면 타의에 의해서 혈육의 정을 끊고 되돌아서야만 했고 만약 딸을 낳게 된다면 그 딸을 종녀촌으로 데리고 와서 다시 종녀로 길러 불행한 운명의 길을 대물림해야만 했다고 한다. 이와 같은 종녀들의 피눈물 어린 통한의 인생살이와는 달리 많은 종녀들을 거느린 성신어머니는 종녀들의 희생과 순종 속에서 호화로운 생활과 향락을 즐겼는데 자주 성신굴에 찾아가 성신의 제단 앞에서 무궁한 생산을 비는 기원제를 올렸단다. 은촛대에는 촛불이 휘황찬란하게 빛나고 성신상과 남근(男根)이 새겨진 제단 앞에서 성신어머니는 주문을 외우고, 입었던 옷을 차례차례 벗어 던지면서 성신가(性神歌)를 부르며 관능적인 춤을 추다가 흥분의 절정에 이르면 젊은 시동과 어울려 한바탕 욕정을 불태우곤 했다.
물론 지금은 사라진 피아골 종녀촌의 애절한 전설은 남아선호사상이 지배했던 우리 중,근세 역사의 한 단면을 보여주고 있다.
10.인걸과 아미선녀
옛날 지리산 기슭 마천면 삼정리 하정부락에는 인걸이라는 사내가 홀어머니를 모시고 사냥을 하며 살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날 그의 사냥 길목에서는 하루에 꼭 3차례씩 무지개가 섰다가 꺼지곤 하였는데 자세히 보니 무지개 아래 소(沼)에서 어여쁜 3선녀가 정성껏 밥을 짓고 있는 게 보였다. 옥황상제의 시녀들이 날마다 내려와 밥을 짓는데 그러던 어느날 더위를 못 참았는지 선녀들이 소에서 멱을 감게 되었다. 이때 인걸은 선녀들의 날개옷만 입으면 자기도 옥황상제를 만날 수 있을거라고 생각하고 날개옷을 훔쳐오다가 그만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면서 날개옷이 돌부리에 걸려 찢어져 버렸다. 옷 찢기는 소리에 깜짝 놀란 선녀들은 놀란 나머지 각자 자기의 옷을 찾아 입었는데 아미(阿美)라는 선녀만은 옷이 없어 인걸이 갖다준 어머니의 옷을 입고 결국 하늘나라에 오르지 못하고 인걸의 집으로 와서 몇 날을 지냈다.
그후 하늘나라에서는 아미선녀를 인걸과 같이 살도록 허락하고 비단옷과 쌀이 나오는 바위를 하사해 주었다.(이 쌀바위는 작전도로 공사 때 묻혀 버렸다고 한다) 인걸과 아미는 그로부터 1남 2녀를 낳아 하늘아래 첫동네에서 정자(지금 하정부락 앞 솔밭 근처에 있는 선유정이 그것이라고 한다)를 짓고 행복하게 살았다.
그러던 어느날 인걸이 장난삼아 옛날 찢어진 아미의 날개옷을 기워서 입혔는데 그만 아미가 하늘나라로 날아가 버렸다. 그후 인걸과 세 자녀가 문바위에 올라가 아미가 다시 내려오기를 기다렸지만 끝내 내려오지 않자 4부자는 그만 지쳐 죽고 말았다. 그 다음날 아침 벽소령에는 부자바위가 솟아올랐는데 후세 사람들은 이 바위가 하늘나라에서 다시 만난 인걸과 아미가 세 자녀를 데리고 걷는 상(像)이라고 한다.
벽소령에 있는 부자바위는 영락없이 아버지와 세 자녀가 걷는 모습이다. 한 아주머니는 벽소령 도로공사때 마천 주둔 공병대 병사들이 몇 명 죽었다고 말하는데 그 이유는 마을주민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바위를 잘못 건드려서라고 설명한다. 쌀바위를 얘기하는지 알 길은 없었다.
11.음양수와 선비샘 전설
남부능선과 주능선이 만나는 지점에 음양수 샘터가 있다. 세석산장이 확장건립된 이후로 수량이 줄고 마르는 날이 많아졌지만 음양수 샘은 그 신비함에 옛부터 지리산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최고의 물로 인식되어져 왔던 샘이다. 자식이 없는 사람들이 음양의 조화로 흘러내리는 이 물을 마시면 아이를 가질 수 있다는 소문 때문에 지리산이 국립공원으로 지정되기 전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음양샘 주위에 몰려들어 기도를 드리곤 했다고 한다.
옛날 대성골에 호야와 연진이라는 서로 사랑하는 연인이 자유롭고 평화스럽게 한 가정을 꾸미며 행복하게 살고 있었다. 아무 부러울 것이 없는 이들에게 오직 자식이 없다는 한 가지 걱정이 있었는데 어느날 곰이 찾아와 연진여인에게 세석고원에 음양수샘이 있다는 것을 알려주면서 이 물을 마시며 산신령께 기도하면 자녀를 가질 수 있다고 일러 주었다. 연진여인은 기뻐 어쩔 줄 몰라 홀로 이 샘터에 와서 물을 실컷 마셨는데 호랑이의 밀고로 노한 산신령이 음양수 샘의 신비를 인간에게 알려준 곰을 토굴 속에 가두고 연진여인에게는 세석 돌밭에서 평생 철쭉을 가꿔야 하는 가혹한 형벌을 내리게 되었다. 그후 연진여인은 촛대봉 정상에서 촛불을 켜놓고 천왕봉 산신령을 향하여 속죄를 빌다가 돌로 굳어져 버렸고, 아내를 찾아헤매던 호야는 칠선봉에서 세석으로 달려가다 산신령의 저지로 만날 수 없게 되자 가파른 절벽 위의 바위에서 목메어 연진여인을 불렀다고 한다. 그래서 세석고원의 철쭉은 연진의 애처러운 모습처럼 애련한 꽃을 피운다고 하며 촛대봉의 바위는 바로 연진이 굳어진 모습이라고 한다.
한편 세석고원에서 서쪽으로 주능선을 따르다 보면 벽소령 못미쳐 선비샘이 나타난다. 야영의 흔적이 곳곳에 있고, 쓰레기로 가득 찬 이곳 샘터가 현재는 서서 물을 받을 수 있게 되어있지만 예전에는 반드시 고개를 숙여야만 물을 받을 수 있었다고 한다.
옛날 상덕평 마을에 평생 가난하고 천대받으며 살아온 한 노인이 있었다. 이 노인의 유언이 죽어서라도 사람대접 한번 받아보는 것이었는데 결국 아들들이 이 샘터 위에 무덤을 만들어 많은 사람들이 샘에서 물을 뜰 때면 반드시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이므로 결과적으로 이 노인의 무덤에 절하는 격이 되게끔 하였다고 한다. 생전에 갖은 고생과 천대 속에서 화전민으로 살아온 한 노인의 애틋한 소망이 실제로 십여년전까지만 해도 실현되고 있었는데 그러나 지금은 무덤도 안 보이고 샘도 파이프로 연결하여 서서 받도록 조처하였기 때문에 이 씁쓸한 전설은 잊혀진 얘기로 되어가고 있을 뿐이다.
12.마야고
지리산의 여신 마야고(麻耶姑)는 남신 반야(般若)를 사모하여, 그리운 옷 한 벌을 고이 지어, 만나서 전해 줄 기회를 찾고 있었다. 그러나, 그 기회가
잘 닿지 않아 마음을 태웠다. 달 밝은 어느 날 밤, 마야고는 지리산 중턱에 앉아 반야의 옷을 품에 안고 그를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때 꿈에도 기다리던반야가 자기 쪽으로 손짓하며 걸어오고 있는 것이 아닌가. 마야고는 바람에 나부끼는 꽃잎의 물결 속으로 반야의 옷을 든 채 달려갔다. 그리고 정신없이 무엇을 잡을 듯이 허우적거렸는데, 이상하게도 잡히는 것이 없었다. 정신을 차려 보니, 그리운 반야는 보이지 않고, 쇠별꽃(나도개미자리과의 다년생 풀. 줄기가 연약하여 땅에 눕고, 흰 판화가 여러 꽃대에서 피어난다.)들만 달빛 아래서 바람에 흐느적거릴 뿐이었다.
쇠별꽃의 흐느적거림을 반야가 걸어오는 것으로 착각한 것을 알게 된 마야고는 너무나 실망하여 두 손바닥에 얼굴을 파묻고 한없이 울었다. 마야고는 그 뒤로 자신을 속인 쇠별꽃을 다시는 치지 못하게 했다. 그리고 정성껏 지어 두었던 반야의 옷도 갈기갈기 찢어서 숲 속 여기저기에 흩날려 버렸다. 또 매일 같이 얼굴을 비춰보던 산상의 연못도 신통력을 부려서 메워 없앴다. 마야고가 갈기갈기 찢어 날려버린 반야의 옷은 소나무 가지에 흰 실오라기처럼 걸려 기생하는 풍란(風蘭)으로 되살아났는데, 특히 지리산의 풍란은 마야고의 전설로 '환란(幻蘭)이라고 부른다.
멀리 웅장한 지리산 산자락을 타고 지리산의 정상 천황봉이 보인다. 천왕봉(天王峰. 천황봉(天皇峰)이라고도 한다. 높이 1,915m)에서 서쪽으로 바라보이는 반야봉(般若峰)(지리산의 제 2봉. 높이 1,732m) 은 마야고가 늘 바라보고 반야를 생각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또, 마야고가 메워 버렸다는 못은 누군가가 천왕봉 밑 장터 목에서 찾아내 '산희샘(山姬샘)'이라고 이름 붙였다. 마야고의 한과 노여움을 풀어주기 위하여 고려 때 천왕 봉에 사당을 세우고 여신상을 모셨는데(여신상은 지금은 없어졌는데 한 하이텔 동호인이 알려온 바에 의하면 산아래 어느 민간인의 집에 있는 것으로 보도된 적이 있다고 한다.) 일제 때 한 왜병이 군도로 그 코와 귀를 잘라 버리려다가 신 벌을 받아 그 자리에서 즉사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13.뱀사골 전설
1천 3백여년전 반선 고을에는 송림사라는 절이 있어 해마다 불도에 정진하여 다른 불제자의 본보기 가 될 만한 승려 한 사람을 뽑았는데 이 승려가 칠석날 정성껏 기도하면 구름을 타고 은하수를 건너 극락세계로 간다하여 불도들은 최고의 영광으로 알았다. 그리하여 이 행사는 해가 갈수록 성대해져 갔는데, 세월이 흘러 조선 선조때의 고승 서산대사가 이 이야기를 듣고 사람의 불심이 아무리 돈독하다고하여도 하늘로 올라가 신선이 될수는 없다고 생각하여 그해 모범스님으로 뽑힌 승려 에게 독이 묻은 옷을 입혀 신선대에서 기도하게하고 몰래 숨어서 동정을 살펴보았다.
밤이 깊이 자정이 넘었을때 신선대 밑 용소가 요동치더니 거대한 이무기가 나와 승려를 덮쳤다. 서산대사는 신선이 돼 하늘로 올라간다는 흉계를 꾸며, 해마다 송림사가 한 사람을 속여 승려를 이무기의 제물로 바쳐 온 비밀을 알게 되었다. 다음날 아침 신선대에 가보니 승려와 이무기가 함께 죽어 있었다. 용이 못된 이무기가 죽은후, 사람들은 이 골짜기 이름을 뱀이 죽었다고 해서 뱀사골이라 부르게 되었으며 골짜기 입구의 마을을 반선이라 칭하는 것도 신선이 되겠다는 승려가 이무기의 밥이 되어 반쪽 신선밖에 되지 못했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14.차일봉(종석대) 전설
차일봉은 그 모양이 마치 차일을 쳐 놓은 것 같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으로 우번대, 종석대, 관음대 등 여러 이름을 갖고 있는데 정상에 암불이 솟아 있어 자연전망대로서 구실도 톡톡히 하고 있다. 차일봉 남쪽 천은사 계곡 상류 깊은 곳에 상선암이란 이름난 선원이 있었다. 신라의 고승 우번조사가 젊은 시절 조용한 상선암을 찾아 10년 수도를 결심하고 혼자 수도 정진하기를 9년째 되던 어느 봄날, 절세미인 한사람이 암자에 나타나 요염한 자태로 우번을 유혹하였다.
여인에게 홀린 우번은 수도승이란 자신의 위치를 망각하고 여인의 뒤를 따라 나섰다. 그 여인은 온갖 기회요초가 만발하고 아름다운 수림속을 지나쳐 자꾸만 높은 곳으로 올라갔다. 우번은 여인을 놓칠까봐 산속을 헤치며 정신없이 올라 가다 보니 어느덧 차일봉 정상에까지 오르게 됐다. 그런데 우번을 유혹하던 여인은 간데 없고 난데없이 관음보살이 나타나 우번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 아닌가. 깜짝 놀란 우번이 정신을 가다듬고 생각해 보니 이는 필시 관음보살이 자기를 시험한 것이라 깨닫고 그 자리에 엎드려 자기의 어리석음을 뉘우치고 참회하니 관음보살은 간데 없고 대신 큰 바위만 우뚝 서 있었다. 자신의 수도가 크게 부족함을 깨달은 우번은 그 바위 밑에 토굴을 파고 토굴속에서 수도하여 후일 도승이 되었다 한다.
우번도사가 도통한 그 토굴자리를 우번대라 부르게 됐으며, 또 우번조사가 도통한던 그 순간에 신비롭고 아름다운 석종소리가 들려왔다하여 이곳을 종석대라 부르며, 관음보살이 현신하여 서 있던 자리를 관음대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15.달궁 전설
마한, 진한, 변한의 부족국가사회를 이루고 있던 삼한시대에 부족간의 큰 전쟁이 일어났는데 마한 군에 쫓기던 진한왕이 전쟁을 피해 문무백관과 궁녀들을 이끌고 이곳 지리산으로 들어와 오랫동안 피난생활을 하였다 하는데 그때 임시 도성이 있던 자리를 달궁이라 이름지었다고 한다. 심원달궁은 지리산에서도 가장 깊은 곳에 자리잡고 있어 적을 방어하기에 천혜의 요새였다. 진한왕은 달궁을 방어하기 위해 서쪽 10리밖의 영에 정장군을, 동쪽 20리밖의 영마루에 황장군을, 남쪽 20리밖의 산령에는 성이 각기 다른 3명의 장군을, 북쪽 30리 밖의 높은 산령에는 8명의 젊은 장군을 배치해 외적의 침공을 막아냈다고 하여 각각 정령재, 황령재, 성삼재, 팔랑재 등의 이름이 지금까지 전해져 오고 있으나, 지금 달궁에는 이름만 전해 내려올 뿐 옛날의 궁성터는 찾아볼 수가 없다.
16.뱀사골 와운마을의 천년송 (千年松)
실제 800년 이상으로 추정되는 소나무로 할아버지 소나무와 20여 미터 사이를 두고 할머니 소나무가 있다. 이를 천년송이라 불렀고, 옛날부터 와운 마을에서는 정월 초사흘(음 1월 3일)에 당산제를 지내고 있다.
아들을 낳지 못하는 사람은 (음 12월 중순경부터) 공을 들이기 시작하여 당산 넘어 계곡(일명 산지소)을 깨끗이 치워놓고, 사흘마다 다니면서 목욕하고(음 1월 1일부터는 3일간 날마다) 옷 세 벌을 마련하여 목욕하면서 갈아입고, 목욕하고 와서 갈아입고, 화장실 갈 때 따로 입었다.
음력 1월 3일 아침 재를 지내며, 밥 해 놓은 것을 한지 종이에 싸서 소나무 밑에 묻고, 왼 새끼줄을 꼬아 소나무에 세 바퀴 놓고, 동동주를 세 군데에 나누어 뿌린다. 이렇게 하여 정성을 드린 사람은 지금까지 아들을 낳지 못한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고 한다.
현재 거문도에 살고 있는 김항신(69세)은 그의 부모가 아들이 없어 이 소나무에 정성을 드려 당산제를 준비하던 중 눈이 많이 와서 소나무까지 가기 어려울 정도였는데, 새벽에 일어나면 누군가 소나무까지 가는 길을 쓸어 놓아 이상하게 여기던 중 호랑이가 꼬리로 눈을 쓸어 놓고 가는 것을 보았다고 한다. 그 후, 아들을 낳았으니 김항신은 현재 큰 부자로 거문도에 살고 있으며, 지금도 일년에 한차례씩 천년송을 찾아와 제사를 지낸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