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당에서 딸 아이와 엄마가 대화를 합니다. 엄마가 귀찮게 앵앵거리는 모기를 잡으려고 손뼉을 치자, 딸이 “동물은 모두 내 친구”라며 모기를 못 잡게 합니다. 그러자 엄마는 모기는 동물이 아니고 벌레라서 상관 없다고 말합니다. 사자, 호랑이, 얼룩말, 기린 등이 동물이라고 부연합니다. 그러자 아이는 곤충도 동물이라고 알려주고, 그제서야 엄마는 자신이 틀렸다는 것을 압니다. 딸과 엄마의 ‘대화’를 엿듣던 필자도 배웁니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동물은 포유류였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포유(哺乳) 동물, 젖을 먹여 새끼를 키우는 동물이지요. 영어로는 mammal 이라고 하는데 ‘젖’을 뜻하는 라틴어 mamma 에서 온 단어입니다. 영어로 엄마인 mama, 스페인어로 엄마인 ma ma 모두 라틴어 mamma 와 무관하지 않을 것입니다. 오늘은 엄마이자 유방암에 걸린 한 여인의 이야기입니다.
직장에서 쫓겨나고, 남편은 바람을 피우고, 이 보다 더 힘들 수도 없겠다 싶은 마그다, 두 달 전에 유방에 생긴 작은 멍울로 병원을 찾았는데, 의사는 유방암이란 진단을 내립니다. 정말 최악의 상황입니다. 누구 하나 도움을 청할 곳도 없는 고립무원의 처지입니다.
아들 나디는 프로 축구선수를 꿈꾸는 초등학생입니다. 아들을 응원하러 경기장을 찾은 마그다는 레알 마드리드의 프로팀 유소년 팀 감독 아르뚜로를 만나게 됩니다. 나디의 재능을 인정하고 관심을 가진 아르뚜로 덕분에 마그다는 힘든 하루를 이겨낼 용기를 얻습니다. 하지만 그 순간, 아르뚜로는 아내와 딸의 교통사고 소식을 듣고 그 자리에서 까무러칩니다. 동병상련의 처지라 생각했던지 마그다는 제 정신이 아닌 아르뚜로가 걱정되어 병원까지 따라가서 그의 곁을 지켜줍니다.
아르뚜로의 딸은 죽고, 아내 역시 목숨만 간신히 붙어 있습니다. 자신의 처지도 딱하기는 마찬가지이지만 마그다는 순식간에 사랑하는 가족을 잃은 아르뚜로를 진심으로 위로합니다. 마그다는 다음 날부터 항암 치료를 시작하고 서서히 약의 부작용으로 괴로워합니다. 하지만 아들을 위해서 꼭 이겨내겠다는 다짐을 하며 마음을 다잡습니다. 예정된 유방암 수술을 받고 정신이 혼미하던 중, 그의 곁을 지키는 아르뚜로를 봅니다.
삶이 무너져 힘든 두 사람, 다만 곁에서 지켜주고픈 생각으로 서로에게 위안을 주던 두 사람, 앞으로 어떤 삶이 펼쳐질까요. 더 이상 이야기를 하면 영화에서 받을 감동이 상당히 줄어들 것이므로 그만하겠습니다. 꼭 한번 보시길 바랍니다.
마그다가 앓는 유방암, 아주 오래된 역사를 가진 병이랍니다. 대략 기원전 27세기에 쓰여진 고대 이집트의 파피루스에도 유방암에 대한 기록이 있으니까요. 당대 최고의 의사 임호테프(영화 <미이라>시리즈에는 악당으로 등장하는 인물)는 ‘치료법 없다’라고 매몰차게 단언할 정도로 그때부터 악성으로 이름을 드날립니다.
기원전 5세기경 그리스의 헤로도토스가 쓴 <역사Historia>에는 페르시아 다리우스 왕의 아내인 아토사(Atoss) 왕비가 유방암을 앓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왕비는 용기를 내어 그리스 의사 데모케데스(Democedes)에게 유방 절제술을 받는데, 다행히 목숨을 건졌다고 합니다. 역사책에 기록된 최초의 유방암 수술 성공 사례네요.
그리스인들에겐 유방 절제수술이 낯설지 않은 모양입니다. 그리스 신화에는 일상적으로 유방절제수술을 받는 부족 이야기가 있으니까요. 아테네에서 멀리 떨어진 어느 곳에 여성들만의 공동체 국가가 있는데, 이들은 남자 아이가 태어나면 모두 죽이고, 여자 아이는 키워 전사로 만듭니다. 이들은 활을 쏘는데 걸림돌이 되는 한쪽 유방을 잘라내는 풍습이 있어 아마존(Amazon)이라 불립니다. 그리스어로 a(없다)+mazos(젖가슴)에서 따온 이름입니다. 하지만 아마존의 어원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주장이 있습니다.
아마존. 한 쪽 가슴이 없다. ⓒ 위키백과
아마존 여전사들에게는 유방절제수술(mastectomy)이 쉬웠는지 모르겠지만, 현실 세계의 의사들에겐 아주 힘든 수술이었습니다. 특히 유방암에 칼을 대면 그 상처는 좀처럼 낫지 않기 때문에 의사들은 수술을 몹시 꺼려합니다. 그리스의 히포크라테스나 로마의 갈렌(Galen) 같은 위대한 의사들조차 유방암에는 손을 대지 말라고 충고했을 정도니까요. 하지만 유방암을 수술칼로 잘라내려던 용감한 의사들이 없지 않았습니다.
1세기의 기록에 따르면 의사들은 날카로운 칼로 유방의 혹을 잘라낸 후 피가 나는 조직은 불에 달군 쇠로 지졌습니다. 암조직은 피가 많이 나므로 지지고 또 지졌습니다. 잘 지져야 지혈도 되고 재발도 안된다고 생각했습니다. 마취가 없던 시절이니 환자들은 통증으로 몇 번을 까무러쳤겠지요. 의사들은 중세 후기까지 이 수술법을 그대로 고수합니다. 다만 달군 쇠로 지지던 것을 지혈 고약으로 바꾸기만 했지요.
하지만 이런 고통을 견디며 수술을 받아도 큰 효과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가능하면 약초나 약물을 먼저 시도해보고 마지막에 수술을 했습니다. 하지만 그때는 이미 늦습니다. 온 몸으로 암이 퍼졌으니까요. 오히려 빨리 수술을 했으면 목숨을 건질 환자들을 이렇게 놓치고 맙니다.
17세기가 되면 수술은 과격해집니다. 혹을 애매하게 잘라내면 반드시 재발하고 온 몸으로 퍼져 나갔기에 의사들은 유방은 물론, 그 아래 소흉근과 충분히 암세포가 퍼져나가는 출구인 겨드랑이 임파선까지 다 잘라냅니다. 힘든 수술을 재빨리 해치워 환자의 고통을 조금이라도 줄여줄 요량으로 유방을 싹둑 잘라내는 둥근 작두 같은 수술 기구도 고안되었습니다(Helvetius forceps).
하지만 그 엄청난 고통을 견디며 수술을 받는다 해도 환자들 대부분은 암으로 목숨을 잃습니다. 어쩌면 당시의 수술은 효과도 부작용도 없는 민간요법이나 오히려 해로운 대책이었습니다. 의사들이 수술을 하지 않을수록 환자들이 더 오래 살았으니까요.
박해시대에 유방이 잘렸지만 살아남은 기적을 일으켰다. 이후로 유방질환자들이 수호 성인이 되었다. 아가사 성녀를 치료하는 베드로 성인. 지오반니 라플란코 그림. 17세기. ⓒ 위키백과
19세기 말이 되면 마취법과 소독법이 도입됩니다. 의사들은 수술 시간을 충분히 쓰면서 수술 후유증인 감염에 대한 걱정도 듭니다. 그러자 수술 현장에 혁명적인 변화가 일어나는데 유방암 수술도 예외가 될 수는 없겠지요.
1867년에는 유방암에 대한 수술 원칙이 확립됩니다. 재발을 막기 위해 가능한 깨끗하게 넓게 잘라내는데 유방의 혹은 물론이고, 피부, 임파관, 지방, 소흉근, 겨드랑이 임파선까지 잘라냅니다. 하지만 당대 최고의 외과의사인 비인의 빌로트(Theodor Billroth)의 수술을 받은 유방암 환자 143명 중 35명 정도만이 생명을 연장할 수 있을 정도로 수술의 결과는 참혹했습니다. 하지만 이런 암울한 분위기 속에 새로운 빛이 보입니다.
유방 수술 장면. 애그뉴 클리닉. 토머스 이킨스 그림, 1889년. ⓒ 위키백과
미국 존스홉킨스병원의 외과의사인 홀스테드(William Halsted)는 기존의 방식으로 수술한 유방암 환자들이 거의 다 재발되며, 재발되는 곳은 수술의 가장자리라는 것을 압니다. 그는 충분히 잘라주지 않아 암이 재발된 것으로 보고 더 과감하게 자르기 시작합니다. 소흉근보다 더 깊이 자리잡은 대흉근도, 쇄골 위의 임파선도 잘려나갑니다. 홀스테드의 과격한 수술은 병의 뿌리를 뽑는다는 뜻으로 근치적 유방절제수술(radical mastectomy)로 불립니다.
결과는 어땠을까요? 효과가 좋았습니다. 재발이 확실히 줄어 들어 환자들은 목숨을 구한 듯 보였습니다. 하지만 수술 후유증은 컸습니다. 팔은 퉁퉁 부어 잘 놀릴 수 없게 되고, 어깨가 안으로 무너져 몸이 굽어집니다. 목숨을 건진 대가가 그 정도라면 참을 만은 합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습니다.
나중에 밝혀진 바에 따르면 근치적 수술은 환자에게 별 의미 없었습니다. 고생한 보람이 없었다는 말입니다. 초기 환자들에게는 너무나도 과한 수술이었고, 이미 유방 밖으로 전이가 일어난 환자들에겐 수술로도 생명을 구하지 못한다는 사실이 밝혀진 것입니다. 1970년대가 되면 홀스테드의 근치적 수술은 좀 더 순화된 근치적 수술(modified radical mastectomy)로 대체됩니다. 우리의 주인공 마그다도 이 수술을 받았구요.
근치적 유방절제수술. radical 의 뜻은 뿌리를 뽑는다는 뜻이다. ⓒ 위키백과
수술 외에도 방사선 치료, 항암 화학요법, 호르몬 치료 등이 유방암 치료에 쓰입니다. 하지만 이런 다양한 치료법에도 불구하고 유방암은 여전히 치명적인 암이며, 전체 암의 약 9%를 차지하는 흔한 암입니다. 우리나라 여성 암의 2위를 차지(1위는 갑상선, 3위는 자궁)하며, 발병률은 인구 10만명당 36.2건이나 됩니다(보건복지부 중앙 암등록본부 2014년 조사, 2016년 12월 발표). 특히 상대적으로 젊은 여성들이 많이 앓으며 예후가 지극히 불량한 암입니다. 그래서 조기 진단이 무척 중요합니다. 그 조기진단의 핵심은 여성들의 자가 검진입니다.
영화는 우리가 생각하지 못한 방향으로 흘러갑니다. 엉뚱하면서도 기발한 내용에 미소를 짓기도, 눈물을 짓기도 합니다. 하지만 엔딩 크레딧이 올라갈 때면, 마그다가 아마존의 여전사보다도 더 용감했다는 사실을 필자는 깨달았습니다. 암 환자들은 암과 싸우기도 벅찬데, 항암제와도 싸워 이겨내야 하고, 사랑하는 가족에게 드리워진 잔혹한 운명과도 맞서 싸워야 하는데, 마그다는 어느 한 가지도 소홀하지 않았네요. ‘딸을 위해서라면 어디든 갈 사람’도 바로 그녀였네요.
10월이 오면 명절도 오고 연휴도 옵니다. 최장 10일 간의 연휴를 누리고 나면 ‘시월의 마지막 밤’도 코앞이겠네요. 무엇을 해도 잘 할 수 있을 것만 같은 최고의 계절이라 그런지 이런저런 행사도 많습니다만 핑크색 리본으로 상징되는 ‘유방암 예방의 달’이라는 것은 잘 모르는 분들이 많습니다. 조기 검진으로 목숨을 건질 수 있는 유방암에 대해 좀 더 관심 가지는 10월이 되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