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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자란 고향 마을은 세대수가 50여 가정이 되는 조그마한 시골마을이었습니다. 이 마을에는 구멍가게 점방(요즘 말로 마트)이 하나 있었습니다. 이 점방에는 주로 과자나 술을 취급했습니다. 그 시절에는 가난해서 과자를 사먹는 일이 거의 없었습니다.
제가 초등학교 1-2학년 때였던 거로 기억됩니다. 어떻게 하다가 용돈이 생겼습니다. 가게에 가서 건빵을 사먹기로 했습니다. 그 당시에는 봉지 건빵이 있고, 낱개로 1원에 몇 개씩 헤아려 주는 낱개 건빵이 있었습니다. 봉지 건빵과 낱개 건빵 중에 저는 저는 봉지 건빵을 선택했습니다. 낱개로 사면 건빵의 개수가 많기는 하지만 봉지 건빵을 사기로 결정했습니다.
집에 와서 건빵이 몇 개가 들었는지 헤아려보면서 깜짝 놀랐습니다. 주섬주섬 다시 건빵을 봉지에 담아서는 점방에 달려가서 다른 봉지 건빵을 달라고 항의를 했습니다. 주인이 얼마나 황당했겠습니까? 이미 봉지를 헐었는데, 새것으로 바꾸어 달라고 했으니 말입니다.
저는 그날에 새 건빵봉지를 요구한 것은 봉지 봉지 건빵 안에 들어있는 하얀색과 붉고 노란색의달콤한 별사탕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내가 더 많은 개수의 낱개 건빵을 마다하고 봉지 건빵을 선택한 것은 달콤한 색깔의 별사탕을 입에 녹이며 아싹하게 깨물어 먹는 즐거움 때문이었습니다. 봉지 건빵 안에 별 사탕은 봉지 건빵의 핵심이었습니다.
복음에 합당한 생활을 하는 성도들의 모임인 교회 안에 달콤한 별 사탕과 같은 것이 무엇일까요? 지난 주일에 저는 세 가지를 언급했습니다. 바로 사랑의 위로와 성령 안에서의 교제, 그리고 서로 불쌍히 여기는 긍휼이라고 했습니다. 위로와 교제 그리고 긍휼이 교회 안에 들어있어야 할 별 사탕과 같은 것입니다. 이것들이 바로 교회의 아름다운 특징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아름다운 특징들이 어디에서부터 나오는 것일까요? 2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마음을 같이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마음을 품어”(2)
“그렇다면 같은 생각을 가지고 같은 사랑을 나누며 마음을 합쳐서 하나가 되십시오.”(공동번역성경)
사도 바울은 복음에 합당한 생활을 하는 성도들의 공동체인 교회가 하나가 되라는 말씀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복음에 합당한 생활이란 (1) 복음에 협력하는 것이요. (2)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이요. (3) 영적 싸움에 승리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 성도는 ‘한 마음을 품어’ ‘마음을 합쳐서 하나가 되라’고 하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혹시 한국에서 교회를 다니면서 찬양대에 봉사해 본적이 있습니까? 성가대는 보통 4개의 파트로 합니다. 소프라노, 앨토, 테너 그리고 베이스로 나누어 있습니다. 이들은 각각 다른 악보를 가지고 있습니다. 대원이 40명이면 그 40명의 목소리는 각각 다릅니다. 이들의 음색은 각자의 특징이 있습니다. 그러기에 똑 같은 소리를 내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지휘자의 지휘에 따라서 질서있게 소리를 내어야 할 부분과 소리를 삼켜야 할 부분에 신호에 따라서 소리를 냅니다. 그러면 질서있게 조화롭게 화음을 이루어서 아름다운 소리를 내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 공동체를 이루는 구성원인 성도들을 보십시오. 얼마나 다양한 차이를 가지고 있는지 모릅니다. 먼저 남녀노소 – 남녀 성별이 다릅니다. 연세 드신 분과 젊은 사람이 있습니다. 직업도 다양합니다. 자라온 환경, 예수님을 믿는지 오래된 사람, 이제 막 시작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받은 바 은사가 다릅니다. 개성도 천차만별입니다. 성질이 급한 사람, 느긋한 사람이 있습니다. 외모도 다릅니다.
이렇게 교회 공동체 안에는 다양한 사람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렇지만 우리의 이 다양함과 다름 속에서 우리의 지휘자는 누구이겠습니까? 바로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이십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교회 성도들에게 말합니다.
“그렇다면 같은 생각을 가지고 같은 사랑을 나누며 마음을 합쳐서 하나가 되십시오. 그렇게 해서 나의 기쁨을 완전하게 해주십시오.”(공동번역 성경)
우리 각자는 다르고 다양하지만 같은 생각을 가지라고 합니다.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면서 같은 생각, 같은 시선, 같은 목적을 가지라고 합니다. 그리고는 같은 사랑을 나누라고 합니다. 그 사랑이란 바로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입니다. 자기 희생, 십자가의 은혜를 가지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같은 생각과 같은 사랑으로 우리에게 주어진 직분과 직무를 감당해 나가면 조화롭고 아름다움으로 하나가 되어갈 것입니다.
고린도 교회는 아주 유명한 교회이었습니다. 이 교회의 성도들은 신비한 이적적인 은사를 많이 가지고 있었습니다. 방언의 은사, 신유의 은사, 믿음의 은사, 지식의 은사, 지혜의 은사, 또 통변하는 은사 영을 분별하는 은사 등등 아주 여러 가지 은사들을 많이 가지고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고린도교회 성도들은 말도 잘해서 구변에 부족함이 없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에게 복음을 증거할 때에 얼마나 조리있게 증거했는지 모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를 향하여 “너희를 그리스도 안에서 갓난 아이같이 대한다”고 했습니다. 성숙한 자로 대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왜 그렇게 했을까요? 하나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나는 바울파다, 나는 그리스도파다, 나는 아볼로파다’하면서 하나 되지 못했습니다. 자기들이 받은 바 은사들을 자랑하고 분열되었습니다.
그들 중에는 예언의 은사를 받은 사람이 질서에 따라 자신을 절제하면서 예언을 해야 하는데, 어떤 사람이 은사를 받아서 예언하고 있는데, 다른 사람이 일어나서 또 예언하므로 예배가 혼란스럽게 되었습니다.
또 방언의 은사를 받은 사람은 방언 은사를 받지 못한 사람들 앞에서 알아 듣지도 못하는 방언을 막 했습니다. 그러니까 믿지 않는 사람들과 또 방언의 은사를 받지 못한 사람들이 이상하게 생각했습니다. 마치 정신 나간 사람처럼 허공을 대고 말하는 것처럼 보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말했습니다.
“은사를 왜 주셨다고 생각하느냐? 우리 몸에 각 기관이 여러 가지 지체가 있듯이 하나님께서 은사를 주시되 모든 사람들에게 한꺼번에 주시지 않고 골고루 다 은사를 주었는데, 그 은사를 어떻게 해야 하느냐? 우리 주님은 섬김으로 사랑 가운데서 해야 함을 가르치셨다”고 했습니다.
사랑 가운데 행한다는 말은 마음을 같이 하여 뜻을 한데 모아서 질서를 따라서 한다는 말입니다.
사도행전 16:11 이하에 보면 빌립보교회가 어떻게 세워지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이 2차 세계 선교 여행 가운데 첫번째 도시가 바로 빌립보입니다. 안식일을 맞이해서 예배할 회당이 없어 조용한 강가로 나가 기도하였습니다. 거기에서 유대인의 풍습에 다라서 기도하는 여인들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때에 바울은 자주 장사하는 루디아를 만나 전도하게 되고, 루디아가 마음 문을 열어 예수님을 영접하고 또 자기 집을 열어 예배 처소로 사용하게 되었습니다. 생활이 넉넉했던 루디아의 집이 교회가 되어 빌립보 교회가 출발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시작한 빌립보 교회는 한마디로 말하면 여성 주도적인 교회였습니다. 여성이 주도적인 역할하는 교회이기에 장점도 있고, 단점도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로마 감옥에 수감되었다는 소식을 접하자 ‘얼마나 춥고 배고플까 얼마나 고생스러울까’를 염려하면서 위문품을 모습니다. 그것을 교회의 핵심적인 지도자인 에바브로 디도를 대표자로 파송하여서 바울을 돌보도록 했습니다. 이렇게 사랑을 구체적으로 베푸는 것이 여성적인 빌립보 교회의 장점입니다.
그런가 하면 결정적인 단점이 있다면 바로 질투입니다. 사랑과 질투는 종이의 양면과 같습니다. 빌립보교회 안에서 유오디아와 순두게라는 두 여인 사이에 알력이 있었습니다. 만사에 경쟁적으로 하고 질투하고 시샘하다 보니 교회가 시끄럽고 화목하지를 못했습니다.
그래서 교회가 하나가 되어야 하는데 그러지를 못하니 사도 바울의 마음이 불편하고 걱정이 되었습니다. 그렇다고 대놓고 직접 “왜 싸우고 야단이냐. 하나 되어라”고 윽박지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빌립보 교회 성도들에게 말했습니다.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3)라고 했습니다. 한 마음으로 하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합니까?
1. 첫째로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3절에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라”고 당부를 했습니다.
‘다툼’은 경쟁심입니다. 경쟁심은 다른 사람과 비교하는 데서 생기는 마음입니다. 경쟁심은 두 가지 모습으로 나타냅니다.
하나는 열등감에 빠지게 합니다. 다른 사람과 비교하니, 자신이 너무 왜소하고 볼품이 없다고 생각하면서 자기 열등감에 빠집니다. 열등감은 자기 파괴로, 나아가 타인에 대해 공격성을 가지게 합니다.
다른 하나는 자기 포장입니다. 남을 이겨 보겠다고, 남보다 나아지겠다고 자기 과장을 하게 됩니다. 그러면 거짓말을 해야 하고, 과대 포장을 하므로 진실에 벗어나서 자기를 상실하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다툼(경쟁심)에는 반드시 오는 것이 있는데, 바로 허영입니다. 거짓된 자만심에 빠지게 됩니다. 허영은 진실을 잃게 합니다. 자기 존재를 상실하게 만들어 버립니다.
왜 그렇습니까? 다툼과 허영으로 행하면 오직 다른 사람이 나를 어떻게 보느냐, 남이 나를 어떻게 평가하느냐에 관심을 둡니다. 남이 나를 잘 대해 주면 기분이 좋고, 아니면 기분이 언짢아 지고, 살 맛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평가에 따라 사는 불쌍한 사람이 되어 버립니다.
아무 일에든지 다툼과 허영으로 하지 말라는 말은 하나님 앞에서(코람데오)에서 하라는 말입니다. 다른 사람의 평가에 연연하는, 상대 평가에 기죽지 말고, 하나님 앞에서 내가 어떤 존재인가. 하나님의 절대평가에 따라 살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을 보십시오. 예수님께서는 전혀 승부욕이 없었습니다. 남을 이겨 보겠다든가 남보다 나아지겠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 어떻게 그 뜻을 이루어갈까에 관심을 두고 살았습니다.
우리 모두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세워 나가면 우리의 마음을 하나가 되지 않겠습니까?
마음을 같이 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2. 둘째로,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라고 했습니다.
의사로서 한평생 덕 있는 삶을 사신 장로님이 계십니다. 그분은 말끝마다 “나는 성질이 못되어서 복받을 만한 존재가 못한데, 이만큼 복을 받고 사는 것은 우리 집사람 때문인 것 같아요. 우리 집사람 성품이 좋고 덕이 높아서 하나님이 복을 주시는가 봐요”라고 합니다.
나는 복 받을 만하지 못한데 아내 때문에 복을 받아 살고, 나는 시원찮은 삶인데 내 남편 때문에 이런 복을 받는다고 생각하므로 그 부부는 각각 다르지만 하나된 마음으로 살았을 것이 분명합니다.
아이들을 기르다 보면 아이에게서 좋지 못한 모습이 보이면 어떻게 합니까? 속으로 혹은 말로 “지 아버지를 닮아가지고 … 쯧쯧쯧” 반대로 아이들이 잘하는 것을 보면 다 자기를 닮아서 그렇다고 합니다.
이제부터는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십시오. “네가 아버지를 닮아서 공부를 잘하구나.” “네가 어머니를 닮아서 착하구나”라고 해 보십시오. 그 집은 한 달이 안 가서 천국과 같은 가정으로 변하는 역사가 일어날 것입니다.
이렇게 남을 자기보다 낫게 여기는 겸손함이 마음이 하나되게 만듭니다.
어거스틴에게 “당신의 신앙과 경건의 비밀이 무엇입니까”라고 물었을 때에 첫째도 겸손, 둘째도 겸손, 셋째도 겸손이라고 했습니다.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는 곳에는 둘이 모여도 하나가 되고, 열이 모여도 하나요 만 명이 모여도 하나가 될 것입니다.
마음이 하나가 되는 비결이 어디에 있을까요?
3. 셋째로, 자기 일을 돌볼 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일도 돌아보라고 했습니다.
4절 말씀입니다.
“각각 자기 일을 돌볼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라”
“저마다 제 실속만 차리지 말고 남의 이익도 돌보십시오.”(공동번역)
우리는 자기의 주어진 일에 성실해야 합니다. 나아가 남의 처지도 좀 돌아볼 수 있는 자가 되라는 말입니다. 이 말은 남의 일에 참견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만약 다른 사람에게 부족한 면이 발견되면 그것을 보충해 주고 잘 받쳐주라는 말입니다. 더불어 함께 공존하라는 것입니다. 여기에 마음이 하나되는 것입니다.
일본의 유명한 기독교 작가 미우라 아야코라는 작가가 있습니다. 이 분이 작가로 전업하기 전에식료품 마트를 했습니다. 남편과 함께 가게를 꾸미는데, 장사가 잘 되었습니다. 체력에 한계를 느낄만큼 바빴습니다. 그런데 자신의 가게에서 멀지 않는 같은 업종의 가게는 파리를 날리고 있었습니다.
미우라 아야코는 자기 가게가 잘 되는 것에 만족하지 않았습니다. 자기 옆에 있는 가게를 돌아보면서 더불어 공존을 생각했습니다. 자기 집에서 취급하는 몇 가지 종류를 더 이상 팔지 않고 이웃 가게에 가서 구입하도록 했습니다. 그러자 바쁘고 힘든 가게 일에 여유가 생겼습니다. 그 여가 시간에 소설을 기록했습니다. 바로 그 유명한 [빙점]이라는 소설이었습니다.
저는 ‘더불어 숲’이라는 말이 참 좋습니다. 한 나무가 햇볕과 바람 그리고 물을 독점하지 않고, 주변에 있는 나무와 나누므로 숲을 이룰 수 있습니다. 오늘 현대인은 너무 나 자신의 실속, 유익, 편함을 챙기고 얻으려고 하다가 고립되고, 외롭고, 허무한 나날을 보내고 있지는 않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내 주변에 열 사람이 있고, 백 사람이 있고, 천 사람에 의해 둘러 쌓여 있으면도 외롭고 공허한 이유가 어디에 있을까요? 공감, 마음의 하나가 없는 고립된 고아로 살기 때문이지 않겠습니까?
(1) 아무 일에든지 다툼과 허영으로 하지 말고 (하나님 앞에서 나의 정체성을 세워 나가고) (2) 남을 자기보다 낫게 여기고(겸손한 마음으로) (3) 제 실속만 차리지 말고 남의 이익도 돌아보므로(자기 집착, 이기주의를 버리므로)
서로의 마음이 열리고, 연결되어 하나가 되는 역사를 만들어 내어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내가 머무는 곳, 가정을 하나로, 교회 공동체를 하나로, 사회를 조화롭게 만들어가는 복음에 합당한 삶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사랑하는 주님 앞에(278, 2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