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은 독일 튀빙겐 구시가지와 구신학부, 쉬팁트 교회와 네카강)
●나를 튀빙겐대학에 인도해 주신 성종현 박사님●
내가 한국의 호만에움에서 독일어 기초 과정을 끝내고 독일 여러 대학에 입학허가를 신청했는데 유독 튀빙겐대학교 한군데서 신학전공과 철학 부전공으로 석사과정으로 입학허가가 나왔다. 나는 결혼 한지 겨우 2년 후 갓난아이들과 집사람을 뒤로 한 채 무작정 독일 튀빙겐으로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물론 한국 호만에움 김규철 원장의 친구인 성종현 박사를 소개해 주어 그 힘만 믿고 겁 없이 낯 설은 독일 튀빙겐으로 향하는 길이었다. 일본 하네다 공항을 거쳐서 독일 프랑크푸르트 공항에 도착한 나를 마중 나온 후배 이상재 선교사의 안내를 받아 기차를 타고 4시간 동안 독일 남부의 수도 슈투트가르트 역에 도착했다. 여기서 나를 마중 나온 깨끗한 미남의 성종현 박사(당시 유학생)를 만나 나를 튀빙겐으로 안내 했다. 처음 튀빙겐으로 가는 길, 성종현 박사의 아우디 자동차에 내 몸을 실었을 때 어두운 밤이었다. 한참 자동차로 튀빙겐 가는 길은 어느 시골 준 고속도로 언덕을 넘고 푸른 잔디밭을 한참 가고 있었는데 가도 가도 끝이 없는 독일 숲속 쉬밭츠발트 숲속 길이 나타났다. 그곳이 지금의 베벤하우젠 가는 길이 아닌가 싶다. 이윽고 사거리에 신호등이 정지 신호를 알리었고, 곧장 우회전 하니 그곳이 지금의 마틴스 키르헤(마태교회) 사거리가 아닌가 싶다. 나는 생각해 보았다. 불과 3일 만에 나를 한국 화곡동에서 독일 튀빙겐대학으로 데려오신 것은 내 힘이 아니고 하나님의 섭리였다는 것을 감격해하고 있었던 것이다.
언어가 다르고 도시 환경이 다른 낫선 튀빙겐, 그곳은 나를 압도하고, 나의 기를 꺽어 놓았다. 거리에는 한사람 안 보이고 건물만이 이곳저곳, 저 건물들이 다 대학건물이라고 한다. 나를 안내한 성종현 박사는 바로 그곳 사거리 우측 첫 집 4층 옥탑 방에 사는데 완전히 이국적이었고, 초인종 벨이 입구 정문에 있어 그것을 누르고 엘리베이터가 없이 걸어서 4층까지 올라갔다. 마침 사모님은 병원에 짖즈박헤(야간근무) 하느라 병원에 가셨고, 성종현 박사께서 안살림을 다 하시는 것 같았다. 설거지며, 아들 세인이와 딸 유리를 도맡아 키우셨다. 난 이곳에서 처음 독일 유학생활이 시작되었다. 자세하고 세밀한 그러면서 털털하시고 모나지 않으신 성종현 박사님은 지금 은퇴하셨어도 그 성격 변하지 않고 소유하고 계신다. 매번 식사 때마다 자녀를 위한 기도, 나의 유학생활의 앞날을 위해 기도해주신 그 고마움, 인자하신 성종현 박사님! 그분은 내 은인이며 평생 잊지 못할 유학생활의 첫 인도자 은인이시다. 그분의 그 인자하심과 자녀를 위한 기도 때문에 오늘 아들은 삼성의료원 교수, 딸은 탈렌트로 하나님께서 훌륭하게 잘 성장시켜 주신 것이 아닌가 싶다.
튀빙겐에서 나는 맨 처음 공개 모임이 83년 5월 어느 날 튀빙겐 한인 유학생 야유회가 아닌가 싶다. 성종현 박사님의 안내로 나는 그가 준비해간 도시락을 가지고 참석하였다. 한국 사람들이 없는 것으로만 알았던 그곳에 이렇게 유학생이 많이 모이다니 마치 다른 세상에서 한국 사람들을 만나듯 싶었다. 여기에 유명했던 분들이 다 모였다. 고려대학교 총장을 지내셨던 이기수 박사께선 마침 학위가 끝나 마지막 참석이고, 에큐메니칼 지도자이신 박종화 박사님은 독일교회 협동목회를 끝내고 박사학위 과정에 있었는데, 지금은 한신대학교 교수를 거쳐, 장충단의 엘리뜨 교회의 하나인 경동교회를 담임하시고 후배 한신대학교 총장이셨던 채수일 목사에게 물려주시고 현재는 국민일보 이사장으로 계신다. 그리고 지금의 소망교회 김지철 박사, 장신대학교 총장이신 김명룡 박사, 한일장신대학교 교수 배경식 박사, 등 모두 다 만나게 되었다. 물론 그 뒤에 만났지만 일본의 동경신학대학에 교수로 있는 박헌욱 박사, 서울신학대학교 총장 유석성 박사, 한국관광연구원장을 지내신 정갑영 박사, 등, 많은 다른 전공을 하신 교수님들을 만나게 되었다.
그 때가 83년 오월이니까 튀빙겐의 날씨는 구름 한점 없이 맑고 맑은 푸른 하늘, 먼지하나 없는 깨끗한 날씨는 한국에서의 생활을 단숨에 다 잊어버렸다. 온천지가 숲으로 가득 차 있어 가도 가도 끝이 없는 발트호이저 오스트 숲속 길, 가다가 지치면 부로스트를 구워먹고, 사과 밭이 나오면 달 고 맛있는 사과를 따 먹을라치면 벌레들이 다 먹어 검은 구멍이 뽕뽕 뚤려 있었다. 그래도 미처 벌래가 안 먹은 달고 맛있는 사과를 골라 먹는 재미, 뿐만 아니라 네카강에 검붉은 키르쉬 열매는 가을이 되면 검붉은 색, 한국의 뽕나무 오디 열매처럼 네카 강가에 떨어져 있어 그것을 주워 와서 말리어 먹으면 얼마나 달고 맛있는지, 마치 한국의 곶감 맛이다. 그리고 말려 차를 다려 끓여 마시면 단맛이 우려나 온몸을 푹 녹여준다.
몇일 후 나를 안내해준 성종현 박사께서는 한국에서 비자를 받아 왔지만 여기 와서는 다시 받아야 해서 외국인 관청으로 같이 갔다. 학생 비자를 발급 받기위해 석사과정이니까 그곳에서 느긋한 비자를 발급해 주었다. 보통 언어과정을 하려면 6개월인데 1년을 발급해 주었다. 하여튼 일년동안 독일어 공부에 전념하여 합격해야 한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튀빙겐대학은 언어과정이 독일 언어학부에 속해 있다고 한다. 물론 아우랜더 암트(외국인관청)에서 하는 것이지만 그리고 신학을 하려면 라틴어, 히브리어, 헬라어, 등 고대어를 해야 하기 때문에 처음부터 용기가 나질 않았다. 그러나 독일어가 첫 관문으로 쉽게 하면 안 되는 문제가 깔려 있는 듯했다. 그래서 성종현 박사는 나를 볼푸강 룩이라는 어학코스 렉토(담당교수)에게 소개를 해주시어 어학을 공부하게 인도하여 주었다. 그러나 그 언어공부는 고급반이라 쉽지 않았다. 어느 듯 여름방학이 되어 성종현 박사 댁에서 신세만 질 수가 없는 형편이었다. 2개월 후 난 독일 남부의 작은 도시 풀라이부르크 테엠베 어학코스에 입학하였다. 그곳에서 나는 여러 국가에서 온 외국인 학생들과 어학을 하면서 많은 교제를 나누었다. 2개월 어학코스를 마치고 다시 튀빙겐으로 돌아 온 나는 어학 교수이신 볼푸강 룩에게 어학시험을 보았는데 한국교회 역사를 성종현 박사께서 써준 내용을 들고 외웠다. 난 구두시험에서 그 덕으로 겨우 합격하였다.
나는 성종현 박사의 안내로 튀빙겐대학교 학생처에서 운영하는 발트호이저 오스트 학생 기숙사에 신청한 드라이 찜머가 허락되어 한국의 식구들을 데리고 올 수 있었다. 물론 아이들은 그냥 올 수 있었고 집사람은 교육학으로 학생비자를 받아 오게 되었다. 물론 이 모든 서류준비는 성종현 박사께서 다 도와 주셨다. 나는 그의 아주 친절한 안내를 받으며 어학공부와 신학공부가 시작 된 것이다. 뿐만 아니라 독일에서 신학을 공부하기 위해서는 라틴어와 히브리어 헬라어가 필수이었다. 물론 나는 한국의 학부에서 공부한 것이 있지만 잊어진지 오래되어 다시 매학기 마다 어학과 신학강의를 병행하여 공부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84년인가 성종현 박사는 학위를 끝내고 귀국길에 오르고 나는 성종현 박사가 가르쳐준 유학방법으로 모든 일을 혼자 처리하고 공부해야 했다. 나는 어학과 신학석사 통합과정의 공부를 마무리하고 박사(Promotion)과정에 허가를 받았다. 그러니까 나의 신학공부의 유학생활은 성종현 박사께서 인도해 주셨다. 그래서 그분은 은퇴한 다음에도 매 학기 한번은 같이 꼭 만나 영화도 보고, 음식도 먹고, 드라이도브 하며 행복한 만남의 시간을 갖고 있다.
*. 나의 삶과 신앙 그리고 학문 형성은 5-5)에서 계속됩니다.
후곡교수님의 은사이신 성종현 빅사님의 아들인 성세인 씨는 서울삼성병원 의사이고 딸은 유명 인기 탈렌트 성유리 씨네요. 유학시절 같이 사셨네요.
그리고 소망교회 김지철 목사님, 고려대 이기수 총장님께서도 독일 튀빙겐대학교 동문이시네요.
신앙생활을 사시면서 공부를 열심히 하셨네요.
수고 많으셨고 휼륭하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