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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상수훈 강해노트(30-2)
오른손의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
원저자: 김성수 목사 / 편집자: 카이로스
(마 16:6,11,12) 6 예수께서 이르시되 삼가(-> ‘호라오, ὁράω, 제대로 깨달아)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주의하라 하신대 … 11 어찌 내 말한 것이 떡에 관함이 아닌 줄을 깨닫지 못하느냐 오직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주의하라 하시니 (-> 깨달아야 주의할 수 있다는 말) 12 그제야 제자들이 떡의 누룩이 아니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교훈을 삼가라고 말씀하신 줄을 깨달으니라(-> 깨달으니까 ‘주의’하게 된다)
6절에 ‘삼가’라고 번역된 단어가 ‘호라오’이다. 헬라어에서 ‘보다’라는 단어는 네 가지가 있다. ‘옵타노마이(ὀπτάνομαι), 에이돈(εἶδον), 블레포(βλέπω), 호라오(ὁράω)’이다. ‘옵타노마이’는 그냥 눈으로 보여서 보는 것이고, ‘에이돈’은 어떤 목적을 가지고 대상을 보여주어서 보는 것이다. 성전이 저기 서 있는 것을 하나님이 보라고 보여준 것이 ‘에이돈’이다. ‘블레포’는 ‘먹어 보다, 입어 보다, 씹어 보다’와 같이 시험하거나 훈련할 때 ‘해 보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아, 이게 그것이구나!’ 하고 그 진의를 깨달아 보게 되는 것을 ‘호라오’라고 한다. 여기서 주님은 ‘호라오’라는 단어를 쓰셨다. 너희들은 율법, 말씀이 무엇인지 깨달아 ‘호라오’ 하면 바리새인의 누룩이 무엇인지 알고 주의할(프로세코) 수 있다.
11절도 너희가 깨달으면 주의할 수 있다는 말이다. 진리를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절대로 ‘주의’가 불가능하다. 그래서 열심히 율법만 지키다가 멸망의 자리로 떨어지게 된다. (‘주의’가 안 되니 ‘부주의’하게 전하다가 배나 지옥 자식을 만들어 같이 멸망으로 떨어진다.) 본문으로 돌아가서 ‘구제할 때 조심하라.’ 말씀하신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을 이어가신다.
(마 6:1)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치 않도록 주의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얻지 못하느니라
‘사람에게 보이려고 자비를 베푸는 짓 하지 말라’는 말씀인데 우리는 ‘착한 일할 때 사람들에게 자랑하기 위해 하지 말라’는 말씀으로 알아듣는다. (너희들 ‘진짜 상 받으려면 남들이 보지 않는 데서 착한 일 해!’ 그런 말이 아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께 칭찬받는 일인 줄 알고 열심히 숨어서 착한 일 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작은 일 해놓고도 누가 알아주지 않으면 마음이 불편해지는 것이 보편적인 정서이다. 이 말씀은 그런 말씀이 아니다.
여기서 ‘보이다’라고 번역된 ‘데아오마이(θεάομαι)’는 ‘밖의 것으로만 보는 것’을 말한다. 예를 들어 성전을 보면서 성전의 내용인 진리를 보지 못하고 그 성전의 표피적 의미인 율법만 보는 것을 ‘데아오마이’라고 한다. 그냥 보이는 것만 보는 것, 그 안의 것을 보지 못하는 것을 ‘데아오마이’라고 한다.
(요일 4:12-13) 12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느니라 13 그의 성령을 우리에게 주시므로 우리가 그 안에 거하고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아느니라 14 아버지가 아들을 세상의 구주로 보내신 것을 우리가 보았고 또 증거하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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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우리가 하나님을 보지 못하니까 아버지께서 아들을 (육신을 입히고 그 안에 아버지인 진리를 넣어서) 세상에 구주로 보내셨다. 세상이 그 예수는 보았다. 그러나 하나님은 못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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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절: ‘어느 때에도 하나님을 본(‘데아오마이’) 사람은 없다. / 창세전부터 지금까지 그 어느 때에도 하나님을 ‘나타난 형상’으로 본 사람은 아무도 없다. 아담, 아브라함, 모세, 다윗, 바울, 그 누구도 하나님을 나타난 형상으로 보지 못했다. 구약시대에는 사람들에게 잠깐 보여줬다가, 신약시대에는 안 보여주시는 것이 아니다. / 말씀으로 보고, 성령을 통하여 본 것을 가지고 ‘보았다’고 하는 것이다. 진리를 가진 자가 그 진리를 전할 때, 그 전달받는 자가 진리를 깨달아 알아서 ‘아, 내가 온전하신 하나님을 보았다.’라고 하는 것이지 하나님의 형상을 본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눈에 담을 수 없다. (아브라함에게 세 천사의 모습으로 나타났던 하나님은 그 (온전하신) 하나님이 아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므로 인간의 눈과 인식 속에 포착되지 않는다.) ‘데오마이’한 자는 아무도 없다.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그 진리를 이야기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느니라.
성경은 ‘하나님을 본 자는 죽임을 당한다.’고 한다. 그 말은 인간이 하나님을 볼 수 있다는 말이 아니라, 그게 거짓말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보았다고 하는 자는 죽은 자라는 말이다. 산자라면 그렇게 얘기 못 한다는 말이다.
의를 전할 때, 사랑을 전할 때 보이는 어떤 신비적인 기적 같은 것을 보여주고, 어떤 착한 사람을 롤 모델로 제시해서 ‘데오마이’로 주지 마! 그 안에 들어있는 진리를 전해줘! 껍데기로만 전해주지 마!
표피적으로 보는 것, 내용을 모르고 나타난 것으로만 보는 것을 ‘데오마이’라고 한다. 진리를 전하여 구제할 때 ‘겉의 것’만 보여주려고 하지 마! 그게 ‘사람에게 보이려고’라는 어구의 진의이다. (‘속의 것’을 전해줘‘라는 말이다.) 신사도 운동이나 신비주의 사역을 하고 있는 사람들은 전부 하나님의 말을 거스려 일하고 있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반드시 사람들 눈에 뭘 보여줌으로써 사역하려고 한다. 그게 ’데오마이‘이다. 율법주의와 인본주의도 마찬가지로 눈에 보이는 것만 가르치고, 눈에 보이는 행위를 강조한다. 하나님은 눈에 보이는 ’호 코스모스‘의 것들을 통해 진리를 깨닫고 그것을 마음으로 가지라고 하시는데 사람들은 그것을 행하기에 급급하다. 그래서 망한다. 그게 사람의 눈에는 좋게 보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내가 천지에 충만하다.’ 말씀하시는 것은 모든 것이 하나님을 이야기하고 있다는 말이다. 사람의 세포를 연구하면 우주가 보인다. 형식과 원리가 똑같다. -> 천지가 하나님을, 진리를, 설명하고 있는 것처럼, 나도 하나님을 설명하고 있다. 모든 것이 다 진리이고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이다. 내가 그 마음을 진리로 갖게 되면(물론 내 수준에서이지만) 그 충만이신 하나님을 내가 볼 수 있다. 그때 ‘내가 충만하다’라고 한다.
(요 12:37-40) 37 이렇게 많은 표적을 저희 앞에서 행하셨으나 저를 믿지 아니하니 38 이는 선지자 이사야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가로되 주여 우리에게 들은 바를 누가 믿었으며 주의 팔이 뉘게 나타났나이까 하였더라 39 저희가 능히 믿지 못한 것은 이 까닭이니 곧 이사야가 다시 일렀으되 40 저희 눈을 멀게 하시고 저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셨으니 이는 저희로 하여금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깨닫고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하였음이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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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 저를 믿지 아니하니 -> 보이는 것으로 주어도 믿지 못하게 되어 있다.
-40: ‘고침을 받지 못하게 하나님이 만들어 놓으셨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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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께서는 눈에 보이는 많은 표적들을 행하셨다. 그런데 아무도 주님을 믿지 않았다. 그것은 당연한 결과이다. 아직 진리의 성령이 오시기 전인데 누가 주님의 표적을 알아버리면 안 되기 때문이다. 그러한 이야기가 이사야서에 이미 예언이 되어 있었다는 것이 성경 기록으로 확인된다. / 하나님께서 저희 눈을 멀게 하셨고 저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셨다.(40절) 그 이유가 ‘저희가 눈으로 보고 깨달아 고침을 받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그것은 하나님이 세우신 원칙이다. 그런데 작금의 교회는 전부 눈에 보이는 것을 요구한다. 그리고 눈에 보이는 것으로 행하려고 한다. 그래야 안심이 되기 때문이다. 마음에 진리가 없으니까 그런 것이다.
눈에 보이는 것만 전하고 행하는 자들은 상이 없다. 사도 바울이 말하는 자신이 받을 상은 ‘내가 말씀을 가감 없이, 복음을 거짓 없이 올바로 전하는 것’이라고 했다. 자기는 원래 복음과 아무 상관 없는 자였는데, 어떻게 하여 진리를 알게 되어 사랑을 흘려주게 되었고, 사람들을 용서하고 있다. 그 복음 전하는 자의 삶은 그리스도의 삶이며 더 나아가 하나님의 일이다. 그런데 내가 하나님이 하시는 그 일에 감히 동참하고 있다. 나에게 이것 이상의 상이 있을 수 없다. 그러나 진리를 전해주지 못하고 껍데기(율법)만 전하는 이들은 ‘상이 없다’(마 6:1).
(마 6:2) 그러므로 구제할 때 외식하는 자가 사람에게 영광을 얻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는 것같이 너희 앞에 나팔을 불지 말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희는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자기 상’이란 하나님이 주시는 상이 아니라 인간들이 주는 상이다. 구제할 때, 진리를 전할 때, 사랑을 흘려 줄 때 외식하는 자(‘배우’처럼, 자기가 그 사람이 아닌데 그 사람인 척하는 자)처럼 사람에게 영광을 얻으려고 회당(교회)에서 나팔을 불지 말라. ‘외식’이란 진리도 모르는 자가 성경을 전한답시고 성경을 인간의 선악 구조로 해석해서 전해주는 것을 말한다. 껍질만 전해주는 것이다. 그것은 배우의 연극과 같다. 아무런 내용도 없고 앵무새처럼 대사만 읊조리는 잘못된 가르침에 불과하다. 그들은 사람의 영광을 얻으려고 하는 자들이다.
영광(‘독사’, δόξα)은 하나님의 것이 눈에 보이는 것으로 나타나고 설명될 때 쓰는 말이다. 영광은 하나님이 먼저 우리에게 돌린다. 예수님도 ‘영광은 아버지가 나에게 돌리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영광은 사람이 하나님께 돌리는 것이 아니다.
(요 5:41) 41 나는 사람에게 영광을 취하지 아니하노라
영광은 하나님이 사람에게 먼저 돌리신다. 그 영광이 올바로 깨달아져서 그로부터 진리가 선포되고 살게 될 때 그가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낸다.’라고 한다. 그것을 굳이 ‘영광을 돌린다’라고 표현해도 무방하다.
그런데 사람의 영광이라는 것이 있다. (하나님의 영광 = 하나님의 것이 사람에게 가시적으로 나타나는 것) 사람의 영광은 ‘하나님처럼 되고 싶은 피조물의 헛된 망상이 나타나는 것’이다. 그것은 선악 구조 속에서 내가 하나님처럼 되는 것 즉, ‘에피뚜미아(ἐπιθυμία, 탐심)’가 드러나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사람이 사람을 칭송하고 칭송을 받은 사람은 ‘하나님처럼’의 호사를 마음껏 누린다. 이 영광은 서로 칭찬해 주고 칭찬받고 하는 것이다. 이 영광이 서로에게 돌려지려면 말씀을 전하는 사람은 듣는 이들에게 듣기 좋은 이야기를 해줘야 하고, 듣는 이들은 그게 너무 좋아 열광한다. 이게 사람의 영광이다.
(요 12:43) 43 저희는 사람의 영광을 하나님의 영광보다 더 사랑하였더라
사람의 영광을 사랑하는 자들은 서로서로 영광을 주고받는다. 말씀을 주는 자도 받는 자도 모두 서로의 영광만을 추구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쌍방이 서로 좋아하는 것을 주어야 한다. 주는 쪽에서는 사람이 듣기 좋아하고 보람도 느끼고 자기 가치 상승의 욕구도 해결되는 그런 종류의 말을 주어야 하고(사람의 영광), 그런 말을 전해 들은 자들은 그 전해준 자가 좋아하는 인간적 칭찬과 박수를 보내주어야 한다. 자기가 원하는 것을 열심히 말헤주고 있으니 당연히 좋아하게 되어 있다. 주님은 그런 사람들처럼 하지 말라 하신다.
주님께서 ‘그러한 자들처럼 나팔 불지 마!’ 하시는데 그 나팔의 의미를 몇 군데 찾아보자.
(사 58:1) 1 크게 외치라 아끼지 말라 네 목소리를 나팔 같이 날려 내 백성에게 그 허물을, 야곱 집에 그 죄를 고하라
-> 말씀, 진리를 전하는 것을 ‘나팔을 불어라’라고 한다.
(고전 14:8-9) 만일 나팔이 분명치 못한 소리를 내면 누가 전쟁을 예비하리요 9 이와 같이 너희도 혀로써 알아듣기 쉬운 말을 하지 아니하면 그 말하는 것을 어찌 알리요 이는 허공에다 말하는 것이라
나팔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일, 구제하는 일, 사랑을 흘려주는 일을 가리킨다. 그 일을 할 때 외식하는 자들과 같이 하지 말라. (쉬운 말로 하라는 것이 아니라 진리를 전하라는 말이다.) 외식하는 자들처럼 나팔을 불면 사람들이 귀가 먹는다.
(민 10:1-2, 7) 1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2 은나팔 둘을 만들되 쳐서 만들어서 그것으로 회중을 소집하며 진을 진행케 할 것이라 … 7 또 회중을 모을 때에도 나팔을 불 것이나 소리를 울려 불지 말 것이며
7절을 보면 나팔을 불되 소리를 울려 불지 말라고 하신다. ‘루아(ר֫וּע)’는 ‘소리로 귀를 먹게 하다’라는 뜻이다. -> ‘나팔을 불어라. 그러나 그 나팔 소리로 그들이 귀를 먹게 하지는 말라’는 뜻이다. 예수님이 오셨을 때 모든 자들이 귀가 먹어 있었다. 그래서 주님께서 귀머거리 고치시는 사역을 행하심으로, 진리가 전해졌을 때 그들의 귀가 어떻게 열리게 되는지를 보여주셨다.
너희들은 귀먹은 바리새인들의 율법만 듣고 귀가 다 먹어서 내 말을 못 알아듣고 있다. ‘내가 그 귀를 뚫어줄게!’ 하셨다. 오늘 본문에서 ‘그 나팔 불 때, 외식하는 자처럼 나팔 불지 마. 그러면 그들의 귀가 먹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네가 그 나팔을 분다면, 너는 사람들에게 칭찬받기 위해서 부는 것이다.’
이런 현상은 오늘날도 마찬가지로 일어난다. 사방에서 나팔을 분다. 그리고 모두들 그 나팔 소리 듣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는 거의 다 귀를 먹게 하는 나팔 소리를 내고 있고, 듣는 이들도 전부 그 나팔 소리 때문에 들을 귀를 상실해 버렸다. 엉뚱한 나팔 소리 들으면 귀가 먹으니 명심하라.
(마 6:3) 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의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할 수 있나? 정 그렇게 하고 싶으면 왼손을 잠깐 어디다 두고 와야 하는데 그것은 불가능하다. 여기서 ‘오른손’ 그리고 ‘왼손’이라고 번역된 ‘덱시오스(δεξιός)’와 ‘아리스테로스(ἀριστερός)’는 그냥 ‘오른편, 왼편’이라고 번역하는 것이 좋다. 성경에서 오른편은 늘 진리의 편을 말하고, 왼편은 비진리의 편 즉, 멸망의 편을 가리킨다. ‘옳은 편, 그른 편’으로 이해하면 좋다. (하나님에게는 오른편밖에 없다. 왼편은 없다.)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가 두 아들을 데리고 예수님께 와서 하나는 왼편 하나는 오른편에 앉게 해 달라고 요구했다가 혼이 났다. (그게 그른 편, 옳은 편이라는 말이다.) 예수님이 ‘네가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모른다!’ 하고 꾸짖으셨다. 그 말은 둘 중의 하나는 멸망으로 보내달라는 말인데 어떻게 그런 것을 요구하느냐는 말이었다. 그런 것은 하나님께서 결정하실 일이다.
요셉이 야곱에게 두 아들을 데리고 와서 (므낫세가 장남이고, 에브라임이 차남이다) 므낫세를 야곱의 오른손 앞에 두고, 에브라임을 왼손 앞에 두었다. 그런데 야곱이 손을 엇바꾸어 왼손을 므낫세 위에 얹었다. / ‘옳은 손(옳은 편)은 하나님의 언약 안에서 많은 열매를 맺게 되는 진리의 현실을 의미하고, 왼편은 삭제되어야 할 비진리를 의미한다. ’비진리‘는 나쁜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껍데기로서의 호 코스모스(세상)을 말한다.
므낫세(מְנַשֶּׁה, 제거하다, 없어지다, 소멸되다)는 장남인데 ’왼손‘으로 안수받았고, 차자 에브라임(אֶפְרַ֫יִם, 한 알의 씨가 땅에 떨어져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은 ‘오른손’으로 안수받게 되는 것이 므낫세와 에브라임의 이야기이다. 그 에브라임이 예수를 상징한다. 그래서 그 아비가 요셉(יוֹסֵף)이다. 그게 오른편, 왼편의 이야기이다.
(마 25:32-34, 41) 32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각각 분별하기를 목자가 양과 염소를 분별하는 것같이 하여 33 양은 그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리라 34 그 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하라 … 41 또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영한 불에 들어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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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양은 그 오른편(= ‘덱시오스’) / 오늘 본문‘: ‘오른 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 / ‘덱시오스’ = 오른 편, 양들이 있는 편, 진리의 편. / 그런 면에서 ‘옳은 손’이라 해도 무방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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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른편에 있는 사람들은 오른손의 역할을 하게 되어 있다. 하나님의 오른손은 늘 복음을 전하는 하나님의 사람들을 가리킨다. 그들과 왼편의 사람들은 완전히 다르다. 마태복음 25장에는 ‘왼편’의 사람들이 왜 자기들을 불에 집어넣느냐고 항의하는 장면이 나온다. 자기들은 이러저러한 훌륭한 행위를 열심히 했다고 주장한다. 율법을 행했다는 것이다. 그렇게 자신 있게 항의할 수 있는 자들은 율법주의자들밖에 없다. 다른 사람들은 긴가민가해서 그렇게 자신 있게 말하지 못한다. 율법주의자들은 소신과 확신을 가지고 종교 행위를 하기 때문에 자기들은 분명히 옳은 일을 했다고 굳게 믿는다.
기독교 밖의 예수와 상관없는 사람들은 긴가민가해서 ‘내가 뭘 했다’고 예수님 앞에서 주장 할 수 없다. 그런데 예수를 믿노라고 하는 율법주의자들은 내가 한 게 있다고 강하게 주장한다. 그렇게 배웠고, 성경도 그렇게 이해했기 때문에 ‘나는 했다’고 항의할 수 있는 사람은 그들밖에 없다. 그 사람들이 ‘그른’ 편이다.
반면에 오른편의 ‘덱시오스’들은 자기들이 내어놓을 것이 없어서 머리만 긁고 있다. ‘우리가 언제 그런 일을 했지요?’ 그들에게는 모든 것이 은혜이기 때문에 자기가 한 일이 전혀 없다. 혹 하나님이 보시기에 기특해 보이는 일이 자기에게서 나왔다 할지라도 그것은 내 안의 하나님이 행하신 일이지 자기가 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안다. 그들은 진리를 깨닫고 진리를 전하는 일을 한다. 오른편의 ‘덱시오스’들이 한 일을 왼편의 염소들이 알 수가 없다.
그래서 ‘오른손의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는 말은 “오른편의 덱시오스들아! 왼편도 다 알아먹는 그런 것 하지 말라! 내가 원하는 것은 그런 수준의 것이 아니다.”라는 말이다.
예수님 옆에도 왼편, 오른편이 갈라진다. 구원받은 강도가 오른편이다. 예수님이 가시 면류관을 쓰시고 십자가에 달려있고. 양편이 갈라져 있다. 예수님이 가시 면류관을 썼다는 것은 ‘가시와 엉겅퀴’의 대장, 율법의 왕으로 매달리신 것을 의미한다. 이렇게 율법에 대해 죽으시는 예수님을 ‘오른편’으로 보는 자가 있고, ‘왼편’으로 보는 자가 있다. 오른편으로 보는 자는 ‘우리가 이렇게 죽는 게 마땅합니다. 내가 강도입니다.’라고 고백하고, 왼편으로 보는 자들은 ‘내가 왜 죽어야 해? 네가 그리스도라며? 나를 구원해야지!’라고 주장한다.
교회의 재정을 투명하게 합시다. 목사의 정년을 3년으로 합시다. 조직은 이렇게 해야 한다 등의 얘기로 떠들면 ‘저게 우리가 본받아야 할 교회야!’ 하면서 진리와 상관없는 자들도 칭찬한다. 다른 종교인들도 다 하는 그런 일을 두고 ‘저게 올바른 교회야!’ 같은 소리 하지 마! -> 그게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는 말의 참뜻이다. 구제의 일을 하고 있는데(‘엘레모수네’) 왼손도 아는 그런 것 하지 말고 왼편, 율법주의는 모르는, 세상은 모르는 ‘그 진리를 전하라’는 말이다.
그리고 마지막 4절이 이렇게 결론을 맺는다. (구제 이야기의 마지막 절이다.)
(마 6:4) 네 구제함이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블레포) 너의 아버지가 갚으시리라
역시 ‘엘레모수네’가 주제이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긍휼을 전할 때 은밀한 것으로 하라. -> 은밀한 구제(‘크립토스, κρυπτός, 은밀한 것’)는 ‘외적인 것’과 대조되는 ‘내적인 것’으로 하는 구제를 말한다. 표피가 율법이라면 그 내용인 진리가 ‘크립토스’이다. 구제할 때는 ‘내적인 것을 흘려 주라!’는 말이다. / ‘보시는’이라고 번역된 ‘블레포’는 ‘하나님께서 보게 하시는 봄’이다. -> 두 어구를 이으면 ‘네 구제함을 은밀한 것으로 하라! 은밀한 것을 보게 하시는 너의 아버지가 갚으시리라’이다.
한글 개역 성경에는 번역되어 있지 않지만, 원어 성경에는 ‘수 엔 호 파네로스(φανερός, 외형적인 것)’라는 어구가 붙어있다. ‘네 안에 외적인 것을 분명한 것으로 넘겨주다’라는 뜻이다. (註: 엄밀한 현대 헬라어 원어 성경 본문에는 해당 구가 빠져 있다. 고대 일부 필사본(공인 본문 계열)에는 이 단어가 포함되어 전해 내려왔다. -> "은밀하게 행한 선행을 하나님께서 나중에 겉으로 드러나게(공개적으로) 갚아 주신다")
‘은밀한 것(크립토스)’을 싸고 있는 그릇이 ‘파네로스’이다. 표피적인 율법에 머문 거짓말이 아니라 내적인 진리를 제대로 넘겨주어 구제하면 그 은밀한 것을 보게 하시는 하나님이 그 외적인 것을 분명한 것으로 완전하게 넘겨주신다. 4절은 ‘안의 것, 진리로 구제하라!’ 이런 말이다.
(롬 2:28-29) 28 대저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라 29 할례는 마음에 해야지 신령에 있고 의문(= 그라마티, γράμματι, 글자, 문서, 율법)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 그 칭찬이 사람에게서가 아니요 다만 하나님에게서니라
표면적 유대인 이라는 어구에 쓰인 단어가 ‘파네로스’이고 이면적 유대인이라는 어구에 쓰인 단어가 ‘크립토스’이다. 표면적 유대의 것(‘유다이오스’, Ἰουδαῖος, ‘유대적인 것, 유다에 속한 것’)은 율법, 옛 성전, 옛 이스라엘을 말하는데 그것은 진짜가 아니다. 그 내용(파네로스)이 진짜 유대의 것(유다이오스)이다. -> 말씀을 법으로 전하면 안 된다. 진리를 제대로 잘 전하라. 그러면 외적인 것도 내적인 것으로 분명하게 넘겨주시겠다는 말이다. -> 아무것도 하지 말라는 말이 아니다.
동양학에 ‘위 무위(爲 無爲)’라는 말이 있다. 그 말은 아무것도 하지 말라는 말이 아니라, 행함이 아닌 영원한 것(無)을 하라. 진리를 깨닫고, 진리가 되어, 진리를 전하는 진리의 사람이 되라는 말이다. 그런 사람이 어떻게 ‘나는 이제 마음대로 살아도 된대’ 하면서 말도 안 되는 시정잡배들의 엉터리 자유를 외칠 수 있다는 말인가? 우리도 할 일이 있다. 무위(無爲)는 하늘의 일을 하는 것이다.
무(無)는 ‘없음’이 아니다. ‘진짜 있는 것’인데 피조 세계가 감지하지 못하는 것을 ‘무(無)’라고 한다. 무위(無爲)는 [없을 무(無)+할 위(爲)] => ‘그 하늘의 것을 하라.’ / 노자의 ‘위 무위’도 ‘진리를 하라’는 말이다. / ‘‘위 무위“하라 = 진리를 행하라.
구제할 때 하늘의 사랑을 깨달아 그 사랑을 흘려줄 때, 어떠한 자세와 방법으로 전해주어야 하는지 잘 알아서 진짜 구제 하시기 바란다.
[정리]
하나님이 우리에게 율법을 세 가지로 요약해서 설명해 주시고, 그것을 사랑(마지막 네 번째 것, 에스카토스 코드란테스)으로 완성시켜 주신다.
① 살인하지 마(희생 제사 드리지 마): 성부 하나님과의 관계를 잘못 맺으면, 희생 제사를 자꾸 드리게 된다.
② 간음하지 마: 남편이신 성자 하나님과의 관계를 잘못 맺으면 계속 간음하게 된다.
③ 거짓증거 하지 마: 진리의 성령 하나님과의 관계를 잘못 맺으면 거짓 증거를 계속하게 된다.
④ 이 세 가지 관계가 올바르게 정립되면 모든 율법이 다 해결된다. 그것을 ‘온전함’(에스카토스 코드란테스)이라 하고, ‘사랑의 상태’라고 하며, 그렇게 깨달아 알아낸 진리를 전해주는 것을 ‘사랑한다’라고 한다.
⑤ 그리고 표피적으로 인지되는(보게 되는) 살인, 간음, 거짓 증거 등의 이면에 숨어 있는 즉, ‘호 코스모스’ 안에 담겨 있는 그 내용(진리)을 ‘호라오’ 하여 사랑으로 전해주는 것을 올바른 ‘구제’라고 한다.
⑥ 구제할 때 ‘오른손의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은밀하게 하라’는 것은 다른 종교인들도 다 하는 그런 것(보편적 진리)으로 구제하지 말라는 것이다. 왼손이 모르는, 율법주의는 모르는, 세상은 모르는 ‘그 진리를 전하라’는 말이다. 은밀하게 숨어서 구제하라는 말이 아니다. 이제 그런 생각에서 자유 하셔라. 숨어서 하고 싶으면 숨어서 하고, 자랑하고 싶으면 자랑하셔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