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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까?”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 “사람이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은 하신다”
마태복음 19장 16-26절 / 16어떤 사람이 주께 와서 가로되 선생님이여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17예수께서 가라사대 어찌하여 선한 일을 내게 묻느냐 선한 이는 오직 한 분이시니라 네가 생명에 들어가려면 계명들을 지키라 18가로되 어느 계명이오니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살인하지말라, 간음하지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거짓 증거하지 말라 19네 부모를 공경하라,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니라 20그 청년이 가로되 이 모든 것을 내가 지키었사오니 아직도 무엇이 부족하니이까 21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 하시니 22그 청년이 재물이 많으므로 이 말씀을 듣고 근심하며 가니라 23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려우니라 24다시 너희에게 말하노니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신대 25제자들이 듣고 심히 놀라 가로되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으리이까 26예수께서 저희를 보시며 가라사대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할 수 있느니라.(병행 구절. 막 10::17-27; 눅18:18-27)
유대의 관원이요 부자인 한 청년의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
유대의 관리요 부자인 청년이 달려 나와 예수께 질문하다 : 본문이 시작되는 첫 절에서는 어떤 사람이 달려 나와 예수께 와서 물었다고 기술하고 있으므로 불특정인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만, 20절에서는 그가 젊은이에 해당하는 청년이라고 알려주시고 있습니다. 그리고 계속되는 내용에서 22절에 의하면 그는 재물이 많은 부자였습니다. 누가복음 18:18에 의하면 그는 관리, 곧 유대인의 관원이라고 소개하고 있는데, 이는 유대인의 지도자에 속하는 지위에 있는 자임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예수께 달려와서 질문한 어떤 사람은 유대인의 관원으로서 부자인 청년입니다. 마가는 그때의 광경을 기록하고 있는데, 그가 달려와서 무릎을 꿇고는 질문을 하였다고 하였습니다. 그는 멀찍이 떨어져 있는 곳에서 예수님을 발견하고는 숨이 차도록 예수께 달려 나온 것입니다. 그런 그가 무릎을 꿇으며 예수께 질문을 하였는데, 예수님을 선한 선생님이라고 부르며 물었다고 하습니다(막 10:17).“선생님, 제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까?”
예수님의 말씀 : 유대의 관리요 부자인 청년이 예수께 나아와 자신이 무슨 선한 일을 하면 영생을 얻을 수 있을 것인지를 물었을 때, 예수님은“너는 어찌하여 선한 일을 내게 묻느냐? 선한 이는 오직 한 분이시다. 네가 생명에 들어가려면 계명들을 지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에서는“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라고 말씀하시면서“너는 계명을 잘 알고 있지 않느냐?‘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거짓 증거하지 말라, 속여 취하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라고 하신 네가 잘 알고 있는 것들을 행하라”고 기록해 주시고 있습니다만, 마태는 예수님과 청년과 대화가 오고 간 내용에 의해서 구분하여 기술하고 있습니다.“(청년의 질문)선생님, 제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까? (예수님의 답변)예수께서 가라사대 어찌하여 선한 일을 내게 묻느냐? 선한 이는 오직 한 분이시다. 네가 생명에 들어가려면 계명들을 지키라. (청년의 질문)가로되 어느 계명입니까? (예수님의 답변)예수께서 가라사대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거짓 증거하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다.”
청년의 두 번째 질문 : 그러자 청년은“이 모든 것을 내가 지켰습니다”라고 말하며,“그런데도 아직도 무엇이 부족합니까?”라고 물었습니다.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에 의하면“선생님이 말씀하신 그 모든 계명들은 제가 어려서부터 다 지켰습니다.”라고 청년은 대답하였다고 하였습니다. 그런 그는“그런데도 제가 무엇을 더 해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까?”라고 물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 : 이에 예수님은“네가 온전하고자 한다면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을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따르지 않고 떠난 청년
청년은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을 듣고는 근심이 되었습니다. 그는 재물이 많은 부자였기 때문에 예수님이 말씀하신대로 따르고자 하면 자신의 모든 것을 잃어야 할 것이기에 그런데도 포기하고 예수님을 따라야 할 것인지, 아니면 예수님이 말씀하신대로 하여 예수님을 따르는 것을 포기할 것인지의 염려로 마음에 갈등이 일어나 근심이 되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 근심은 오래가지 않았으며, 그 근심으로 예수님이 하신 말씀대로 자기의 모든 것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주고 예수님을 따름에 있지 않았습니다. 그는 근심하였으나 예수님을 떠났기 때문입니다.
청년이 이처럼 예수님을 따름에 있지 않은 것은 그의 온 마음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영생이 아닌 그가 그동안 쌓으며 소유해 온 재물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에게서 재물은 어렸을 때부터 율법의 의로는 흠 잡을 것이 없게 지켜 온 데 따르는 축복으로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그는 하나님의 나라에서 영생하는데 무슨 선한 일이 더 필요한지를 예수께 물었습니다. 자신이 해야 할 것을 알려 주시면 그것이 무엇이든지 다 하겠다는 의지를 표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이를 통해서 율법 준수에 의한 자기 의의 확신에 있었습니다. 대체적으로 청년이 질문한“제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까?”를 영생을 얻기 위하여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예수님으로부터 듣고자 했다는 것으로 봅니다만, 그래서 영생을 소유하기 원하여 예수께 물은 것으로 봅니다만, 그보다는 영생을 얻기 위하여 지금까지 지켜 온 율법 준수에 있어 온 의 외에 무슨 의를 더 행해야 하는지를 물은 것입니다. 이러한 청년의 질문은 영생을 얻고자 함에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고자 함에서가 아니라, 예수님을 시험하며 자신의 의를 드러낼 의도로 영생을 얻는 질문을 한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예수께서 그에게 계명을 지킬 것을 말씀하시자 계명의 모두를 어렸을 때부터 잘 지켜왔다며 그런데도 무엇이 부족한지를 반문한 데서 잘 나타납니다. 그는 이 율법의 의에 의해서 자신을 온전하다고 여겼습니다.
예수님은 그러한 청년에게 영생을 얻음에 있는 온전한 의는 그가 어렸을 때부터 지켜 온 율법의 의에 머물러서는 안 되며, 그보다 더 나은 의에 있어야 할 것이니, 그 의는 그의 주가 되시는 예수님을 따름에 있다는 것을 알려 주십니다. 그렇게 예수님을 따름으로써 비로소 영생을 얻음에 있는 온전한 의로운 자가 됩니다. 왜냐하면, 율법의 모든 계명이 가리키는 의는 율법의 계명에 언약하신 메시야, 곧 그리스도를 의미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을 주로 받아 주와 함께 하는 것에 있지 않고서는 그는 자신이 얻은 것으로 알고 있는 영생에 결코 있지를 못합니다.
하지만 청년은 재물이 많으므로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는 근심하며 예수님에게서 떠났습니다. 누가의 기록에서는“그 사람이 큰 부자이므로 이 말씀을 듣고 심히 근심하더라”(눅 18:23)라고 기술하여‘심히 근심하더라”고 표현하여서‘심히’라는 말을 사용하여 그가 가진 근심이 매우 크고 마음 깊이 자리하고 있었다는 것을 강조해 주십니다. 그러한 그는 마침내 결정하였는데 예수님을 따르는 것을 포기하고 예수님에게서 떠났습니다. 마가는 이 청년의 모습을 좀 더 구체적으로 기술해 주고 있으니“그 사람은 재물이 많은 고로 이 말씀으로 인하여 슬픈 기색을 띠고 근심하며 예수님에게서 떠났다”(막 10:22) 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슬픈 기색을 띠고 근심하며’는‘슬픔’과‘고민’을 의미하는 것과‘∼의 둘레에’를 의미하는 말이 함께 쓰여‘슬픔과 고민으로 에워싸인’을 뜻합니다. 이는 예수님을 시험하며 자신의 의를 드러낼 의도로 영생을 얻는 질문을 하러 왔다가 도리어 큰 슬픔과 근심에 둘러 에워싸여 있게 되었다는 것을 나타내주고 있습니다. 마태와 누가는 청년이 예수님을 따르는 행동을 취함으로 그동안 소유해 온 많은 재물을 잃는 포기를 해야만 하는 것을 염려하는 마음에 고민이 많아 근심이 가득한 사실을 언급하고 있지만, 마가는 청년이 예수님을 따름에 있으므로 인해 포기하여 잃을 재물이 너무 크다는 사실이 그를 큰 슬픔에 잠기게 하고 고민이 됨으로 마음이 고통스럽게 짓눌려 있었다는 것을 의도하고 있습니다. 그처럼 자신을 고통스럽게 하는 무거운 짐을 벗고 자유한 하나님의 아들이 되게 해 주시는 예수님(마 11:28)을 향함에 그는 있지 않았습니다. 그는 영생의 주이신 참으로 선하신 분과 함께 하는 것보다는 재물과 함께 하고자 예수님에게서 떠났습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렵다”고 말씀하시다.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렵다”: 영생하는 하나님의 나라가 사람이 소유하고 있는 재물의 넉넉함에 있지 않고,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로부터 구원하기 위해 그리스도로 보내신 예수님을 따르는 믿음에 있다는 것을 알려 주시며 그의 무거운 짐으로부터 벗어나 자유한 자가 되어 그가 구하고자 하는 것을 얻을 수 있게 해 주셨습니다만, 청년이 소유한 재물이 예수님을 따름에 있지 못하도록 넘어지게 하는 큰 걸림돌이 되고 있는 것을 예수님 곁에 있는 제자들이 보고 있기에, 예수님은 그들을 향하여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재물이 있는 자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는 참으로 어려우니,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더 쉬울 것이다.”
재물이 있는 자는 과연 천국에 들어갈 수 없는가? : 예수님이 하신 말씀은 재물이 있는 부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에는 재물이 있는 부자, 그것도 재물이 많은 큰 부자, 또는 권세 있는 자들이 하나님의 구원을 받아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간 경우를 기록해 주고 있습니다. 구약과 신약에서 몇 몇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아브람에게 가축과 은과 금이 풍부하였더라…아브람의 일행 롯도 양과 소와 장막이 있으므로 그 땅이 그들이 동거하기에 넉넉하지 못하였으니 이는 그들의 소유가 많아서 동거할 수 없었음이니라…아브라함은 강대한 나라가 되고 천하 만민은 그로 말미암아 복을 받게 될 것이 아니냐.(창 13:2, 5-6, 18:18)
우스 땅에 욥이라 불리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은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더라, 그에게 아들 일곱과 딸 셋이 태어나니라. 그의 소유물은 양이 칠천 마리요 낙타가 삼천 마리요 소가 오백 겨리요 암나귀가 오백 마리이며 종도 많이 있었으니 이 사람은 동방 사람 중에 가장 훌륭한 자라.(욥 1:1-3)
저물었을 때에 아리마대의 부자 요셉이라 하는 사람이 왔으니 그도 예수의 제자라. 빌라도에게 가서 예수의 시체를 달라 하니 이에 빌라도가 내주라 명령하거늘, 요셉이 시체를 가져다가 깨끗한 세마포로 싸서, 바위 속에 판 자기 새 무덤에 넣어 두고 큰 돌을 굴려 무덤 문에 놓고 가니.(마 27:57-60)
나와 온 교회를 돌보아 주는 가이오도 너희에게 문안하고 이 성의 재무관 에라스도와 형제 구아도도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롬 16:23)
우리 중에 이루어진 사실에 대하여, 처음부터 목격자와 말씀의 일꾼 된 자들이 전하여 준 그대로 내력을 저술하려고 붓을 든 사람이 많은지라. 그 모든 일을 근원부터 자세히 미루어 살핀 나도 데오빌로 각하에게 차례대로 써 보내는 것이 좋은 줄 알았노니, 이는 각하가 알고 있는 바를 더 확실하게 하려 함이로라.(눅 1:1-4)
주의 사자가 빌립에게 말하여 이르되 일어나서 남쪽으로 향하여 예루살렘에서 가사로 내려가는 길까지 가라 하니 그 길은 광야라. 일어나 가서 보니 에디오피아 사람 곧 에디오피아 여왕 간다게의 모든 국고를 맡은 관리인 내시가 예배하러 예루살렘에 왔다가 돌아가는데 수레를 타고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읽더라.(행 8:26-28)
그러나 나도 육체를 신뢰할 만하며 만일 누구든지 다른 이가 육체를 신뢰할 것이 있는 줄로 생각하면 나는 더욱 그러하리니, 나는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 족속이요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열심으로는 교회를 박해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빌 3:4-6)
그러니 재물이 있는, 그것도 재물이 많은 부자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구원을 받을 수 없고,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결코 이러한 뜻에서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예수께서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렵다고 말씀하신 진의 : 그러면 어떤 의도에서 예수께서는 재물이 많은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어렵다고 말씀하신 것인지요. 청년은 예수님이 말씀하신 대로 할 경우 그동안 소유해 오고 있던 모든 재물은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다 나눠주고 자신은 예수님과 함께 하여 따라야 할 것이므로 한 순간에 다 잃을 것이어서 가난한 자가 될 것이 근심이 되었으며, 이것이 무거운 짐이 되어“너는 나를 따르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고 예수님에게서 떠났습니다. 그에게서는 예수님을 따름으로써 계명에 온전 하는 가치보다 소유하고 있는 많은 재물의 가치가 더 컸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그는 사도 바울에게서 보는 바인“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얻고자 내게 있는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긴다”(빌 3:8)는 믿음으로 서는 걸음에 있지 못했습니다. 예수님보다 더 사랑하는 재물을 버릴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요. 그는 재물을 쥐기 위해서 영생의 주를 버리는 일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그는 영생이 인생의 목적이 아니었습니다. 재물이었습니다. 자신이 영생하는 생명을 버리면서까지 사랑하는 것이 재물이었습니다. 그러니 재물을 포기하는 자기 부인에 있지 않았습니다. 그가 영생하는 주님을 떠나면서까지 붙든 것은 어렸을 때부터 지켜왔던 모든 계명에 나타내 주신 하나님의 뜻을 따름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는 재물을 좇는 것이었습니다. 그럼으로써 그의 계명 준수는 모든 계명에서 훈계하시고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 함에 있었던 것이 아니며, 마음에 하나님을 공경함에 있었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단지 탐욕으로 가득 차 있었을 뿐입니다.
그러한 그를 보며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제물이 있는 자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얼마나 어려운지를 낙타(약대)가 바늘귀를 통과하려는 것이 차라리 쉬울 것이라는 말씀으로 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이를 통해서 청년의 마음이 어디에 있는지를 알려주시고 있습니다. 산상설교의 한 부분인 마태복음 6:24-34에서 말씀해 주셨던,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함에 있는 것이 아니라, 목숨을 위하여 먹을 것과 마실 것과 입을 것을 구함에 있는 이방인이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그는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으니,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김에 있지 못합니다. 재물을 사랑함에 있으므로 이를 지키기 위하여 하나님은 그의 마음에서 미움의 대상이 되어 배척합니다. 재물을 중히 여기는 그는 하나님을 업신여깁니다. 이것이 그대로 드러나고 있는 것이 유대의 관원이면서 부자인 청년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재물이 많은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참으로 어렵다고 말씀하신 것은 그래서 입니다. 그의 마음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재물이어서 재물을 사랑함에 온 마음이 빼앗겨 있어 하나님을 공경함이 없는데, 그로 말미암아 그의 삶에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 따름이 없으며, 그에게 그를 온전케 하는 율법에 나타내 주신 하나님의 의로 오신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을 주로 받아들임이 없으며, 그에게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주시는 구원을 얻음이 없는데, 영원한 생명의 나라에 그가 있을 수 있겠는지요. 청년에게서 재물은 낙타이며, 하나님의 나라는 바늘귀입니다. 낙타의 큰 몸집인 재물로 생명으로 들어가는 좁은 귀의 하나님의 나라를 통과하려는 것과 같으니, 하나님의 나라는 그런 사람으로서는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그와 같이 예수님보다 부모, 형제, 전답 등등을 더 사랑하여 예수님을 따르지 않는 자, 곧 예수님을 버림에 있으므로 예수님을 부인함에 있는 자는 낙타가 바늘귀에 들어갈 수가 없듯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낙타와 바늘귀를 비유적으로 들어 말씀해 주시는 것은 영생을 얻고자 하는 부자가 붙들고 있는 것이 예수님이 아닌 재물이라면, 그것이 그를 하나님의 나라에로 들어가게 해 주지 못한다는 것을 말씀해 주시는 것에서입니다. 그와 같이 사람이 자신의 생명을 위하여 붙들고 의지하는 것이 영생의 주이신 예수님이 아닌 권세, 명예, 그리고 부모, 형제, 전답 등이라면, 그가 붙들고 놓지 못하는 그 모든 것에서 어느 것 하나도 그를 하나님의 나라에로 들어가게 해 주지 못합니다. 그러니 예수님 외에 다른 것으로서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있지 않습니다.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까?”라고 묻는 제자들에게“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으나 하나님은 하신다”는 구원의 진리를 말씀해 주시다.
예수께서“부자, 곧 재물이 있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울 것이다”라고 하시자, 이 이야기를 들은 제자들이 걱정 어린 표정으로 예수께 물었습니다. 마태와 마가의 기록에 의하면 제자들이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을 듣고는 크게 놀라서 물었다고 하였습니다.“그러면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라고 말입니다. 제자들이 이처럼 놀라워하며 근심어린 표정으로 물은 것은 자신들이 알고 있는 재물에 대한 이해와는 달랐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을 비롯하여서 한 관리에게서 보듯이 유대인들이 갖는 통상적인 재물관은 하나님이 의로운 자를 축복하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 하나님이 주신 축복에 있는데, 그 축복을 받은 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하니 놀라워하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재물과 하나님의 나라와 상관성을 갖는 것으로 알고 있어온 것인데, 이것이 무너지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재물을 하나님의 구원, 하나님의 나라와 상관을 짓지 않으셨습니다. 재물은 하나님의 구원과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 재물이 많음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감에 있는 여유에 있는 것이 아니며, 가난하여 재물이 없음으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마음을 갖지 못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누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것인지를 알려 주십니다“무릇 사람이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은 하실 수 있느니라.”예수님은 먼저 구원은 사람이 할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하십니다. 그리고 이어서 구원은 왜 사람이 할 수 없는 것인지를 말씀해 주십니다. 구원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구원의 요인은 하나님 외의 사람과 그 사람이 소유하며 지닌 기반에 있지 않으니, 오직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습니다.
그것으로 제자들에게 있은 일이 그들은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예수님을 따름에 있은 것입니다. 예수께서 베드로를 비롯하여 열 두 제자 삼으신 자들에게“너희는 나를 따르라”고 하실 때, 그들에게 있은 일이 하나님이 권능으로 행하신 일이니 배와 그물과 나두고 부친을 떠나 예수님을 따름에 있은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름에 그 누구도 아무런 능력이 없는데, 하나님께서 권능을 행하셔서 예수님을 따름에 자기 부인을 능력 있게 해 나가게 하셨으며, 예수께서 가지고 오신 하나님의 나라를 능력 있게 받아들이게 하셨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권능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차지함에 있는 자들이 예수님의 제자들입니다.
이 모든 말씀을 들음에 있는 우리의 믿음
유대의 관원이요 부자인 청년이 재물이 많으므로 예수님을 따르지 못함에 있은 것에서 영생하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보게 됩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것은 그동안 주인이 되어 있던 것에서 떠나 새주인을 섬기는 새사람이 됨에 있는 것이기 때문에 마음을 차지하고 생각하는 모든 것이 완전히 새로운 것으로의 바뀜에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를 육에 속한 자와 영에 속한 자의 구분에 의해서 말하였습니다.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므로 육신의 생각에 있는 자는 하나님과 원수가 되어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않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 그러한 자를 영을 따르며 영의 일을 생각함에 있게 한 것은 그의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신 까닭이니 육신에 있지 않고 영에 있는 것은 그리스도의 영이 그와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롬 8:5-9).
영의 사람으로 영의 일을 생각하며 영의 일을 함에 있어 생명과 평안에 있는 그 사람을 그리스도의 사람이라고 합니다. 그 사람으로 살아가는 생애에 있도록 하나님의 영, 곧 그리스도의 영이 임하셔서 그리스도를 따르며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함에 있는 영의 사람이 되게 해 주시는 것을, 그래서 영생하는 하나님의 나라에 있게 해 주시는 것을 예수께서는“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으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으시다”는 말씀으로 해 주셨습니다. 그렇게 도무지 사람으로는 할 수 없는 것인 예수님을 따르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할 수 있도록 그리스도의 영을 보내주시고 그를 믿는 믿음에 있게 해 주셨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이 하심으로 예수님을 따르는 믿음에 있으며, 그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영생을 얻음에 있는 우리입니다. 그러한 우리에게서는 예수께서 제자들을 부르심에“너는 나를 따라오라”(마 4:19)라고 하신 권능이 날마다 실행되어져 베드로가 말한 바인“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좇았습니다”(마 19:27)라는 자기 부인에 있으며, 마음과 생각의 전부인 먼저 하나님의 나라의 그의 의를 구함에서 주님이 마신 고난을 잔을 마심에 있는 자기 십자가를 짊어지는 길을 갑니다.
그러한 우리가 그리스도의 사람이 된 본 모습의 정체인데, 혹 하나님도 하나님의 나라도 없는 불의한 이방인이 되어 살지는 않는지요(마 6:24-32). 그래서 옛사람 때에 쥐고 좇았던‘예수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인 재물 등 땅의 것을 바라봄에 있는 탐심의 우상숭배에 있는 것은 아닌지요(골 3:5). 그러하다면, 유대인의 관리요 부자인 청년이 붙들고 있었던 영생이 없으며, 영생하는 하나님 나라가 없는 것을 똑같이 붙드는 어리석음에 있을 뿐입니다. 그러니 수시로 자신을 점검하여 깨어 있어 그 사실을 잊지 말고 영생하시는 예수님을 따름에 믿음 있는 자의 모습으로 돌아와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 속에 구원의 영으로 충만히 부어 주신 바 되신 분이시니, 우리 구원의 처음이요 나중으로서 영원무궁토록 온전히 보존하시기 위하여 우리 속에서 시작하신 구원을 계속 해 나가실 것이며 마침내 그리스도 예수께서 다시 오시는 날 완성하실 것입니다(빌 1:6). 그리스도의 부활과 함께 하는 우리 몸의 완전한 구속인 부활을 통해서 말입니다.
이처럼 우리의 구원이 하나님의 견인에 있어 나가니, 단 한 시도 하나님께 붙잡힌 손에서 떼어져 있고 떨어져 나감에 있지 않습니다. 그에 따라서 우리 몸이 부활에 이르는 그날까지 우리 삶에서 쏟아져 나오는 육체의 정욕에 의한 욕심 하나하나를 우리 육체가 깨어지고 부숴져 허물어지는 것에서 놓게 하시며, 그러할수록 우리에게서 생명 되신 예수님은 빛을 찬란히 비춰 드러내시어 마침내 그 빛 가운데 휩싸임에 우리가 있게 하실 것입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