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방서예[2765]왕유(王維)5절 녹채(鹿柴)
공산불견인 (空山不見人) 깊은 산 인영은 보이지 않고
단문인어향 (但聞人語響) 사람들의 소근거림만 귀에 울리네.
반경입심림 (返景入深林) 석양 볕 깊은 숲 안으로 비켜 들어와
부조청태상 (復照靑苔上) 푸른 이끼 위를 비추누나.
이 시는 왕유(王維)가 안록산(安祿山)의 난이 진압된 다음
좌천당하자 장안(長安) 근처에 위치한 남전(藍田)의 망천(輞川)에
별숙(別塾)을 지어 은거하던 시기에 쓴 오언절구입니다.
<망천집(輞川集)>에 실려있는 20수의 시 중 4번째에 해당되며,
‘사슴을 가두는 울타리’라는 뜻의 녹채(鹿柴)는 왕유가 사슴을
기르기 위해 만들어 놓은 진짜 사슴울타리를 가르키기도 하지만
망천에 있는 지명이기도 합니다.
<망천집>은 왕유가 절친 배적(裵迪)과 함께 망천에 있는
20군데의 명승지를 돌아보고 그 풍광을 읊은 시를 모아 편찬한
시집입니다.
압운은 향(xiang3)과 상(shang4)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채(柴)자는 섶, 장작이라는 뜻으로 쓸 때는 시라고 읽고,
울타리, 울짱을 의미할 때는 채(寨)나 채(砦)와 같은 글자로
취급해 채라고 읽습니다.
그러나 중국어로 읽을 때는 어느 경우나 ‘차이’입니다.
이런 동자이음어(同字異音語)를 볼 때마다 드는 의문이
왜 중국본토에서조차 사용하지 않는 걸 우리나라에서는
구분해 사용할까 하는 것입니다.
처음 의문이 든 것 나무잎사귀를 뜻하는 ‘엽(葉)’자였습니다.
중국인들 중에는 이 엽을 성으로 사용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그럴 경우 엽이 아닌 섭으로 읽어야 합니다.
옛날에 원표(元彪)와 함께 <공작왕(원제: 孔雀王子)>이란
영화에 나왔던 글로리아 입이라는 홍콩배우가 있었습니다.
한자로는 섭온의(葉蘊儀)라고 쓰는데, 홍콩발음은 ‘입완이’고
북경어로는 ‘예윤이’로 읽어 무심코 ‘엽온의’라고 했다가
지적 받은 적이 있습니다.
엽자를 성씨로 사용할 때는 섭으로 발음해야 한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습관적으로 엽으로 읽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한국사람들에게 이 글자를 보여주고 읽으라고 하면
대부분이 엽온의라고 읽을 게 틀림없습니다.
왜 이런 말을 하는가 하면 물론 옳은 발음으로 읽어야 하는 것이
마땅하지만 한학자가 아니라면 ‘녹시’로 읽던, 녹채’로 읽든
그다지 큰 의미가 없다는 걸 말하고 싶어서입니다.
기구(起句)의 공산(空山)을 대부분 텅 빈 산으로 번역합니다.
그러나 공산을 사람이 전혀 없다는 의미의 빈 산으로 번역하면
승구(承句)의 인어향(人語響)과 내용적으로 매치가 되지 않습니다.
사람이 없이 텅빈 산에서 사람의 소리가 들릴 리 없고,
사람이 있으면 빈 산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는 공산이 의미하는 것이 산이 깊어 고요하다는
뜻으로 보는 것이 옳은 것 같습니다.
그렇게 해석하면 공(空)은 전구(轉句)의 심(深)과 서로
상응하게 되는 것입니다.
즉 깊은 산에 들어와있다 보니 마치 아무도 없는 것처럼
사람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데, 누군가 있어서 서로 대화를
하고 있는 것 같은 울림이 들린다는 것입니다.
사람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고 했으니 나(왕유)와 대화를
나누는 사람들 사이에 어느 정도 거리가 떨어져 있다는 걸
알 수 있고, 깊은 산속이라 목소리를 높여서 대화를 하지는
않을 것이니 자연스럽게 그 소리는 왕유에게는 소근거림으로
들릴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그 소리가 사람들이 대화하는 소리인지 나뭇잎에
바람이 스치며 나는 것과 같은 자연의 소리 가운데 하나인지는
확실하지 않습니다.
저는 작자 왕유가 그것을 묘사하기 위해, 나중에 변명을 하기 위한
일종의 탈출구로서 굳이 울림을 뜻하는 향(響)이라는 글자를
사용했다고 믿습니다.
그 소리가 사람의 소리인지 아닌지는 그다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공(空)자가 의미하는, 죽은 듯이 적막한 공간이 사람의 대화소리일지도
모르는 울림, 성(聲)에 의해 살아 숨쉬는 공간으로 부활했기 때문입니다.
전구의 반경(返景)은 중국어사전에는 저녁 무렵의, 해질녘의 태양광(傍晚的阳光)
또는 석양빛(夕照)으로 설명하면서 출처로 이 시와 함께 황보증(皇甫曾)의
<제증오문옹상인(題贈吳門邕上人)>이라는 시를 들고 있습니다.
즉 이들 시가 나오기 전에는 이런 의미로 사용되지 않았다는 의미일 수도 있습니다.
한자 그대로는 돌이킬, 돌아올 ‘반’에 볕 ‘경’이니 '돌아서 비추는 햇빛' 정도로
해석할 수 있겠습니다.
어떤 사람은 석양이 구름에 반사된 빛으로 해석하기도 합니다.
경은 햇볕이나 경치를 의미할 때는 경으로 읽고, 그림자로 표현할 때는
터럭 삼(彡)이 붙은 그림자 영(影)자와 동일한 글자로 보고 영으로 읽습니다.
태양이 높이 떠있을 때는 나뭇잎이 무성해 빛이 숲 안으로 들어오지 않지만
해질녘의 석양빛은 비스듬히 비추니 나무들 사이로 숲 속 깊숙이까지
태양빛이 들어올 수 있는 것입니다.
위 사진처럼 나뭇가지 사이사이로 햇빛이 비추는 광경이 상상되지 않습니까..
저도 깊은 숲 속에서 담배를 피운 경험이 있는데, 나뭇가지 사이로 햇빛이 들어와
담배연기가 보였다 안보였다를 반복해 저도 모르게 ‘야 정말 멋지다’라고
감탄사를 내뱉은 기억이 있습니다.
결구(結句)의 ‘부’자 역시 동자이음으로 ‘다시’라고 할 때는 부로 읽고
‘회복하다, 돌아오다, 반복하다’라고 할 때는 복으로 읽는데,
여기서는 별도의 뜻을 가진다기보다는 글자수를 맞추기 위해
별다른 의미 없이 사용했다고 보여집니다.
비스듬하게 간헐적으로 들어오는 햇빛이 때마침 푸른 이끼 위를
비추게 되고, 주위의 어둠으로 인해 이끼의 푸르름이 더욱 선명하게
보인다는, 시각적 광경을 노래함으로써 ‘詩中有畵’라는 왕유시의 특징이
선명하게 드러나는 대목입니다
[출처] 녹채(鹿柴) - 왕유(王維) -|작성자 씨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