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방[5517]龍洲[용주]趙絅(조경)시-초정〔草亭〕
草亭(초정)
초가 정자- 조경 趙絅, 1586∼1669
絅=당길경,홑옷 경
風塵逼側無奇計 풍진핍측무기계
湖海歸來有草亭 호해귀래유초정
昨夜西風掃蚊蜹 작야서풍소문예
滿天明月臥松櫺 만천명월와송영
*파리에 예, 격자창 령,
풍진에 시달려도 뾰족한 계책 없어
강호로 돌아오니 초정이 있네
어젯밤 서풍이 모기 파리 쓸어갔으니
하늘 가득 명월 아래 솔창에 눕네
蚊蜹문예=모기와 파리. 蜹=파리매 예, 독충 예. 동자(同字)蚋
松櫺송령=소나무 창. 櫺=격자창 령. 동자(同字)欞
원문=龍洲遺稿 卷一 / 七言絶句
草亭
風塵逼側無奇計,湖海歸來有草亭。
昨夜西風掃蚊蜹,滿天明月臥松櫺。
초정〔草亭〕
풍진에 시달려도 기이한 계책 없어 / 風塵逼側無奇計
강호로 돌아오니 초정이 있구나 / 湖海歸來有草亭
어젯밤 서풍이 모기떼 쓸어갔으니 / 昨夜西風掃蚊蜹
밝은 달 하늘 가득한데 솔창 아래 누웠네 / 滿天明月臥松櫺
ⓒ 단국대학교 동양학연구원 | 최예심 이라나 장유승 (공역) | 2015
조경 趙絅, 1586∼1669
絅=당길경,홑옷 경
조선 중기의 문신·성리학자.
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일장(日章), 호는 용주(龍洲)·주봉(柱峯).
아버지는 봉사(奉事) 익남(翼男)이다.
윤근수(尹根壽)의 문인으로 김상헌(金尙憲)·이정구(李廷龜) 등과 교유했다.
1612년(광해군 4) 사마시에 합격했으나, 광해군의 대북정권하에서 과거를 포기,
거창에 물러가 살았다. 인조반정 후 유일(遺逸)로 천거받아 형조좌랑·목천현감 등을 지냈고,
1626년(인조 4) 정시문과에 장원, 정언(正言)을 거쳐 지평·교리·헌납 등을 역임했다.
이무렵 서인계 공신이 조정의 여론을 무시하며 정국을 좌우하자,
정경세(鄭經世)·이준(李埈) 등과 함께 맞서며 남인의 맹장으로 활약했다.
특히 지평으로 있으면서 같이 공부했던 김상헌과 좌의정 홍서봉(洪瑞鳳)을 탄핵하여
조야(朝野)의 지원을 받았다. 1630년 이조좌랑이 되었으며, 이조정랑을 거쳐
1636년 사간을 지냈다. 병자호란이 일어나 화전(和戰) 양론이 분분할 때
강화론을 주장하는 대신들을 강경하게 논박하며 척화론(斥和論)을 주장했다.
이듬해 집의로서 일본에 군사를 청하여 청나라 군대를 격파하자고 상소했으나 실현되지 못했다.
그뒤 응교·집의 등을 거쳐 1643년 왜란 후 재개된 5번째의 일본사행(日本使行)에
통신부사(通信副使)로서 다녀왔다. 이때의 일을 〈동사록 東槎錄〉이라는 기행문으로 남겼다.
이어 형조참의·김제군수·전주부윤·대제학 및 각 조의 판서를 두루 역임했다.
1650년(효종 1) 예조판서로 재직중, 효종의 북벌계획을 눈치챈 청나라가
사문사(査問使)를 보내어 추궁하고 죄를 주고자 하는 등 위기에 처하자,
영의정 이경석과 함께 책임을 떠맡고 백마산성에 위리안치되었다. 이듬해 풀려나왔으나
기용되지 못하다가 1653년 회양부사(淮陽府使)를 지낸 후 은퇴했다.
이후 포천에서 노모를 봉양하며 살던 중 제1차 예송이 일어나자,
허목(許穆)·윤휴(尹鑴)·홍우원(洪宇遠) 등과 함께 서인의 의견을 반박하고
3년설을 적극 주장했다. 이 일 때문에 서인으로부터 집중적인 공격을 받았다.
그뒤 행부호군(行副護軍)에 서용되었다. 주자 성리학을 근본으로 하면서도
문사(文史)에도 박학하여 진한(秦漢) 이후의 글을 모두 섭렵했다.
저서로 〈동사록〉·〈용주집〉이 있다. 1676년(숙종 2) 현종 묘정에 배향되었다가
1681년 출향되었다. 포천 용연서원(龍淵書院), 흥해 곡강서원(曲江書院),
춘천 문암서원(文巖書院)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