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남 예산 수당고택과 추사김정희 고택답사기
역사학과 20142338 윤은비
들어가며
5월28일 토요일, 답사를 가기위해 아침부터 학교를 향해 출발하였다. 사실 그날까지도 어느 곳에 답사를 가는지 무엇을 보는지 잘 모르는 상태였다. 고택을 간다는 것은 알았지만 어떤 고택이며 어떤 사람이 살았는지, 이러한 정보에 대해 거의 무지한 상태였다. 답사를 가기 전에 미리 조사를 해야 더 답사를 제대로 느낄 수 있다는 것은 알지만 그 당시 할 것이 많다는 핑계로 미루고 있었다가 결국 거의 백지인 상태로 답사에 가게 되었다. 아침 일찍 학교에 오다보니 피곤하기도 해서 답사에 대한 기대가 전혀 되지 않았었다. 하지만 버스에서 내려 수당기념관에 도착한 뒤 그러한 마음이 가셨다. 우선 아름다운 경치와 맑은 날씨덕분에 한결 기대가 되기 시작했다. 그날의 답사 순서는 수당기념관-수당고택을 관람한 후 점심을 먹고 추사 기념관과 추사고택을 마지막으로 답사를 마무리 하는 것이다.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좋은 답사였다. 고택들의 아름다운 조형미를 감상하면서 마음에 여유를 가질 수 있던 시간이기도 했다. 이제 답사지에 대한 소개를 하려 한다.
修堂기념관과 修堂古宅
버스에서 내려 제일먼저 본 곳은 수당기념관이었다. 수당기념관에 들어가기에 앞서 입구에서 이문원 교수님에게 간략한 설명을 들었다. 수당기념관은 수당 선생이 실천하신 ‘士可殺 不可辱’의 정신을 널리 알리고 또 이를 계승하기 위하여 건립하셨다고 한다. 또한 수당뿐만 아니라 4대 이남규 이충구 이승복 이장원으로 이어진 애국과 호국 활동을 소개하고 이를 통해 수당가의 독립과 호국정신을 이해할 수 있게 하기 위하여 수당기념관을 만드셨다고 한다. 이문원 교수님은 2004년 독립기념관 관장이 끝나시고 2005년부터 예산에 내려오셔서 기념관을 만드시고 이 기념관에 그동안 가지고 계셨던 고문서를 놓으셨다고 한다.
그림 수당기념관 앞에서 설명을 해주신 이문원교수님
그림 수당기념관의 유물
수당기념관에 들어가선 그동안 수당이 남긴 일기와, 수당집, 호패와 어사화등을 보았다. 그것들을 보면서 교수님에게 설명을 들으며 각 유물들이 어떤 의미를 지니는 지 배울 수 있었다. 특히 어사화와 호패를 실제로 볼수 있어서 그동안 교과서나 책속에서 보던 것을 실제로 볼 수 있었다.
수당 이남규 선생의 일생에 대해 간략히 설명해 보면, 수당 이남규는 1855년 미동에서 태어나 아버지로부터 仁義禮智룰 중시하는 유학정신을 배운다. 수남 이남규는 구한말 사대 문장가중 한명으로 꼽힐 정도로 명필이었다고 한다. 그는 과거 급제 후 흥문관 교리 승정원동부승지 형조참의 등을 거쳤고 안동부 관찰사를 역임하였다. 그 후 종2품 궁내부에 임명이 되었다. 을미사변이 일어나자 왜적을 물리치자는 상소를 올렸고 을사늑약이 채결되었을 때도 그에 반발하는 상소를 올렸다. 그후 항일의 정신적 지주가 되었고 이후 일제 단발령에 반발하여 자리를 내려놓고 예산에 들어가 칩거를 하셨다고 한다. 의병장을 숨겨주고 일제에 체포되어 고문을 받았으나 굴하지 않았고, 의병의 정신적 지주로서의 수당에 불안감을 느낀 일제가 선생을 회유하려 했으나 ‘士可殺 不可辱‘이라는 선비를 죽일 수는 있으나 욕보일 수 없다다는 말을 남기고 가마에 올라타 그 자리를 떠났다, 결국 그날 일제의 칼날에 수당과 그의 아들 이충구와 하인 모두 순국하였다. 그는 자신의 삶보다 명분을 소중히 여긴 진정한 선비로서의 삶을 살고 간 것이다. 이러한 선비정신은 수당에서 끝나지 않았다. 그의 손자인 이승복 선생으로 이어졌다. 그는 신교육을 이수후 러시아 연해주로 건너가 독립운동의 기틀을 마련하였고 만주와 상해를 왕래하며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또한 그런 선비정신이 호국으로 승화되어 이승복선생의 아들 이장원선생은 6.25 전쟁에서 전사하셨다. 이는 그 유래를 찾아볼 수 없던 사대에 걸친 나라사랑의 상징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수당기념관을 관람한 뒤에 이동한곳은 바로 옆에 위치한 수당고택이었다. 수당고택에서 사랑채의 마루에 앉아 이문원 교수님의 설명을 들었다. 수당고택은 조선시대에 전주이씨에 의해 건립되었으며 예산에서 수당가문의 역사로 내려왔다. 이곳은 일제의 혹독한 탄압 속에서 항거하여 충절한, 예학자 실학자로서의 고귀한 선비정신이 고스란히 남아있었다. 사랑채에 툇마루에 앉아 이문원 교수님의 설명을 들었는데, 고산마루는 원래 선생님만 앉을 수 있는 곳인데 교수님께서 특별히 허락해 주셔서 몇몇 학우들은 그곳에 앉아 설명을 들었다.
그림 수당고택의 사랑채
사랑채에 앉아서 그에 관한 풍수와 그곳의 역사 그리고 학생들을 가르칠 땐 어떻게 하였는지 에 대한 설명들을 들었다. 사랑채에 앉아서 풍경을 관람하며 시원한 바람을 쐬니 마치 다른 시대에 온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사랑채에서 이동하여 안채로 이동하였는데 이 안채는 내가 봤던 것 중에 가장 특이했다. 그이 유는 안채가 사랑채보다 높은 위치에 자리했었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사랑채가 더 높은 곳에 위치하는 것이 당연한데 수당고택의 안채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그림 수당고택의 안채입구
그림 수당고택의 전경
그림 신주를 보여주시는 이문원 교수님
이에 대해 교수님은 그 곳의 지형상 안채가 위에 위치한다고 말씀하셨고 또한, 수당고택을 지으신 분이 여장부이셨다는 말씀을 해주셨다. 아마 지으신 분이 여성이기 때문에 안채가 더 높이 위치한 것에 영향을 줬을 것이라고 하셨다. 그 시대에 여성이 그러기 쉽지 않았을 텐데 라는 생각과 동시에 안채의 입구를 보았을 때, 그 역시도 일반적인 입구와 달라서 기억에 남았다. 개인적으로 아치형으로 입구는 처음 봐서 각인된 것 같다. 안채에는 신주가 모셔져있었는데 교수님이 그걸 꺼내서 보여주실 때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제대로 보지 못하고 설명도 듣지 못한 것이 아쉬웠다. 그나마 먼발치에서만 들은 설명에 따르면 특이하게도 신주를 안에 모셨다는 점과, 그리고 신주가 분리된다는 점이 신기했다. 수당고택은 그동안 내가 알았던 고택의 특징들과 다른 점이 많아서 기억에 남았다.
秋史기념관과 秋史故宅
그다음으로 점심을 먹고 이동한곳은 추사고택과 추사기념관이었다. 추사 김정희는 역사학과 학생으로서 답사에 갈 때 마다 거의 매번 만나는 인물이라 수당선생에 비해서는 배경지식이 있었다. 추사기념관과 추사고택은 자율관람이어서 좀 더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었다.
먼저 본 곳은 추사기념관이었다. 추사기념관에는 추사김정희 선생의 서예정신과 업적들이 진열되어 있었다. 작품들이 체계적으로 전시되어 있어서 다양한 작품들을 한눈에 볼 수 있었다.
추사 김정희 선생은 조선왕조 후기의 실학자이며 대표적 서예가로 벼슬은 성균관 대사성에 이르렀고, 당쟁에 휩쓸려 제주도에서 유배생활을 지내다 말년 과천에서 71세로 작고하였다. 김정희 선생은 시대사조의 구문화체계를 탈피하여 신지식의 기수로서 새로운 학문과 사상을 받아 들여 신문화 전개를 가능하게 한 실학자인 동시에 선각자라 한다.
저서로는 阮堂集, 禮堂金石過眼錄, 實事求是說 등이 있다. 이와 같이 깊은 학문과 재질을 바탕으로 한 그의 예술은 詩,書,畵,등에도 뛰어났으며 秋史體라는 서예의 경지를 이뤘다. 그중 歲寒圖는 국보로도 지정되었으며, 이는 그가 제주도에서 귀양살이 하는 동안에도 변함없이 사제의 의리를 지켜준 것에 대한 고마움을 歲寒松에 비유하여 그려준 그림으로 阮堂생애의 명작이라 평가받고 있다. 그동안 이 작품이 주목받은 이유를 그림으로 생각하고 있었는데 사실은 그 옆의 필체가 지닌 가치가 더욱 크다는 것을 이번 답사를 통해 배울 수 있었다.
그림 추사기념관 속 추사의 작품
사실 그동안 추사체를 그동안의 역사학과 답사에서 많이 보았지만, 이번 답사처럼 그의 작품들을 한번에 모아서 본 경험이 없었는데 이번 기회에 좀 더 자세히 관찰할 수 있었다. 흥미로웠던 점은 그가 귀양을 다녀오고 나서의 변화였다. 대둔사 무량수각의 현판을 보면, 그가 귀양 가기 전에 써준 것은 예서체로 멋을 잔뜩 부린 기름진 서체였던 반면, 그가 제주도 귀향에서 돌아오는 길에 쓴 현판인 화암사의 무량수각 현판은 기름기가 빠지고 좀 더 소박해진 모습으로 그가 귀향생활에서 변화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설명에 따르면 추사는 후에 대둔사를 다시찾아 자신의 글씨를 때고 다시 원교의 현판을 달도록 하였다고 한다. 아마 귀양 가기 전 자신의 모습을 스스로 반성하는 것이 아니었을까 싶었다. 귀양생활동안 그의 식생활도 바뀌어서 나물, 두부가 최고의 반찬이라고 말하였다. 그의 소박해진 입맛처럼 글씨도 소박하고 꾸밈없는 허화의 경지를 이뤘다.
그림 변화한 추사체
그림 추사고택의 안채
그림 추사고택의 사랑채
추사기념관을 보고 이동한곳은 추사고택이었다. 추사고택은 추사선생이 태어나고 성장한 곳이며 주변에는 그와 관련된 여러 가지 유적이 있었다. 추사고택은 확실히 수당고택보다 더 크고 웅장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사랑채는 ㄱ자 남향집으로 온돌방이 남쪽에 한칸 동쪽에 두칸이 있었으며 나머지는 대청과 마루로 되어있었다. 시랑채를 본 뒤에는 안채로 이동하였다. 안채는‘ㅁ’자 모양으로 6칸 대청에 안방,건넌방, 부엌 등을 갖추고 있었다. 여성들의 생활공간인 안채는 밖에서 바로 들여다보이지 않는 구조로 되어있었다. 안채에는 추사가 썼던 주렴들이 있었는데, 명필이자 명언이었다.
마치며
추사고택을 관람 후에는 버스를 올라타서 학교를 향해 출발하였고, 그렇게 일일답사는 끝이 났다. 이번답사를 통해서 그동안 몰랐던 것을 많이 배울 수 있었다. 수당기념관과 수당고택에서는 진정한 선비정신을 배울 수 있었다. 수당가의 역사를 말해주는 유물들을 볼 수 있었고 당시 선비들의 생활을 그대로 볼 수 있었다. 선비란 단순히 학문을 연구하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명분과 지조를 생명처럼 여기며 도덕과 사회의 근본이 되며 위기의 시대에 시대의 불의에 맞서 싸우는 자들이란 것을 알 수 있었다.
추사기념관과 고택에선 추사체의 특징과 그의 작품들을 통해 그가 얼마나 뛰어난 예술가인지에 대해 다시 한 번 느낄 수 있었다. 추사라는 인물에 대한 지식 또한 배울 수 있어서 뜻 깊었다. 그리고 이번 고택 답사를 통해 그동안 도시에서는 느낄 수 없었던 향취와 고택만의 매력을 온전히 느낄 수 있어서 정말 좋은 답사였다고 생각한다.
고택 답사기.hw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