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지에서 만나는 성경 말씀] 그분께 자주색 옷을 입히고
예루살렘의 성 안, 십자가의 길이 시작되는 곳에는 ‘리토스트로토스’라는 옛 로마 거리가 남아 있습니다. 요한 19,13에 언급된 빌라도의 재판석이 자리했던 곳입니다. 본시오 빌라도는 예루살렘을 좋아하지 않아, 평소에는 항구 도시 카이사리아에서 살다가 1년에 세 번 정도 예루살렘으로 올라왔다고 합니다. 유다인들이 의무적으로 성전을 순례해야 한 3대 명절, 곧 파스카, 주간절(오순절), 초막절을 대비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는 이 시기에 예루살렘으로 순례 온 유다 남자들이 혹시라도 반란을 모의하고 도모할 봐 미리 견제하려고 올라왔던 것입니다. 여기서 빌라도가 예루살렘을 좋아하지 않은 이유도 엿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잡히시던 때는 유다인들의 3대 명절 가운데 하나인 파스카 축제 직전이었습니다. 이때 빌라도는 리토스트로토스의 재판석에 앉아, 유다인들의 요구를 들어주며 예수님에게 십자가 형을 선고하게 됩니다. 리토스트로토스 위에는 옛 로마인들이 제비 뽑기를 했음 직한 판이 새겨져 있는데요, “제비를 뽑아 그분의 겉옷을 나누어”(마태 27,35) 가졌다는 대목을 떠올려줍니다. 물론 리토스트로토스 유적은 기원후 2세기의 것이라 예수님 시대와 간격이 있지만, 당시의 장면을 그려보기에는 충분합니다.
로마 병사들은 예수님을 두고 임금 놀이를 한 듯합니다. 예수님 머리에 가시나무 관을 씌우고 자주색 옷을 입힌 뒤 “유다인들의 임금님, 만세!” 하며 뺨을 쳐 댄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자주색’ 옷이라는 점이 눈에 띕니다. 당시 자색은 귀한 염료여서 임금과 귀족들만 구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에스 8,15; 1마카 10,20; 루카 16,19 등). 그것은 이스라엘의 북쪽, 곧 지금의 이스라엘 하이파 시와 레바논 앞 바다에 사는 뿔고둥의 체액에서 얻을 수 있는 염료였고(『바빌로니아 탈무드』 므나홋 44ㄱ 참조), 뿔고둥 만이천 마리에서 추출할 수 있는 양이 불과 1.4g 정도였다고 합니다.
에스테르의 사촌 모로도카이가 유다 민족을 말살하려 한 하만을 처단한 뒤 영광스럽게 되었을 때에도 자색 옷을 입었습니다: “모르도카이는 자주색 모직과 하얀 천으로 된 왕실 의복에 커다란 금관을 쓰고 아마와 자홍색 양모로 된 겉옷을 입고 어전에서 물러 나왔다”(에스 8,15). “부자와 라자로의 비유”(루카 16,19-31)에서 부자는 “자주색 옷과 고운 아마포 옷을 입고 ··· 호화롭게”(16,19) 살았던 것으로 나옵니다. 자주와 자홍은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방랑하던 시절, 하느님께 봉헌한 성막에도 사용되었던 염료입니다(탈출 26,1). 자주는 푸른빛이 도는 자색, 자홍은 붉은빛에 가까운 자색을 뜻하는데요, 그만큼 귀한 염료를 써서 주님의 성막을 장식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다 예수님께서 자색 옷을 입고 수난하신 이후, 자색은 회개와 속죄의 상징이 됩니다. 이렇게 오늘날엔 구세주의 오심을 기다리는 대림시기와, 주님의 수난과 죽음에 대해 묵상하는 사순 시기의 색깔이 되었습니다.
* 김명숙 소피아 - 예루살렘 히브리대학교 박사, 광주가톨릭대학교 구약학 교수, 전 한님성서연구소 수석연구원. 저서 「에제키엘서」 「예레미야서 1-25장」 「예레미야서 26-52장」 「구세사 산책: 에덴에서 약속의 땅까지」
[2024년 3월 24일(나해) 주님 수난 성지 주일 의정부주보 2면, 김명숙 소피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