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 그날! 새날이 올 때까지 두 손에 횃불을 들고 도도히 흐르는 역사의 복판에서 우리 불꽃으로 활활 타오릅니다”-광주 국립 5.18민주묘지 고 이세종의 묘비(묘비번호 4-11)
5.18의 첫 희생자로 알려진 고 이세종 열사의 33주기 추모식이 다가 왔지만 아직도 그의 사인은 베일에 쌓여있다. 또 5.18기념재단 홈페이지에서 조차 첫 희생 기록은 누락돼 이 열사의 사인 규명과 명예회복을 위한 노력이 시급하다는 목소리가 크다.
지난 1980년 5월17일 전북대학교 농학과(현 농업생명대학 작물생산 전공) 2학년이었던 이세종(당시 22) 열사. 이 열사는 호남대학총연합회 소속 연락책임자를 자임하며 전북대학교 제1학생회관에서 농성을 준비하고 있었다.
집회에서 나눠줄 유인물을 등사를 마치고 기숙사로 돌아가려던 자정께, 검은 베레모를 쓴 공수부대원들이 착검한 M16 소총과 긴 곤봉을 들고 학생회관에 들이 닥쳤다.
그리곤 18일 오전 1시께 학생회관 옆 바닥에서 온 몸이 멍들고 피투성이가 된 채 이 열사가 발견됐다. 경찰과 정부는 단순 추락사로 발표했다.
하지만 당시 부검의였던 이동근 박사(현 전북대의대 병리학과 교수)는 유족들이 요청한 ‘광주민주화운동 관련자 보상 신청용 의견서’에서 “이 군의 두개골은 광범위한 복합골절 양상을 보였고 안면부, 흉부, 복부, 사지 등에 많은 타박상이 존재했다. 손상 가운데 상당 부분은 추락 이전에 발생했을 가능성이 큰 것으로 생각된다”고 기록했다.
이 같은 내용은 비단 이 열사의 사인이 단순한 추락사가 아니며 옥상에서 떨어지기 전 이미 계엄군에 의해 무차별 폭행당했음을 시사하고 있다.
사망 직후 그는 생가인 김제시 연정동의 개인 묘역에 안치됐다가 지난 1998년 10월 광주민주화관련 보상심의회의 결정으로 명예가 회복되면서 이듬해 4월 5.18묘역으로 자리를 옮겼다.
의로운 죽음을 기리기 위한 그의 추모비는 모교에 세워지는 데 5년의 세월이 걸렸고, 명예졸업장을 받는 데는 15년이 걸렸다. 그러나 그의 정확한 사인은 33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베일에 가려져 있다.
특히 5.18과 관련 각종 행사들과 교육을 주관하는 단체인 ‘5.18기념재단’의 홈페이지에서 조차 첫 희생자의 이름은 광주지역 피해자로 기록돼 있다. 현 재단 홈페이지(http://www.518.org) ‘5.18 타임라인’에선 ‘5월18일 오후 공수부대에 의해 구타당한 5·18최초 사망자 김경철, 김안부 사망’으로만 기록돼 있다.
이와 관련 강익현 5.18구속부상자회 전북지부장은 “군부독재의 억압에 맞서 자유와 민주주의를 쟁취하고자 했던 게 5.18 민중항쟁의 정신”이라며 “항쟁의 시초가 된 이 열사의 사인을 당시 상황과 목격자 증언, 기록 등을 토대로 정확하게 규명해 내는 게 무엇보다 시급하다”고 강조했다.
이어 “5·18민주화운동이 특정 지역의 민주화운동이 아니라 전국민적 차원의 민주화운동이었다는 역사적 평가가 내려진 마당에 희생자를 광주지역에 국한한 재단 측에 유감을 표한다”며 “구속부상자회 차원에서 재단 측에 항의하고, 이세종 열사를 포함 시킬 수 있도록 요구하겠다”고 밝혔다.
김병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