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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3.24. 주일오전예배 설교문. 【종 려 주 일】 본 문 : 마태복음 26:36-46
제 목 : 겟세마네 동산에서
찬 송 : 148, 144, 149, 150, 154, 303, 439.
할렐루야!!
오늘은 「종려주일」 이고 오늘부터 시작하여 1주일간을 「고난주간」 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고난주간이 끝나면 「부활주일」 이 됩니다.
종려주일은 사순절의 마지막 주간이며 고난주간의 시작이 되는 날입니다. 고난주간은 우리 주님이 십자가의 고난을 당하시기 전 1주간으로써 주님께서 십자가의 수난을 당하신 주간입니다. 이 날에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실 때 많은 군중들이 종려나무 가지를 꺾어 흔들면서 환영을 하였기에 「종려주일」 이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
종려주일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성에 입성하실 때에 제자들은 기뻐서 자기들의 겉옷을 벗어 나귀에 안장을 지우기도 하고 길에 펴기도 하였으며 수많은 군중들은 종려나무 가지를 꺾어서 흔들며 예수님을 앞뒤로 호위를 하며 예루살렘으로 들어가면서 “호산나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왕이여 하늘에서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서는 영광이로다” 라고 예수님을 환영하였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입니다.
오늘 종려주일을 맞이하여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여러분과 여러분의 가정 위에 충만하게 임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아 멘!>
오늘의 설교 제목은 『겟세마네 동산에서!!』입니다. 다 함께 “겟세마네 동산에서”
그래서 오늘은 우리 주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전날 밤새워 기도하시던 겟세마네 동산으로 여러분들을 초대하려고 합니다. 그곳에서 예수님은 무엇을 하셨으며 또 예수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생각하면서 이 시간 함께 은혜를 받고자 합니다.
세계적으로 이름난 성지 예루살렘에 가면 감람산 남쪽에 겟세마네 동산이 있는데 거기에는 아주 오랜 감람나무가 여러 그루가 있습니다. 그 중에 한 그루는 "애통의 나무" 라는 이름을 붙였는데 그 나무 옆에는 예배당이 있고 그 안에는 큰 바위가 있다고 합니다. 주님은 바로 거기서 기도하셨다고 전해져 내려오고 있습니다. 겟세마네의 이름의 뜻은 "기름 짜는 틀" 이란 뜻이 있는데 주님께서는 여기서 피와 같은 땀을 흘리시며 기도하심으로 우리들은 이 겟세마네 동산을 기억할 때마다 새로운 은혜를 받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유월절 최후의 만찬을 제자들과 함께 마치시고 감람산으로 올라가셨습니다. 그 중에는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 세 명의 제자들을 끝까지 데리고 가셔서 죽음을 앞둔 최후의 기도를 드리셨습니다. 몇 시간 후면 가롯유다의 배신으로 체포되어 재판을 받고 사형장으로 끌려가실 주님! 그의 겟세마네의 기도는 심혈을 기울인 최후의 기도였습니다.
눅22:44절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 같이 되더라” 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와 같이 피와 땀을 흘리시며 하신 기도는 “아빠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막14:36)라고 기도하였습니다.
다 같이 복음성가를 한 절 함께 부르겠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
주님의 얼굴은 피로 젖었네
하나님을 거역한 나를 위하여
순종의 속죄 피를 흘려주셨네
아 아 아 아 주의 사랑 깊고 크셔라
내 영혼에 파도처럼 메아리쳐 온다
이토록 주님이 피 흘리시며 기도하신 것이 자신의 소망을 위한 기도가 아니라 바로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한 기도였기에 오늘의 우리들은 머리를 숙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인류의 역사상 그 어떤 성현들이나, 위인들이, 또는 종교가들이, 이와 같은 기도를 한 사람은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이 동산을 자주 찾으셨습니다.(눅22:39-46), 그래서 가롯 유다도 이곳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요18:1-2). 우리는 오늘 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시던 주님의 모습을 생각하고 주님의 음성을 다시 듣게 되는 은혜를 받기를 바랍니다.<아 멘!> 그러면 겟세마네 동산에서 주님은 무엇을 하셨으며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상고해 보겠습니다.
1.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은 고민하시고 슬퍼하셨습니다.
오늘 본문 38절 말씀 "내 마음이 매우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 이는 진실로 주님께서 최대의 비통함을 고백하시는 말씀입니다. 주님은 그 후 십자가에 달리신 후,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마 27:46)라고 부르짖으신 바 이 비통의 부르짖음은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이 고백과 같은 비통을 하나님 아버지께 고백한 것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고통을 묘사할 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를 올렸다"(히5:7) 라고 기록했습니다.
(1)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주님의 고민과 슬픔, 그리고 고독해하신 일은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일찍이 마태복음 16장 23절에서 주님은 베드로로부터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라는 신앙고백을 들으신 후 자기가 장차 당할 십자가의 죽으심을 말씀하실 때 베드로의 충심 어린 만류를 들으시고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라고 책망하셨습니다.
히브리서 2:14-15절에 보면 그가 육신의 몸을 쓰시고 사망으로 인하여 죽음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 하시며, 죽기를 무서워하여 종노릇하는 인생을 해방하시려 했는데 왜 이같이 고귀하신 목적을 가지신 주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고민하고 슬퍼하셨다는 말입니까? 이 문제에 대하여는 여러 성경학자들 가운데서 많은 논란의 대상이 되기도 합니다.
(2) 주님은 진실로 고독하셨고 슬퍼하셨고 고민하셨습니다.
주님은 사람의 몸을 가지고 오신 분으로 인간으로서의 십자가를 앞에 놓고 어찌 고민과 슬픔 그리고 고독이 없으셨겠습니까? 죽음을 고민하고 슬퍼하는 것은 인간의 본성입니다. 그는 일찍이 나사로의 죽음 앞에서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외식하는 바리새인들을 향하여서는 담대히 책망하셨으나 눈물 뿌려 우는 자에게는 동정과 눈물을 아끼시지 아니하신 주님이십니다. 주님이 고민하셨다고 해서 그의 신성에 하등의 손상이 있을 이유가 없다고 봅니다.
(3) 주님이 이같이 고민하고 슬퍼하신 이유는 무엇보다도 인류의 죄악을 한 몸에 지니시고 십자가를 지시려는 고민과 슬픔이었습니다.
이 세상 모든 인간들이 무서운 죄악으로 멸망당할 것을 생각할 때 어찌 고민이 없으며 어찌 슬프지 아니할 수 있겠습니까? 그는 지금 인생의 모든 고민과 슬픔을 한 몸에 지니셨습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한대로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사 53:5). 이제 우리는 주님께서 친히 이 연약한 고민과 슬픔을 당하셨기 때문에 우리가 나음을 얻었습니다(히5:2), 예수님은 친히 우리의 고민과 슬픔을 한 몸에 지니시고 십자가를 지심으로 우리를 구속하셨고 또 오늘도 우리 연약함을 아시고 위로해 주시고 능력을 주시는 분이십니다(히4:15-16)
2.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은 엎드려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의 겟세마네 동산에서 엎드려 기도하신 사실에 대하여는 공관 복음 세 곳에 모두 기록되어 있습니다. 마가복음에는 그가 엎드려 기도하였다고 하였고(막14:35) 누가 복음서에는 예수님이 무릎을 꿇고 기도하였다고 기록하였고(눅22:41)
오늘 본문 39절 말씀에서는 얼굴을 땅에 대고 기도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이는 모두다 정성을 드려 간절히 그리고 겸손히 기도하셨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함께 동행하였던 세 명의 제자들은 예수님의 이와 같은 심정은 아랑곳없이 잠에 취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자고 있는 모습을 보시고 “시험에 들지 않게 일어나 기도하라” 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반대로 생각하면 기도하지 않으면 시험에 든다는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 예수님은 세 번씩이나 제자들이 시험이 들지 않도록 기도하라고 하셨지만 제자들은 기도하지 않았기 때문에 시험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일찍이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사탄이 너를 밀 까부르듯 할 것이라고 말씀하신 바가 있습니다.
(눅22:31-32)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탄이 너희를 밀 까부르듯 하려고 요구하였으나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
그래서 예수님께서 마지막까지 함께 기도하기를 바랐던 제자들도 예수님이 잡히시자 모두 도망을 가버렸고 베드로는 예수님을 세 번씩이나 부인을 하였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 지고 골고다를 향할 때도 제자들 중에 아무도 따라오는 이가 없었습니다. 엉뚱하게 구레네에서 온 시몬이란 사람이 붙들려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지고 갔습니다. 십자가에서 운명하시기 전에야 비로소 요한이 급히 달려와 예수님은 그 요한에게 모친 마리아를 부탁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운명하시자 아리마대 요셉과 니고데모가 예수님을 장사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제자 중에는 아무도 십자가를 대신 진 제자도 없고 장사를 지낸 이도 없었습니다. 얼마나 시험에 빠졌습니까?
(벧후2:9) “주께서 경건한 자는 시험에서 건지실 줄 아시고 불의한 자는 형벌 아래에 두어 심판 날까지 지키시리라”
잠든 제자를 깨우시던 주님은 마지막 기도를 하십니다.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이는 육체를 가지신 주님으로서 죽음의 고통을 앞에 놓고 본능적으로 하시는 기도입니다.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이는 실로 승리의 기도요 인간의 뜻을 억누르고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바른 기도이십니다. 이 기도는 이제는 어찌 할 수 없어서 하는 기도가 아니요 또 어떤 불만이 있어 하는 기도도 아니고, 그렇다고 억지로 하는 기도는 더욱 아니고, 패배자의 넋두리가 아니라 승리의 기도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들도 스스로를 살펴보아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할 수 없을 때 절망하고 원망하고 마는 버릇이 있는데 이제 어떤 일이 있던지 오직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하는 신앙(信仰)으로 이제는 변화가 되어야 합니다.
3.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마지막 당부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1) "내가 저기 가서 기도할 동안 너희는 여기 앉아 있으라" 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기도하실 때 제자 8명은 산 아래에 두시고, 세 명의 제자는 중간에 두시고, 당신은 맨 앞에 나가 기도하신 일을 어떤 주석가들은 성전의 식양으로 해석을 하여 성전 뜰과 성소와 지성소를 두고 지성소에 들어가신 주님의 기도로 설명을 하기도 합니다. 하여간 주님은 제자들의 자리를 지정하셨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우리에게 맡기신 신분과 위치와 사명(使命)을 각기 깨달아 있는 자리에서 자기 책임에 대한 충성함이 마땅한 줄 믿습니다.<아 멘!>
(2) "깨어 있으라‥‥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 고 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말씀은 바로 오늘도 우리에게 주시는 주님의 말씀인 것을 믿어야 합니다. 우리는 깨어 있어 믿음을 굳게 지켜야 합니다(고전16:13). 제자들은 여기서 실패했습니다(사56:10참고).
깨어 주위를 사주 경계하는 성도는 하나님과의 통신망을 바로 구성하는 법입니다. 곧 기도입니다(골3:1-2) 그런데 제자들은 여기서 그대로 실패하고 잠만 자고 말았습니다. 육이 약하고 눈이 피곤하였습니다.
(3) "일어나라 함께 가자 보라 나를 파는 자가 가까이 왔느니라" 고 말씀하십니다.
제자들은 이 위기 상황에서 주님을 따르지 못하고 그대로 실패했습니다. 제자들은 자기의 직분을 지키지 못하고 깨어 기도하지 못했습니다. 이렇게 잠에 취해 있는 제자들을 급히 깨워 “일어나라 함께 가자 나를 파는 자가 가까이 왔느니라” 고 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듣고도 따르지 못하였습니다. 그리고 엉뚱하게 말고의 귀를 잘랐습니다. 마침내 제자 중 어느 하나도 잡혀가는 주님을 위해 내가 대신 잡혀가겠다고 나서는 제자 한 명도 없이 다 흩어져 달아나고 말았으며 나중에는 주님을 부인하는데 까지 이르렀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는 겟세마네 동산의 주님을 깨어서 바로 따르는 믿음의 성도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아 멘!>
4.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은 사탄의 최후 시험을 이기셨습니다.
(1) 사탄은 처음 인간인 아담과 하와에게 접근해서 유혹하여 타락시켰습니다.
그 유혹은 선악과를 먹어보라는 유혹이었습니다. 그 선악과는 보암직도 하고 먹음직도 했습니다. 즉 먹고 싶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선악과를 먹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먹으면 죽는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뱀의 이야기를 듣고 보니까 먹으면 죽는다는 하나님의 말씀이 거짓말 같고 믿어지지가 않았습니다. 뱀의 말이 오히려 더 합리적이고 그럴듯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말라는 유혹이 강하게 그들을 이끌어 갔습니다. 결국 그들은 믿어서는 안 될 사탄의 말을 믿은 대신 믿어야 할 하나님의 말씀은 믿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타락이고 범죄이며 인류 비극의 원인이기도 합니다.
(2) 주님이 겪으신 최초의 유혹도 마찬가지였습니다.
40일을 주리신 후에 유혹하는 마귀가 나타나서 돌로 떡을 만들어 배불리 먹으라는 것과 성전 위에서 무사히 뛰어 내림으로써 신비한 마력을 발휘해 보라는 것과 천하만국의 권세를 누려보라는 유혹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모든 유혹을 주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인용하여 물리치셨습니다.
이렇게 볼 때 주님께 왔던 유혹은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라는 것이었습니다. 말씀 자체이시며(요1:1),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주님에게(요1:14) 말씀을 떠나라는 것은 주님의 주님 됨을 부정하라는 말입니다.
(3) 예수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 마지막 유혹이 왔습니다.
그 유혹은 하나님 뜻보다 자기 뜻대로 하고 싶은 유혹이었습니다.
겟세마네의 기도는 영적 전쟁이었습니다. 이 전쟁은 자기 뜻대로 하고 싶은 유혹과의 싸움이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 뜻대로 하옵소서" 하고 부르짖었습니다. 하나님의 뜻 대신에 자기 뜻에 따라 죽음을 면하고 십자가를 피하고 살고 싶은 욕망이 주님에게 있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런 유혹을 물리치고 결국 자기 생각을 버리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였습니다.
유혹을 받아 들였더라면 십자가의 죽음 대신 편안한 생활을 더 오래 누렸을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 유혹을 물리 쳤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있는 유혹이 어떤 것들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불신하고 불순종하라는 것이며, 하나님의 뜻보다는 자기 계획을 따르라는 것이며, 결국 하나님을 버리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기만 하면 평안과 안일과 성공을 보장해 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앞 다투어 무신론자가 되며 신앙인마저도 하나님의 뜻보다는 자기를 앞세우고 자기를 높이며 자기의 유익을 위해서 신앙을 도구로 삼는 부끄러운 일을 저지르고 있습니다. 이러한 유혹은 우리가 생을 마치는 그날까지 우리를 따라 다닐 것입니다. 믿음의 사람은 바로 이 최후의 유혹을 이기는 사람입니다.
유혹을 이기는 자가 신앙의 승리자입니다. 이러한 유혹을 이기기 위해서 오늘 하루도 말씀 위에 굳게 서서 깨어 기도하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아 멘!>
(4) 마귀의 유혹은 주님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보호와 능력을 시험해 보라는 것입니다.
사실 사람들은 때때로 하나님의 능력을 확인해 보고 싶은 마음을 가집니다. 어떻게 보면 그것이 믿음의 행위 같지만 사실은 인간이 시험관이 되어서 하나님을 수험생으로 만들고 하나님의 실력을 재어보는 행위인 것입니다. 참으로 불경하고 불신앙의 행위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주님은 막16:17절 말씀에 “믿는 자에게는 귀신을 쫓으며 뱀을 손으로 잡으며 독을 마셔도 죽지 않는 기적이 따른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나 이 약속은 믿으면 그 뿐이지 그렇게 되나 안 되나 시험해 볼 필요는 없습니다.
어떤 사람이 자기의 믿음을 보이기 위해서 가족과 함께 독약을 마셨습니다. 그는 주님의 약속이었기 때문에 자기는 그 약속을 그대로 믿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식구들은 모두 죽고 말았습니다. 결국 음독자살한 꼴이 되고 말았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주님의 약속이 거짓입니까? 그런 것이 아니라 그들은 자신이 시험관이 되어서 하나님을 수험생으로 만든 것입니다. 인간이 시험관이 되고 싶어 하는 유혹을 싸워 이겨야 합니다. 하나님을 시험해 보는 것을 신앙으로 착각해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치 말라”(마4:7) 고 하셨고 하나님은 (출20:7)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지 말라 여호와는 그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는 자를 죄 없다 하지 아니하리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이 가르치신 기도문 가운데 “시험에 들지 않게 하옵시며” 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시험이란 말은 여러 가지 의미로 쓰이지만 주기도문 가운데 있는 시험은 유혹이라는 의미가 가장 강합니다. 즉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도와 달라는 뜻입니다. 이 유혹은 우리의 뜻과는 관계없이 또한 우리가 원치 않는 순간에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유혹은 언제나 아무 때나 어디에나 있습니다. 다만 유혹에 지지 않도록 이기는 길밖엔 없습니다.
유혹을 이기는 길이 무엇입니까? 주님은 한마디로 기도뿐이라고 했습니다. 기도만이 유혹을 이기는 길이 됩니다. 유혹을 이기는 방법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나 보다 더 중요한 것은 끝까지 따라다니는 유혹의 내용이 무엇인가를 아는 것입니다. 그 내용을 모르면 기도는 허공을 치는 일이 되고 맙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는 오늘 말씀을 통해서 우리 인간에게 다가오고 있는 유혹이 무엇인지를 깨달아 모든 유혹과 싸워 이기는 믿음의 사람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아 멘!>
결 론 : 오늘의 말씀을 마칩니다.
만왕의 왕 예수께서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으로 입성을 하실 때에 많은 사람들이 모였습니다. 그 중에는 예수님을 환영하는 사람도 있었고 또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는 무리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향하여 ‘호산나 다윗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를 부르면서 환영하던 사람들은 불과 일주일이 못 가서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하며 배신한 사람들이었지만 오늘의 우리들은 절대로 주님을 환영하는 마음이 변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그 주님은 나와 여러분의 죄를 인하여 십자가의 고난의 쓴잔을 받으셨고 참혹한 십자가의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고난주간을 맞이하여 우리는 다시 한 번 우리 가슴에, 우리교회에, 여러분의 가정에, 이 예수님을 영접하여야 하겠습니다. 예수님이 나를 구원하시려고 십자가의 고난을 당하셨다는 사실을 내 가슴으로 뜨겁게 믿어야 합니다. ‘그럴 것이다’ 라고 추상적으로 관념적으로 그렇게 생각지 말고 이 사실이 믿어져서 십자가 소리만 들어도 가슴이 뭉클해지고 눈물이 쏟아지는 감동과 감격과 고난의 십자가를 체험하는 고난주간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아 멘!>
다 같이 찬송가 303장 1절을 함께 부르고 마치겠습니다.
나 위하여 십자가의 중한 고통 받으사
대신 죽은 주예수의 사랑하신 은혜여
보배로운 피를 흘려 영영 죽을죄에서
구속함을 얻은 우리 어찌 찬양 안 할까<아 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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